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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의 중요성과 보존의 가치, 사브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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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의 중요성과 보존의 가치, 사브라타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2.25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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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라타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최근 사브라타 지방정부와 유럽연합, 유엔개발계획은 사브라타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원형 극장을 개축하기로 합의했다. 사브라타 유적지는 1982년부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었지만 2016년 IS를 비롯한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들이 이 유적지를 침략해 문화유산의 일부가 파괴되었다.

유엔개발계획은 지방정부와 유네스코 등과 협력해 사브라타에 있는 원형극장 등 여러 역사적 건물을 복원하기로 했다. 복원 작업은 유적지를 관리하기 위한 용역사무소 복구, 원형 극장의 무대 보수, 출입문 정비, 태양광 가로등 설치 등이다. 

이번 계획은 2017년부터 전국 65개 자치단체와 공공기관, 시민 사회 등이 함께 꾸준히 노력한 결과다. 기념식에서 사브라타의 모하메드 알하슬럭 시장은 '이 곳은 지속가능성을 위한 유지가 필요한 역사적 유적지다'라며, '유적지 내 모든 시설의 개보수 등을 위해 힘쓰는 모든 사람들의 공헌에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번영의 절정에서 스러지고 다시 발굴되기까지, 사브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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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라타 /flickr

고대 트리폴리타니아 가운데 가장 서쪽에 있던 도시였던 사브라타는 아프리카 배후지의 물품 수송 및 교역을 하기 위해 건설된 페니키아의 상업교역 도시로, 2~3세기 로마화가 되기 전 짧은 기간 동안 누미디안 왕조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페니키아인이 아프리카의 각종 물산을 운반, 수송하는 무역항으로 건설한 도시로 2∼3세기에는 로마제국의 식민 도시로서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다. 사브라타는 트리폴리타니아 해안에 위치해 페니키아에서 일종의 교역소 역할을 했는데, 현재의 가다메스 지역인 시다무스를 거쳐 페르시아만과 아프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통로 쪽에 있어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물품들을 가베스 만으로 수송하는 무역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사브라타는 사하라 횡단 무역의 종착지이자 항구이기도 했지만 로마의 재건을 위한 좋은 자극제였다. 오늘날 사브라타에서 볼 수 있는 건축물들은 2세기까지 로마가 계속 재개발을 하던 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대부분은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이후 비잔틴 기독교인들에게 점령당했다. 

 

원형 극장의 외부 모습 /flickr

사브라타의 주요 기념물이자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건물이기도 한 원형 극장은 1930년대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카르타고는 제1차 포에니 전쟁(로마와 카르타고의 전쟁)이후 로마가 융성하기 전부터 지중해에서 가장 강한 나라였고, 가장 큰 함대를 갖고 있었던 나라이기도 하다. 

카르타고는 무역 영역을 넓히기 위해 사브라타를 지배했고, 다른 나라에 이국적인 상품을 공급하며 무역을 장려했다. 카르타고가 지배한 사브라타는 카르타고에게 수익성이 꽤 좋은 항구 중 하나였다. 상품 수요가 증가하면서 도시 또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 인구가 늘고 시장과 사원, 묘지가 늘어났다. 원형 극장 다음으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인 '베스의 영묘'는 이집트 신화에서 풍요와 보호의 신인 베스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베스의 영묘 /flickr
베스의 영묘 세부 모습 /flickr

누굴 위해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묘의 많은 건축적, 예술적 요소들은 그리스 예술과 건축 양식에서 온 것으로 추정한다. 높이는 18미터 정도 되고 계단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면부는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장식되어 있고 서쪽에는 영웅 헤라클레스가 사자와 싸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후에 지진의 충격으로 파괴되었고 무덤은 도시 주변 성벽을 쌓기 위해 해체되었다.

포에니인들은 정기적으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차용했지만 현재로써 남아 있는 작품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베스의 영묘는 더 중요하다. 포에니인들이 어떤 예술을 향유했고 어떤 문화를 가졌는지를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품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카르타코 통치 하에서 사브라타는 큰 전쟁이 있기 전까지는 영원한 번영을 누릴 것만 같았던 도시였다.

당시 로마는 이탈리아에 자리잡고 있었던 작은 도시에 불과했고 카르타고는 바다를 지배하던 세상 그 자체였다. 로마와 카르타고가 서로 전쟁을 벌였을 때 로마는 해군 함대를 발전시키고 바다에서도 싸우는 법을 빠르게 터득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를 패배에 빠뜨렸고, 사브라타는 전쟁의 여파로 다른 식민지들과 함께 고통받아야 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사브라타가 직접 관여한 것이 없었지만, 지금의 알제리 북부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의 고대 지명이자 베르베르인의 왕국이었던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왕이 전쟁을 일으키며 사브라타의 왕도 바뀐다. 

마시니사는 원래 카르타고의 동맹이었지만 로마가 승리할 것을 예상하고 태세를 바꾼다. 로마는 후에 보답으로 마시니사가 북아프리카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고 마시니사는 누미디아 왕국을 세운다. 이 왕국은 그가 죽은 후 쇠퇴했지만 그의 손자인 유구르타가 왕이 되며 다시 부흥한다. 누미디아와 로마가 맺은 협약에 따라 로마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지만 이윽고 로마가 유구르타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고, 로마는 북아프리카를 분할하고 사브라타를 포함한 여러 무역항들을 점령했다. 

 

훼손된 바실리카 터 /flickr

현재 사브라타에 남아 있는 유산은 거의 없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사브라타를 다른 도시와 통합하고 기반 시설 개조를 명령했다는 사실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사브라타가 다시 옛날의 번영을 재현하고 많은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을 갖고 있을 수 있었다고 추정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아들이며 로마의 첫번째 황제인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의 통치 기간 동안 도시의 신전들뿐만이 아닌, 로마 시대의 법정이나 상업거래소·집회장으로 사용된 건물인 바실리카가 만들어졌다.

사브라타는 이후 로마의 네 번째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에 의해 번영의 절정이 달했는데, 그는 오늘날 사브라타에서 볼 수 있는 인상적인 건축물들을 세웠다. 로마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이시스와 오시리스, 제우스 등 신들을 기리는 신전을 세웠다. 로마의 많은 목욕탕, 원형 극장 외 다른 건축물들은 안토니우스가 통치하는 기간 동안 만들어졌다. 지진이 일어나 건축물들이 부서지고 도시가 손상되었어도 안토니우스의 후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다시 재건하고 수리하는 식으로 유지됐다. 

 

뼈대만 남은 기둥들 /flickr

안토니우스는 사브라타를 식민지로 만들었고 시민들은 로마인들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았다. 식민지였지만, 사브라타는 번성했고 로마 근처 항구도시였던 오스티아에 무역 회사를 설립했다. 늘어나는 부는 사브라타의 재건을 촉진했다. 사브라타에 사는 사람들의 주도 하에 많은 양의 그리스 대리석을 건축 자재로 수입했다. 사브라타의 건축물은 처음에는 사암으로 지어졌지만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들도 많고, 이 대리석들은 건물의 지붕을 받치는 기둥이나 조각상을 만드는 데 쓰였다

사하라 사막 위 세워진 '사막의 진주'라 불렸던 가다메스 오아시스에 많이 의존했지만 나름 사브라타 시민들도 자립하며 많은 상품들을 생산해 냈다고. 사브라타가 번영할수록 주위의 침입 또한 잦아지기 시작했다. 안토니누스 시대 사브라타는 외곽에도 많은 주거지들이 생겼지만 워낙 침략이 잦아 시민들은 슬슬 도시 중심부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침략자들은 내륙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무역로를 봉쇄하거나 파괴했다. 이후 크레타 지진이 일어나면서, 이 지진은 크레타의 모든 구조물을 부수고 쓰나미를 일으킨다.

지진의 영향은 이집트까지 갔을 정도였고, 진원지에 상당히 가깝게 위치해 있었던 사브라타는 큰 타격을 입는다. 배들은 떠내려 갔고 바다를 향해 서 있던 건물들은 무너져 내렸다. 많은 사람들을 도시를 피해 떠났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래바람을 하릴없이 맞아야 했다. 로마가 멸망했을 때, 사브라타는 로마의 표면적인 보호뿐만이 아닌 항구 기능까지 잃게 된다. 외부 건물들은 비워졌고, 중심부에 살던 사람들도 없어지며 자연히 도시 규모는 축소되었다. 

 

폐허로 남은 사브라타 /flickr

6세기 비잔틴 제국이 사브타라를 잠시 탈환했을 때 폐허가 된 신전이 있던 곳에는 수많은 성당이 세워졌다. 비잔틴인들은 잠시나마 성벽을 다시 세워 침략을 막고 도시를 부활시키려 했다. 하지만 이 성벽도 불어오는 사막의 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슬람 군대가 이 도시를 점령하려 왔을 때, 도시는 거의 버려진 상태였다. 군대는 이 도시가 매우 열악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눈치채고 떠나버렸다. 사브라타는 모래에 그대로 묻혀 버렸고 20세기 초까지 잊혀졌다.

이탈리아가 로마의 유물들을 찾기 위해 고고학자들을 파견했고, 이 탐험은 제1차세계대전으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가 1920년대에 재개되었다. 1923년 이탈리아 고고학자들이 발굴하기 시작해 현재 도시 중심부 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나 중요 미술품과 대리석 등은 유럽으로 반출되고 현재는 붉게 산화된 석회암 벽체만 허물어진 모습으로 남아 있다.

 

당시의 화장실 터 /flickr
바닥의 모자이크 /flickr

사브라타는 무역의 중심지였던 만큼 지금처럼 평범한 도시 시설이 많았다. 공중 목욕탕과 수영장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가장자리에 세워졌다. 기술자들은 석조보다 사암을 더 선호했고, 그래서 지금은 다 무너지고 흩어져 터만 남아 있다. 목욕탕에서는 다양한 기하학 무늬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으며 사브라타의 화장실을 장식한 대리석들은 사람들이 화장실이어도 허투루 만든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화장실이었어도 부담없이 들어와 서로 수다를 떨 수 있었을 만큼 잘 갖춰졌음을 의미한다. 

 

원형 극장 무대 /flickr
부조 /flickr

사브라타의 가장 유명한 건축은 코모두스 황제 때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원형 극장인데 기둥이 세워진 3층으로 된 정면 무대가 특징이다. 원래 대리석 기둥을 이용해 3층으로 나누어 재건한 것이며 약 5,0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원형 극장은 지중해를 배경으로 무대를 세웠으며 분홍빛의 대리암 기둥들이 연주장의 발코니를 받치고 있다. 풀피툼이라 불린 무대 아랫부분에는 신들과 역사와 극의 배경을 의미하는 부조 장식물이 있고, 직사각형이나 반원형 벽감들이 있다. 

벽감의 중앙에는 여전사처럼 투구를 쓰고 방패를 든 로마의 여신이 새겨져 있고 옆으로는 사브라타를 대표하는 또 다른 신이 서 있다. 이 원형 극장은 예전까지만 해도 가끔 무대가 만들어져 야외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고. 극장 근처에는 옛날 검투사들이 맹수들과 마주하고 죽을 때까지 싸움을 벌였던 원형 경기장이 있으며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되었던 지하 통로를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리베르 파테르 신전, 유스티니아누스 성당, 야손 마그누스 하우스의 모자이크, 카피톨룸, 세라피스·헤라클레스·이시스 신전 등이 있다.

 

사브라타 /flickr

2016년 사브라타는 수많은 무력 충돌로 인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극장은 거의 방패막이로 많은 손상을 입었다. 몇 년 전부터 사브라타는 정부군과 무장단체 사이의 충돌로 훼손이 심각한 상태였다. 설상가상 부드러운 토양과 모래로 이루어진 해안의 특성상 사브타라 유적지는 해안 침식으로 큰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한다. 원래 있었던 대중목욕탕 등의 건물이 무너지면서 가장 큰 피해를 봤다고. 사브라타에서 가장 흔히 쓰였던 건축 자재인 석회사암은 물리적, 생물학적 풍화 작용에 매우 취약해 유적지의 장기적인 보존이 어렵다. 해수면의 상승 또한 유적지를 해칠 수 있다.

유엔개발계획은 사브라타 지방 정부, 유네스코 등과 협력해 원형 극장을 비롯해 여러 건물을 복구하도록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리비아 주재 EU대사는 '리비아의 문화 유산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중요한 원동력이 될 수 있으며, 잠재력이 있다'며 '사브라타에 있는 원형 극장과 같은 특별한 유적지는 지역 사회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한다'고 덧붙였다. 문화유산보존이란 것이 인류가 살아 있는 동안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 사브라타가 좋은 본보기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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