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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왕후·귀족들이 다투어 수집했던 취미이자 문화, 시누아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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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왕후·귀족들이 다투어 수집했던 취미이자 문화, 시누아즈리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2.10 18: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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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누아즈리 패턴의 여러 그릇들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서양, 특히 유럽인들의 중국 도자기에 대한 흥미는 중세 말부터 시작되었으며 16세기 말 중국의 공예품들이 대거 수입되면서 유럽의 왕후·귀족들의 취미 생활로 수집했다고 한다. 이후 18세기 들어 중국과 동아시아의 다른 지역들의 교류 증가로 인해 대중화되었다.

시누아즈리는 17세기의 후반부터 18세기 말까지 유럽의 후기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미술에 가미된 중국 취미의 미술품을 통칭하는 말로, 생동감 넘치는 장식과 수집가들의 유흥에 중점을 두었다. 단순한 수집 대상에서 17세기 후기에는 동양의 공예품이나 그 모방품을 자신들의 실내 장식에 활용하는 '시누아' 취미도 유행했다고.

동양의 문화에 서양인의 시각을 융합하다, 시누아즈리

시누아르지 풍의 응접실 /flickr

한때 유럽과 미국에서 중국풍 물품들이 열렬히 선호되던 때가 있었다. 커다란 저택에는 화려한 도자기가 쌓여 있는 '차이나 룸'부터 시작해 중국풍의 정원이 흔했던 때도 있었다. 이 유행에 끼려면 중국식의 장식품, 비단, 옻칠된 가구, 화려한 벽지와 탑이 있는 정원 정도만 있으면 됐다.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오리엔탈 스타일이라는, 접근하기 어려웠던 세계에 대한 선호가 컸고 그 유행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 프랑스에서는 '시누아즈리'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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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8세기 유럽인들은 실제 중국이 어떤 나라였는지 제대로 모르고 있던 상태였다. 아시아를 오랫동안 여행한 유럽인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서양인의 눈에서 본 아시아 문화는 그저 흥미로웠을 것이다. 이 단어는 19세기 프랑스 문학에서 처음 등장했는데, 1836년 프랑스 소설가인 발자크가 중국 양식으로 만들어진 공예품을 칭하는 단어로 시누아즈리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이때부터 시누아즈리라는 단어는 중국풍으로 만들어진 단어를 의미하기 시작했다.

옛날부터 중국은 수준높은 도자기와 비단 등을 생산했다. 유럽의 업체들도 정교한 디테일, 고품질의 도자기나 가구를 만드는 게 어려웠다. 유럽인들에게 중국은 멀리 떨어져 있는, 아주 목가적인 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은 부유했고 인구도 많은 나라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헨리 퍼셀은 미지의 영역이었던 중국을 먼 낙원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니 어느 정도로 몰랐었는지를 알 만한 부분이다. 

루이14세의 소장품 /Wikimedia Commons

17세기 유럽으로 흘러들어온 시누아즈리는 로코코와 바르코 양식이 성행했던 18세기 중반까지 절정에 달했다. 프랑스의 루이14세는 베르사유 궁전 부지에 청백색의 기와로 장식된 도자기 궁전을 만들었다. 그의 도자기 궁전은 취향에 맞는 무늬와 함께 시누아즈리 양식이 더해졌다. 루이14세의 시누아즈리에 대한 관심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8세기까지 꽤 인기 많은 디자인 스타일이 됐다. 동남아시아, 인도, 중국과의 무역을 위해 설립된 영국 동인도회사는 중국과 인도의 공예품들을 수입하면서 사람들에게 대중화되었다. 이는 곧 동양의 건축, 예술에 대한 서구 사회의 관심으로 이어졌다. 

스페인 상인들도 마닐라에 기반을 두었던 중국 상인들의 중국 도자기, 옻칠 공예품, 직물 등을 수입해 시장으로 가져왔다. 1900년대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시누아즈리의 인기는 계속되어 현재는 인테리어나 여러 디자인 등에 널리 쓰이고 있다. 유럽에만 국한된 것 같지만 사실 시누아즈리는 전세계에서 즐긴 문화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시누아즈리가 인기를 얻은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유럽인들은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의 폭넓은 무역을 통해 아시아에 대한 접근의 쉬워졌지만 그래도 제한적이었던 시기였기에 흥미가 갈 수밖에 없었다.

유럽인들에게 중국이란 나라는 너무나도 넓은 미지의 세계였고, 예술의 영역에서 동양이라는 단어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받는 원천 중 하나였다. 유럽인들은 다양한 스타일을 모방하기 위해 당시 유행했던, 화려한 장식이 특징인 로코코 문양과 잘 어울리는 동동양풍 작품들을 직접 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누아즈리 양식은 서양과 동양 간의 교류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후 영국과 중국 사이에 일어난 아편 전쟁은 동서양의 무역 교류를 방해했고 동양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떨어졌다. 중국은 수출입을 금지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시누아즈리는 과거의 영예로 밀려났다. 그러나 19세기 말 영국과 중국 사이의 관계가 다시 우호적이 되며 시누아즈리에 대한 관심도 다시 살아났다. 유럽의 많은 제조 업체들이 중국 제품을 모방한 디자인들을 선보였고 가구에서 직물, 미술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관점과 맞물린 많은 제품을 만들어냈다. 

시누아즈리 꽃 패턴 /flickr
시누아즈리 패턴으로 뒤덮인 의자 /flickr

여전히 사람들의 이동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유럽 장인들은 종종 자신의 상상력에 의존했고 이것은 자연히 꽃무늬나 새 같은 환상적인 풍경을 묘사하게 만들었다. 다만 시누아즈리는 중국 제품을 모방해 유럽인들의 취향에 맞게 재창조되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알두스 버트람은 시누아즈리는 거의 모든 면에서 진짜 동아시아 디자인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16세기 유럽의 무역상들이 동아시아 문명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관련 물품을 유럽으로 가져왔지만 이것이 점점 구전되고 변형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버트람 박사는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다른 국가 문화를 구분할 수 있는 충분한 지식이 없었다고 말한다. 아시아 디자인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제각각의 해석은 중국과 일본 제품이 마음대로 혼합되고 여러 모티브를 재활용해 자신들의 작품으로 만들어지곤 했다. 이들은 중국, 일본, 한국의 고유 이미지를 구별하지 못했고 동양은 그저 극동 지역의 이국적인 이미지라는 것 정도였다. 이것은 17-18세기 비평가들이 시누아즈리를 두고 서양이 아시아 예술의 디자인을 폄하하고 조롱하는 것이라 비판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시누아즈리 패턴 /flickr
화병에 그려져 있는 중국풍 그림 /flickr

어쨌든 시누아즈리는 아시아에서 직접 유래한 것이 아닌 아시아 문화와 장식 예술에 대한 유럽의 자의적인 해석이 합쳐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서양 예술가들이 시누아즈리 장식을 만들 때 사용한 주요 모티브는 중국 의상과 모자를 쓴 남녀, 다양한 크기와 색깔의 용, 다리와 버들이 있는 수상 정원, 산과 안개, 옻칠한 가구와 장식품 등이 있다. 다만 부유층들은 진품을 가질 여유가 있었지만 중산층들은 값싼 모조품들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시누아즈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물품은 유럽과 중국을 혼합한 어딘가 묘한 별종이 대부분이다. 초기 디자인은 조잡한 게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정교해졌다. 

시누아즈리 풍의 침실 /flickr
토마스 치펜달의 의자 디자인 /flickr

시누아즈리는 인테리어 디자인, 건축, 차, 도자기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했다. 17-18세기 사이 유럽인들은 중국의 옻칠 가구를 모방한 가구를 생산했다. 아시아의 전통 칠기 작품들은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며, 옻칠 특유의 광택을 내기 위해서 칠을 수십번을 해야 한다. 영국의 가구 디자이너인 토마스 치펜달의 디자인은 복잡한 장식의 시누아즈리풍 가구가 눈에 띄는데 의자나 캐비닛은 화려한 새와 꽃, 이국적인 상상 속 장소의 이미지가 특징이다. 

18세기 유럽 가정들의 집에 벽지 사용이 증가한 것도 시누아즈리 모티브의 영향이 컸다. 점점 단독집들이 생기고 햇빛을 잘 받는 인테리어에 대한 취향이 많아지며 벽지 또한 인기가 많아진다. 벽지에 대한 수요는 유럽 귀족들로부터 처음 시작했는데 이들이 이용한 고급스러운 벽지는 독특하고 수제였으며, 가격도 비쌌다.

시누아즈리 문양이 있는 벽지는 이후 대량 인쇄가 가능해지며 중산층들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고 그에 따라 가격과 품질도 다양해졌다. 시누아즈리 벽지는 가구에서 보는 것처럼 꽃무늬나 이국적인 풍경이 많았다. 이 벽지는 침실, 옷장, 개인 방의 벽지로도 쓰였다. 화려한 무늬의 벽지는 다른 가구와 어우러져 돋보이는 효과를 더했다. 

시누아즈리 정자 /flickr
큐 왕립식물원의 대탑(Great Pagoda) /flickr

시누아즈리는 건축과 정원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여러 시누아즈리 건축 디자인은 일종의 정원 형태를 취했는데, 유럽의 정원들은 이 디자인에 영감을 받아 정원에 다양한 식물, 꽃과 나무, 장식용 바위, 물고기가 있는 연못, 구부러진 길 등을 포함한다. 중국풍의 탑을 포함해 꽃과 계절적 요소를 포함한 정자 등이 있는 것이 포인트다. 영국 런던 남서부의 교외에 있는 식물원인 큐 왕립식물원은 윌리엄 체임버스가 설계하고 건축한 이 정원 중앙의 기념비적인 대탑은 영국 건축 요소와 결합한 일종의 문화 교류의 산물이다. 

체임버스는 젊었을 적 중국의 여러 도시들을 방문해 여행하며 중국 건물 설계에 관련한 여러 책을 냈다. 이후 그는 큐 왕립식물원에 여러 중국식 건축물을 지었는데 별장, 다리, 탑 등 실제 중국 건축물을 기초하고 만든 건 아니지만 동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중국 건축물에 가깝게 모방할 수 있었다. 

시누아즈리풍 티세트 /flickr
맥주잔 /flickr

시누아즈리의 인기를 더한 건 18세기 차를 마시는 문화였다. 차 마시는 문화는 시누아즈리의 화려한 미장센을 필요로 했다. 차를 마시는 것은 예의바른 인간이 사는 사회에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인식이 있을 정도였다. 시누아즈리에 대한 관심은 차 마시는 문화를 돋보이기 위한 열망도 있었다. 차를 마시는 문화에는 격식이 필요했으며, 최고급 도자 차 서비스를 선보이기 위한 업체들의 경쟁 또한 치열했다.

티포트와 식기 세트 등 여러 중국풍 도자기들이 이 시기에 유행했는데 카올린이라 불리는 고운 점토로 만들어진 도자기가 대다수였다. 카올린은 단단하고 내구성이 강한 도자였고 이미 중국은 한나라 말기부터 도자 개발을 시작하고 있었다. 도자기의 경우 유럽인들은 처음 밝은 색상의 도자기를 선택했는데, 이후 핑크색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연채 자기인 파미유 로즈를 비롯해 핑크색과 화이트 유약이 개발되어 유럽으로 수출된 도자기들은 더 매력적으로 변했다. 칠보 또한 해외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시누아즈리풍 그림이 그려진 접시 /flickr

유럽인들의 중국 예술과 공예에 대한 관심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도자기를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향신료를 담는 항아리로 시작한 것이 유럽으로 수입되었을 때는 장식을 하는 용도로 바뀌면서 미학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부유층들이 좋아했는데 메리2세, 퀸즈베리 공작부인을 포함한 귀족들이 대표적인 시누아즈리 도자기 수집가들이었다. 이들의 시민들이 우러러보기도 했기 때문에 취향 하나라도 일종의 본보기가 되었고, 그만큼 중요했다. 

꽃병에 희미하게 보이는 시누아즈리풍 그림 /flickr

V&A에 의하면 17-18세기 유럽의 대부분의 집들은 진품이든 가짜든 중국풍으로 장식된 방이 적어도 하나씩은 꼭 있었다고 한다. 18세기 말에는 평범한 집들에서도 이누아즈리 장식을 만날 수 있었다. 시누아즈리의 다양성과 유럽인들의 대한 흥미는 건축과 가구, 도자기 등 여러 장식 예술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쳤다.

유럽 전역의 홈 데코, 옻칠 가구, 건물 내부의 인테리어 등에서 보이는 이누아즈리의 존재감은 지금도 명확하다. 로코코 양식과 결합해 큰 영향력을 끼치다 신고전주의의 부활로 잠시 사라지기 전까지도 시누아즈리는 유럽에서 꽤 흔한 예술이고 흥미로운 영역이었다. 중국 예술과 문화, 기법 등을 모방했던 유럽 장인들과 동양을 잘 몰랐던 서양인들의 흥미가 이누아즈리라는 또하나의 독특한 문화를 탄생시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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