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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왕조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도자 예술, 세브르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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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왕조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도자 예술, 세브르자기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2.07 1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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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르 자기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독일에 마이센이 있고, 덴마크에 로열코펜하겐이 있고 헝가리에 헤렌드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세브르 자기가 있다. 세브르 국립도자제작소를 총칭하는 말로 그 기술과 디자인이 우수해 프랑스의 고급 도자기를 대표한다. 루이15세 치하, 퐁파두르 부인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많은 예술가들이 세브르 자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왕실의 거침없는 후원 아래 세브르 자기는 품질의 우수성을 전세계적으로 인정받았고, 부유층과 외국 사신들의 선물용으로도 쓰였다. 산업화가 꽤 많이 진행되었지만 세브르는 여전히 전통 기법으로 도자기를 만들며, 현대 예술가들의 컬레버래이션을 통해 한정판을 만들어 대통령이나 국빈에게 선물용으로도 쓰인다.

세브르 도자는 다양한 디자인 스타일의 화려한 색조가 특징이다. 꽃, 과일, 동물 등 섬세한 화폭을 형상화하면서도 화병이나 디너 세트 등 작품과도 조화를 이룬다. 블루 로얄로 유명한 블루 톤이 특히 잘 알려져 있으며 입체적이고 정교한 금박 모양이 뛰어나다. 섬세한 그림과 화려한 금채 장식이 결합된 것이 세브르의 묘미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 그리고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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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금박이 인상적인 세브르 자기 /flickr

1740년, 루이 15세와 퐁파두르 부인의 지원 아래 독일의 마이센과 같은 여러 도자 공장들과 경쟁하기 위한 공장을 세웠다. 독일 마이센의 성공을 질투했던 루이15세는 도공들에게 스파이나 도둑질 등 어떤 짓을 해서라도 마이센의 성공 비결을 알아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고. 이 최초의 공장은 샹티이 성의 도자공방에서 일했던 도공 뒤보아 형제가 뱅센에 도자기 제작소를 세우면서 시작했는데, 1756년 이 공장을 세브르로 이전한 후부터 '세브르 국립 도자기 제작소'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도자 생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마이센을 모방하기 위한 시도로 시작했던 세브르 도자는 곧 자신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개발했는데, 퐁파두르 부인의 후원은 이 공장의 성공을 이끄는 데 기여했다. 그는 루이15세를 설득해 뱅센 공장 이외에는 프랑스의 어떤 곳에서도 자기를 만들어 판매할 수 없도록 하고 뱅센에 독점권을 부여했다. 이 세브르 도자 공장은 세계 유일의 국립 도자 공장으로, 이 공장만이 왕실 도자기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공장 1층에는 점토를 쌓아 놓은 창고 등이 있고 조각가와 판화공들을 위한 작업실이 있었다. 4층에는 공공 로비가 있었는데 한달에 두번 오는 방문객들을 위한 잔치가 열리는 곳이었다고.

프랑수아 부셰의 그림을 참고한 세브르 자기 /chairish.com

처음에는 소프트 페이스트를 생산했는데, 1768년 프랑스 리모지 지역에서 고령토(카올린)이 발견된 이후 하드 페이스트 도자가 1770년 이후 세브르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루이15세는 퐁파두르 부인을 적극 지지했고, 왕실 재정을 도자 공장에 직접 쏟아부었다. 도공들은 로코코 양식을 도자에 적용했고 프랑수아 부셰, 조각가인 오귀스탱 파주를 포함해 당시 많은 예술가들이 공장에서 일을 했다. 특히 궁정 화가이자 퐁파두르 부인이 가장 좋아한 예술가였던 프랑수아 부셰는 세브르를 위해 여러 작품을 만들었으며 세브르의 초기 도자기들은 부셰의 그림에 나온 장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세브르 도자 공장은 정교한 디자인과 장식이 유명했으며, 식기 외에도 여러 조각과 입체적인 디자인이 특징인 꽃병 등이 눈에 띈다. 세브르는 섬세한 금박 디자인을 완성하기 위해 최고의 화가들, 금박 전문 디자이너들을 찾았다. 각각의 도자기는 조각가, 유약 화가, 전문 꽃을 그리는 화가, 금박 전문 도공들 등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세브르의 모든 양식은 보안이 철저했고 루이15세는 도공들이 공장을 떠나 다른 회사에서 일하는 것도 금지했다고 한다.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컵과 컵받침 /flickr

특히 퐁파두르 부인은 도자기와 꽃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는데, 수백 개의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의 꽃들로 가득찬 화병이 당시 유행이었다. 퐁파두르 부인은 한때 루이15세가 연 깜짝 생일 파티에, 자연과 어울리는 향기까지 곁들인 화병으로 집안을 장식했다고 한다. 그만큼 세브르 도자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했고, 공장 운영은 성공적이었다. 1752년 루이15세는 공장에 '로얄'이라는 호칭을 부여하기도 했다.

루이15세는 매년 베르사유에 있는 그의 궁전에서 세브르 도자 공장에서 만들어진 멋진 작품들을 과시하는 전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전시회에 초대된 전세계의 왕족들은 희귀한 세브르 도자를 구경하거나 구입했다. 루이15세는 세브르 도자 공장의 가장 열정적인, 일종의 영업사원이라 해도 무방했다. 왕실의 공격적인 후원은 세브르가 끊임없이 왕실의 의뢰를 받아 작업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프랑스 재무부가 재정 문제로 압박을 시작해 오자 은과 금으로 점철된 만찬 서비스 대신 도자기를 활용하기 위해 구매했을 정도라고 전해진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브르 도자 공장은 꽃길만 걸을 것 같았지만, 이후 프랑스 혁명 발발과 여러 혼란스러운 상황 속 세브르 도자 공장도 불안정한 상황에 놓인다. 루이16세가 루이15세를 계승하고,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에 올랐다. 바스티유 궁전은 공격당했고 폭동이 일어났다. 

알렉상드르 테오도르 보롱니아르 자화상 /Public Domain

세브르의 재정 상태는 위태로웠다. 더이상 왕실의 기업도 아니었을 뿐더러 고객층도 많이 잃었고, 불안정한 재정 상태 또한 당시의 프랑스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공장은 노동력도 줄고, 원자재 부족 등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프랑스 정부는 손을 썼고, 프랑스의 저명한 건축가 알렉상드르 테오도르 보롱니아르가 관리 감독으로 임명되며 공장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보롱니아르는 건축가였지만 도자기 제조나 디자인에 대한 경험은 거의 전무했다. 하지만 그는 화학, 식물학, 지질학 등에 능통했고 자신의 기술과 경험을 도자기 제조에도 적용했다.

그는 184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세브르 도자 공장을 관리했고 50년 동안 세브르 공장의 조직과 생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공장에서 오래되어 쌓여 있던 재고의 대부분이 팔려나갔고, 유행 지난 구형 모델을 새로운 형태인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대체해 판매했다. 보롱니아르는 보다 효율적이면서도 새로운 유형의 가마 개발도 참여했다. 그의 초기 10년간 세브르 자기 생산의 대부분은 금박을 즐겨 썼고, 광물학에 대한 그의 관심이 도자에 금박을 포함한 여러 장식을 첨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티포트, 디너 세트, 화병 등 세트로 제작된 물건들에 대해 보롱니아르는 장식적인 요소를 선호했다. 세브르 공장 초기부터 일했던 화가들이 동시대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더 옛날 제작되었던 판화나 그림들도 참고해 작업했다면 보롱니아르가 있을 때의 공장은 작가들이 어떤 그림을 차용하든 진지하게 다가가자는 의도를 갖고 명화를 모방했다.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을 도자에 담았으며 특히 라파엘의 작품이 그렇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생 포르셰르 도자 /flickr

이들은 이전 그림을 모방하면서 더 이전 세기의 장식 기법도 모방했다. 생 포르셰르 도자기의 문양은 세브르 자기 장식에 영향을 주었고, 컵이나 찻잔의 형태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르네상스 시기의 은제 장식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보롱니아르는 고딕 양식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이것은 19세기 내내 인기가 많았던 디자인이었다. 고딕 양식은 정직하게 모방만 하는 것보다는 채색된 장식 등에서 언뜻 보이는 식이었다.

보롱니아르가 죽은 이후에도 공장에서는 기술 혁신에 대해 작업자들의 지속적인 욕구가 존재했고, 동시에 쓰던 다양한 장식 스타일을 어디서든 폭넓게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19세기 많은 세브르 작품들은 다양한 역사적 양식을 모방해 이 양식들을 재해석하거나, 자신들의 형태로 재창조해 결합하는 등의 경향이 뚜렷하다. 이후 아르누보 양식이 출현하며 세브르 자기는 자연의 영감을 받아 비대칭이 특징인 형태가 많았다.

보롱니아르에게서 이어진 창의적인 디자인들은 자연히 생산의 효율성을 높였고 공장은 불황에서 회복해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부유층을 겨냥해 정교하면서도 고품질인 도자를 생산하면서 정부에 대한 지원에서도 벗어나기 시작했다. 

터린 /flickr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있는 세브르 자기 /flickr

코로나19 대유행 이전까지 세브르 국립도자제작소는 한 번도 운영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도자 공장은 120여명 이상의 고도로 숙련된 장인들이 일하고 있는, 말 그대로 살아 있는 전통적인 작업실이다. 6개의 목조 가마들이 있고 가장 큰 가마는 역사적 기념물로도 등록되어 있다. 오래 된 장인들은 젊은 장인들에게 전문 기술을 전수하고, 초청한 여러 예술가들과 1년에 몇 번 공동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공장 부지에는 세브르 작품들을 전시한 박물관이 있고, 그 외에도 세브르의 여러 작품들은 루브르 박물관과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여러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세브르 국립도자제작소의 로만느 사르파티 소장은 "작업실에서 일하는 장인들이 은퇴하기 전에 미리 장인들을 뽑는다"고 전한다. 기법이 전승되도록 은퇴 예정인 장인이 있을 경우 4-5년 전부터 미리 젊은 장인들을 뽑는다고. 또 "스승 장인 밑에서 견습공으로 3년 동안 도제수업을 받은 후 작업실에서 일하게 되며, 교육 기간이 끝나고 작업실에서 일하기 전에 문화부가 주최하는 시험을 통과하면 공무원 자격을 얻는다"고 밝혔다.

백자 채색 살라미나 병 /국립고궁박물관 유투브

세브르 자기는 조프수호통상조약을 기념해 자국을 대표하는 도자기를 서로 선물로 보냈을 때 선택받은 도자이기도 하다. 세브르 국립도자제작소에서 제작한 도자기 두 점을 우리나라에 선물했는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 백자 채색 살라미나 병은 프랑스가 조선에 보낸 세 개의 화병 중 하나로 화병 내부에는 제작 당시에 찍은 마크가 남아 있다. 초록색 마크의 'S'는 세브르를 뜻하고 78은 1878년에 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프랑스 세브르 국립도자제작소의 '한국의 왕에게 보냈다' 라는 출고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세브르 자기 /flickr

로만느 사르파티 소장은 "우리는 여러 혁명과 전쟁을 겪으면서도 국립도자제작소로 유지되었다. 세대를 거쳐 이어져 온 비법을 계승하는 것이 국립도자제작소인 세브르의 주요한 임무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그는 18세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상당한 무형 문화재를 전승하고 예술가들과 협업해 새로운 기술이나 방식을 찾고 개발하는 것을 꾸준히 진행한다고 전했다.

전통을 현대와 잇고, 모방에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을 찾아내고 예술가들과의 협업을 시도하며 멈추지 않는 것을 선택한 세브르가 지금까지도 롱런할 수 있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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