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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이케아에 영감을 준 스웨덴의 국민 화가, 칼 라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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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탐구] 이케아에 영감을 준 스웨덴의 국민 화가, 칼 라르손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1.26 10: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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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Interior with a Woman Reading'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스웨덴의 가구 브랜드 이케아는 스웨덴의 국민 화가인 칼 라르손과 그의 아내인 카린이 꾸민 집 스타일이 자신들의 인테리어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정신적 뿌리라 부른다. 2020년 6월 출판된 '칼 라르손, 오늘도 행복을 그리는 이유'는 그가 스웨덴에서 꾸린 행복한 가정 풍경을 그린 그림을 책으로 출판한 것으로, 이 그림들은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군인들이 성경 다음으로 지니고 다녔다는 말도 있다.

스웨덴의 전원생활을 만끽했던 스웨덴의 화가 칼 라르손은 순트보른의 전원생활을 스웨덴풍의 단순한 선과 맑고 투명한 색채로 묘사한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1882년 파리 외곽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예술가들의 거주지 그레에서 역시 화가였던 카린을 만나 결혼하였고 그곳에서 몇몇 중요한 수채화 작품을 그렸다. 이후 카린과의 사이에 8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라르손에게 아내와 자녀들은 작품의 중요한 모델이자 멘토였다. 

그에게 집은 소중한 곳이자 영감을 얻는 매개체였다

칼 라르손 /flickr

전원적인 모습의 가족을 그린 수채화들, 스웨덴 국립 미술관에 있는 '한겨울의 희생(Midvinterblot)'으로 유명한 칼 라르손은 스웨덴 스톡홀롬 인근의 감라스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아주 많이 가난했고, 그의 어린 시절은 온통 불행의 연속이었다. 칼 라르손에 대한 책을 쓴 레나테 푸보겔은 '라르손의 어머니와 동생 요한은 집밖으로 쫓겨났다. 임시 거처는 한 방마다 세 가족이 살았으며 온갖 쓰레기들이 가득했고, 콜레라가 유행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라고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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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10만 명이 넘는 스웨덴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 위해 고국을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라르손의 가족들은 이민을 갈 처지가 못 됐다. 콜레라가 들끓는 당시 매트리스 사이에는 진흙이 쌓이고 쥐들이 들락날락거렸다. 이들은 임시 주택들을 전전하며 빈민가에 머물러야 했다. 라르손에게 집은 그 어떤 긍정적인 요소도 없는 곳이었다. 그에게 집은 어떤 사생활이나 안락함도 없었고, 오히려 잠시 왔다 가는 캠프에 더 가까웠다. 어린 라르손은 배가 고픈 나머지 일을 하러 다녔고, 나무나 쌓인 눈을 치우는 일을 했다.

라르손의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고 여러 일터를 전전했다. 라르손은 자신의 아버지를 인내심 따위 없으며, 사랑도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고.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는 한 곳에 오래 일하는 타입도 아니었고 화도 많았다. 그는 주정뱅이였고 아내와 아들들에게 자주 화를 냈다. 라르손의 어머니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세탁소에서 꽤 오랫동한 일했다고 한다.

몇년 후 라르손의 부모님은 이혼했고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스톡홀름의 빈민가 주택가였던 외스테르말름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가난했고 매일 보는 이웃들은 매춘부 아니면 살인자, 도둑들이 대부분이었다. 스톡홀롬의 빈민가 생활을 겪고 있던 어린 라르손에게는 딱 하나, 희망이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보였던 예술적 재능이었다. 그는 일상의 탈출로 그림을 선택했고, 그림을 그리면서 현실을 잠시 잊었다. 

'Brita with a cat and a sandwich' /flickr

라르손이 13살이 되던 해, 가난한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의 한 선생님이었던 야콥센은 그에게 스웨덴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 지원해 보라는 제안을 한다. 그는 어린 제자의 작품에서 창조적인 재능을 발견했고, 라르손이 학교 입학 허가를 받고 나서도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왔다. 정작 입학했을 때 라르손은 몇 년간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쉽게 정착하기가 어려웠다. 알게 모르게 쌓였을 열등감이 그를 괴롭혔고, 혼자로 만들었다. 16세가 됐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감을 얻었고, 같은 학생들에게도 꽤 주목을 받았다.

라르손은 신문의 캐리커처를 그리고 그래픽 아티스트로도 활동했다. 그가 버는 돈은 가족이 편하게 살기에는 충분했다. 여러 책, 잡지, 신문의 삽화가로 일하던 그는 1877년 파리로 이사를 간다. 몇몇 인상파 화가들과 파리에서 사는 초기 예술 그룹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파리로 향했지만, 그는 인상파 화가들과는 거리를 두고 다른 스웨덴 예술가들과 함께 파리에서 70㎞ 떨어진 그레 쉬르 루앙에 정착한다. 다만 파리로 갔을 때 그는 몇 년간 성과 없이 단지 끊임없이 노력하는 예술가로서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는 수채화에 빠졌고, 전통적인 유화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두 번의 여름을 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바르비종에서 보낸 이후 그는 1822년 스웨덴의 동료 화가들과 스칸디나비아 예술가들을 만난다. 거기서 그는 아내가 될 카린 베르구를 맞이한다. 카린을 만난 건 라르손에게는 인생의 전환점이나 다름없었다. 파트너이자 예술가인 카린을 만난 후 그에게는 경사스러운 일이 이어졌다. 겹경사로 딸 수잔이 태어난 것이다. 수잔은 그림의 모델이자 주제로 아주 훌륭했으며, 라르손이 예술가로써 더 성숙해질 수 있는 계기였다. 

'Kersti's Birthday' /flickr

카린은 부유하고 꽤 진보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4살 때 스톡홀름에서 독립해 스웨덴 공예학교에서 원근법과 판화, 수채화 등을 공부했다.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한 그는 말스트롬 교수에게 개인 회화 수업을 받기도 했다. 그는 드레스덴, 프라하, 베니스, 뮌헨 등을 돌아다니며 파리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1880년대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수십 명의 젊은 여성들은 실력을 쌓기 위해 프랑스의 파리로 온다. 아카데미 콜라로시와 줄리앙 아카데미는 당시 파리에서 여성들이 그림을 공부할 수 있는 인기 있는 장소들 중 하나였다.

라르손과 카린이 사랑에 빠졌을 때 라르손의 화풍도 서서히 변해 갔다. 그의 팔레트는 밝은 색으로 가득해졌다. 그가 카린의 부모님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은 아직 특별한 사람은 아니지만, 언젠가 카린에게 걸맞는 존재가 될 것이다'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고. 카린의 아버지는 라르손을 두고 '가장 완벽한 사람'이라고 극찬하며 라르손을 반갑게 맞이한다. 카린이 쓴 편지에서는 '그와 약혼할 수 있게 됐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되어 감사하다'라는 내용이 있다.

릴라 히트나스 /flickr

이 내용만 보고 카린이 드디어 그림을 그만두게 됐다는 후련함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건 섣부르다. 그동안 그려 왔던 그림을 더는 손대지 않았어도 그의 열정과 창조성은 그대로였다. 1895년, 라르손은 가족과 함께 순트보른으로 이사했고 새로운 집도 생긴다. 카린의 아버지가 순트보른에 위치한 자기 소유의 작은 집을 딸에게 준 것이다. ‘릴라 히트나스(Lilla Hyttnäs)’라는 이름의 이 소박한 집은 라르손 부부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매우 안성맞춤이었다. 

부부는 그들의 미적 감각에 맞춰 뚝딱뚝딱, 집을 바꾸는 작업을 시작한다. 벽지를 뜯어내고, 나무 판자는 다른 색깔로 칠하고 거실 의자를 흰색과 파란색 줄무늬로 칠하거나 식당의 의자와 벤치를 빨간색으로 칠하는 등 가구의 일부를 교체하거나 다시 칠했다. 집을 확장하는 공사는 그들에게 아주 즐거운 작업이었다. 라르손을 위해 그림 작업실을 추가하고, 나중에는 카린이 옷감을 짜는 데 쓰이는 작업장이 되기도 했다. 

'Titt-ut (Peek-a-boo)' /flickr
'Old Anna' /flickr

1901년부터 라르손의 가족은 릴라 하트네스에 정착했고, 집의 모든 구조와 요소들은 라르손에게는 흥미로운 주제이면서 동시에 안식처가 되었다. 옛날 어렸을 때의 라르손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집이고 장소였다. 라르손과 카린은 집의 매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찾았고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집을 장식했다. 라르손은 벽에 화환이나 꽃, 명언 등을 그리고 카린은 베개, 장식용 직물이나 가구 등을 디자인하고 수놓았다.

카린은 예술과 공예의 독특한 혼합에 재능이 있었고 그의 뛰어난 재능은 가구 디자인과 가족들을 위한 의상을 만드는 것으로 이어진다. 카린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옷을 디자인하고, 옷감을 짜는 동시에 자신과 아이들이 입을 옷을 디자인하고 바느질을 했다. 집 안에서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규칙이나 제한이 없었다. 쏟아지는 햇빛, 아이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개들로 집안은 시끌벅적했다. 이 북적거림은 라르손의 그림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당시 빅토리아 시대 일반적인 집은 주거용 공간과 개인용 공간이 엄격히 제한되고, 거실은 온통 화려한 장식으로 가득 차 있으며, 호화스러운 커튼으로 항상 꽁꽁 가려져 있던 풍경이 흔했다. 라르손의 집은 이런 일반적인 집이라는 개념과는 전혀 달랐다. 특히 빅토리아 시대 집의 응접실은 항상 분위기는 엄숙했고, 개들은커녕 아이들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라르손 가족은 이 유행에 정면으로 대항했다. 이들은 직접 손으로 물건을 만들고, 아이들은 자유롭게 돌아다녔으며 물건은 계속 교체되고 바뀌었다. 

'The Kitchen' /flickr
'Sewing Girl' /flickr

가구와 물건들은 가령 카린이 아이들이 자랄 때마다 옷을 다른 것들로 수놓고 바느질하는 식으로 계속 쓰이고, 또 쓰였다. 어두웠던 빅토리아 시대와는 달리 라르손과 카린은 한없이 밝은 색을 택했고, 방은 모두 닫혀 있는 게 아니라 열려 있었으며 방에는 빨간색과 녹색의 선명한 색들이 포인트가 되었다. 실내 장식들은 과감했고 도전적이었으며 소박한 가구들은 스웨덴 인테리어의 특징이 됐다. 라르손의 그림은 집의 하나의 장식이 되었고, 그의 그림은 캔버스뿐만이 아닌 천장, 벽, 문, 창문, 캐비닛 등에서 볼 수 있었다.

이케아가 영감을 받은 곳도 이 부분이다. 어떤 것이든 반복적으로 쓰는 것, 선명하고 밝은 색을 거침없이 썼던 라르손 가족의 철학과 미학은 이케아 스타일의 선구자이자 영감을 준 것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2016년 이케아는 셀스카프(SAELLSKAP)컬렉션을 라르손 가족에게 헌정했는데, 카린이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디자인한 것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든 식물 모티브의 제품들이었다. 

'Crayfishing' /flickr

라르손은 약 20년간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을 그린 수채화 시리즈를 작업한다. 시골 전원의 생활, 그의 가족을 그린 그림들에는 작은 오두막이나 땅을 밟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라르손과 카린은 함께 만든 집을 통해 그들의 삶, 예술, 가족애 등을 표현했다. 이들은 자작나무 아래에서 자주 식사를 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고, 이것은 스웨덴 사람들에게 일종의 습관으로 전파되기도 했다. 여름의 스웨덴, 8월 7일 '랍스터 페스티벌 데이'는 그의 수채화 덕분에 크게 대중화가 되었을 정도다. 당시 라르손 가족은 스웨덴의 전통 음식인 크내케브뢰트와 수프, 이탈리아 파스타 등을 먹었다고.

2019년은 칼 라르손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난 해였다. 원인은 뇌졸중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그의 옆에는 카린이 있었고, 그의 말에 따르면 라르손은 머리에 손을 얹고 '기분이 이상해, 꼭 죽어가는 것 같아'라는 말을 하고, 몇 분 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고. 그의 죽음은 스웨덴의 모든 사람들에게, 미술 사학자들에게, 그리고 일반 사람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한겨울의 희생(Midvinterblot)' /flickr

그의 작품에는 마냥 행복한 가정 생활만이 그려져 있는 것들이 많지만, 당시 라르손은 그에게 있어 의미 있는 '한겨울의 희생'을 검열하는 정부 당국과 꽤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이 그림을 스웨덴 국립 박물관에 전시하길 바랐다. 동료 화가인 안데르스 소른과 같은 여러 화가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인 '한겨울의 희생'은 소더비 미술관에서 판매된 이후 1997년까지 박물관에 걸리지 못했다.

1997년 이후 이 벽화는 개인 수집가가 구매한 것을 박물관이 구매하면서 원래의 전시 공간에 걸리게 되었다. 그가 죽은 후 출판된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 생각했던 그림이 계속 거절당하고, 전시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씁쓸함과 실망을 드러내기도 했다.

입구로 보이는 곳 /flickr

릴라 하트네스는 스웨덴에서도 주요 관광지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여행객이 많이 오는 시기에는 주변 가게와 레스토랑까지도 사람들이 꽉꽉 들어찬다고. 스칸디나비아를 상징하는 붉은색으로 가득 찬 집은 라르손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인상적인 곳이다. 이 집에 들어간다는 것은 라르손이 소중하게 여겼던 장소, 그리고 그의 작업실을 구경한다는 것과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요리했던 주방, 그들이 잠을 잤던 침대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큰 의미다.

라르손은 딱히 인상파 화가들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니지만 인상파 화가들에게 여러 영감을 준 사람이기도 하다. 릴라 하트네스는 라르손에게 있어 일종의 피난처였고, 어렸을 적 거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었던 집이라는 환경을 스스로 창조한 곳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과 책을 통해 이 곳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할 예술가의 집들 중 하나가 됐다. 자신들의 취향이 담뿍 담긴 집의 풍경을 그리고, 가족들의 모습을 그리고, 아무 걱정 없이 소박하고 평화로운 모습들을 수채화로 표현했다. 예술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성공하기도 했지만 그는 릴라 하트네스에 살면서 가정을 꾸리고, 편안한 삶을 만끽했던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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