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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강력했던 여성들의 연대, 아르피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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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강력했던 여성들의 연대, 아르피예라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1.24 13: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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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피예라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시대가 언제였든 사람들은 끝없는 투쟁을 계속해 왔다. 그 속에서도 고난과 폭력, 가난을 겪는 동안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우고 저항했던 그들이 있었다. 칠레 군부 통치 기간 동안, 자신들이 겪은 모든 경험을 포함해 정치와 사회적 내용을 천 조각의 그림으로 표현한 여성들이다. 

'아르피예라'는 '아마포로 만든 부대'를 뜻하는 재료 이름으로, 고유명사화가 된 용어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사 독재 정권 당시 조직된 여성 단체에서 생산한 패치워크 또는 아플리케를 뜻한다. 천조각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재료를 이용해 많은 여성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역경과 폭력의 장면을 묘사했다. 

세상을 향한 여성들의 강한 울림, 아르피예라
 

현대의 아르피예라 작품 /flickr

아르피예라는 스페인어로 삼베를 뜻하며, 다양한 색의 패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로 여성으로 이루어진 그룹으로 아르피예라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 독재 시절 칠레에서 대중화되었다. 칠레 가톨릭 교회 위원회가 주관한 워크숍에서 만들어진 후 인권 단체인 ‘교구 연대(vicaria de la Solidaridad)’에 의해 해외로 비밀리에 배포되었다. 아르피예라는 여성들에게 있어 필수 요소였던 수입원으로, 수많은 해고와 남편의 실종 등으로 재정 상태가 항상 불안했던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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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피예라는 보통 삼베나 천 같은 조각 같은 단순한 재료로 만들어지며 여성들의 가난한 생활 환경, 정부의 억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시위 장면과 피노체트 정권 하의 인권 침해를 비판하는 정치적인 메시지도 담았다. 이에 대응해 칠레 정부는 아르피예라와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려 동분서주했다고.

1973년 9월, 칠레에는 정치적 긴장과 사회적 불안이 감돌고 있었고, 쿠데타가 일어난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휘하의 칠레군이 권력을 잡았고 집권 첫날부터 이들은 인권침해를 자행했다. 군사 정권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모든 체포의 임의성을 허락했다. 수만명의 사람들이 고문을 당했고 사형을 당했다. 피노체트 정권이 16년간 집권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거나 실종되었는지는 아직도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이후 1991년 진실,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 보고서에는 피노체트 정권이 약 2,000여명 이상을 죽였고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투옥되었으며 이 사람들의 대부분은 고문을 당했다고 밝혔다. 

군부 정권 속 칠레 사람들은 더욱더 가난해지고 절망에 빠져들었다. 수입이 거의 없던 칠레 사람들은 수도나 전기요금 같은 건 낼 수가 없었고, 이 공공시설들은 정부에 의해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수입원으로 변해 버렸다. 피노체트 정권 아래 칠레 여성들은 무조건 침묵해야 했으며, 정치적으로 활동하면 안 된다는 주의 아래 억압받았다. 신자유주의 정책 시행으로 빈곤층, 노동자 계층의 여성들은 더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르피예라 /Wikimedia Commons CC BY 3.0

이 여성들 중 다수는 수입원이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든 직업을 구해야 했고 돈을 벌어야 했다. 아르피예라의 약 80%는 빈곤층이고 노동자층이었다고 하며, 여성들은 강의를 들으며 자신들의 권리를 알게 된다. 여성들은 아르피예라를 만들어 팔면서 교육 기회도 얻고, 건강도 관리하며 가족의 안녕을 챙겼다. 당시 여성들은 가정에서 주부의 역할로만 존재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개념과, 여성들이 아르피예라 작업장에서 일하는 모습은 상충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일을 하는 여성들 중에는 남편으로부터 신체적, 정서적 학대를 당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피노체트 정권이 승승장구할수록 상류층 여성들, 특히 군대와 관련이 있는 여성들은 정부에 의해 아주 훌륭한 도덕적 미덕으로 칭송받았다. 이들은 친정부 단체들에 참여함으로써 제한된 여성성, 가부장적인 가족 구조를 찬양하는 데 쓰였다. 반대로, 군부 정부에 대항하고 생존을 외치며 여성들의 사회 참여를 주장하는 집단들도 나타났다. 이 집단에는 인권과 정의를 외치는 정치적인 단체, 밥을 제공하고 기술을 가르치는 상호원조 단체, 가톨릭 교회가 조직한 공동 작업장도 있었다. 

여러 재료가 쓰인 아르피예라 /flickr

아르피예라 워크샵은 피노체트 정권에서 아주 조용히 등장했다. 레오노라 소베리노 데 베라는 이슬라 네그라에 한 워크샵을 만든다. 워크숍에서 일했던 여성들은 빈곤, 실업, 알코올 중독 같은 문제를 논의하고 서로의 상처를 위로했다. 자신들의 전통에서 영감을 얻은 이들은 워크숍의 아르피예라를 통해 삶의 즐거움을 찾으려,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한 소망을 조각보에 표현했다. 여성들은 여러 곳의 지원을 받아 여러 나라의 충성 고객을 얻었다. 수요가 너무 증가해 부담일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은 한 곳에 계속 모였다. 

1973년, 쿠데타 직후 다양한 가톨릭 단체들이 군사정권에 반대해 만들어진다. 산티아고에서 만들어진 첫 번째 워크샵의 아르피예라는 이슬레 네그라 워크샵에서 만들어진 작업물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슬라 네그라 여성들의 자수 기술은 재료도 비쌌고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산티아고 여성들은 자신들만의 기법을 개발한다. 

남편이나 아들, 형제가 정부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감옥에 갇히고 혼자 남은 여성들은 매주 산티아고 외곽에 위치한 작업장에서 옹기종기 모여 작지만 의미 있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이들의 작품은 외부 세계에 그들의 가난, 고통, 두려움, 그리고 칠레에서 여전히 실종되거나 갇혀 있는 사람들을 알리는 절규였다. 여성들에게 아르피예라를 만드는 것은 서로의 슬픔과 걱정을 반으로 나누고 또 나누는 방법이기도 했다. 

아르피예라는 단순하면서도, 예술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 여성들이 쉽게 만들 수 있도록 했다. 항상 부족한 자원을 고려해 아르피예라를 만들 땐 제일 저렴한 재료를 썼다. 아르피예라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재료는 황토, 삼베 섬유로 만든 천조각, 썼던 실, 버려진 물건 등이 있다. 처음 아르피예라는 약 14×18㎝의 크기였지만 점점 더 작은 크기도 만들었다. 여러 개의 아르피예라를 함께 꿰매 커다란 벽화를 만들기도 했다. 

사람 형태의 입체적인 모습 /CCE Santiago 유투브

대부분의 아르피예라는 사람,건물, 거리, 자연 풍경 등의 이미지를 구상해 천 조각들을 수를 놓고 꿰맨다. 옷감의 조각들은 집, 나무 모양으로 바느질이 되고, 사람들의 형상은 평평한 배경에서 단순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실이나 천조각 말고도 막대기, 호일 조각, 종이 조각 등 흔한 재료는 천조각과 같이 꿰맸다. 심플한 장식이 작품에 포인트가 되며 어떤 작품들은 직물 위에 박음질된 인형 같은 느낌을 준다. 인형처럼 입체적인 느낌은 각자의 소재에 영감을 받은 개개인의 개성을 나타낸다.

또 아르피예라에는 냄비, 후라이팬, 빗자루 손잡이, 플라스틱 케이스 등의 일부를 사용해 작품에 3차원적인 느낌을 주었다. 아르피예라의 주제는 각 워크샵 그룹에 의해 결정되었다. 여성들은 작업장에서 디자인을 개발하고, 집에서 바느질을 한 후 완성된 작품은 다음 회의 때 가져오는 식이었다. 각 작업실에는 20명 정도의 여성들이 있었고, 각자는 돈이 정말 너무 필요해서 두 개 이상 만들어야 하지 않는 한 일주일에 한 개씩 만들 수 있다. 약 250여명이 당시 아르피예라스타로 활동했다고 한다.

작품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식사를 제공하는 빵집, 세탁소, 공방을 볼 수 있으며 아이들이 줄을 서서 차를 닦거나 청소를 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시위대의 무리가 현수막을 들고 다니거나 전단지를 뿌리는 모습은 당시에는 둘 다 불법이었다. 경찰은 제복을 입고 탱크를 몰고 다녔으며, 공장과 병원 문에는 실종자 가족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커다란 'X'자가 박혀 있다.

아르피예라 /SUNY Potsdam 유투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이런 장면만 있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많은 시장, 건강한 사람들, 즐겁게 노는 어린이들, 평화로운 시골 풍경을 표현하며 영원토록 평화로움이 계속되는 삶을 꿈꿨다. 사실 모든 칠레의 아르피예라스타들은 찬란한 햇빛이 안데스 산맥 위로 떠오르는 걸 보면서, 새 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꿈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르피예라들은 때때로 작품 뒷면에 바느질된 작은 주머니에 종이를 넣어, 이 작품이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하기도 한다. 종이에 씌어 있는 묘사는 자신들의 연대에 대한 열망, 군부 정권의 인권 침해에 대한 것을 상세히 묘사한다. 신문에 게재되는 광고에는 대개 아르피예라라는 이름이 들어갔으며, 이들은 안전을 위해 만든 사람의 이름을 밝히진 않았다. 

피노체트 정부는 아르피예라의 예술적 표현에 대한 검열 정책을 시작했다. 워크샵 초기, 칠레 경찰들은 수많은 아르피예라를 압수했고 군인들은 아르피예라가 포장된 소포를 산티아고 공항에서 발견했을 시 명예훼손으로 비난하며 압수했다고. 정부의 탄압과 검열로 대부분의 아르피예라는 익명으로 만들어졌다. 여성들은 커튼으로 가린 창문 너머에서 촛불 하나만 켜 놓고 아르피예라를 만들었다. 최대한 경찰과 군인들의 눈을 피해야 했다. 또 경찰이 급습할 경우에 대비해 여성들은 침대보에 아르피예라를 숨겨 처벌을 면하려 애썼다. 또 아르피예라를 교회로 가져갈 때 코트나 치마에 숨겨 들키지 않게 했다.

아르피예라는 정치적인 주제를 담았기 때문에 지역적으로 판매되거나 국내 갤러리에 전시되는 일은 없었다. 산티아고에서 열렸던 작품 전시회는 화염병을 맞았다고 한다. 군부 독재 말기까지 워크샵은 계속되었지만 이들은 결국 불법일 수밖에 없었다. 매달 한 번씩 아르피예라 작품들은 각 워크샵에서 모아 산티아고에 있는 인권 기구인 교구 연대로 옮겨졌다. 칠레 정부에게 이들은 반역자나 다름없기 때문에 초기 작품들은 은밀히 밀반출되었다. 

전시 중인 아르피예라 /SUNY Potsdam 유투브

교구 연대에서는 해외에서 작품을 판매한 돈을 원작자들인 여성들에게 전달했다. 다만 교구 연대는 아르피예라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 표현하면 안 되는 것에 대한 몇 가지 규칙을 정했다. 노골적인 고문 장면이라든지, 정부를 자극해 아르피예라스타들이 잡혀가거나 할 수 있는 '지나치게 강한 정치적 주제'도 금지되었다.

아르피예라에 허용된 문구는 시위대가 들고 있는 현수막 같은 정도가 허용됐다. 대개 작품에는 안데스 산맥이 그려져 있어 이 모든 일이 칠레에서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독재 정권에 충성하는 여성들은 정부가 허가한 공방에서 칠레는 자비로운 통치자가 지배하는 평화로운 나라라는 선전성이 가득한 광고 목적의 아르피예라를 만들어 수출했다고. 

아르피예라는 군사정권에 대한 반대였고, 인권을 외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칠레의 아르피예라스타들은 궁극적으로 예술에 대해 무지한 자신들도 하나의 예술을 창조할 수 있다는 기쁨을 느꼈을 것이다. 나라로부터 핍박받고, 주변에 깔린 수많은 고난에도 여성들은 굴하지 않고 바느질을 했다. 바느질을 할수록 그들은 자신감이 붙었고, 생각이 더 깊어졌고,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바느질을 하는 모습 /CCE Santiago 유투브

만들어지는 작품의 색, 질감, 모양과 형태에서 그들은 어쩌면 하루 24시간이 절망만이 가득하다는 걸 잠시나마 잊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고통을 조용히 감내하는 것이 아닌, 아르피예라에 표현함으로써 누구보다 더 단단하게 뭉쳤고, 연대했다. 아르피예라가 현대 칠레의 혁명을 이끄는 깃발이라 불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밤중에는 도시에 침묵이 감돌았다. 어제 믿은 사람을 오늘은 믿을 수 없게 됐고, 편하게 읽었던 책은 더이상 읽을 수 없는 불온서적이 되었다. 모든 가게의 문은 닫혔고 여성들은 당연한 안전함을 보장받지 못했다.

사회가 그들을 검열할 때, 주변인들이 그들을 억압할 때 이들은 여성으로써, 또는 사람으로써 목소리를 냈다.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받은 여성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당당히 말할 권리 또한 있었다.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현실 속 이들은 예술을 통해 잃었던 목소리를 찾았다.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작품을 통해 아주 평범한 삶을 꿈꾸었다. 아르피예라는 칠레 여성들에게 말할 수 있는 힘, 표현할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 현대에도 아르피예라는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여성 예술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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