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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계급에 따라 허리띠도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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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계급에 따라 허리띠도 달랐다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1.19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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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국립박물관 특별전 한국의 허리띠 끈과 띠
〈한국의 허리띠 –끈과 띠-〉 /국립대구박물관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국립대구박물관은 2022년 3월 27일(일)까지 허리띠로 복식문화를 살펴보는 특별전 〈한국의 허리띠 –끈과 띠-〉를 개최한다. 전시는 한국의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허리띠를 종합적으로 소개하는 자리이다. 허리띠가 우리 복식과 삶에서 지닌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살펴본다. 

1994년 국립대구박물관이 개관 후 처음으로 국보인 경주 천마총의 금관과 금허리띠, 서봉총의 금관(보물)과 금 허리띠를 전시한다. 경산 신대리 호랑이 모양 띠걸이, 안동 태사묘 여지무늬 허리띠, 김해 대성동출토 중국 진(晉)나라식 허리띠, 전(傳) 김육의 서대 등 우리 역사 속에서 중요한 허리띠 자료 600여 점을 한자리에 모아 공개한다. 특히 전시를 위해서 문헌기록과 실물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왕이 구장복(九章服)을 입고 옥대를 찬 모습을 추정 복원해 전시했다.

경주 천마총 금허리띠 /국립대구박물관

전시는 제1부 왕의 허리띠, 제2부 허리띠란 무엇인가?, 제3부 허리띠 이야기, 제4부 끈과 띠의 나라, 조선으로 총 4부로 구성했다. 제1부 ‘왕의 허리띠’는 시대를 대표하는 기술과 진귀한 재료로 만들어진 왕의 허리띠를 살펴본다. 금으로 만든 신라 마립간 허리띠부터 조선 왕의 옥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 왕의 허리띠를 소개한다. 

제2부 ‘허리띠란 무엇인가?’는 고대 허리띠의 역사, 허리띠를 맨 모습, 허리띠를 만든 재료, 고려시대 허리띠의 문양과 의미 등을 살펴본다. 경산 신대리 호랑이 모양 띠걸이, 김해 대성동 고분군 출토 중국 진(晉)나라식 허리띠, 부여 외리 출토 도깨비 문양 벽돌, 안동 태사묘 여지무늬 및 모란무늬 허리띠 등을 소개한다. 허리띠는 통일신라시대에 복식제도가 확립되면서 재질에 관한 규정이 생겨나고, 장신구에서 관품을 상징하는 복식품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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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태사묘 고려시대 허리띠 /국립대구박물관

제3부 ‘허리띠 이야기’는 허리띠가 지닌 이야기를 풀어냈다. 고려시대의 화려하고 문양이 다채로운 금동제 허리띠를 소개하며, 조선시대 허리띠에는 주머니, 호패 등 필요한 물건을 매달았다고 한다. 돌잔치에는 아이의 장수와 복을 기원하며 돌띠를 맸고 조선시대 관리들은 국가의 상장례에 백대를 맸다고 한다.

안릉신영도 /국립중앙박물관

제4부 ‘끈과 띠의 나라, 조선’은 조선시대의 복식과 회화 자료로 조선의 허리띠를 소개한다. 조선의 띠를 착용, 옷매무새를 마무리해 다양한 끈과 띠가 남아 있다. 선비의 도포를 여미기 위해 실을 엮어서 만든 세조대 등을 맸으며 관리들은 품계에 따라 띠돈의 재료를 달리해 각대를 맸다고 한다. 김홍도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안릉신영도, 조선 후기 문신 서헌순 초상 등으로 당시 허리띠를 맨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입는 사람의 신분과 계급에 따라 두르는 허리띠도 차별을 두었는데, 관원이 공복 등에 띠를 두르던 것은 신라시대에 이미 제도화된 상태였고 고려에서는 계급에 따라 구분하여 제도화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허리띠를 하는 것이 발달되어 계급에 따라 장식도 다양해졌다. 허리띠의 종류는 재료에 따라 옥대, 서대, 금대, 각대 등이 있다. 허리띠는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졌고 차는 사람의 신분과 계급을 나타내기 위해 여러 장식을 붙였다. 

광복 이후의 각대 /국립중앙박물관

처음에는 나무나 가죽, 깃털 등으로 엮은 띠를 둘렀다가 직물을 생산하면서 포백대가 생기고, 금속 문화가 발달하며 혁대 위에 금속으로 장식한 과대가 생겼다. 백제는 신분에 따라 띠의 색을 다르게 했다고 하며 9품은 적대, 10품은 청대 등으로 차등을 두었다. 신라는 진평왕이 왕위에 오른 579년, 상왕이 왕에게 옥대를 받으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허리띠는 삼국 공통으로 다 썼으며, 형태에 붙이는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옷감으로 된 대대나 광대, 실로 짠 사대와 광다회, 가죽 위에 금속제 과를 붙인 각대와 야자대, 금속제 요패가 늘어져 있는 과대가 있다. 요패는 옛 사람들이 허리띠에 물건을 달고 다니던 습관에서 비롯한 것으로 실용성은 없지만 꽤 다양했다. 입는 사람에 따라 형태와 배치 순서도 달랐고 활동을 위해 평소에는 양 옆에만 달려 있다고 한다. 고분 벽화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허리띠는 포백대로, 직물로 만들어졌고 좁은 폭의 허리띠다. 

영친왕비 옥대 /국립고궁박물관

상류층은 폭이 넓고 서민층은 폭이 좁은 허리띠를 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들어 허리띠의 계급 표시는 점점 강화되고 종류도 세밀해진다. 계급에 따라 옥, 금, 은, 동 등 재료의 차이도 있었고 착용 자체도 법으로 정했다. 옥대는 비단으로 싸고 옥으로 만든 장식을 붙였다고 해 옥대라 불렀다. 특히 옥은 매우 귀한 것이라 왕의 예복에 착용한 것으로 중국 황제의 조공품으로 쓰이거나 제사 지낼 때 쓰였다. 왕이 국가공신에게 직접 하사할 때에도 옥대가 쓰였다고 한다. 

옥은 청·현·적·백옥 중에서 무늬 없는 백옥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가죽이나 나무 등의 띠 바탕을 비단으로 싸서 만들었다. 중국에서 하사품으로 내려진 거라 매우 귀한 물건이어서 개인이 중국에서 사 오더라도 가질 수 없었던 만큼, 임금이 선대에 보수해 따로 간직했던 옥대를 듣고 친히 옥대명을 지어 내리거나 옥대를 쓰는 신하 또한 특별히 고르는 등 각별히 대했다.

영친왕 옥대 /국립고궁박물관

이 유물은 영친왕의 옥대로 곤룡포에 차던 것이다. 홍색 무문단(무늬가 하나도 없는 비단)으로 겉을 싸고 그 위에 용문과 화염문을 투조한 옥판을 붙였다. 옥판으로 된 띠돈 뒤에는 금박으로 된 판이 대어져 있다. 옥대의 대구를 중심으로 좌우 양 옆에는 여지(박과에 속하는 열대 과일)형태의 옥판이 3개씩 배치되고, 뒤쪽에는 좌우에 은으로 된 6엽 연판을 하나씩 배치하고 장방형 옥판 5개를 나란히 부착시켰다. 옥대의 뒤 안쪽에는 옥색 공단이 덧대어 있다.

금속혁대대림장식, 금동 말띠 드리개 /국립중앙박물관

왕이 상복을 입을 때는 물소뿔로 만든 서대를 썼는데 옥대 다음으로 귀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상복을 입을 때 혁대를 맸는데, 혁대는 구조상 패옥(왕·왕비의 법복이나 문무백관의 조복과 제복의 좌우에 늘려 차는 옥)이나 폐슬(무릎 앞을 가리는 하의)을 걸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관리들은 품계에 따라 장식에도 구별이 있었다고 하며,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혁대가 주로 쓰였지만 고려 말 우왕 때 개혁, 제정된 복식에서는 품대가 중심이 되고 혁대는 많이 줄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또한 명나라의 복식을 따라 품대 중심이었고, 혁대 사용이 꽤 제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 시대 남자들이 입는 외투인 '포류'에는 허리띠가 필수였다고 한다. 허리띠는 옷을 단정하게 만들어 주며, 장식의 기능도 했지만 궁극적으로 신분을 밝히는 표식이 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1품에서 3품은 홍조아, 4품에서 9품은 청조아를 띤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관리들이 도포나 창의를 입을 때는 가느다란 띠인 '세조대'를 찼는데, 이 또한 품계에 따라 색이 달랐다고 한다. 당상관은 훈색, 자색을 입고 당하관은 청색이나 녹색을 사용했다. 하지만 워낙 색이 많아 제도를 떠나 자유롭게 입는 사람도 많았다고. 

세조대 /서울역사박물관

노인들은 회색이나 흰색의 세조대를 하고 상 중에는 흰색을 맸다. 왕도 평상에는 도포를 입었는데 금사세조대를 했다고 한다. 세조대는 여러겹으로 겹친 명주실을 짜 만든 것으로 이렇게 만드는 것을 '다회'라 부른다. 동글게 짰다고 해서 동다회, 폭이 넓고 납작한 건 광다회라 부른다. 이 세조대는 표면이 둥글게 짜여지는 동다회로, 양쪽 끝에 딸기술이 한 개씩 달리고 그 위에 금사로 맺은 가락지매듭 2개를 연결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손으로 짜는 끈을 다회라 불렀고, 끈을 만드는 작업을 '다회친다'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나무껍질이나 넝쿨 등을 잘라 두가닥 이상으로 꼬아 쓰던 것으로, 사냥이나 낚시 등에 필요한 도구들을 제작했다고 한다. 그러다 점점 세가닥, 네가닥으로 짜고 나아가 네가닥 이상으로 짜는 끈으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한다. 

심득경 초상, 허리에는 청색 세조대를 맸다 /국립중앙박물관

광다회는 주로 군복으로 사용되었던 철릭이나 도포, 전복 위에 착용했고 대개 양쪽 끝을 풀어 술을 만들었다. 동다회는 주로 노리개나 주머니 끈 등을 맺는 데 사용했는데 세조대는 이러한 방법으로 짠 다회 중에서 특히 좁게 짠 것을 가리킨다. 양쪽에 술이 달려 있어 술띠라고도 불렀는데, 조선시대 남자들의 겉옷을 여미는 데 사용했고 대개 허리보다 높이 가슴 부분에 매어 입었다.

야자대 /대전선사박물관

악공, 악사들이 메는 허리띠도 따로 있었다. '야자대'는 긴 길이의 일자형 허리띠로, 머리 부분에는 버클을 달고 끝에는 타미라 부르는 띠돈(노리개를 고름이나 치마허리에 거는 장식)을 달았다. 허리띠 안쪽에는 버클 걸쇠를 끼워 허리에 맞추는 보조대가 달려 있는데 길이가 길고 보조대가 달린 게 야자대의 특징이다. 띠 끝에는 타미가 달린 부분을 허리띠에 끼워 뒤로 늘어뜨렸으며, 보조대가 달리고 타미 부분이 뒤로 늘어지는 모양이 ‘也’와 비슷해 ‘야자대’ 또는 ‘야대也帶’라고 불렀다. 

당시 명나라에서 공복에 청색 가죽의 띠 끝에 타미를 달아 늘어뜨리는 '요대'를 쓰면서, 조선 시대에도 문무백관이 공복을 입을 때 쓰는 공복용 야자대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악공, 악사들의 관복 허리띠로도 야자대를 썼다. 아악 문무무 공인, 우방 악사와 공인이 공복을 입을 때 두르는 허리띠 도식을 『악학궤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품계에 따라 야자대의 띠돈도 변했으며 17세기 이후 상복에서 쓰는 띠돈 재료를 야자대에도 적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시대 각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대구박물관은 전시 외에도 관람객이 허리띠의 숨은 역사를 이해하기 쉽도록 끈과 띠, 신라 금허리띠와 조선의 옥대와 후수, 고려 허리띠 속 문양으로 꾸민 정원, 고구려의 끈과 띠, 조선시대 초상화 속 허리띠,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첩 속 허리띠 등의 다채로운 영상을 제작했다. 

박물관 측은 "이번 전시는 우리 역사 속 허리띠의 다양한 모습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기본적으로 저고리와 두루마기가 길었던 고대에는 옷을 입고 마무리하는 데 쓰는 필수적인 요소였던 허리띠가 장식적으로 쓰일 때는 위엄을 나타내면서 신분과 계급을 나타내는 표상의 역할도 하였다는 점에서 허리띠 하나라도 뭐 하나 허투루 생각하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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