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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열정이 응축된 밀크 초콜릿, 허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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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열정이 응축된 밀크 초콜릿, 허쉬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1.1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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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쉬 초콜릿 /pixabay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이 불황에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제과부문 점유율 1위는 허쉬는 북미 초콜릿 시장에서 여전히 1등을 지키고 있다. 허쉬 하면 자동으로 초콜릿이 생각나는데, 초콜릿뿐만이 아닌 여러 브랜드를 인수합병(M&A)하면서 영역을 늘려 나가고 있다. 

2018년 허쉬는 팝콘 브랜드 '스티니팝'을 보유한 앰플리파이, 글루텐프리 스낵 회사인 파이럿 브랜드 등을 인수했고, 최근에는 슈가프리 초콜릿 브랜드인 릴리즈와 프레즐 브랜드인 도츠 프레첼을 인수해 본격적으로 스낵 사업에도 뛰어들 예정이다. 

이경신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는 ‘스낵킹 파워하우스’로 거듭나려는 의지를 시장에 보여준 것”이라며 "허쉬는 기존 주력 제품들에 의존하지 않고 적극적인 M&A를 통해 소비자 수요 트렌드에 맞춘 새로운 제품군으로의 포트폴리오 확장을 지속해오고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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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에서 캐러멜, 그리고 밀크 초콜릿까지 
 

밀턴 허쉬 /Wikimedia Commons

미국의 다국적 기업, 세계에서 가장 큰 초콜릿 제조 회사 중 하나인 허쉬는 쿠키와 케이크 등의 스낵, 밀크셰이크 같은 음료들도 판매한다. 허쉬의 초콜릿은 미국 전역을 포함해 전세계 60여개국에서 팔리고 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 허쉬는 초콜릿 마을로 불리며, 허쉬라는 이름이 붙은 공원과 체육관, 박물관 등이 있다. 허쉬 타운의 설립자, 지금의 허쉬를 만든 건 창업자인 밀턴 허쉬로 그는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캐러멜 회사를 만들었지만 이 회사를 경쟁사에 매각해 버리며 업계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인들의 입맛을 바꿨고, 도시에 그의 이름을 남겼다. 

그는 독일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인 헨리 허쉬는 공상가였다. 그는 작가, 화가, 부자가 되길 원했다. 그래서 자신이 실패했던 꿈을 아들이 대신 이뤄주기를 바랐고, 교육을 시키길 원했다. 다만 그의 어머니는 생각이 좀 달랐는데, 그는 사람은 일을 해야 한다는 주의였다. 헨리 허쉬는 가난했기 때문에 빚을 갚기 위해 농장을 팔고 이사를 갔다. 부인과 아들이 작은 방에서 살 때 그는 남은 현금으로 광산 채굴이라는 동업을 할 사람들을 찾았다. 

허쉬의 동생이 태어났을 때 이 가족은 몇 안 되는 농지를 얻을 수 있었다. 허쉬의 어머니는 농장에서 닭을 기르고 달걀을 내다 팔았다. 아버지는 생선을 저장하고 나무를 심었다. 다만 허쉬의 부모님은 자주 싸웠는데, 대부분은 부자가 되지 못한 것과 돈에 대한 얘기였다. 설상가상 허쉬의 동생이 병에 걸려 죽은 건 허쉬에게는 엄청난 비극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허쉬는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다. 어머니는 평생 아들을 위해 살았다고 한다. 

허쉬 마을에 있는 워터파크 /flickr

허쉬의 정식 교육은 13살에 끝났다. 2년 후 허쉬는 돈을 벌러 밖으로 나갔고, 신문사 견습생으로 일했다. 다만 상사가 맘에 들지 않았던 허쉬는 곧 그 자리를 나왔고, 어머니는 인쇄 일이 아들에게 어차피 맞지 않았다고 생각해 해고된 것을 기뻐했다고 한다. 이후 허쉬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했는데, 가게가 있는 곳은 예쁘게 차려입은 사람들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던 곳이었다. 

가게 손님들의 말을 관리하는 일을 맡은 허쉬는 상사의 눈에 들었고, 아이스크림보다 사탕을 만드는 일을 돕게 된다. 1872년의 사탕은 설탕을 끓여 만들었는데 당시 초콜릿은 쓴 맛이었고 대개 코팅을 하는 데 쓰였다. 아무도 우유와 설탕으로 초콜릿 바를 만드는 법은 알지 못했다. 이후 1875년이 되서야 스위스의 다니엘 피터가 친구인 앙리 네슬레의 분유를 자신의 초콜릿에 첨가해 밀크 초콜릿을 만든다.

허쉬는 가게에서 일하면서 손님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깨닫게 되고, 1876년 필라델피아 100주년 국제박람회가 열리자 필라델피아에 사탕 가게를 열기로 결심한다.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허쉬는 6월 1일 필라델피아 스프링 가든 거리에 첫 사탕 가게를 연다. 곧 많은 사탕 가게들이 생겼지만 상관없었다. 허쉬는 사탕 향기를 지하에서 바깥으로 내보내기 위해 에어 벤트를 설치했다. 박람회에 구경을 간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 가게의 사탕 향기에 취할 수밖에 없었다.

허쉬는 밤을 새며 사탕을 만들었고, 가족과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사탕을 판매했다. 당시 허쉬의 가게는 사람들이 줄을 많이 서 있었다고 한다. 6년 후 그의 가게는 점점 매출이 줄어들고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허쉬는 밤까지 사탕을 만들며 판매하고 고군분투했지만 지지부진했고, 이것은 그를 엄청난 압박감에 몰아넣었다. 급기야 허쉬가 쓰러졌을 때, 그는 더이상 친척에게도 돈을 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인들은 그에게 가게를 접을 것을 조언했고, 모든 것을 접고 새롭게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지칠 대로 지친 허쉬는 가족과 함께 랭커스터로 귀환했다. 아버지인 헨리 허쉬가 콜로라도 주 리드빌에 실버 러쉬(은이 있는 광산을 찾는 사람들이 이주하는 현상)가 있다는 것을 알고 허쉬에게 여기로 오라며 편지를 쓰고, 바람이라도 쐴 겸 그곳에 갔던 허쉬는 덴버 사탕 가게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 가게는 캐러멜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곳이었다.

랭커스터 캐러멜 상자 /flickr

당시 이 곳은 사탕에 씹는 느낌을 주기 위해 넣었던 파라핀을 사용하는 것 대신 우유, 바닐라와 설탕을 쓰는 곳이기도 했다. 부드럽고 달콤한 캐러멜에 매료된 허쉬는 만드는 과정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랭커스터로 돌아온 그는 뉴욕에서 남은 자재들로 랭커스터 길거리에서 케러멜을 만들어 팔았다. 덴버 가게에서 배운 건 그에게 큰 자산이었다. 신선한 우유와 설탕을 이용해 그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캐러멜을 만들었다. 판매가 잘 되자 그는 차를 구입하고 사탕을 만들기 위한 작업실을 빌렸다.

그의 대출 만기가 다가오고 있을 즈음, 한 영국인 수입업자가 그의 캐러멜을 발견하고 그 독특한 맛에 매료된다. 그는 이 사탕의 유통기한이 몇 달이라는 것을 알고, 런던에 도착하면 돈을 지불하겠다며 대량 주문을 한다. 나중에 허쉬에게는 500파운드(약 7,700만원 상당)의 수표가 도착한다. 허쉬가 붙인 '크리스탈A'라는 캐러멜은 꾸준히 판매량이 증가했다. 특히 유럽에서 매출이 잘 나왔고 그의 회사는 계속 성장할 수 있었다. 랭커스터의 공장은 700명 이상을 고용했고, 캐러멜은 꽤 상품성이 높아 경쟁사들이 고전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1873년 열린 시카고 박람회에서 허쉬는 J. M. 리먼의 독일제 초콜릿 생산 기계를 발견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캐러멜은 유행에 불과하지만 초콜릿은 영원하다. 난 초콜릿을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박람회가 끝난 후 허쉬는 초콜릿 기계들을 싹다 사들였다. 1894년 새해, 그는 핫초코와 초콜릿을 굽고 케러멜 코팅용 코코아 가루를 만들고 있었다. 40살이 될 때까지 허쉬는 미혼으로 살면서 고객들을 위해 뉴욕, 시카고, 유럽 등을 다녔다. 

그는 여행을 다니며 현재 초콜릿이 유럽에서 대세고, 크리스탈A가 시장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알게 된다. 당시 랭커스터 캐러멜 회사는 공기업이었던 아메리카 컴퍼니가 인수하겠다며 입찰가를 50만 달러에서 100만 달러로 인상하며 제안을 했지만 허쉬는 거절했었다. 그러다가 며칠 후, 허쉬는 초콜릿 사업을 성공시키기 위해 15만 달러에 랭커스터 캐러멜 회사를 내놓는다. 랭커스터 케러멜 회사가 정식으로 합병됐을 때 허쉬 초콜릿 회사는 자회사로 바뀐다. 

허쉬 밀크 초콜릿 /pixabay

이 회사를 키우기 위해 허쉬는 스위스 초콜릿 공장에서 일하며 다른 초콜릿 공장에서 장인들을 대거 영입한다. 허쉬는 J. M. 리먼의 도움으로 유럽 여행을 하면서 여러 초콜릿 제조업체들의 시설을 둘러볼 수 있었다. 당시에만 해도 밀크 초콜릿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회사는 없었다. 스위스 사람들만이 밀크 초콜릿을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것은 기밀이었다. 그러나 허쉬는 포기하지 않았다. 빈 농경지를 사들인 그는 거대한 초콜릿 마을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커다란 초콜릿 공장, 코코아 애비뉴와 초콜릿 애비뉴라는 두 거리 등. 그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다.

1903년, 공장의 벽이 세워지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그는 밀크 초콜릿을 만드는 법을 몰랐다. 하는 시도마다 다 실패했고, 만들어도 며칠 후엔 다 어그러지는 등 뭔가가 잘 되지 않았다. 허쉬는 랭커스터에서 일했던 화학자를 데려와 초콜릿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첫 번째 시도에서 우유를 따뜻하게 만들어, 응축시켜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을 수 있는 밀크 초콜릿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한다. 이것은 심지어 상하지 않고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기도 했다. 

그는 최초로 밀크 초콜릿을 만든 사람은 아니지만, 신선한 우유와 바닐라로 대량 생산 기술을 이용해 초콜릿을 만든 사람이었다. 초콜릿은 이때까지만 해도 부자들이나 먹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신선한 우유는 더 맛있고, 오래 보관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그는 했다. 다만 그 재료로 초콜릿을 만드는 건 정말 오래 걸렸다. 우유의 수분 함량이 약 87%였고, 이 수분은 좋은 초콜릿을 만드는 데 방해 요소였다. 그래서 초콜릿에 우유를 넣기 전에 응축을 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처음에 그는 주전자에 우유를 끓이면서 크림을 응축하려고 했다. 여기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주전자가 우유를 너무 뜨겁게 만들었고, 크림으로 만든 초콜릿은 상해버렸다는 점이다. 이것은 응축된 탈지 우유가 해결책이었다. 응축 과정 중에 언제 설탕을 넣을지에 대해서도 결정해야 했는데, 허쉬는 여러 실험 후 응축 전에 설탕을 넣으면 우유의 수분을 더 많이 제거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완성된 것은 설탕과 우유가 잘 섞여서 마치 엿 같은 느낌을 주었다.

허쉬의 상징, 초콜릿 /unsplash

쉬에는 시그니처이자, 누군가에겐 약간의 불쾌함을 주는 것이 있다. 허쉬 초콜릿 특유의 '냄새'다. 심한 사람은 아예 이 냄새를 못 맡으며, 싫어하는 사람은 손도 못 댈 정도라고 하니 어느 정도의 악명인지 궁금해질 정도다. 확실히 허쉬 초콜릿에는 그 특유의 냄새가 존재한다. 물론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호불호가 꽤 심한 편이다. 

이 냄새는 지방산의 일종인 부탄산에 의해 생기는 것으로, 밀크 초콜릿에 첨가하는 우유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생긴다. 문제는 이 부탄산의 냄새인데, 허쉬가 밀크 초콜릿을 만드는 방법을 알아냈을 때 우유의 유지방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기술의 한계로 인해 부탄산이 생긴 것이다. 부탄산에서 나는 신맛이나 냄새를 제거하지 못해 초콜릿에 그대로 남게 됐다는 얘기다. 

원래라면 실패작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원재료인 코코아버터보다 허쉬의 밀크 초콜릿은 우유와 설탕의 비중이 높았다. 당시 코코아는 엄청나게 비싼 재료였고 우유와 설탕의 비율이 높아질수록 싼 값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했던 것이다. 한마디로 냄새는 좀 났어도 허쉬는 이 초콜릿을 5센트(약 50원)에 팔 수 있었다. 비싸서 초콜릿을 먹고 싶어도 엄두도 못 냈던 일반 사람들에게 허쉬의 밀크 초콜릿은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허쉬 초콜릿 /unsplash

나중에 아버지인 헨리 허쉬가 죽고 나서 허쉬는 그의 아버지가 항상 말했던, '돈을 벌고 싶으면 일을 해야 한다'라는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그는 일에 항상 몰두했다. 1904년 봄, 노동자들은 밀크 초콜릿 대량 생산을 위해 일했고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새 공장을 짓고 일을 했다. 그는 거리, 상점의 디자인부터 허쉬 마을의 모든 계획에 관여했다. 마을의 이름은 이후 펜실베니아주 허쉬로 지어졌다.

허쉬 초콜릿 회사, 허쉬 마을의 관광업은 모두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회사의 모든 성공이 허쉬에게는 공허함으로 다가왔다. 부인인 캐서린의 병이 점점 악화되었고, 급기야 휠체어까지 필요하게 된다. 캐서린이 병원에서 세상을 떠나고 난 후 허쉬는 회사의 경영에서 물러나 쿠바에서 새 도시와 설탕 농장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그는 쿠바에서 펜실베니아 버전의 유토피아를 꿈꿨다. 농장을 사들인 후 쿠바의 센트럴 허쉬 마을은 설탕 공급원으로 완전히 자리잡았고, 그는 쿠바에 고아원도 세웠다. 이 회사는 나중에 코카콜라에 설탕을 팔았다고도 한다.

허쉬 초콜릿의 매출은 갈수록 올랐다. 전쟁 기간 동안 허쉬 초콜릿 회사는 어떤 기후에서도 상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초콜릿 바를 보급품으로 배급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허쉬는 10억개가 넘는 초콜릿 바를 해외로 보낸다. 1945년 10월, 여러 스트레스와 기침으로 고생하던 허쉬는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마지막을 기리기 위해 보러 왔다고 한다. 

허쉬 키세스 /flickr

초창기에, 허쉬는 초콜릿 바를 만들어 성공한 것도 있었지만 당시 114여개의 제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그 제품들은 다른 회사에서도 판매하던 것이라 허쉬는 자신들만의 독창성을 보이기 위한 연구를 했다. 1907년, 그는 은박지로 싸여 있는, 한 입 크기의 초콜릿인 허쉬 키세스를 선보였다. 그는 초콜릿 이외에도 다른 재료를 써서 실험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1925년 그는 첫번째로 땅콩이 가득 들어 있는 미스터 굿바, 바삭바삭한 쌀이 들어간 크랙커 바로 다시한번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허쉬라 쓰여 있는 굴뚝 /flickr

여러 시도도 해 보고 실패도 엄청나게 많이 했다. 인생에 있어 초콜릿이라는 걸 공부해본 적 없었던 그였지만 시카고 박람회에서 초콜릿을 먹어보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이 그렇까지 바뀔 줄 예상이나 했을까. 대중들도 즐기고 싶었던 초콜릿이었지만 그러지 못한 현실에서 그는 수년을 스위스인들만 알고 있었던 초콜릿 개발에 힘을 쏟았다. 다양한 제품들을 만들었지만 지금도 밀턴 허쉬가 헌신했던 밀크 초콜릿은 지금도 허쉬 초콜릿의 일종의 상징으로 남아 있다.

허쉬는 자신이 부를 창출하는 것을 넘어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만큼, 그에 비례해 행복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뜻대로 허쉬 마을에는 허쉬 학교를 비롯해 컨벤션, 박물관, 수영장, 놀이공원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있으며 연간 300만명이 방문하는 관광지로 남아 그가 만든 밀크 초콜릿만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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