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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기와로 전통성을 만드는 장인, 번와장 이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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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기와로 전통성을 만드는 장인, 번와장 이근복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1.07 18: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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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기와 /문화재청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2008년 그는 숭례문에서 화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TV에서는 실시간으로 숭례문 화재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고, 택시를 타고 황급히 숭례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그는 숭례문이 하릴없이 불타고 있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는 숭례문을 가장 기억에 남는 곳으로 기억한다고 한다. 그는 밤새 숭례문 주변에 있었다. 새벽이 되고서야 그 자리를 떠났다. 이후 문화재청은 전통 건축기법에 능통한 장인 및 전문가를 초빙해 숭례문 복원을 진행하게 되고, 그는 소실된 숭례문 기와의 복원을 담당했다. 

건축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술, 번와

기와지붕 /문화재청

기와는 지붕을 덮기 위하여 점토를 틀에 넣어 일정한 모양으로 가마에서 구워 만든 건축재를 뜻한다. 원래 목조 건물의 지붕에는 이엉이나 볏짚, 나무껍질 같은 식물성 부재를 썼는데 내구력이 약해 자주 교체해야 돼서 방수효과가 좋고 강도가 높은 반영구적인 기와가 만들어졌다. 목조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여 지붕을 이는 풍습은 고대 동양 건축의 특징의 하나지만 그 기원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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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는 지붕에 씌워 눈과 빗물의 침수를 차단하고, 이를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재목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위하여 사용된다. 목조건물의 지붕에 사용되는 위치에 따라 그 모양이나 명칭이 각각 다르고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또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변천되어 각기 다른 특색을 보인다. 다양한 기와는 모두 건물을 짓기 이전에 그 사용처를 미리 고려하여 제작된 것으로, 국가적인 조영사업의 하나로 많은 수량이 만들어졌다.

번와장 이근복 /문화재청

'번와장'이란 지붕의 기와를 잇는 장인을 말한다. 번와장의 번와는 기와를 뒤집는다는 뜻으로, 뒤집는다는 건 기와를 뜯고 다시 잇는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기와를 사용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출토 유물로 봤을 때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번와와공(翻瓦瓦工)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삼국시대의 기와 기술은 더욱 발달하여 기록에 의하면 ‘와박사’라는 장인이 있었고, 이들은 일본에 건너가 기와 기술을 전해주기도 했다고. 조선시대에는 ‘와서’를 설치해 기와를 생산하도록 하였으며, 태종 6년에는 ‘별와요'에서 기와를 보급하도록 했다. 별와요에는 와장을 비롯해 승려도 배치하여 대대적으로 기와를 제작했다.

와공의 명칭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기와를 만드는 제와 기술자로 ‘와공’ 또는 ‘와장’이라고 하며, 벽돌 만드는 장인이 기와도 함께 만들었기 때문에 ‘와벽장’이라는 명칭도 썼다. 기와를 올리는 장인은 ‘개장’이라고 하는데 이는 제와장인과 구분하기 위해 붙인 명칭이다. 기와를 만드는 것은 ‘번와(燔瓦)’라고 하고 기와 덮는 일을 ‘번와(翻瓦)'라고 하기 때문에 기와 덮는 장인을 ’번와와공(翻瓦瓦工)‘이라 한다.

지붕은 한국 건축을 형성하는 조형 요소이면서 한국건축의 전통성을 가장 잘 표현하는 부분 중 하나다. 또 우리나라 목조건축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술을 만들어 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기와 지붕은 전통 건축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인 곡선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으로 지붕의 조형적 특징은 번와 기술이 좌우한다고 할 정도다.

이근복 번와장 /문화재청

이근복 번와장은 자신이 하는 일에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살다 6.25전쟁 직전 시골로 피난을 갔다. 시골에서 그는 집 공사하는 일을 했는데, 솜씨가 워낙 좋아 여러가지 일을 했다고 한다. 이 당시에는 집 짓는 여러 기술을 혼자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가 맡은 전문 분야는 미장이었지만 재주가 꽤 좋아 12가지 일을 다 하며 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심부름을 다녔다. 

어린 아이는 현장에서 어른들에게 밥도 얻어먹고 일도 도우며 아버지를 잘 따랐다. 그러다 어느날 초가 지붕이 ㄱ자로 꺾인 부분에서 물이 새 썩는 걸 보게 된다. 이 장인은 지붕이 썩는 이유가 대부분이 기와를 잘못 놓아 나무가 먼저 썩어버려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비가 아무리 많이 내려도 기와가 멀쩡하다면 집도 고칠 필요가 줄어들 것이란 생각을 했다고. 그는 “지붕에서 비만 새지 않으면 목조 건축은 천 년 이상을 간다. 하지만 물이 새면 그냥 썩어 버린다. 목수가 집을 단단히 지었어도 기와 한 장을 잘못 이으면 대들보가 썩고, 대들보가 썩으면 집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전했다. 

그는 건축에서 기와를 잘 잇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는다. 아버지는 여러 건축 기술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 분야에 특화된 전문가까지는 아니었다. 그냥 있다가는 제대로 된 기술자가 되지 못할까 싶어, 그는 기와 놓는 일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1970년 서울로 상경한다. 서울로 올라가야 제대로 된 일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친척이 돈암동에 살았는데 그 주변엔 한옥이 꽤 많았다고 한다. 공사판을 전전하던 그는 이 분야의 최고가 누구인지를 찾았고, 고건축 분야의 대가인 故 기성길 선생을 만난다.

그는 선생을 찾아가 기술을 배울 것을 부탁한다. 돈 같은 것도 필요 없으니 일만 하게 해 달라며 간청한 끝에 수년간 그의 밑에서 일할 수 있었다. 기 선생은 당시 경복궁, 불국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등 주요 문화재의 지붕 공사를 맡아 하던 전문 기술자였다. 기술을 배우고 싶었던 그는 절박했다. 이미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많이 보고 했던 일들이기에 남들보다는 일을 잘 했다. 그래도 처음부터 했던 건 지게질이었다. 

토수 끼우기 /문화재청

당시 지붕에는 번와장 1명, 그 곁에 일을 도와주는 조공 1명만이 오를 수 있었다. 나머지 인부들은 지게와 기와와 흙을 싣고 다니는 일을 반복했다. 이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점심 시간이 오기 전 남들보다 지게를 한두번은 더 지어다 날랐고, 점심 시간은 1시간이 주어졌지만 그는 밥을 얼른 먹고 남는 시간에 연습할 흙을 가져다 두고, 기와 잇는 연습을 했다. 

자신이 연습했던 건 기술자들이 오기 전에 다시 뜯어 놓았는데, 기술자도 아니면서 감히 기와를 놓는다고 혼났기 때문이라고. 그는 오전과 오후 통틀어 30분씩 주어지는 쉬는 시간에도 끊임없는 연습을 했다. 연습을 많이 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어떤 것이 잘 됐고, 잘못되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됐고 어떻게 하면 지붕 기와를 더 잘 이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1년 동안 번와를 배우며 그는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는 기 선생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첫째는 '급하게 일하지 말라', 둘째는 '일을 해 놓고 멀리서 봐야 잘 보인다', '공사가 끝나며 한바퀴를 돌지 말고 두바퀴를 돌아라'다. 기와를 아무리 잘 놨어도 마지막에 한 장을 제대로 못 놓으면 안 되고, 기와를 놓을 때는 도구가 아닌 육안으로 보는 것이며, 신중하게 작업하라는 뜻이다. 실력을 인정받은 이 선생은 2008년 2월 숭례문 소실 이후 반년이 지나고 나서 중요무형문화재 제121호로 지정, 기능보유자로 인정받았다. 

연함박기 /문화재청

번와장 보유자로 인정받은 이 장인은 서울 숭례문, 경복궁, 경회루 등 다수의 주요 문화재 번와 공사에 참여하였으며,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능숙한 기량을 보여주었다. 또한 기와지붕의 구성, 외형, 시공 작업 등 실질적인 기법을 이해하고 있으며, 번와에 대한 해박한 식견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덧붙여 스승으로부터 배운 번와 기술을 지속적으로 보존·전승·활용하고 있으며, 전통 번와 기법의 보존을 위하여 전수교육장을 마련하여 후계자 양성에도 힘쓰고 있어 번와장 보유자로서 충분한 자질을 갖춘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나라 전통건축에서 지붕의 중요한 조형적 특징 중 하나인 곡선의 미는 번와 기술에 좌우되는데, 이에 따라 기와를 잇는 전통 번와 기법과 기능을 보존·전승하기 위해 번와장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 

숭례문 복구현장 설명회에서 이근복 번와장과 인부들이 기와 잇기를 하는 모습 /문화재청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그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번와장이며, 1997년 숭례문 기와보수 작업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숭례문은 특별할 수밖에 없었고, 소실되었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안타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3일간 그는 전수조교 일행과 복구 공사 이전 기와를 해체했다. 깨진 것과 성한 것을 분류하는 작업을 3일간 하고 나서 목수들이 서까래를 까는 목공 분야가 끝나면 그는 지붕에서 기와를 이었다. 숭례문 복원에도 옛 전통 기법인 아궁이에 불을 때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기와 크기는 보통 소·중·대로 나뉘며 작은 문화재에는 소형 기와를 쓰고 조금 큰 규모에는 중형 기와를 쓴다. 숭례문에는 '특대' 크기의 기와가 쓰였는데, 건물의 기단부에는 보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었지만 기와에 대한 기록이 없어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나오는 문헌을 토대로, 시기적으로 연결되는 여타 유적 등에서 출토된 조선 시대 기와들을 조사했다고 한다.

또 1963년 숭례문 복원 당시 수습된 조선 후기 기와와 2008년도 화재 때 긴급히 수습된 기와, 2009년 숭례문 주변 발굴에서 출토된 기와들을 검토해 복원에 반영했다고 그는 밝혔다. 숭례문 기와 작업에는 암키와 1만8000장, 수키와 7200장, 암막새 500장, 수막새 500장이 투입되었다. 

기와는 보통 100년 이상 유지될 수 있다고 한다. 기와에 첨가하는 접착제 역할을 하는 생석회의 강도에 따라 결정되며, 시멘트가 100년이 간다면 생석회는 최대한 천 년까지도 갈 수 있다고 하니 이 생석회를 만드는 과정에 따라 기와도 차이가 난다. 시공을 아무리 잘 해도 기와 밑에 진흙을 잘못 깔면 용마루가 내려앉고 흙에 생석회를 섞지 않으면 흙이 물러져 기와를 탄탄히 이을 수 없다고 한다. 

수막새 놓기 /문화재청

기와를 고정하기 위해 채우는 흙과 생석회의 배합도 맞지 않으면 기와가 미끄러져 내려가기 때문에 장인의 깊은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나라 건축은 일반적으로 나무 위에 기와를 올리는데, 나무가 변형이 오거나 잘못 지으면 기와를 잘 올려도 소용이 없다고 한다.

기와는 눈이나 비가 새지 않는 것도, 무게를 견디는 것도 중요하다. 보통 기와 한 장에 5.2㎏~5.3㎏ 정도 하며 무거운 건 5.5㎏까지 나간다. 그런 기와를 지붕 위에 올려놓으면 무게가 막중할 수밖에 없어 하중을 줄여야 한다. 또 집을 잘 지어도 기와를 이을 때 흙을 너무 많이 올리게 되면 나무가 처지고, 그 사이로 눈이나 비가 스며들어 나무가 썩는다고. 

그가 기와를 이은 지도 벌써 40년이 훌쩍 넘었다. 경복궁 수정전, 창덕궁 돈화문 등 5대 궁을 비롯해서 봉정사 극락전, 법주사 대웅전, 길상사 극락전 등 200여곳을 보수하거나 신축한 그는 전통 번화 기법의 보존을 위해 경기 고양에 '전수교육장'을 마련, 자신의 아들들을 포함해 후학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 매년 문화재수리기능자 자격시험을 실시하고, 그가 시험관 자격으로 시험장을 와도 몇 년 간 시험을 보러 온 사람들 가운데 제대로 기술을 익힌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번와장 이근복 /정책브리핑

그게 안타까웠던 그는 교육장에 한옥 건물 3동을 지었다. 한 동은 경상도 기법, 한 동은 서울 기법, 한 동은 문화재 시방서 기준에 맞는 재현으로 제자들이 연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는 항상 제자들에게 주인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데, 즉 자신의 집 기와를 잇는 것이라 생각하라는 것이다. 단순히 기와가 아닌 작품 하나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많은 건물의 기와를 잇는 것이 아닌 한 동을 제대로 이었다고 사람들에게 자랑하라고 그는 말한다. 2009년부터는 매년 한번씩 일반인과 문화재 관련 종사자들을 초대해 공개 시연회를 열고 강의도 하고 있다. 

그는 건축물을 더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새 기법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흙에 생석회를 섞어 기와를 잇는 것은 전통 방식인데, 현재의 기후 변화에 꽤 취약한 편이다. 지켜야 할 문화재지만 꼭 전통 방식에만 매여 있는 것이 아닌, 번와를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더 나은 지붕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탐구한다. 그는 기 선생에게서 전통 문화의 계승자로서의 사명과 정신을 배웠다고 말한다. 전국에 있는 600-700명의 번와공들을 제대로 교육시켜 올바르게 기와를 잇는 일,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는 자신의 뒤를 이을 수많은 사람들을 그는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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