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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10만 명의 대도시로 존재했던 마야의 영광, 티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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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10만 명의 대도시로 존재했던 마야의 영광, 티칼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1.06 18: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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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림 너머 보이는 티칼 /unsplash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과테말라의 열대우림에서 발견된 고대 도시, 티칼은 콜럼버스 이전 마야 문명의 가장 큰 도시이자 유적지로 알려져 있다. 과테말라 티칼 국립공원의 일부를 차지하며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티칼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도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고 메소아메리카 전역의 지역들과도 교류했다고 한다. 이 시기 동안 많은 통치자들의 무덤, 사람들이 세운 기념물과 사원, 궁전 등이 발견되었다. 

우림에 숨어 있던 피라미드와 건축물, 그리고 마야인들

티칼 /pixabay

지나다니던 사냥꾼들, 여행자들이 이 지역에 있던 저수지를 가리켜 마야의 유카텍어로 'ti ak'al'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명칭은 '물웅덩이'란 뜻으로, 티칼이라고 불렀던 건 1840년대 이 곳이 사람들에게 발견되면서 생겨난 이름이다. 유적지에 새겨진 상형 문자에는 '약스 무탈'이라 씌어 있었다고.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하다. 이 도시는 약 3,000여개의 구조물이 있으며 건축물들은 대부분 고지대 위에 놓여 있다. 주변 지역은 티칼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고 1955년 5월 과테말라에서는 처음으로 보호 구역으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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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지대는 매우 비옥했으며, 동서의 무역로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다만 수로가 따로 없어 주민들은 빗물을 모아 10여개의 저수지에 물을 저장해 사용했다. 사람들은 비가 언제 오는지를 예측할 수 없어서 오랜 시간 가뭄을 경험할 때도 있었다고. 티칼의 인구는 만명에서 최대 10만명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서기 200년까지 지속적으로 인구는 증가했고, 어느 순간 급격히 증가하다가 인구는 서서히 감소했다.

티칼의 주요 건축물은 기원전 300년경 올라가기 시작했고 이때 피라미드 건설도 시작된다. 다만 엘 미라도르나 나크베 유적지 같은 곳보다는 규모가 작았다. 신고전기의 대도시들이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티칼은 본격적으로 정치적, 문화적인 번성을 누린다. 또 멕시코 중부에 위치한 도시 테오티우아칸의 여러 영향을 받게 되는데, 테오티우아칸의 장군이 티칼로 쳐들어와 왕이 되고 인근의 도시들을 몰락시키면서 티칼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의 아들 또한 47년 넘게 왕위에 올라 티칼을 이끌었다. 

티칼의 북쪽에는 안정적인 요새들이 만들어졌고 도시의 동쪽과 서쪽에는 넓은 늪지대가 있어 자연적인 방어 구조물이 되어 주었다. 이 방어선들은 티칼에 사는 사람들과 이들이 보유한 자원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다. 급속도로 뻗어 나가는 권력은 급기야 남쪽에 있는 마야 제국의 대도시 유적이자 식민 도시인 코판을 세운다. 

칼라크물 유적지 /pixabay

티칼에게도 적은 있었다. 이들의 숙적이면서 끝없는 싸움을 한 칼라크물이라는 나라였다. 칼라크물은 티칼 인근에 있던 도시였는데, 티칼과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두 나라의 관계를 가리켜 마야 열강들 간의 오랜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나라의 왕들은 서로 '칼룸테'라는 칭호를 썼고 정확한 뜻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왕과 비슷한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이 두 나라의 경쟁은 6세기 중반, 칼라크물이 인근의 도시인 카라콜과 동맹을 맺고 티칼을 점령하면서 잠시 마무리가 된다.

이후 티칼의 기나긴 공백기가 시작된다.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후반까지 티칼에는 건축물이 세워지지 않고, 공공 조형물이 훼손되는 등의 위기가 있었다. 티칼을 점령한 칼라크물은 융성했지만 반대로 티칼은 10만명까지도 살던 인구가 만명으로 줄어들 정도로 쇠락했다. 티칼의 이 공백기를 두고 고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마야 고전기의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지표로 썼다고. 9세기에 이르러 마야가 멸망하게 되면서 티칼의 인구는 급감하고 도시는 조용해졌다.

국가는 서서히 붕괴해 가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피난을 떠났다. 9세기 후반, 통치자들은 신전과 기념물 등을 세우며 나라를 통제하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티칼은 벌목, 토양 침식, 굶주림 등으로 고통받았고 인구 감소는 예견된 길이었다. 티칼의 중심부는 붕괴되고 난민 유입이 늘어나며 자원은 메말라 갔다. 9세기 말까지 타킬 인구의 대부분은 도시를 떠났고, 티칼의 왕궁은 사람들이 제멋대로 들어와 살았다. 의식용 광장에는 움막이 세워지고, 무단 침입자들은 건물의 출입구를 막고 쓰레기를 버렸다. 

티칼 /unsplash

기념물들을 파손되거나, 새로운 장소로 옮겨졌다. 무덤은 보물 약탈을 위해 파헤쳐지고, 옛 통치자들에 대한 존경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거의 폐허가 된 도시 속 무너져 가는 집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몇이 존재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사람들도 11세기가 되서는 이 도시를 떠났고, 열대우림이 무성히 자라 이 폐허를 집어삼켰다. 학자들은 티칼의 붕괴 원인을 난민 유입으로 인한 인구 과잉과 가뭄으로 인해 실패한 농업이라 봤다. 

티칼은 고대 왕조가 있었던 시간 동안 궁정, 예술, 건축 등 여러 방면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오래된 가뭄으로 인해 사원과 궁전 근처의 저수지들은 녹조로 뒤덮였고, 극소수의 저수지만이 마실 수 있는 물을 제공했다. 미국 신시내티 대학의 여러 학자들로 구성된 공동 연구팀은 티칼 유적지 내에 있는 10개의 저수지의 침전물을 분석한 결과, 궁전과 사찰에서 가장 가까운 두 곳의 중앙 저수지에서 심각한 수준의 독성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오염은 고대 마야인들이 건물 벽화, 그릇 등을 장식하기 위해 썼던 색소에 함유된 수은이 원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수은은 다름아닌 적색 황화수은인 '진사'로, 저수지 바닥에 쌓인 수은은 물 속에서 용해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티칼에 사는 사람들은 매 끼니마다 수은이 들어간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요인은 독소를 생성하는 녹조류였다. 가뭄이 지속되는 동안 녹조류와 수은 때문에 더러워진 물은 자연스럽게 나라의 몰락을 초래했다. 학자들은 이로 인해 티칼이라는 도시가 사람들이 살 수 없는 수준까지 떨어졌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마주보고 있는 제 1신전과 제 2신전 /flickr

19세기 중반, 유럽의 탐험가들이 티칼을 발견한다. 이후 펜실베니아 대학 연구원들은 과테말라 정부의 지원을 받아 많은 구조물들을 일부 복원했다. 지금 관람객들이 보는 티칼의 모습도 이때 대부분 복원한 것들이다. 대부분의 도시 건축물은 석회암으로 지어졌고 70미터가 넘는 사원과 커다란 왕궁, 피라미드와 여러 기념물들을 포함한다.

건설에 사용된 석회암은 현지에서 직접 채굴했고 채취에 의해 움푹 패인 곳은 저수지로 쓰였다. 티칼의 통치자들은 여섯 개의 피라미드를 지었는데 이 피라미드들은 통치자의 무덤을 봉헌한 구조물이었다. 1964년부터 1970년까지 티칼의 건축물을 조사한 고고학자 스탠 로튼은 '티칼의 건축물들은 매우 잘 지어졌고, 열대우림의 공격도 버텼다'고 전했다. 

제 1신전 /unsplash

제 1신전과 제 2신전은 대광장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재규어의 신전이라고도 불리는 제 1신전은 티칼을 다스린 자소우 찬 카이이 왕에게 봉헌된 피라미드이다. 사찰 꼭대기에 있는 거대한 빗 모양의 장식은 원래 왕좌에 앉은 왕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었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1962년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왕의 무덤을 발굴했고, 후기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인간과 동물의 뼈로 만들어진 관과 신과 사람을 정교하게 조각한 조각상, 옥과 조개 껍질로 만든 장식, 음식과 음료가 가득 찬 도자기 등이 발견됐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사원은 세 개의 방이 있고 각 방마다 목재로 만든 서까래 등이 끼워져 있다. 제 2신전은 가면의 신전이라 불리며 다른 주요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의 사원에는 세 개의 방이 있다. 이 곳은 자소우 찬 카이이 왕의 왕비에게 바쳐진 것으로 추정되며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왕비는 티칼에서 남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곳에서 왔다고 하며, 그와 카이이 왕의 결혼으로 정치적 동맹이 이루어졌다고. 꼭대기의 출입구에는 그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조각을 볼 수 있다. 

작업이 진행되는 제 3신전 /flickr

제 3신전은 티칼에 세워진 마지막 피라미드로 정교함을 자랑하지만 지붕이 손상되어 있다. 신전 꼭대기에는 춤추는 사제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보통 신전들이 세 개의 방을 갖고 있는 반면 이 곳은 내부에 방이 두 개밖에 없다. 제 4신전은 티칼에서 가장 높은 피라미드로 광장 바닥에서 빗 장식이 있는 꼭대기까지 약 70미터에 달한다. 자소우 찬 카이이 왕의 아들인 이킨 찬 카이이 왕의 치세를 나타내며 신전 내부에는 티칼의 승리를 기념하는 상형 문자 석판 부조들이 출토되었다.  

제 5신전 /flickr

제 5신전은 중앙 아크로폴리스에 위치한 신전으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통치자를 봉헌한 피라미드다. 이 사원의 높이는 57미터로 제 4신전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꼭대기의 신전에는 하나의 방이 있고 신전 주변에 많은 양의 부장품과 유물들이 발견됐다. '비문의 신전'이라 불리는 제 6신전은 꼭대기 위 빗 장식의 뒷면과 옆면에 수많은 상형 문자들이 새겨져 있어 비문의 신전이라 불린다. 내부의 방이 다른 곳에 비해 넓어 일부 학자들은 이곳이 신전이 아닌 거주용으로 쓰였을 거라 추측한다.  

북부 아크로폴리스 /flickr

티칼에는 피라미드 말고도 여러 건축물이 있었다. 북쪽에 있는 아크로폴리스에는 티칼에서 가장 오래된 여러 건축물들이 있다. 마야 유적지들 중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아크로폴리스의 기본 토대는 신고전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며, 고전기 시대 용도가 궁전에서 무덤으로 바뀐다. 여러 건축물들은 역대 국왕들과 왕족들의 무덤으로 쓰였다. 왕들이 죽을 때마다 새 건축물들이 옛 토대 위에 세워지고, 높이가 100미터에 달하는 피라미드들이 추가되었다. 티칼의 전성기였던 9세기에는 43개의 석비, 30개의 제단이 세워지고 18개의 사원에는 상형 문자와 왕들의 초상화가 새겨졌다.

문도 페르디도 /flickr

문도 페르디도(Mundo Perdido)는 스페인어로 '잊혀진 세계'를 뜻한다. 일곱 개의 사원들은 제례용 건물들 중 가장 오래된 것들이며 여러 번 다시 지어졌다. 멕시코 테오티우아칸의 건축 양식에 영향을 받았고 고전기에는 북부 아크로폴리스와 함께 티칼의 주요 도시 중심지였다. '잊혀진 세계'라는 이름은 펜실베니아 대학의 고고학자들이 이 광장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해 붙였다고 한다.

문도 페르디도 동쪽에는 일곱 사원들의 광장이 있는데, 일곱 개의 소규모 사원들이 열을 지어 서 있어 이름이 붙었다. 광장 아래 석회암 퇴적물에는 많은 양의 유물들이 출품되었고 일곱 사원 중 하나인 '5D-90' 사원 지하에서는 23,000여 점의 도자기 조각들이 발굴되어 도시가 버려지기 전까지 이 곳에서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한다.  

훼손된 건물, 사람들이 살았었을 곳 /flickr

학자들은 마야인들이 적어도 3,000여년 전에 티칼에 처음 도착했다고 추정한다. 시작은 미미했을지 몰라도 이 도시는 마야 문명에서 중요한 경제적, 정치적 입지를 다져 갔다. 추정만 가능한 여러 가지 이유로 티칼은 급속도로 붕괴했고 많은 사람들이 떠난 유적지는 버려졌다. 왕족들이 살던 왕궁과 무덤의 주인들이 잠든 피라미드는 훼손됐다. 1848년 티칼을 발견한 유럽인들은 이 유적지의 사진을 찍고 지도를 그려 발굴을 시도했다. 이후 약 100년이 지나고 나서야 온전한 발굴 작업이 진행됐다.

오늘날 티칼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은 많은 기념물, 왕궁과 사원을 구경할 수 있다.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남아 있는 건축물은 사람들에게 한없는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오늘날의 티칼은 여전히 고고학적 연구와 발굴의 대상이며, 유적지의 20%만이 관람객들이 접근할 수 있다. 지금 티칼의 규모는 전성기의 1/10에 불과하다. 열대우림 속, 치열하게 살았었을 마야인들의 비밀이 티칼에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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