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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백색 도자기를 일본에서 꿈꾸고 이루다, 노리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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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백색 도자기를 일본에서 꿈꾸고 이루다, 노리타케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2.01.05 18: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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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타케 홈커밍 컵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일본의 유명 도자기 노리타케에서 인공 치아에 필요한 치과용 파우더를 생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고급 도자기 제조로 유명한 노리타케에서는 지르코니아 블록과 지르코니아 전용 파우더를 직접 생산하고 있다고 한다. 

인공 치아를 만드는 과정도 보면 도자기를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고 한다. 파우더를 물에 타서 물감으로 만들고, 도자기를 굽듯이 불에 굽고 마지막에 유약을 바르고 형태를 다듬어 하나의 인공 치아를 완성한다. 이렇게 보면 인공 치아 제조 과정도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노리타케는 도자 생산 외에도 여러 산업으로 유명한 곳이다. 노리타케 가든에는 뮤지엄, 숍, 크래프트 센터 등이 있어 관람객들이 도자기 관련 견학을 하며 장인들이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도 볼 수 있고, 직접 참여해 그림을 새기는 경험도 할 수 있다. 도자 기술에 대해 소개를 받을 수도 있으며 가치가 높고 희귀한 '올드 노리타케'도 구경할 수 있다고. 

앞으로 나아가고 멈추지 않는다. 노리타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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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타케 찻잔 /flickr

1854년, 미국과 일본이 가나가와무역조약을 체결했을 때 상인인 이치자몬 모리무라는 일본에서 해외로 금이 대량 반출되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유명한 서양 학자인 후쿠자와 유키치와 대화를 나누며 수출 무역으로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이 외국으로 흘러간 금을 되찾기 위한 해결책이라는 조언을 듣는다. 나라를 위해 해외 무역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그는 1876년 동생인 토요와 함께 '모리무라 구미'를 세운다.

노리타케는 처음 이 공장이 만들어진 아이치현 아아치군 타카바무라 다이지노리타케, 현재의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노리타케라는 지명에서 따 왔다고 한다. 모리무라는 동생 토요를 뉴욕에 파견했고, 토요는 뉴욕 6번가 238번지에서 일본의 골동품과 도자기를 포함한 여러 상품들을 판매하는 가게를 열었다. 이 상품들은 인기가 매우 많아 미국인 고객들이 많이 몰렸다고 한다. 처음에는 토요 혼자 일하다가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했다고. 1881년, 이들은 모리무라 브라더스로 회사 이름을 변경하고 1890년대에 이르러 소매업에서 도매업으로 전환, 도자기와 디자인 작업을 시작한다. 

모리무라 브라더스의 도자기는 해외에서도 인기가 많았는데, 1889년 파리세계무역박람회에서 정교한 유럽 도자기에 매혹된 모리무라는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제품들을 만드는 데 영감을 받는다. 이때부터 그는 유럽의 백색 도자기를 일본에서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곧 도쿄와 교토에 있던 도자기 장식 공장들이 나고야로 통합되었고 그는 일본에서 만드는 유럽식의 단단한 백자를 연구하게 된다. 회사의 구성원들은 1904년 노리타케의 전신이었던 '일본 도기' 주식회사를 설립, 나고야 노리타케에서 새 공장이 속속들이 세워졌다. 

올드 노리타케를 전시해둔 모습 /flickr

이 공장의 첫 목표는 수출용 서양식 식기류를 만드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도자기 제품을 서양 구매자들의 취향에 맞게 만드는 일도 포함되었다. 초기의 노리타케 제품들은 1800년대 말부터 제2차세계대전까지 미국에 수출했던 화병과 도자기 인형, 식기류를 가리킨다. 지금도 수집가들의 인기가 많은 아이템으로 골동품 애호가들에게는 올드 노리타케로 불린다. 1910년대까지의 작품들은 당시 인기 있었던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아 꽃병과 보석상자 등을 만들다 점점 찻잔과 주전자 같은 티포트가 만들어졌다. 

노리타케 세단 /이베이 

그리고 1914년, 노리타케는 유럽의 도자기 회사들과 경쟁하기 위해 창업 10년만에 '세단 Sedan'이라 불리는 최초의 서양식 디너 세트를 만든다. 초기의 식기들은 대부분 장인들이 손으로 직접 칠했고 금띠를 두르는 등의 방식이었다. 이때의 도자기들은 매우 소량으로 제작되어 오늘날 수집가들이 좋아하는 희귀품들 중 하나가 되었다. 대부분의 상품들은 미국과 유럽에 수출했고 일본 내무성 관청, 식당과 가게 등에 판매되었다. 당시의 제품들은 유럽과 미국의 디자인과 일본의 새, 꽃 그림을 합친 제품들이었다. 

1968년부터 사용된 노리타케 'N 재팬' 마크 /flickr

일본 도기 주식회사는 주로 유럽 시장을 목표로 했는데, 이 회사의 초기 제품들은 서양에 수출할 때 원산지를 표기하기 위한 다양한 일본 스탬프를 도자기 뒷면에 찍었다. 이 스탬프는 약 400여개가 넘는다고 전해진다. 1923년 일본 도기 주식회사는 미국에서 들어온 대량 주문을 처리하기 위해 수기로 표를 작성하던 것에서 CTR이 개발한 터뷸레이터 기계를 수입해 간편하게 서류 작업을 하게 되며 모든 일이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의 품질을 유지할 수 없게 된 이들은 3년간 제품에 '로즈 차이나'라는 마크를 썼다. 전쟁으로 원재료 공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어 도자기 품질이 점점 떨어지게 된 것이다. 흰색 표면에는 작은 점들이 생기고 유약의 광택 또한 만족할 수준이 되지 않았다. 이 점을 걱정한 회사 측은 질이 떨어지는 제품이 노리타케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 '로즈 차이나'로 이름을 잠시 바꿨던 것이다. 이 대목만 봐도 노리타케라는 이름에 엄청난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리타케 꽃병 /flickr

1981년, 주식회사 일본 도기는 정식으로 '노리타케 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꾼다. 노리타케의 대량 생산은 19세기 후반부터 시작했지만 정치와 경제 상황에 따라 도자기의 질과 패턴 또한 많이 바뀌었다. 1930년대 일어난 대공황과 제2차세계대전은 노리타케의 생산량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대중적인 마케팅과 글로벌 소비자들의 수요는 노리타케가 꾸준한 인기를 얻는 데 기여했다.

소비자들은 이 도자기를 1920년대부터 '노리타케'라 불렀지만 일본 도기 주식회사는 1981년까지는 공식적으로 '노리타케 주식회사'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회사 측은 처음에 노리타케가 지명 이름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상표명을 등록할 수 없었지만, 일관된 높은 품질과 신뢰성을 인정받아 노리타케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등록할 수 있었다고. 

금띠가 매력적인 노리타케 /flickr

시간이 지나면서 복잡한 디자인보다, 심플한 디자인이 새로운 트렌드로 인정받았다. 제1차세계대전 당시에는 판매되는 식기류가 사치품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물품이 아니었다. 모리무라 형제는 제1차세계대전 이후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읽고 새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대상을 일반 대중으로 바꾼다. 비싸고 장식적인 제품을 만드는 대신 일반 대중들도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식기류를 만드는 데 노력했고, 저렴한 비용으로 질 좋은 도자기를 만들어 시장에 내놓았다. 

노리타케의 무늬는 술잔, 접시 등 여러 식기류에서 볼 수 있다. 쟁반부터 접시, 티포트 등 수집가들에게는 매력적인 제품이다. 수집가들이 모으는 노리타케의 가치는 상태에 따라 나뉘는데 균열이 거의 없고, 표면에 긁힘이 없어야 한다. 또 찍혀 있는 스탬프의 모양은 완전하고 명확해야 하며, 패턴은 색이 바래거나 얼룩지지 않아야 한다고. 이렇듯 인기가 많은 노리타케의 디자인은 숙련된 일본 장인들의 수작업으로 진행된다.

아잘레아 패턴의 노리타케 /이베이
크리스마스 보울 /이베이

현재까지 정확히 몇 개의 패턴이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리타케라 알 수 있는 무늬들이 존재한다. 노리타케의 가장 인기 있는 아잘레아 무늬는 1915-1930년 사이 제작되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흰색 바탕에 분홍색 꽃을 칠하고, 바깥 부분에 금박을 입혔다. 이 무늬는 꽤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널리 수집되고 있다. 패턴 175라 불리는 노리타케 크리스마스 보울은 디자인이 매우 화려했지만 중산층 가정을 위한 저렴한 디자인으로 판매됐다. 흰색 바탕의 꽃무늬와 금색의 화려한 디자인은 풍성한 느낌을 준다.

1904년에 쓰던 가마 /flickr

노리타케 가든은 노리타케에서 운영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공원, 전시관, 노리타케 식기를 살 수 있는 여러 가게와 레스토랑 등이 갖춰져 있다. 창립 100주년을 기념해 만든 곳으로 예전 공장 부지를 정원으로 만든 것이다. 정원에는 옛 가마, 기부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접시들로 장식되어 있는 벽돌담 등을 구경할 수 있다. 노리타케 공예관은 지상 4층짜리 건물로 1층과 2층은 공예관, 3층과 4층은 박물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공예관에서는 회사 제품의 생산 과정을 보여주며, 장인들이 도자 생산 기술을 시연한다. 장인들이 실제 작업 기술을 시연하기 때문에 사진 촬영은 금지이지만 관람객들은 도자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다. 시연이라고 해서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닌 장인들이 실제 판매하는 물건을 만드는 과정을 시연한다고 한다. 사람들은 장인들에게 작업 과정을 묻는 대신 모니터에서 나오는 녹화 영상으로 작업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도자기를 굽던 가마의 굴뚝 /flickr

1층에서는 형태를 만들고 유약 처리를 해 굽는 과정을 보여주고, 2층에서는 무늬를 그리고 표면과 마감 처리를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원하는 관람객들은 요금을 내고 체험 코너에서 성형이 된 접시에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볼 수도 있다. 고객이 그린 작품은 직접 구워 자택까지 배송도 가능하다. 3,4층은 박물관으로 올드 노리타케, 메이지 시대와 다이쇼 시대 노리타케의 디자인을 전시하고 있다. 공예관 맞은편에는 웰컴 센터가 있는데, 노리타케가 현재 생산하는 도자 제품의 종류와 회사의 역사, 현재의 사업 분야 등을 영상으로 전시해 두고 있다. 

'노리타케' 스탬프가 찍힌 제품 /flickr

노리타케는 단순히 도자만 생산하는 것이 아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공 치아를 만드는 파우더 생산 등의 고부가가치 산업도 확장 중이다. 그릇을 장식하는 전사 기법으로 디자인 산업용 데칼 페인트를 만들고, 그릇 밑을 다듬는 기계를 자동차 생산에 접목시킨 그라인더 사업, 자동차와 에너지 산업용 전자 부품 생산에 노리타케의 프린팅과 컬러 믹싱 기술이 쓰이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노리타케의 기술들이 쓰이고 있다. 노리타케는 오늘날 다양한 산업에 자신들의 기술을 제공할 수 있는 다차원적인 사업체로 진화하고 있다. 

의외의 사실은 노리타케의 도자 매출은 약 15%고, 나머지 85%의 매출은 도자기 제조기술과 공정, 소재 등을 응용한 공업기자재, 세라믹, 환경엔지니어링, 전자 등 4개 사업부문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요즘의 친환경 이슈에 대비해 태양전지, 연료전지 등 차세대 에너지 산업에도 기여한다는 입장이다. 노리타케를 처음 만든 이치자몬 모리무라는 '아름답고 섬세한 도자기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노리타케의 정신이라 말한다. 그 열정으로 노리타케는 오늘도 새롭고, 현대적이며, 지속적으로 식기 생산뿐만이 아닌 여러 사업에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2017년 내내 뜨거운 감자였던 전안법은 현실과 다른 불합리함으로 수공예 작가들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 같았습니다. 극적으로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많은 작가들이 한숨 돌릴 수 있게 됐지만 아직 바뀌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핸드메이커는 이러한 불합리에 ‘NO’를 외치기 위해 시작됐습니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은 정말 매력적인 일입니다. 그들은 실을 꿰 엮기도, 펜과 물감 으로 그리기도, 흙을 빚어내기도, 금속을 녹여 두드리기도, 정성스런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하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만들고 있는 세상을 함께 들여다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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