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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인들의 공예 기술과 내세관까지 알 수 있는 상형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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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인들의 공예 기술과 내세관까지 알 수 있는 상형토기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10.13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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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와의 대화 '가야 상형토기' /국립김해박물관 유투브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최근 국립김해박물관 '큐레이터의 대화'에서는 가야의 상형토기를 주제로 하는 강의 영상을 온라인에 공개했다. 국립김해박물관 상설전시실 2층에서 볼 수 있는 상형토기의 종류와 기능, 그에 담긴 의미에 대해 알아보며, 다양한 상형토기 가운데 오리모양토기와 집모양토기를 집중적으로 살폈다. 

상형토기는 인물 또는 특정한 기물의 형상을 본떠 만든 신라·가야시대의 토기로, 흙으로 형상을 본떠 만들었다는 점에서 성격상 토우의 범주에 포함시켜 볼 수 있지만 장식성을 가진 완전히 독립된 형태의 토우와는 다른 특징이 있다. 

토기는 신석기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조리를 하거나, 음식을 담아 먹거나 저장하는 것과 같은 그릇의 용도로 만들어졌다. 뭔가를 담기 위한 용도로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토기의 형태는 대개 안에 내용물을 담을 수 있는 형태로 많이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특이한 형태의 토기도 있는데, 이런 것들을 흔히 '이형토기'라 많이 부른다. 그중에서도 상형토기가 대표적이다. 


가야에서 삼국시대까지 이어진 상형토기
 

 새모양토기 /국립김해박물관

가야 토기는 원삼국시대, 중국의 신석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 초기에 걸쳐 사용된 회색의 토기인 와질 토기에서 발전한 것으로 주로 낙동강 이서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3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추정하며 그 기원은 그릇 모양이나 자연유, 성형법 등으로 보아 한나라의 회유도(규산 물질을 재에 첨가하여 만들어낸 고화도 유약을 바른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한다. 공간적으로 따지자면 가야산 이남의 낙동강 서쪽 지역에서 호남 동부 지역까지 주로 출토되며, 시간적으로는 회청색 경질토기가 출현 시기인 3세기 중엽 이후 562년 대가야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제작된 토기를 가리킨다.

가야는 고구려·백제·신라에 비해 영토 규모가 작았고,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으며 삼국시대 신라와 함께 가장 먼저 경질토기를 생산한 곳이기도 하다. 회청색 경질토기는 분묘 유적에서 주로 출토되어 생활 용기와 더불어 껴묻거리로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여러 소국마다 형태가 다른 다양한 토기를 제작했으며, 가야토기들은 한정된 지역을 넘어 여러 분지와 수계에 걸쳐 분포했다. 

4세기에는 김해 금관가야 양식, 함안 아라가야 양식, 5세기에는 아라가야 양식, 고령 대가야 양식, 고성 소가야 양식으로 분류된다. 이것은 금관가야·아라가야·소가야·대가야라는 나라 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가야토기는 신석기 시대 이래 한반도의 토기 가운데 가장 조형미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같은 시대의 백제토기, 고구려토기의 기종과 형태가 비교적 단순하다는 점과 대비된다. 또한 다양한 기종과 상형토기를 제작한 신라토기, 특히 경주 지역에서 제작된 토기의 경우 약간의 경직된 형태를 띤 점에서 비교가 된다.

여러 모양을 본뜬 상형토기 /함안군

상형토기는 신라·가야시대의 토기로 삼국시대에 주로 유행했지만, 가야 시대 출토된 특별한 상형 토기들이 몇몇 있다. 상형토기들은 일관된 하나의 성격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실용용, 장식용, 부장용 등 제작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쉽다.

상형토기는 일반적인 그릇의 형태라기보다는 무언가를 본떠 만든 형태의 토기라 할 수 있으며 주로 본뜬 건 사람이나 동물이 있다. 동물 중에서도 새, 말, 오리, 거북이, 사슴, 멧돼지 등 당시 사람들이 살면서 보던 동물이나 이들이 살던 주변에 존재했던 시설이나 도구를 본뜬 토기들도 있는데 주로 집, 배, 수레, 짚신 같은 것들이 있다. 또 하나만 본뜬 것이 아닌 복합적으로 여러 가지가 있는 경우가 많다. 

말모양토기 /복천박물관

상형토기 중 인물형토기는 단독으로의 인물이 아니라 말을 타거나 배를 젓는 등 어떤 동작이나 행위를 나타내는 형태로 만들어진다. 가장 대표적인 기마인물형토기를 예로 들 수 있다. 기마인물형토기는 창을 든 사람이 갑옷을 입고 말 위에 올라가 있으며 말도 갑옷을 입고 있다. 즉 사람과 말, 갑옷이라고 하는 도구까지 같이 본뜬 상태로 출토되었다.

흙으로 빚은 여인상 /국립중앙박물관

이런 다양한 형태의 상형토기들은 용기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용기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 것들도 많다. 우리나라의 상형토기로 가장 이른 시기의 것들은 주로 신석기 시대로 확인할 수 있는데, 한국의 비너스라고 알려진 울산 신암리에서 출토된 '흙으로 빚은 여인상'이나 부산 동삼동에서 출토된 배모양토기, 사람얼굴모양토기와 같은 것들을 들 수가 있다. 

오리모양토기 /국립김해박물관

오리모양토기, 새모양토기라 부르는 이러한 토기들은 주로 삼국시대에 많이 만들어졌으며 주로 3세기 무렵 경주, 울산 지역, 영남 지방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 형태의 토기들이다. 형상이 닭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 닭토기모양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고, 주둥이 같은 부분이 오리를 닮았다고 해 오리모양토기라고도 부른다. 또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동물이 아닌 상상 속 새의 모습을 본뜬 것이라 해서 봉황무늬토기라 부르는 의견도 있다. 

오리 모양 토기 /창원시

오리모양토기는 대개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형태적 특징을 보면 일반적인 몸통 부분이 비워져 있고 거기에 목과 머리가 표현이 되어 있다. 비워진 몸통 등 부분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꼬리 부분에도 구멍이 뚫려 있다. 등 부분으로 액체 같은 것들을 넣을 수 있도록 한 구멍이고 꼬리 쪽 부분은 뭔가를 따르는 구멍으로 추측한다.

아마도 오늘날 사용하는 그릇의 용도와 비교한다면 주전자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러한 상형토기는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기보다는 의례를 위한 특수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죽은 사람의 안식과 영혼의 승천과 같이 사후 세계에 대한 상징적 기원을 표현한 것으로 주로 장례와 같은 의례에서 술이나 물을 담아 따르는 데 사용된 후 매장되었다.

오리모양토기, 새모양토기는 주로 무덤에 많이 부장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오리 또는 새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이 지역 사람들의 풍습에 대해 기록한 중국 역사책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새의 깃털과 함께 묻는다는 내용이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이 때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새가 저승으로 인도하는 매개자라 인식한 것이다. 실제로 고대인들은 새가 죽인 이의 영혼을 하늘로 인도하거나 봄에는 곡식의 씨앗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다. 

새모양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새모양토기, 오리모양토기를 본떠서 무당에 부장한 이유도 죽은 사람이 저승으로 잘 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아 부장했던 것으로 학자들은 예상하고 있다. 가야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중에는 새 모양을 본뜬 문양들이 굉장히 많이 보이는데, 이 또한 당시 사람들이 새에 대해 가졌던 생각들이 담긴 것이다. 한편으로는 물과 관계된 어떤 의식, 예컨대 기우 등의 의례 행사와의 관련도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유물 중에는 토기나 금속제의 그릇 뚜껑에 새를 손잡이로 표현한 것이 있고, 무령왕릉의 베개에 두 마리의 새가 얹혀 있는 것도 모두 비슷한 성격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오리모양토기는 원삼국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한 특수 용기로써 사람들 속에 퍼져 있던 새에 대한 신앙이 표현된 유물이다. 특히 오리는 인간이 넘나들 수 없는 물을 건너 땅과 하늘의 세계를 오갈 수 있기 때문에 신성한 동물로 여기며 영혼의 전달자 상징도 될 수 있었다. 시기에 따라 제작 방식과 세부 표현은 변화하고 있지만 오리모양토기가 갖는 상징적인 이미지와 의례용으로 사용되었던 기능적인 측면은 시기가 달라져도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다. 

배모양토기 /문화재청

4세기 말~5세기 초, 상형토기는 크게 변화한다. 그 이전에는 새모양토기가 주로 출토되었지만 이 시기 상형토기가 굉장히 다양해지고 출토량도 많아지면서 본뜬 형태도 다양해진다. 그 이전에는 새를 제외해도 운반과 관련된 것으로서 배모양토기, 수레, 짚신을 본뜬 토기가 있고 수레바퀴모양토기 등 풍요와 안녕과 관련해 집 같은 것들을 본뜬 토기가 만들어졌다. 동물도 새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물들, 이를테면 말이라든지 돼지, 거북이 등 주변에 있는 다양한 동물들을 본떴다. 사람들이 이런 본뜬 대상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여러 사물들을 본떠 토기를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김해 봉황동의 집모양토기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창원 석동의 집모양토기 /국립김해박물관

가야의 집모양토기는 부장용, 특히 장의예식에 쓰였던 것으로 짐작하며 이 유물들을 통해 당시의 가옥형태를 알아볼 수 있다. 대부분 두 가지 형태가 출토로 확인이 되고 있다.  하나는 움집의 형태인 집모양토기(김해 봉황동), 다른 하나는 고상가옥의 형태인 집모양토기(창원 석동)다.

움집의 형태인 집모양토기의 경우에는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출토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중국 문헌 기록에 나오는 것처럼 무덤과 같이 지붕이 생긴 형태를 들 수 있다. 

창원 석동의 집모양토기 /문화재청

창원 석동에서 발견된 집모양토기는 앞쪽 벽면 출입구 근처에 두 개의 구멍이 있는데, 지붕의 경우에는 굴뚝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오리모양토기와 마찬가지로 주입구와 주출구가 있다. 지붕 위쪽에는 액체를 따르고 출입구 위쪽에 뚫린 구멍을 통해 다른 그릇에 담는 주전자와 같은 기능을 가진 토기로 보인다.

창원 다호리에서 발견된 집모양토기 /국립김해박물관

집모양토기가 출토된 다른 유적의 경우 2019년에 출토된 함안 말이산 45호에서 2점의 토기가 출토되었고,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도 봉분 가장자리를 따라 만들어진 도랑에서 깨진 집 모양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대개 이런 집모양토기들은 출입문이 밖에서 잠그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사람이 살던 집이었다면 안에서 잠금장치가 있어야 하는데 바깥에서 잠그는 장치가 있다는 게 조금 특이하다.

말이산 45호분에서 나온 상형토기들 /두류문화연구원

고상가옥 형태로 기둥을 세우고 만들어진 집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살던 집이 아니라 곡식과 같은 중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창고 건물을 본뜬 것일 수도 있다는 게 학자들의 의견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기둥을 세우고 집을 만들었냐고 하면, 그 당시 가장 중요했던 보관 물품이 곡식이었고 곡식을 보관하는 데 있어서 가장 피해를 많이 주는 것은 습기와 쥐 같은 유해 동물이었다. 

그래서 기둥을 세우고 지면과 띄워 만들면 습기로부터 곡식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기둥에 조그마한 시설을 추가하면 쥐들이 함부로 창고 안에 들어올 수 없게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고상가옥은 당시 살던 사람들의 집의 형태가 아닌 곡식을 보관하던 창고라 추정하는 것도 이 이유다. 죽은 이의 장의 절차에 저 세상에서의 평안과 함께 곡식이 담긴 창고 건물을 부장해 저 세상에서의 풍요를 빌어준 것으로 보인다.

함안 말이산 고분 사슴모양뿔잔 상형토기 /문화재청

작년, 문화재청은 함안 말이산 45호분 상형토기 일괄을 포함해 가야문화권 유물 6건에 대한 보물 지정조사를 진행할 것이라 밝혔다. 함안 말이산 45호분 상형토기는 집모양 토기, 배모양 토기, 등잔모양 토기, 사슴모양 뿔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에 조사된 45호분은 출토 유물과 유구 현황으로 볼 때 축조 시기가 4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아라가야 고총 고분의 등장 시점으로 볼 수 있다.

함안 말이산 상형토기를 두고 두류문화연구원 측은 "가야 집모양토기나 배모양토기는 도굴품이나 개인 소장품이 많다”며, “이번에 찾은 상형토기는 출토지가 명확하고 아라가야 사람들의 건축·조선기술을 알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이뿐만 아니라 가야의 상형토기들은 각종 껴묻거리와 함께 출토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통해 장송의례, 즉 조상들의 죽은 자를 위로하는 의식들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고 예술공예품으로서의 상징성 등을 유추할 수 있다. 무엇보다 상형토기를 통해서 당시 사람들의 정신 세계와 내세관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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