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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 이집트로 이어진 화풍, 파이윰 미라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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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 이집트로 이어진 화풍, 파이윰 미라 초상화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9.30 1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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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한 이집트 소년의 얼굴 /PLOS ONE 논문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2020년, 2천여년 전 죽었던 고대 이집트 소년의 얼굴이 현대 기술로 복원된 적이 있다. 라이브사이언스(LiveScience) 등 현지 언론은 독일의 뮌헨-보겐하우젠 아카데미 클리닉 병리학 연구소 연구팀이 CT 스캐너를 사용해 기원전 50년에서 서기 100년 사이 3∼4세의 어린 나이에 폐렴으로 사망한 소년의 얼굴을 3D로 복원했다고 알렸다.

이 작업은 1880년대 이집트 파이윰 지역의 하와라 피라미드 인근 공동묘지에서 발견된 미라와 '파이윰 미라 초상화'를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소년의 미라 초상화는 머리에서 귀까지 이마 가장자리를 따라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땋았고 큰 갈색 눈에 길고 가는 코, 작은 입의 얼굴로 그려졌다. 

연구팀은 복원된 3D 이미지와 초상화를 비교했을 때, 소년의 이마에서 눈까지의 치수와 코와 입 사이 거리가 정확히 일치하며 콧구멍 너비와 입 크기는 초상화에서 더 좁게 그려졌다고 결론을 내렸다. 


영생을 믿었던 사람들의 바람, 파이윰 미라 초상화
 

파이윰 미라 초상화 /flickr

이집트 콥트기 당시, 미라 앞에 놓인 나무판에 자연주의 화풍으로 그려진 초상을 '파이윰 미라 초상화'라 부른다. 이 초상화는 이집트 전역에서 발견되며, 1887년 처음 발견된 뒤 지금까지 1천 개 이상이 발굴되었다. 파이윰이란 말의 유래는 하와라 및 안티노폴리스 등 파이윰 지역에서 많이 발견되었다고 하여 그렇게 불린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지리적 특징을 뜻하기보다는 초상화 표현 양식을 나타낸다.

파이윰 미라 초상화는 로마가 지배하던 이집트 콥트기 시절 만들어진 것이다. 오랫동안 학자들에게는 호기심과 경외의 대상이었지만, 정작 알려진 정보들이 너무 없었다. 고고학자들에 의해 처음 이 초상화가 밝혀진 이후 의문점들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누가 그린 것인지,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어떤 색과 팔레트를 쓴 건지, 재료는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등등. 또는 이 그림은 모델이 살아 있었을 때 보고 그린 것인지, 죽은 후에 그를 기리기 위해 그린 것인지도 모를 정도로 의문이 많다. 

윌리엄 피트리 /flickr

1887년, 영국의 고고학자 윌리엄 피트리는 기원전 3천년 전의 무덤을 찾기 위해 이집트 하와라 근처에 있는 피라미드 발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그는 로마 시대의 공동묘지를 발견했는데, 아주 잠깐 실망했던 그는 곧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가, 흥분으로 바뀐다. 무덤에서 발견된 한 미라에서 그의 팀은 초상화 하나를 발견했고 발굴 과정 동안 피트리는 약 60개의 비슷한 판을 발견한다.

사실 피트리가 이집트의 미라 초상화를 발견한 최초의 사람은 아니었고, 이탈리아 여행가 피에트로 델라 발레는 오늘날 이집트 나일강 연안에 있는 고분 마을인 사카라를 지날 때 실물처럼 생긴 미라 관련 예술 작품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파이윰 미라 초상화를 학문적 연구에 접목해 이집트, 그리스, 로마의 양식과 관습을 연구한 사람은 피트리가 최초였다. 피트리의 연구 결과는 미라 초상화에 대한 체계적 발굴 및 성과가 발표된 유일한 예이며, 현대 기준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지만 미라 초상화에 대한 가장 중요한 원천으로 남아 있다.

이집트 전역 유적지에서 발견된 많은 이 그림들은 파이윰 분지, 그 중에서도 하와라, 아크밈, 안티노폴리스 부근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당시 익명의 미술가들에 의해 그려진 매우 사실적인 모습의, 대부분 상반신이 나온 초상화다. 발견할 때에는 건조한 환경 덕분에 꽤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색깔조차 광택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고. 

고대부터 살아남았고 어쩌면 유일한, 그리스와 로마 미술의 중요한 유산 중 하나며 무덤에서 발견되는 그림이나 벽화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가치가 높다. 파이윰 미라 촹화는 세계 최고의 미술관들, 특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게티 박물관,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 노턴 사이먼 미술관 등에서 볼 수 있다. 판넬 페인팅, 즉 초상화는 고전 시대 꽤 존경받는 예술이었기 때문에 또한 매우 가치있는 작품으로 여겨졌다. 상위 1-2% 사람들만이 그들의 초상화를 그릴 여유가 있었다. 

미라 초상화 /flickr

거의 모든 패널은 한 사람이 정면에서 보는 머리와 어깨까지 나온 상반신을 묘사한 그림으로 채워져 있다. 모델은 남녀노소 누구든 다 포함이었다. 처음 보는 미라 초상화에는 실제 개인의 모습을 묘사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여러 가지 특징이 반복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그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초상화에서는 사실 얼굴의 타원형, 입과 코의 위치, 심지어 자세까지 동일한 기본적인 구조가 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이 모델들을 구별하는 것은 눈썹, 눈, 머리카락, 액세서리 등이다. 즉 대부분의 초상화는 기본적인 헤어스타일, 턱수염을 갖고 있는 소수의 모습들을 기본 틀로 놓고 다양하게 그린 모습이다. 

여성의 모습과 같이 발견된 목걸이 /flickr

그림에 그려진 인물을 구별하는 건 학자들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몇몇 초상화에는 '교사, 헤르미오네' 처럼 이미지 자체에 죽은 사람의 이름과 직업을 쓴 그리스어가 씌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이름도 없다. 다만 그려진 모습에서 초상화의 모델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군인이나 운동 선수들은 보통 허리띠를 맨 체 어깨가 드러나 있고, 여성들은 화려한 장신구와 정교한 헤어스타일로 묘사된다. 어린이의 모습은 어린 시절 로마의 상징이기도 했던 금목걸이를 한 채로 등장한다. 

금잎으로 된 면류관을 쓴 모습을 그린 초상화 /flickr

문화적 다양성 또한 알 수 있다. 어떤 초상화의 주인공은 그리스-이집트의 남신 세라피스를 상징하는 일곱 개의 뾰족한 별로 만들어진 관을 쓰고 있고 또 어떤 초상화는 마케도니아, 로마 왕족의 상징인 황금잎으로 된 면류관을 쓰고 있다. 이것은 파이윰 지역의 다양한 인구, 다양한 문화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정보를 학자들에게 제공한다. 대개 인물의 의상, 헤어스타일과 액세서리가 당시의 패션을 반영하는 것처럼 말이다.

초상화가 처음 그려진 때는 파이윰 인구의 1/3이 그리스인들이었다고 한다. 처음 파이윰 미라 초상화의 스타일, 또 주제들은 그리스인들이 직접 정해 그렸을 것이다. 그러나 250여년 경 이 스타일이 조금씩 쇠퇴할 때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여성들과 결혼하고, 이집트의 종교적 관습을 따르면서 그리스인이라는 의식에서 벗어나던 때였다. 그림 기법은 그리스식이었지만,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썼던 건 이집트였다.

미라와 초상화를 두었던 모습의 재현 /flickr

그렇다면 왜 이런 초상화를 만들었을까, 나무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고대에도 존재했다. 이집트에서는 미라의 영원한 안식처, 죽은 사람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도록 설계된 환경에 의해 이 초상화들이 살아남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 초상화 판을 미라의 얼굴 위에 놓고, 미라를 제자리에 고정시켰다. 이것은 사후 세계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믿음 그 자체였다.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었어도 사후에 부활해 영원히 살 것이라고 믿었다. 항상 주변 환경을 관찰해 왔던 이들은 점점 이런 생각이 굳건해지게 된다. 해가 밤에 지고 다시 아침에 뜨는 걸 보며 비록 졌어도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했다. 이집트인들은 이집트 자체가 신성하고 축복을 받은 곳이라 믿었다.

끊임없이 모든 게 죽고 다시 살아나는 땅에 죽은 사람들을 매장하는 건 죽은 사람도 영원한 부활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닌 과도기였다. 즉 끝이 아닌 잠시 쉬어가는 것이며, 자는 동안에도 살아 있으며 자고 나면 다시 그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다. 

미라 초상화 /flickr

이집트는 그리스와 로마 세계의 일부였기도 했다. 전통적인 가면보다는, 영생을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소망이 초상화로 발현되었다. 화가들은 마치 실물과도 같은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엔코스틱, 또는 템페라 페인트를 썼다. 세밀한 음영, 색상, 붓놀림으로 그림의 모델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파이윰 미라 초상화는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향한 일종의 바람이었다. 이집트인들은 파이윰 미라 초상화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으며, 이들이 다시 살아나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초상화가 영혼이 돌아올 수 있는 매개체로 작용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영혼은 페인트와 나무로 만들어진 이 초상화를 자신의 몸으로 대신 삼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LA에 있는 게티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6점의 파이윰 미라 초상화는 기원후 2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림들은 원래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가린 채, 미라에 붙어 있었다. 마리 스보보다 박사는 초상화를 두고 그리스-로마와 고전 세계의 장례 의식, 예술 전통의 융합을 보여주는 최초의 그림이라 평가한다. 또한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점들이 이 당시의 무역, 경제, 사회 구조와 관련해 초기 이집트 문화를 알 수 있을 열쇠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

게티 박물관 소장, 수염난 남자 모습의 초상화 /Wikimedia Commons

또한 초상화가 그려진 판의 75%가 이집트가 원산지가 아닌 피나무 위에 그려졌다는 것을 알아낸다. 아마 이 미라 초상화를 그린 화가들은 나무판 재료를 북유럽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작품에서 확인한 붉은 색소는 스페인 남부에서 온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것은 이집트가 이때부터 광범위하게 무역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림에 자주 보이는 인디고는 파란 색소가 대량으로 생산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며, 일부 학자들은 염료에 작은 섬유가 함유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안료를 섬유에서 재활용해 얻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엔코스틱 페인팅으로 그려진 초상화 /flickr

초상화들 전반에 걸쳐 여러 자료를 분석한 결과 두 가지 종류의 초상화를 발견했는데, 엔코스틱과 템페라 두 가지다. 금박이나 엔코스틱 페인팅에 쓰는 재료는 비싸기 때문에 유명하고 뛰어난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썼을 것이고, 자연히 이들은 부유층을 묘사하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은 밀랍에 색소를 섞고 여러 층을 쌓아 그리면서 초상화를 만들었다. 이 방법은 그리스에서 유래하고 알렉산더의 정복 전쟁 당시 이집트에 소개되었다. 서로 다른 색상을 겹쳐 그리면 미묘한 색조가 만들어지며, 이미지 자체의 강도나 깊이에 여러 효과를 줄 수 있다.

템페라로 작업한 초상화 /flickr

반면에 저렴한 템페라 페인트는 상대적으로 재료가 별로 없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을 터다. 재료가 풍족하지 않은 예술가들은 달걀, 색소, 물의 혼합인 템페라 페인트를 사용했다. 템페라 페인팅으로 완성한 초상화는 대개 무광택으로 마감된다.

즉 미라 초상화가 그려졌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이 꽤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역 목재, 재활용 목재에 그림을 그린 것들도 존재하며 우리가 모르는 더 저렴한 재료를 사용해 그림을 그렸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 사회적 지위에도 분명한 범위가 존재했을 거라고 스보보다 박사는 지적한다. 

미라 초상화 /flickr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그림의 모델이 과연 살아 있을 때 그려진 것인지, 죽고 나서 그려진 것인지이다. 대부분의 그림은 20대에서 40대까지의 젊은 층을 묘사하고 있다. 크면서도 어딘가 과장된 눈은 죽은 사람보다는 살아 있는 사람의 생경함을 포착하려는 예술가들의 노력이라 추측한다.

미라의 내부를 연구하기 위한 CT 스캐너 결과 고인의 나이가 대부분 해당 초상화의 모습과 일치한다는 것이 밝혀지며, 스보보다 박사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른 나이에 죽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당시 사람들은 전염병이나 출산 등의 문제로 수명이 짧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1세는 제국 전역에 걸쳐 기독교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미라화를 억제했다. 수천 년 동안 이집트 문화의 일부는 홀연히 사라졌음에도, 파이윰 미라 초상화는 미라와 함께 지하에서 꿋꿋이 살아남았다. 파이윰 미라 초상화는 초기 기독교 미술뿐만 아니라 비잔틴 시대, 중세 유럽의 후기 미술품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이집트 문화에 조금 더 가까이 가는 길, 파이윰 미라 초상화
 

소년의 모습을 그린 미라 초상화 /flickr

파이윰 미라 초상화가 발견되었을 때, 생생한 보존에 모두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많은 정보들을 추론할 수 있지만, 아직 작품의 용도나 제작 관련 의문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알 수 있는 정보가 더 많아진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집트에 대한 역사를 훨씬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상류층들이 의뢰해, 그 사람의 생애 동안 그려졌으며, 대상이 세상을 떠나면서 같이 묻히게 된 초상화가 세상의 빛을 본 지는 그다지 오래 된 것도 아니다. 

역사가 깊든 짧든, 파이윰 미라 초상화는 인류가 이룩한 예술 문화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을 오늘도 현대의 학자들은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미술사적으로도 아주 큰 중요성을 가진다. 이집트 문화와 파이윰에 살던 소수의 그리스 상류층 문화가 만나 영생을 기원하는 초상화를 만들어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데 아직, 파이윰 미라 초상화에는 이집트 문화를 알 수 있는 비밀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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