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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생은 사랑과 모험으로 가득해, 토베 얀손과 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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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인생은 사랑과 모험으로 가득해, 토베 얀손과 무민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9.27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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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우리가 흔히 아는 미키마우스나, 헬로키티처럼 하얀 하마 캐릭터인 무민 또한 국내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열고 다양한 브랜드와 콜라보를 가졌다. 2020년 11월 열린 무민 75주년 특별 원화전은 2021년 9월 22일 전시 종료 전까지 오랜 기간 동안 그라운드시소 성수에서 팬들과 만났다. 최근에는 수많은 동화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무민을 만든 작가의 영화가 개봉했다. 

'토베 얀손' 포스터 /㈜영화사 진진 

이번에 개봉한 '토베 얀손'은 핀란드 작가 토베 얀손을 다룬 첫번째 전기 영화로, 지난 1일 폐막한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으로 먼저 선보였다. 이 영화는 서른 살의 얀손이 무명 화가였던 1944년부터 약 14년간의 삶을 그렸다. 영화에서는 그의 흔한 성공 이력이 아닌, 그의 굴곡진 인생 속 나는 사람 냄새에 주목한다. 예술을 대하는 그의 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랑하며 다치고 좌절하고 깨지는 감정의 파편들을 볼 수 있다. 


벽에 그린 제일 못생긴 트롤, 무민이 되다
 

토베 얀손 /flickr

무민을 이야기할 때 토베 얀손을 빠뜨릴 수가 없다. 무민이란 캐릭터는 그의 인생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특이하게도 토베 얀손은 핀란드 헬싱키에서 살았지만 무민 이야기는 스웨덴어로 쓰였다고 한다. 그는 사는 동안 총 9권의 소설, 그림책에 무민 글을 쓰고 삽화를 그렸다. 그의 첫 무민 소설은 거의 단편 소설에 가까웠다. 그는 누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역대 최고의 핀란드 예술가들 중 한 명이며, 해외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하나다. 그의 인생에서 무민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은 단순히 성공했다는 것만으로도는 표현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Convolvulus /Moomin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가, 얀손의 아버지는 핀란드계 스웨덴인 빅토르 얀손이고 어머니는 시그네 얀손으로 이 둘은 파리에서 공부하는 동안 만나 1913년에 결혼하게 된다. 빅토르는 조각가로서의 경력을 쌓고 있었고, 그가 가장 좋아했던 주제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조각이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공공 조각품 중 하나는 핀란드 헬싱키에 있는 'Convolvulus'라는 이름의 조각이며, 모델은 다름아닌 토베 얀손이다.

얀손의 어머니인 시그네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으며, 핀란드 은행 의뢰로 지폐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또 1929년부터 1926년까지 핀란드의 우표들을 디자인했다. 시그네가 일하는 동안 어린 얀손은 옆에 앉아 자신의 그림을 그리곤 했다. 부모님뿐만 아니라 얀손의 형제들도 모두 예술가로 일했다. 이들은 많은 프로젝트를 공유했으며 뻬르와 라스는 무민 만화와 다큐멘터리 등을 만들었다. 얀손에게 있어 그가 살던 집, 그의 가족은 그의 경력에 큰 영향을 준다. 

이들은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서로를 믿고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예술과 일상의 타협이라는 경계에서 항상 고민해야 했던 예술가들로 가득찬 이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족들의 모습은 얀손의 철학에도 영감을 주었다. 얀손은 어렸을 때 친척집에서 자주 시간을 보냈는데, 무민밸리와 무민하우스의 토대가 된 여름 별장이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 초, 얀손과 그의 파트너 뚤리끼 삐에띨라는 'Klovharun'이라는 이름의 섬을 발견하고, 별장을 짓고 30년이 넘게 별장에서 매년 여름을 보냈다. 얀손에게 섬은 자유나 다름없었다.  

작업중인 토베 얀손 /flickr

그는 학교 공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예술 쪽으로 학업을 쌓았다. 23살 때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났고, 그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는 예술에 대한 그의 열의가 담겨 있었다. 세라믹 장식, 채색과 소묘 등 응용미술 공부를 시작으로 소묘 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도 그는 다양한 나라에서 생활했다.

1970년대 토베와 그의 파트너 뚤리끼 삐에띨라는 작품과 여가 활동을 위해 전 세계를 8개월 동안 여행하기도 했다. 이 여행은 무민 가족을 사랑하는 전 세계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도서를 집필하며 동시에 스트레스를 잊기 위한 휴식이었다. 여행은 토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였다. 여행을 통해 그녀는 예술적 영향 외에도 평화롭고 즐겁게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봤다.

첫 스튜디오는 1944년 헬싱키의 울란린나에 있는 작은 작업실이었다. 아파트의 상태는 상당히 좋지 않았지만 얀손은 이 집이 갖고 있는 잠재력에 반했다고 한다. 몇 년간의 수리와 청소를 거쳐 작업실을 만들었고, 그는 수십년간 그곳에서 살며 그에게 있어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을 만들었다. 첫 번째 무민 이야기도 이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졌다. 무민 외에도 그는 12개의 소설과 단편집을 썼다. 

얀손은 일반 산문, 동화, 모험담, 판타지, 회고록, 그리고 심지어 대화 방식의 작품 등 서로 다른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쓴 작가로써도 인정받았다. 그는 또한 시각예술가로서의 재능도 갖고 있었는데, 그래픽뿐만 아니라 공공 사업과 장식용 그림들도 그렸다. 헬싱키 시청의 유화, 헬싱키에 있는 오로라 어린이 병원의 벽화, 학교와 유치원에 있는 벽화들 모두 그의 주요 공공 작품들이다. 

토브 얀손과 그의 무민 가족들 /Moomin

무민, 무민트롤은 어린 시절 어느 여름날 얀손이 별장에서 뻬르 얀손과 문학과 철학에 대해 토론할 때 우연히 태어난 것이다. 뻬르가 한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자 얀손은 그 말을 반박하고 싶었지만 딱히 방법이 없어 대신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 못생긴 생물을 벽에 그렸다.

얀손은 반박할 인용구 대신 이 그림을 그렸고, 이것이 무민트롤의 첫 디자인이었다. 당시 얀손은 이것을 '스노크 Snork'라 불렀다. 이후 이 디자인은 다른 캐릭터들과 함께 가족을 이루게 된다. 무민마마, 무민파파, 유목민 스너프킨, 스노크 등등을 만들어낸 얀손은 '난 누군가를 철학적으로 가르치길 바라지 않았다. 사람들은 주로 내 이야기를 재미있어했으니까'라고 전했다.

그가 무민 가족을 만들었던 당시는 제2차세계대전이 벌어진 후였다. 뻬르는 이 전쟁이 자신과 얀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다. 현실에선 총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반면, 삽화 속 무민 가족은 평화로운 무민 발리에서 살며 종종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여행을 떠난다. 얀손은 친구에게 '폭격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으며, 이 우울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때 이 캐릭터를 만들었다. 나는 모든 게 평화롭고, 뭐든 할 수 있었던 세계로 슬그머니 들어갔다'란 말을 했다고 한다. 

무민과 대홍수 /finnishdesignshop

그러나 그는 일종의 도피라 부를 수 있는 쾌락의 가치에 의심이 들었고, 몇 년간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전쟁 중에는 작업을 하지 않았고,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 무의미하게 느꼈다고 전한다. 그러다 1945년, 그는 친구의 권유로 첫 책을 하나 낸다. 1945년 출판된 첫번째 책인 '무민과 대홍수'는 무민마마와 그의 아들인 무민트롤이 배고프고 추운 환경 속을 헤매면서 실종된 무민파파를 어떻게 발견했는지, 어떻게 무민 발리로 가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1946년, 두번째 책인 'Comet in Moominland' 또한 이전과 같은 불안한 삶 속에서 쓰여졌다. 작가의 시간이 불안과 우울의 연속이라면 책 속의 무민 가족은 친구들과 함께 언제나 안전하게 무민 밸리로 돌아오는, 항상 행복한 결말로 끝났다. 실제로 이브닝 뉴스에서 연재를 했을 때에도 신문은 이 연재 만화가 행복한 결말을 맺어야 하고, 작중 등장인물이 사망하지 않아야 하며 정치, 섹스, 죽음, 왕실 등 민감한 주제는 피해야 한다고 규정했다고. 

'무민과 대홍수' 이후 10년만에 그는 런던 이브닝 뉴스로부터 일일 연재를 의뢰받는다. 얀손은 정규직이라는 게 자신 인생에 있어 처음이라며 뿌듯해했다고. 무민의 이야기는 전세계 100개 이상의 신문에서 인쇄되었고 여러 나라에서는 무민을 대상으로 한 TV쇼와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무민 관련 프로젝트 요청이 쇄도했고, 무슨 생각인지 월트 디즈니는 '무민'이란 단어에 대한 사용 독점권을 요구했지만 당연히 얀손은 거절한다. 

조금은 무서워 보이는 무민 /flickr
무민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 /flickr

얀손은 아이들로부터 수천 통의 팬레터를 받았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편지에 답장을 했다고 전해진다. 무민의 인기에 대해 루스라는 아이가 보낸 팬레터에는 캐릭터가 인기가 있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이 들어 있었다고. 그는 답장에 이렇게 썼다. 책과, 약간의 친밀감과 유머라는 게 그의 대답이다. 특별하다면 할 수 있겠지만, 그는 전쟁 전후 예술가들처럼 프로이트의 무의식, 허무주의 등에 영감을 받은 어떤 운동에도 이끌리지 않았다. 그는 초현실주의에 대해서도 '상당히 유혹적인 것이지만, 마치 한 시즌밖에 입을 수 없는 특별한 옷들처럼 보인다. 즉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대신 그는 우리와 같은 문제를 가진 캐릭터 무민을 만들었다고 답장에 쓴다. 그래서 무민은 마냥 귀엽지도 않고, 이상한 친숙함을 느끼게 한다. 대개 무민이 하는 모험은 책, 애니메이션의 형태로 무민 가족이 갖고 있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의 가치는 단순하다. 사랑, 가족, 우정, 관용, 존경 등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삶에 대한 그들만의 관점이 있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의미가 있을 수 있는 이유다.

얀손에게는 꽤 친한 사람이 있었다. 러시아계 유대인인 사진작가 에바 코니코프와 얀손은 20대일 때 만나, 코니코프가 1941년 미국으로 도피할 때까지 만났고, 서로 편지를 썼다. 얀손의 편지는 그가 20대 중후반이었던 전쟁 기간 동안 코니코프와 여러 감정적인 교류를 나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여기 누워 천 개의 실크 페티코트처럼 살랑거리는 자작나무를 창밖에서 바라보고 있다. 바다는 녹청색이고, 비가 내렸다." "공중에 떠 있는 덩어리와 화염병이 남긴 포탄....비행기는 하늘에서 죽음이 드리워진 검은 십자가처럼 매일 우리의 머리 위에서 표효한다"

토베 얀손과 비비카 반들러 /Moomin

1946년, 라스는 무민 시리즈의 연극을 감독했던 핀란드의 연극 감독 비비카 반들러에게 얀손을 소개한다. 얀손은 당시 비비카를 두고 '한쪽 눈은 실명했지만 다른 쪽 눈은 맑고, 정직했다'라 묘사한다. 당시 얀손에게는 남자친구가 있었고, 비비카는 결혼한 상태였지만 이 둘은 서로에게 이끌려 만나기 시작한다. 얀손은 이때를 회상하며 처음으로 여자와의 사랑을 경험했다고 전한다.

당시 핀란드에서는 동성애가 불법이었고, 심지어 정신질환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얀손은 자신의 연애를 주변에 쉽게 공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얀손은 창의적이면서, 개방적이면서도 대담했다. 얀손은 세 번째 무민 작품에 자신과 연인의 모습을 넣었다. '핀 패밀리 무민트롤 Finn Family Moomintroll'의 팅구미와 밥이 그것이다. 그는 비비카를 헬싱키 시청 벽화 중 하나에도 그렸는데, 자신의 연애를 밝히는 대신 작품에 넣어 사람들에게 전시하는 식으로 알렸다.

얀손은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알고 처음에야 깜짝 놀랐지만, 친구들에게 곧 솔직하게 말한다. 사랑 속에서 자신이 여자임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드디어 알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는 편지에서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은 한 여자와 미친듯한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에겐 이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만족스럽다. 전혀 문제될 것도 없다. 난 그저 자랑스럽고, 걷잡을 수 없이 기쁘다. 지난 몇 주간 일어난 일은 나에게 모험이자 강렬한 춤 그 자체였다. 매우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고 새로운 영역을 향한 탐험이다" 라 썼다. 

토베 얀손에게 무민은 마냥 좋은 기억만은 아니었던 적도 있다 /flickr

안타깝게도, 그를 성공의 길로 이끌었던 무민 연재 만화는 그를 우울에 빠뜨리기도 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고 쓸 시간도 없이, 그림을 계속 그려나가기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생각해내야만 했다. 어느날 그는 '이 망할 놈의 무민들'이라 노트에 쓰고, 좌절감에 빠졌다. 그는 더이상 무민에 대해 듣고 싶지도 않고, 오히려 토할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그의 창작은 서서히 그의 세계를 잠식해 갔다. 점점 얀손은 여성들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1956년 그래픽 아티스트이자 판화가인 뚤리끼 삐에띨라와 한 파티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얀손은 그에게 먼저 춤을 추자고 제안했고, 처음 삐에띨라는 거절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얀손은 그의 아파트에 갔고, 둘은 와인을 마시며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이들은 평생의 동반자가 된다. 

무민과 투티키 /Moomin

얀손은 '무민의 겨울'에서 삐에띨라를 모티브로 한 '투티키'를 등장시킨다. 무민의 겨울에서 투티키는 사랑스럽고, 차분하고, 영리한 캐릭터로 겨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민의 조력자 역할을 한다. 투티키는 무민 옆에 있지만, 단지 '모든 일은 직접 겪어야지, 혼자 헤쳐 나가야 하고'라 말하며 직접적으로 도와주진 않고 자세한 설명도 하지 않는다. '무민의 겨울'은 얀손이 삐에띨라와 연애를 하며 느꼈던 사회적인 억압, 차가운 분위기를 그대로 담은 작품이다. 

70대가 되어 얀손과 삐에띨라는 더 이상 여름의 별장에 갈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진다. 이제 이들은 바다가 무서웠고, 별장이 있는 섬에 오래 머물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둘은 그곳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했고, 돌아가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들은 그 때를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싶어했다고 얀손의 조카인 소피아 얀손은 말한다.

토베 얀손의 무덤 /flickr

얀손은 2001년 여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삐에띨라는 얀손이 떠난 지 8년만에 세상을 떠난다. 얀손의 첫 책인 '무민과 대홍수' 이후로 전세계에는 1500만권 이상의 무민 책이 팔렸다. 대부분의 핀란드 가정집에는 수건, 접시, 커피잔 등 무민이 그려진 식기들을 흔하게 볼 수 있으며 핀란드 우체국들은 수년간 무민 우표를 발행했다. 


열심히 살고, 열심히 사랑했던 토베 얀손

'토베 얀손' 스틸컷 /㈜영화사 진진

얀손이 활동했던 시기는 여성 예술가들의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때였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자신을 작가, 화가, 각본가, 만화가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게 했다. 그래서 '토베 얀손' 안에서의 얀손은 자신이 이 많은 직업군들 중 누구인지를 알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토베 얀손'은 예술의 본질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알게 되어 가는 과정을 그렸다.

'토베 얀손'은 여성의 관점으로 여성 예술가의 삶을 그렸다는 점에서 더 의미있다. 감독, 제작자, 촬영감독, 시나리오 작가 모두 여성으로 자이다 베리로트 감독은 "세상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자리를 찾아 헤매는 뛰어난 예술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라고 영화를 소개했다.

영화를 제작한 안드레아 로이터는 “얀손을 동화책 읽어주는 나이 든 여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그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규범에 도전하는 열정적이고 당찬 여성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귀여운 하마에게서 잠시 시선을 돌려, 한 사람의 성장 과정이 오롯이 들어 있는 영화 한 편도 괜찮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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