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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건네는 거대한 위로, 마크 로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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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건네는 거대한 위로, 마크 로스코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9.23 10: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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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7' /Kate Rothko, Christopher Rothko, ARS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최근 미국의 한 부동산 재벌이 이혼한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약 7000억원에 이르는 미술 작품들이 경매 시장에 나온다. 9일, 경매 회사 소더비는 해리 매클로 부부가 소유한 작품 65점으로 이루어진 '매클로 컬렉션'의 경매 권한을 받았다고 밝혔다. 피카소와 앤디 워홀, 마크 로스코 등 현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으로 구성된 매클로 컬렉션은 총 6억 달러(약 7020억원)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소더비 최고경영자(CEO) 찰스 스튜어트는 해당 컬렉션을 두고 "지난 80년간 서구 미술의 최고 업적들이 담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품 모음"이라며 "미술시장의 결정적 순간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전했다.

소더비는 오는 11월과 내년 5월, 두 차례로 나눠 뉴욕에서 경매를 진행할 예정이다. 11월 15일 진행될 첫 경매에는 유명 배우 메릴린 먼로의 초상인 ‘나인 메릴린스’를 비롯해 마크 로스코, 피카소, 게르하르트 리히터,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의 작품이 오른다. 특히 로스코의 1951년 추상화 'No. 7'은 7천만 달러(818억 원) 이상의 가치가 매겨질 전망이다. 


사람의 감정을 소중히 여겼던 마크 로스코
 

마크 로스코의 초상화 /flickr

추상회화의 본질, 형상에 일종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을 받는 마크 로스코는 리얼리즘 시기, 초현실주의 시기, 과도기. 고전주의 시기 등 세월 속 수많은 활동을 했다. 인상주의 하면 빈센트 반 고흐를 떠올리는 것처럼,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라면 마크 로스코를 떠올린다. 그는 세계2차대전 이후 모더니즘 화가들 안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 중 하나로도 꼽힌다. 그의 작품들은 단색 회화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고, 1940년 전후 미국에서 있었던 급격한 화풍 변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의 작품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작품과의 대화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는 동안 겪었던 다채로운 경험이 유일한 영감의 원천이었던 그는 자신의 작품을 비극, 황홀 등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가 작품을 만드는 목적은 보편적인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는 데에 있었다. 

로스코는 유태인 부모 사이에서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유년기는 평탄하지 않았다. 러시아 말을 하는 유대인 출신에게 세상은 냉대의 시선을 보냈다. 어린 로스코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은 심리분석학, 철학, 종교 관련 책을 읽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경멸이 있었다. 이민 후 겪었던 인종차별, 경제적인 빈곤 등은 그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구원했던 것도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구하던 중 접하게 된 그림이었다.

막스 웨버, 'Les baigneuses' /flickr

그에게는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었다. 마크 로스코와 같은 유태인 혈통의 화가 막스 웨버가 그 사람이다. 1925년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잠시 막스 웨버의 회화 수업을 들었던 로스코는 웨버의 영향으로 표현주의 양식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웨버가 그에게 끼쳤던 가장 큰 영향력은 그가 그림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깊은 열망을 깨워냈다는 것이다. 이것은 로스코의 일생 동안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웨버와 함께 했던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 로스코의 천재적인 능력은 독학이 전부였다. 예술가로서 크는 동안 로스코는 스위스 태생의 파울 클레와 프랑스 화가인 조르주 루오와 같은, 색을 멋드러지게 사용하는 초현실주의 화가들과 표현주의자들의 작품에 이끌린다. 초기 이 예술가들은 로스코가 작품을 만드는 내내 큰 영향을 주었고, 덕분에 로스코는 색을 이용한 표현의 달인이 될 수 있었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들 /flickr

로스코는 초상화, 풍경화 등에 대해서는 더이상 예술적으로 말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신 인생을 살면서 중요한 것들을 표현하는 것, 예를 들면 독일에서 일어났던 나치 집권, 혼란스러운 도시 속 사람들의 생활 등 파시스트적 견해들에 의해 촉발하는 감정들을 발견해 그림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그가 뉴욕에 도착했던 시점은 묘하게도 딱 맞아떨어진 게 있었는데, 마침 로스코와 같은 여러 예술가들이 현대 미술의 다양한 부문을 연구하며 뉴욕에 하나씩 정착을 하던 때였다. 뉴욕의 화랑과 박물관들도 관객들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로스코는 미술을 독학하며 여러 예술가들과 접촉하고 경험을 쌓아 나갔다. 

'Slow Swirl at the Edge of the Sea' /flickr

초기의 로스코는 초현실주의적 경향을 띄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그가 전업으로 예술을 시작하기도 전의 경력들이었다. 로스코의 초현실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 '바다 가장자리의 느린 소용돌이 Slow Swirl at the Edge of the Sea'는 조안 미로와 같은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흥미로운 아이디어에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컬러 필드 페인팅 운동이 시작되기 수년 전 제작한 이 작품은 아라베스크, 나선형, 줄무늬로 둘러싸인 두 생명체가 바다와 하늘 사이에서 춤추는 모습을 그렸다. 이 그림은 로스코의 두 번째 부인이 될 메리 엘렌 바이슬(애칭은 멜이라고 불렸다)을 만난 직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이 두 생명체는 로스코와 멜을 묘사한 것으로 추측한다. 

작품을 감상 중인 관람객 /flickr

그의 또다른 크나큰 영감은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마송에서 왔다고 한다. 마송은 작품에서 기계공, 인간, 곤충, 식물 요소를 혼합한 상상 속의 생명체들을 묘사했다. 로스코의 이 작품 또한 마송의 상상의 존재들처럼 형태와 스타일을 일부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존재 주위에는 수많은 줄무늬와 나선형이 있는데, 이것들은 해양 생물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로스코는 이 그림을 두고 미지의 세계로의 모험이라 했는데, 어쨌든 그의 끝을 알 수 없는 상상력에서 나온 것임은 분명하다.

이 작품은 가벼운 느낌을 주는 동시에 바닷가에서의 즐거웠던 경험에 대한 명확한 메시지를 제공한다. 로스코의 스타일은 몬드리안과 같은 현대 추상 예술가들의 분위기를 고취시키는 색상을 쓰는 게 특징이었다. 이것은 자연히 현실주의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게 했고 그가 생각하는 감정의 순수한 표현, 최대한 현실주의적이지 않은 표현이면서도 솔직한 감정의 표현을 만들었다.

1940년대까지 그의 작품은 추상 그 자체였다. 현대 미술 기법에 대한 이해, 그에 따른 거부에서 생겨난 추상표현주의라는 용어는 원래 1920년대 러시아 화가인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품을 묘사하기 위해 태어났다. 이후 색깔, 액션 페인팅 같은 움직임을 사용해 감정과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예술 스타일을 요약하는 데 쓰였다. 로스코는 추상적 표현주의자라 불렸던 새로운 미국 예술가들 중에서도 선두에 있었다. 잭슨 폴록, 바넷 뉴먼 같은 이 예술가들은 사실 공통점 같은 건 없었고 심지어 순수하게 추상적이지도, 표현주의자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들을 한데 모을 수 있었던 건 날것 그대로인 감정에 대한 반항, 즉각적인 표현의 인식, 그들 각자가 가졌던 자유로운 예술 정신이었다. 여담으로 로스코를 포함한 많은 예술가들은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이라도 주지 않기 위해 작품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 것을 선호했다. 로스코는 제목 없이 작품만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더 큰 느낌, 깨달음 등을 주고 싶어했다. 

앙리 마티스, 'The red studio' /flickr

추상표현주의는 액션 페인팅(행위추상)과 컬러 필드 페인팅(색면추상)의 두 가지로 나뉘는데, 액션페인팅은 잭슨 폴록이나 한스 호프맨 등으로 주로 피카소와 표현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는다. 컬러 필드 페인팅은 마크 로스코와 바넷 뉴먼 등이 구현했으며 화가 마티즈의 여러 색채에 영감을 받는다.

로스코는 MoMA에 전시된 마티스의 'The red studio' 를 매일 찾아가서 봤다고 전해진다. 1950년대 이르러 로스코는 컬러 필드 페인팅에 탁월한 재능을 드러낸다. 일반적인 물감을 캔버스에 칠하는 대신 그는 커다란 캔버스 위에 단순한 색상을 사용했다. 

'No. 9' (Dark over Light EarthViolet and Yellow in Rose) /flickr

그 시대의 몇몇 추상표현주의 화가들과 달리 그는 색에 있어 조금 더 사색적인 태도를 보였고, 물리적이거나 때때로 폭력적이기까지 한 페인트 사용을 거부했다. 컬러 필드 페인팅을 두고 처음 로스코와 그의 동료들은 비평가들이나 일반 대중들이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기엔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완전히 틀린 판단이었다. 때로는 생생한 색감을 자랑하며, 때로는 새벽 공기처럼 가라앉은 색감의 그림들은 사람의 즐거움과 경이로움에서부터 슬픔, 화남, 우울함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다양한 감정을 관람객에게 전달했다. 로스코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했다. 

그는 서술적인 제목을 가진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짧은 제목, 또는 숫자를 포함했다. 또 그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그림을 수직 캔버스에 작업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대부분 직사각형이며, 그가 암시하는 메시지에 따라 여러 색깔로 칠해졌다. 그의 그림에서의 직사각형 모양은 밝은 색의 배경을 갖고 있어, 중심의 모양들이 마치 둥둥 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는 거의 모든 작품에 이 스타일을 채택했고, 이 스타일은 그에게 여러 색과 다양한 비율의 조합에 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로스코는 이 거대한 직사각형과 밝은 색들을 이용해 보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감정, 다양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키길 원했다. 

'Black on Maroon' /flickr
'Black on Dark Sienna on Purple' /flickr

로스코의 건강은 1968년까지 수년간의 심각한 불안, 그와 관련된 음주와 흡연으로 인해 급속히 악화되었다. 해리성동맥류를 앓고 난 뒤 그는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흡연과 음주를 계속했으며, 캔버스의 크기를 줄이고 그림을 그릴 때마다 몸에 가해지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유화에서 아크릴 물감으로 재료를 바꾼다.

그러나 이미 그는 자신이 존재하는 세상, 자신이 그리는 작품에 대한 회의감과 만성적인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명예와 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그에게 갑작스럽게 다가온 어마어마한 명성은 그를 괴롭혔고, 자신도 거대한 자본주의에 종속되었다는 무력감이 그의 우울증을 심화시켰다. 

'Untitled' (Black on Grey) /flickr

'무제 Untitled (Black on Grey)'는 1970년 마크 로스코에 의해 완성된 작품이며, 그에게 있어 핵심이었던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 어둠은 그가 그동안 그려 왔던 밝은 색의 작품과는 현저히 비교되며, 이것은 로스코가 일생 동안 견뎠던 감정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가 곧 죽음에 가까워졌고,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작품들 중 많은 것들은 후반기에 들어서서는 매우 어둡고 우울하며, 전작과는 대조적이다. 

'무제 Untitled (Black on Grey)' 역시 그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약해지고 있던 시기에 만들어졌다. 그는 1969년, 1970년 사이 이와 같은 제목을 가진, 비슷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 로스코 예배당에 걸린 그림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색깔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의 경력 후반기는 어둠과 관련된 감정들에 조금씩 잠겨 갔다. 이 시기, 그의 그림은 끝없이 어둡고 어두운 색깔로 가득했다. 어쩌면 그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계속 가라앉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1970년 2월 25일, 주방에서 파자마를 입은 채 자살한 상태로 조수인 올리버 스타인데커에게 발견된다. 로스코는 죽기 전, 그의 모든 것을 그의 재단에 맡기고 새로운 예술가들을 독려하기 위한 학교를 설립하길 원했다. 그러나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오히려 혼란스러운 상황이 초래된다. 그의 유언 집행자들은 탐욕에 사로잡혔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로스코의 그림을 갖다 팔기 시작했다. 로스코가 남긴 작품들은 모두 말보로 갤러리에서 헐값, 또는 부당계약에 팔려나갔다. 

심지어 이들은 법원 소송으로 로스코의 작품 판매를 금지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로스코의 작품을 판매했다. 결국 로스코의 딸 케이트는 유언 집행자들을 법정에 세웠다. 이후 7년간의 분쟁 끝에 마크 로스코의 딸 케이트와 아들 크리스토퍼는 아버지의 권리를 넘겨받을 수 있었다. 오늘날 로스코 재단은 케이트와 크리스토퍼가 자신들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관리하고 있다. 

로스코 예배당 내부 /flickr

1964년, 존과 도미니크 드 메닐은 마크 로스코에게 건축가 필립 존슨이 곧 새로 지을 예배당에 잘 어울릴 만한 회화 연작을 그려줄 것을 주문한다. 로스코는 존슨과 함께 협동하여 미술품 전시를 위한 갤러리이면서도 영혼의 안식처를 디자인하며 회화와 건축이 일체화된 신성한 공간을 만들었다. 단순한 내부는 위에서 태양빛이 들어오면서 감동적이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관객들은 검은색 공간으로 들어와 검은 그림을 보며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며 내면과 소통한다. 

멀리 보이는 로스코 예배당과 바넷 뉴먼의 '부러진 오벨리스크' /flickr

로스코는 3년이라는 세월 동안 이 작업에 매달렸고, 나중에 이 공간에 걸릴 작품들을 갖고 왔지만 정작 자신이 그림에 대해 만족하지 못했다고. 안타깝게도 그는 예배당이 완전히 마무리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로마 가톨릭 예베당으로 설계되었지만, 지금은 교회나 성당 등 특정 종교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적인 장소로 쓰인다.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기도를 하러 오거나, 공연이 열리거나, 토크 콘서트 등이 열린다. 또 누군가는 명상을 위해, 마음의 치유를 위해 이곳을 방문한다. 로스코는 그림을 보며 종교를 초월한,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를 제안했고 지금의 로스코 예배당이 만들어졌다. 실내에는 로스코의 그림 14점이 전시되어 있고, 로스코 예배당 입구에는 바넷 뉴먼의 작품인 '부러진 오벨리스크'가 보인다.  


작가의 감정은 작품으로 관객에게 전달된다
 

마르 로스코의 작품, 그리고 관객을 위한 자리 /flickr

"나는 추상미술가가 아니다. 
나는 색채나 형태 등의 것엔 아무 관심이 없다. 
내 관심은 오로지 비극, 황홀경, 파멸 등 인간의 기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내 그림을 대한 사람들이 무너져 울음을 터뜨린다는 사실은 내가 인간의 기본 감정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내 그림 앞에서 눈물 흘리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경험한 것과 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은 약 45cm 떨어진 거리에서 봐야 가장 완벽하다고 한다. 그는 어떤 것도 자신의 그림과 관객 사이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작품을 무언가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거부했다. 로스코는 특정 언어로 한정하는 것이 아닌, 관객과 작품이 맞닿았을 때 발생하는 감정의 교류에 관심을 갖고 평생을 작업에 몰두했다. 

예술의 감상은 진정한 정신과의 결합에서 나오는 것이라 그는 말한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누군가에게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감정의 동요는 로스코가 평생 바라왔던 것이었다. 그의 작품을 보며 웃고, 울고, 감명받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있다. 로스코가 지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기뻐하지 않을까? 한때 자신을 짓눌렀던 작품들이 누군가에게는 크나큰 위로가 되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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