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1-09-18 18:55 (토)
조선 시대 화장실 놀랍고도 과학적이었다
상태바
조선 시대 화장실 놀랍고도 과학적이었다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7.12 18: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복궁 정화시설 발굴 현장
경복궁 동궁 지역 발굴 현장 /문화재청 유투브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인사동 땅밑에서 고이 잠들어 있던 훈민정음 금속활자 발굴에 이어 또 하나의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경복궁 동궁의 남쪽 지역에서 현대 정화조와 유사한 시설을 갖춘 대형 화장실 유구(遺構)가 확인된 것이다. 문화재청 국립강화문화재연구소는 경복궁 동궁의 남쪽 지역에서 이와 같은 화장실 시설을 발굴했다는 사실을 이번에 공개했다. 

특히 궁궐 내부에서 화장실 유구가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다. 경복궁 화장실의 존재는 「경복궁배치도」,「북궐도형」, 『궁궐지』 등에서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문헌에 따르면 경복궁의 화장실은 최대 75.5칸이 있었는데 주로 궁궐의 상주 인원이 많은 지역에 밀집되어 있었으며 특히, 경회루 남쪽의 궐내각사와 동궁 권역을 비롯하여 현재의 국립민속박물관 부지 등에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 유적의 정화 시설, 놀라운 기술력
 

익산 왕궁리 공중화장실 유적 /국립문화재연구소

그동안 옛 고대 유적에서 정화 시설은 백제 때의 익산 왕궁리 유적, 양주 화엄사지 등이 있었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처음에는 백제 시기 절터로 파악해 발굴을 시작했지만 발굴 결과 나타난 거대한 건물터와 정원·공방·특히 대형 화장실 등은 이곳이 백제 무왕의 왕궁, 혹은 별도(서울 밖에 따로 둔 작은 서울의 기능을 한 곳)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왕궁리 유적의 정화 시설은 궁성의 구조를 완전히 갖추는 과정 중에 지어진 것으로 확인되며, 특히 대형 화장실은 규모도 규모지만 매우 과학적으로 조영된 구조물이다. 화장실 내부의 분뇨가 일정 높이가 되면 인근의 동·서 석축 배수로로 흘려보내는 저류식과 수세식 화장실이 뒤섞인 독특한 형태를 갖췄다. 

이 화장실이 발견된 계기가 참 독특한데, 2003년 여름의 발굴단이 전북 익산의 왕궁리 유적 북서쪽에서 길이 10.8m, 폭 1.8m, 깊이 3.4m의 기다란 구덩이를 발견한다. 당시 발굴단은 이 구덩이를 과일이나 곡식 등 주로 식품을 저장하던 창고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바닥에 수분과 유기물을 포함한 검은 흙이 발견되어 유독 악취가 심했고, 흙 속에서는 짚신과 식물 씨앗, 나무 막대기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나무 막대기는 사람들이 창고에서 물건을 재는 '자'로 생각하고 깨끗이 씻어서 보관했다고. 

그러나 흙을 파낼수록 악취가 심해졌고, 자문 위원인 이홍종 고고학 교수는 이 곳이 저장고가 아닌 화장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유구 양상이 일본의 고대 화장실 터와 비슷하다'라며 유기물의 흙을 채취해 생물한 분석을 의뢰했고 조사 결과 다량의 기생충 알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삼국시대 공중 화장실 유적이 국내에서 처음 발견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왕궁리 화장실 유적에서 출토된 뒤처리용 나무 막대기 /국립문화재연구소 

같이 발견됐던 나무 막대기는 자가 아니라 볼일을 본 뒤 뒤처리를 하는 뒤처리용 나무 막대기였다. '측주'라 불리는 이것은 중국에서 유래되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져 3국에서 모두 사용된 것이다. 총 6점의 막대기들은 자 치고는 눈금도 없어 뒤처리를 할 때 쓰는 것이라는 걸 학자들이 파악한 것이다.

부여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백제 사람들은 나무 판으로 짜 만든 변기 위에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본 후 나무 막대기로 뒤처리를 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백제 화장실 유적 발굴에 참여한 부여문화재연구소 전용호 학예연구사는 “뒷나무들은 워낙 잘 다듬고 손질을 한 덕분에 매끈매끈해 상처를 입을 일은 없다”며 “뒷나무는 재활용이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왕궁리 유적의 화장실은 당시로서는 최신식 그 자체였다. 지금으로 치면 푸세식 화장실의 형태로, 발을 올릴 수 있도록 구덩이에 나무 기둥을 박고 내부 벽은 점토를 발라 분뇨가 새지 않게 했다. 기둥으로 볼 때 지표 위에는 3~6칸으로 칸을 나눈 목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쪽 벽에 수로를 뚫어 유입되는 물이 경사를 타고 내려와 분뇨를 다른 배수로로 밀어내도록 설계되었다. 배수로에 흐르는 물에 분뇨를 희석시키는 방법으로 처리한 것이다. 

1990년 발굴된 일본 규슈 후쿠오카의 홍려관(외국 사신들의 숙소) 유적 등에선 8세기 초 화장실 유구와 뒷나무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백제 화장실과 비슷한 형태로, ‘동아시아의 뒷간’을 쓴 김광언 인하대 교수는 “홍려관 뒷간 유적은 백제 사람들이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며, “일본 학자들도 뒷간 문화가 백제에서 넘어온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회암사지 뒷간 터 지하석실 입구 /국립민속박물관

2005년 양주 회암사지에서 발견된 석실은 조사 결과 뒷간 터의 지하 구조로, 현재까지 국내 사찰 터에서 발굴된 최대 규모이다. 이 석실이 분뇨를 저장하는 지하 공간이었고 이곳에 뒷간이 있었던 사실이 밝혀진다. 뒷간 터는 측면 중앙칸이 지하 석실 형태로 되어 있으며 한번에 최대 16명까지 사용 가능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석실 내부의 퇴적토 일부를 채취해 기생충 검사를 실시한 결과 기생충 알이 발견되었다. 발견된 기생충은 회충과 흡충으로 흙 1g당 회충 알 5-10개 가량, 흡충류 알 20개가 검출되었다. 

회충은 채소, 특히 배추가 주요 감염원으로 채소류의 소비가 많은 사찰의 특성을 고려할 때 회충 역시 회암사의 밭 작물이 음식물로 소비된 결과물로 추정할 수 있다. 뒷간 터에서 나타난 흡충은 인체에 기생하는 간흡충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 양주가 있는 경기 북부 일대는 우리나라 5대 간흡충 유행지 중 하나인 한강 유역에 속하는 지역으로 사찰의 음식 문화를 고려할 때 뒷간에 외부인이 출입했다는 증거가 된다. 

회암사지 뒷간 터 발굴 모습 /국립민속박물관

우리나라 전통 사찰의 뒷간의 구조는 크게 일자형과 정자형으로 나뉜다. 하나의 출입구를 통해 진입해 좌, 우측으로 남녀 칸을 구분하거나 통로를 나누어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회암사지 뒷간은 북향으로 좌,우측 두 곳의 출입구가 배치되고 이 통로를 통해 진입하는 구조다. 사찰의 뒷간은 승당, 욕실과 함께 절간에서 조용함을 지켜야 하는 삼묵당 중 하나로 여겨졌다. 즉 이곳에 드나들 때의 태도를 규율로 정하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는 방편으로 삼은 것이다. 단순하지만 정갈하고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규모, 주변의 자연 풍경을 보며 근심을 덜어내고 비움의 미학을 느끼며 잠시 쉬어가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건물이 소실되기 전 회암사 뒷간의 구조는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뇨를 저장하는 시설의 규모는 순천의 송광사나 선암사와 유사하지만 형태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산사의 뒷간은 경사지를 기반으로 지어져 건물 내부의 위칸에서는 볼일을 보고 아래 칸에는 분뇨가 쌓이게 되는 구조다. 반면에 회암사 뒷간은 지하에 매립한 시설을 기반으로 평지에 지은 단층 목조건물이기 때문에 지상에 용변칸이 위치하고 지하에 분뇨가 쌓이는 석실이 위치한다. 지하 석실의 입구 앞쪽에는 출입 공간이 마련되어 분뇨를 배출하고 청소하는 데 용이하다. 석실의 벽과 바닥은 박석으로 채워넣어 흙이 노출되지 않게 했다. 


또 하나의 발견, 경복궁 동궁 지역의 정화시설 
 

경복궁 동궁 지역의 유구 /문화재청 유투브

태조의 명으로 정도전이 지어 올린 경복궁은 '큰 복을 누리며 번성하라'란 뜻으로 경복궁의 발굴 조사는 1990년부터 현재까지 계속 진행 중이다. 동궁 권역은 세자와 세자비가 생활하던 공간으로 1994년에 세자와 세자비의 거처인 자선당, 세자의 집무 공간인 비현각이 발굴조사 되었고 정비, 복원이 완료되었다. 현재 조사가 진행중인 동궁 남쪽에 인접해 있는 지역은 기록을 살펴보면 세자가 공부를 하는 공간, 세자를 호위하는 군인들이 머무르는 공관, 세자의 음식을 마련하거나 시중을 드는 궁녀들이 있는 공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을음이 보이는 석재 /문화재청 유투브 

1427년 세종 연간에 동궁 일대 조성 후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전소되기까지 세 차례 큰 화재가 일어나 재건축도 빈번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발굴 조사 결과에서도 큰 화재로 인해 건축 부재에 그을음이 있고, 다른 전각에서 사용되었던 석재들이 사용된 흔적 또한 볼 수 있다. 200여년간 궁궐로써 기능하지 못하던 경복궁은 1865년 고종 연간에 경복궁을 중건 진행, 동궁도 다시 조성될 수 있었다.

경복궁 발굴 조사는 일반적인 다른 발굴조사와는 차이가 있다. 고종이 150여년전 중건한,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해당하는 시대의 땅 속에 있는 유물이 발굴된 것이 특징이다. 고종 연간에 중건된 경복궁 건물 배치는 '경복궁 배치도'와 '북궐도형' 도면으로 확인 가능하며, 발굴조사 결과와 전해져 오는 기록을 비교해 실제 발굴된 곳이 경복궁 배치 구조와 맞고 틀리는지를 맞춰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심각한 훼손이 진행되어 현재 조사 결과로는 굉장히 복잡하게 중첩된 구조들이 확인된다.

경복궁 동궁 지역의 유구 /문화재청 유투브

이 기다란 돌로 짜여진 구조물의 용도 부분에 대해 당시 조사에서는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한가지 추정할 만한 장소가 '궁궐지'라는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궁궐지는 1904년 경복궁 전각의 칸수와 용도를 설명하는 책이다. 책의 기록에 따르면 이 구조물이 있는 문기수청에 대해 '통장청은 40칸으로 지금(1904년경)은 없다. 통장청 동쪽에는 문기수청이 있는데, 10칸이며 화장실은 4칸이다. 지금(1904년경)은 없다"라고 나와 있다. 이로써 문헌에 근거해 화장실이라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유구 구조는 땅을 깊게 판 다음 바닥에 돌을 깔고 그 위로 큰 돌들을 쌓아 올리며 뒤쪽도 돌을 채워 넣었다. 물이 갑작스럽게 유입되는 상황에서도 넘치지 않는 구조물을 만든 것이다. 이 점이 화장실이 갖고 있는 구조적 특징 중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구조물의 전체 길이는 10.4m, 폭 1.4m, 깊이는 가장 높이 남아 있는 곳을 기준으로 1.8m 정도 된다.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북쪽에 물이 들어오는 입구가 있다는 것이다. 동쪽 측면에는 물이 나가는 출구를 두 개를 만들어 놓았다.  

물이 들어오는 입구 /문화재청 유투브 

좀 특이한 점은 물이 들어오는 지점보다 물이 나가는 지점이 80cm 정도 더 높게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대형 구조물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두고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구조물 내부에 쌓여 있던 흙에 대한 분석을 진행했고 g당 18,200개의 개체에 해당하는 기생충 알이 검출되었으며 다른 지점들에서도 소량이긴 하지만 기생충 알이 검출됐다.

기생출 알의 g당 개수는 현재까지 가장 많은 양으로 절대연대(탄소연대 측정)는 대부분 19세기에 집중되었다. 이외에도 오이, 가지, 들깨 씨앗이 확인되어 150여년전 궁궐 상주 인원 생활상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고 소나무, 참나무, 벼 등 24종의 꽃가루도 확인되어 150여년전 경복궁의 식생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렇듯 궁궐지의 기록과 기생충 알의 높은 밀도로 봤을 때 화장실의 하부 구조 가능성이 높다는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이 구조, 즉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데 있어 물이 들어오는 지점의 바닥면이 더 낮다는 이 점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만일에 이 구조물이 화장실이었다면 과연 어떤 식으로 운영되었고 화장실로서의 기능을 했는지 그런 부분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대형 화장실의 유구를 3D 영상으로 재현한 모습 /문화재청 유투브

이것은 물의 유입과 배출 상황을 근거로 경복궁 동궁 전역에서 확인된 대형 화장실의 유구를 3D 영상으로 재현한 것이다. 물은 입수구 바닥면보다 해발 고도가 1.1m 가량 높은 현재 자선당과 비현각 쪽 통행 배수로에서 유입된다고 가정, 입수구를 통해 물이 계속 유입되는 상황을 연출했다. 많은 양의 물이 유입되어 출수구 바닥 높이 이상으로 물이 차오르면 물이 출수구를 통해 외부로 배출된다. 이 모의 실험을 통해 현재 대형 화장실 추정 유구의 입수구가 출수구보다 낮아도 출수구를 통해 물이 바깥으로 배출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당시의 화장실 구조는 이러하다. 지하에 거대한 정화 시설을 만들고, 정화시설 한쪽 벽에는 물이 들어올 수 있는 입수구를 만들고 동쪽 벽에는 물이 나갈 수 있게 최대 25m의 기다란 두 개의 출수구를 만든다. 그 위로 화장실 건물을 올리고 유구의 길이를 감안해 정면을 네 칸으로 하고 한 칸에 두개씩 총 8개의 화장실이 있는 형태로, 지하에 조성된 정화시설 안으로 분뇨가 쌓이는 것이다. 입수구에서 물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면 내부에 쌓인 분뇨와 섞인다.

3D 모델링으로 구성한 화장실의 구조 /문화재청 유투브
화장실의 모습, 변을 운반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문화재청 유투브

시간이 흐르면 유입된 물에 의한 발효가 진행되면서 오물은 바닥으로 가라앉고 오수와 정화수가 분리된다. 출수구 바닥면 높이까지 정화수가 차오르면 외부로 배출되기 시작한다. 화장실이 계속 사용되고 변이 입수구 높이까지 차오르면 화장실 바닥판을 일부 드러낸 다음 정화 시설 내부의 변을 운반한다. 갑작스런 집중호우 상황에서는 정화시설 내부의 수위도 함께 높아지며, 정화시설 용적량이 한계에 이르면 오수가 출수구를 통해 지하에 매설된 배수로를 따라 배출된다. 

동궁에 설치된 대형 화장실은 정화 시설에 입수구를 만들고 물을 끌어들여 발효 과정을 거침으로써 악취를 줄임과 동시에 변을 압착시켜 운반과 처리라는 작업 과정을 줄였다. 1인당 평균 분뇨랑이 1.2리터 정도고 1년에 한번만 분뇨를 처리하는 것으로 계산하면 매일 150여명이 사용할 수 있는 대형 화장실인 것이다. 이는 물의 유입과 배수 시설이 없는 화장실에 비하여 약 5배 정도 많다. 

출토된 소뼈의 모습 /문화재청 유투브 

이 화장실 유구가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건 크게 세 부분으로 검증된다. 문헌 자료에서 경복궁 배치도가 만들어진 시점은 1888년에서 1890년 사이다. 즉 유구와 그 당시 해당하는 도면의 위치가 일치한다. 또한 과학적인 분석 방법으로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기법으로 이 유구 안에서 소뼈가 확인되어 소뼈에 있는 원소를 분석,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으로 중심 연대가 19세기 중엽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발굴조사 유구의 층위 관계를 통해 가장 바닥의 돌무더기는 건물의 기둥을 세울 때 들어가는 하부의 기초 시설인 것을 알 수 있다. 덧붙여 유구의 단면을 봤을 때 조선 전기에 건물 기초를 세우고, 조선 후기 즈음 화장실 유구를 조영, 마지막으로 근현대의 건물 기초가 들어오며 완성된 것임을 확인했다. 

동궁 지역 유구 발굴 모습 /문화재청 유투브 

150여년전, 경복궁 동국 남쪽에 만들어진 이 대형 화장실을 이용한 사람들은 하급 관리, 병사, 궁녀들로 추정된다. 구조적인 부분에 있어 물을 이용해 정화시킨 후 배출하는 이 친환경 기술 적용은 전세계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는 이례적인 것이다.

특히 이 같은 분뇨 정화시설은 우리나라에만 있으며, 유럽과 일본의 경우에는 분뇨를 포함한 모든 생활하수를 함께 처리하는 시설이 19세기 말에 들어서야 정착되었다. 중국의 경우에는 집마다 분뇨를 저장하는 대형 나무통이 있었다고 전해질 뿐 자세한 처리 방식은 알려진 바가 없다.

문화재청 측은 토양 분석으로 궁궐 사람들의 생활상에 접근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확보하고, 향후 보존과 정비 방안에 대해서는 관련 부서와 긴밀히 협의해 가장 좋은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