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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닿고 싶었던 사람들의 열망, 지구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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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닿고 싶었던 사람들의 열망, 지구라트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7.09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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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트 /unsplash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성탑, 단탑이라고도 부르는 지구라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곳곳에서 발견되는 건축물이다. 거대한 계단형 탑처럼 생긴 '지구라트'는 높은 곳이란 뜻을 갖고 있다. 하늘에 있는 신과 지상을 연결하는 매개체로 기본 구조는 작아지는 사각형 테라스롤 여러 개 겹쳐 기단으로 하고 그 꼭대기에 신전을 안치하는 식이다. 신성한 탑과 신전이 같이 있어 일반적으로 도시의 중심부에 있다. 

수메르인들은 신이 지구라트의 꼭대기에 있는 신전에 살고 있으며, 성직자들과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 믿었다. 원래는 각 도시에 있었지만 거의 다 무너지고 없어 원형을 갖추고 있는 곳이 많이 없다.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볼 수 있는 곳은 우루크의 지구라트로 우르 제 1왕조의 것을 우르 제3왕조의 우르남과 슈르기가 수복한 것이다. 이집트의 오래된 피라미드의 계단식 디자인도 지구라트에서 진화했다는 말이 있다. 


하늘로 향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만든 지구라트

이란의 테페 시알크에 있는 지구라트 /flickr

고대에서 오래된 건축물들처럼 지구라트 역시 완성되기까지는 수백 년이 걸렸다. 수메르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 최초의 문명을 가져다 준 집단이었고, 수메르에서 지구라트를 건설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곧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지구라트의 구조 또한 커졌다. 지구라트는 고대 수메르인 외에도 아카디아인, 엘람인들과 바빌로니아인들에 의해 종교 활동을 목적으로 세워졌다. 각각의 지구라트는 다른 건물들을 포함한 사원의 일부이기도 했다. 

지구라트의 형태는 기원전 6000년, 이라크 남부 우바이드 시대(청동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타원형 또는 직사각형, 정사각형의 모양이었다. 윗부분이 평평한 고대 이집트의 무덤 형식인 마스타바와 같은 구조였고 내부는 햇빛에 말린 진흙 벽돌로 만들어졌다. 유약으로 불에 구워진 벽돌들은 바깥쪽으로 쌓였고, 이 벽돌들은 지구라트 구조의 핵심이었다. 각각의 면들은 다른 색깔의 유약을 칠했고 점성학적 의미를 담기도 했다. 유약을 바른 벽돌엔 때때로 왕의 이름이 새겨졌고 층의 수도 2층에서 7층까지 다양했다. 

수메르의 도시 에리두에서 발견된 지구라트의 폐허, 벽돌 일부에는 우르 남무 왕의 이름이 적혀 있다 /flickr
엘람인의 비문이 새겨진 벽돌 /flickr

겉으로만 보면 튼튼해 보이지만 지구라트는 햇빛에 구운 벽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변질되고 침식되어, 왕들은 주기적으로 지구라트를 재건하고 종종 오래된 건축물 위에 새 신전을 짓곤 했다. 홍수를 대비해 지구라트는 물을 빼내는 내부 배수관도 만들었고, 많은 지구라트 건축물은 홍수의 피해를 막기 위해 각 층의 진흙 벽돌 사이에 갈대나 풀과 같은 식물이나 방수 타르인 역청을 바르고 끼워 넣었다. 

일반적으로 지구라트는 신전이 있는 곳이라 여겨졌지만 물리적인 증거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유일한 증거는 헤로도토스의 증언으로, 인류에게 가장 유명한 지구라트인 바벨탑에 대한 언급이다. 그리스 역사가이자 학자인 헤로도토스는 바벨탑에 대해 '거대한 벽돌 탑으로 각각 높이 5.5m인 7개의 층으로 이뤄져 층마다 다른 빛나는 색깔이 칠해져 있고 26톤의 금으로 된 가구와 조각이 신전을 채웠다'고 전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지구라트가 초기 사원들로부터 발전했으며, 신전은 가장 높은 단계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구라트 꼭대기의 모습 /flickr

신전에 접근하려면 아마도 지하에서 정상까지 나선형의 경사로를 통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메소포타미아에 있는 지구라트는 공공 예배나 의식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신들만이 살 수 있는 거처로 여겼고 각 도시에 있는 지구라트는 일종의 수호신이었다. 오직 사제들만이 지구라트를 올라 신전의 방을 들어갈 수 있었고, 신들을 돌보는 것도 그들의 일이었다. 사제들은 수메르, 바빌로니아에서도 매우 큰 역할을 하는 구성원들 중 하나였다. 

초가 잔빌 /unsplash

가장 잘 보존된 지구라트 중 하나는 이란 후제스탄주의 초가 잔빌이다. 초가 잔빌은 엘람 시대에 운타시 나피리샤 왕이 안샨과 수사의 중간 지점에 종교 수도로 건설한 것이다. 첫 번째 담 안에는 '테메노스'가 있다. 중앙에 있는 사원은 본래 정방형 건물이었으며, 수메르의 신 인슈시나크를 모신 곳이다.

이 사원은 당시 지구라트의 1층으로 구성되었고 다른 견고한 4층 부분은 옛 중앙 광장을 모두 덮을 수 있도록 궁정 마당에서 시작해 다른 20개의 건물과 함께 있다. 진입로에는 아치 천장을 올린 계단이 있는데 밖에서는 볼 수 없으며 외부에 계단이 3개 있어서 다른 메소포타미아 지구라트와는 다르다. 오늘날 남아 있는 초가 잔빌 지구라트는 25m 정도이며 마지막 2층은 본래 60m였지만 모두 소실되었다. 인슈시나크뿐만 아니라 안샨의 신 나피리샤의 성전이기도 하다.

지구라트의 북서쪽에는 이슈니카랍, 키리리샤 같은 작은 신들을 모신 일군의 신전이 있다. 타원형 벽이 작은 사원과 지구라트를 둘러싸고 있다. 사다리꼴의 두 번째 담은 빈 지역을 둘러싸고 있고 세 번째 담에는 왕의 문 근처에 있는 작은 사원과 궁전 세 곳, 넓은 안뜰이 있다. 테메노스 사원과 분리된 운타슈갈 궁전도 발견되었다. 

초가 잔빌 /flickr

비록 아시리아인이 파괴했지만 두상, 작은 조각상, 동물과 부적 등 많은 유물과 상아 모자이크로 장식한 판 2개가 발견되었으며 지하층에서 발견된 몇 개의 둥근 무덤은 화장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초가 잔빌 지구라트는 유네스코에 의해 계단식 피라미드 구조의 가장 잘 보존된 사례로 인정받았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최초의 이란 유적지가 되었다.

라르사 지구라트, 햇빛에 말린 벽돌들의 모습 /flickr

지구라트 자체는 신전이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것은 하늘과 더 가까워지고 지상에서 계단을 통해 하늘로 접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구라트의 높이를 중요시했다. 여러가지 고고학적 발견과 역사적 기록으로 인해 사람들이 이 탑을 7개의 다색 층으로 만들고 그 위에 정교한 비율의 구조로 신전을 얹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구라트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사제들이 매년 저지대를 침수시키는 홍수를 피할 수 있도록 높은 장소의 역할 또한 했다는 것이다. 지구라트는 보안의 기능도 맡았다. 신전은 세 개의 계단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소수의 경비병들은 제사장들이 지구라트의 꼭대기에 있는 신전에서 비공개로 여러 의식을 치루는 것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각각의 지구라트는 창고, 욕실, 사제들의 거처를 포함한 도시의 일부 그 자체였다.

지구라트는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메소포타미아의 상징이었다. 종교 자체가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지구라트 또한 도시의 심장부 역할을 했다. 왕들은 그들의 종교적 헌신, 열정을 증명하기 위해 지구라트를 세웠다. 지구라트는 사람들에게 신들과 연결되는 하나의 방법이자, 왕의 권력을 증명하는 가시적인 표시였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비록 권력이 없는 왕이었어도 누구나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보일 수 있는 지구라트를 만들 수 있었다. 큰 신전은 도시의 경제 중심지 중 하나였고 사제들뿐만 아니라 목수, 직조공들에 이르기까지 수백 수천명의 사람들이 고용되기도 했다. 각 도시마다 지구라트가 위치한 형태도 달랐다. 수메르와 바빌로니아의 지구라트는 주변에 다른 건물이 없지만 아시리아의 지구라트는 지구라트를 다른 건물들을 포함한 더 큰 건축물의 일부로 만들었다. 


우루크의 지구라트 

우루크의 지구라트 /flickr

지구라트 중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라면 우루크의 지구라트를 들 수 있다. 현재 32여개의 지구라트가 전해져 오는데 이라크 남부, 지금의 나시리야 근교 평원에 서 있는 우루크의 지구라트가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메르의 우르남 왕은 자신이 지은 이 지구라트를 '에 테멘 니 구루'라 불렀다. 이것은 주춧돌이 숭고한 아우라를 풍기는 집이란 뜻이다.

우르남 왕은 지구라트를 달의 여신 난나에게 바쳤다고 전해진다. 우루크는 난나를 숭배하는 도시였고, 우루크의 지구라트는 달의 신전이라 불렸다. 수메르 초기 왕조 시대에는 1층에 테라스가 있었지만 우르 제3왕조시대에 이르러 건축물이 완성된다. 우르남은 난나를 모신 신전을 높은 곳에 세워 도시의 상징으로 만들고자 했다.

우루크의 지구라트는 우르의 행정 중심지였던 사원 단지 쪽에 위치해 있었고, 수메르 사회에서 강력한 힘을 가졌던 사제들만이 이 지구라트를 올라갈 수 있었다. 우르남의 후계자인 슈르기 왕은 약 48년간 우루크를 통치했고 그가 통치하는 동안 우르는 국가의 수도가 되었으며 메소포타미아의 거의 모든 지역을 지배했다.

새롭게 정복한 도시 국가들의 충성을 얻으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기 위해 슈르기 왕은 시민들에게 자신을 신이라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죽은 이후 우루크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지구라트는 사원에서 점점 폐허로 변해 갔다. 신 바빌로니아 시대에 들어섰을 즈음 지구라트는 신 바빌로니아 제국의 마지막 통치자인 나보니두스 왕에 의해 복원되고 업그레이드된다.  

우루크의 지구라트 /flickr
 우루크의 지구라트를 오르는 미군들 /flickr

지구라트는 벽으로 두른 관내 안에 서 있었으며 중앙부는 진흙과 갈대를 반죽해 형틀에 넣어 빚어낸 뒤 햇볕에 말린 벽돌로 지어졌다. 중앙부에만 7백만 개의 벽돌이 쓰였다고 하며, 벽돌 여섯 겹마다 갈대 거적과 모래흙을 넣어 견고함을 더했다. 상상하기 어려운 그 옛날에 지어진 이 지구라트는 고대 문명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발전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려준다.

가장 낮은 층은 처음 시공할 때 만든 것이고, 위쪽의 두 층은 신 바빌로니아 시절 수리한 것이다. 외층에는 구멍을 뚫어 물을 증발할 수 있게 만들고 홍수와 비에 대비해 테라스에 배수구를 만들었다. 우루크의 지구라트에는 3개층의 테라스가 발견되었으며 모든 층으로 이어지는 큰 계단이 있다. 난나 신을 섬기는 신전이 지구라트 정상에 있었다고 추측하지만 현재로써는 남아 있는 것은 없다.

고대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이 신하들을 필요로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지구라트 위에 있는 신전에는 난나 신을 위한 침실이 있었고 신을 모시는 하녀도 있었다고 한다. 북서쪽 계단에는 신에게 바치는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엌이 있었으며 외곽에는 사원 창고, 사제들의 집, 그리고 의식용 건축물이 있었다.

덕분에 지구라트 위 난나의 신전은 여행자들, 또는 신앙심이 깊은 신자들을 모두에게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눈에 띌 수 있었다. 1800년대 후반부터 발굴 시도를 했으며 펜실베니아 대학과 런던 대영박물관의 공동 프로젝트로 1930년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0년 이라크의 독재자였던 사담 후세인은 최하층의 파사드와 계단을 재건한 지구라트의 복원을 지시했지만 이후 지구라트가 피해를 입는 사건이 일어난다. 1990년 걸프전 때 미군의 공습으로 지구라트 유적지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다. 


종교적, 문화적 가치를 품은 지구라트 

메소포타미아 니푸르의 지구라트 /flickr

지구라트는 단순한 구조물에서 점점 신의 안식처로 변해갔다. 시간이 흐르고 기술이 진보하면서 지구라는 초기보다 훨씬 더 복잡해지고, 정교해졌다. 지구라트의 높이가 높아질수록 신과 더 가까워진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수많은 지구라트를 만든 건 순전히 신에 대한 믿음 하나에서 나온 것일 테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종교적,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속했던 지구라트는 신 바빌로니아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메소포타미아의 다양한 민족들에게 종교적인 믿음 그 자체였고 왕에게는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지금도 지구라트는 다른 유적지들처럼 여전히 학자들과 관광객들에겐 여러 연구와 관심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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