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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건물의 양식이 서구 성당의 특색이 되기까지, 바실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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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건물의 양식이 서구 성당의 특색이 되기까지, 바실리카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2.24 1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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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에 있는 바실리카의 흔적 /flickr
폼페이에 있는 바실리카의 흔적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고대 로마 건축에서 바실리카는 마을과 함께 지어진, 다양한 공공 기능을 수행하는 건물이었다. 로마 시대 법정이나 거래소, 집회장으로 사용되던 대규모 건물로 건축물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바실리케(basilikè)에서 유래했다. 바실리카는 일반적으로 2개 이상의 세로 모양의 통로가 측면에 있는 직사각형 건물로, 지붕은 2개 층으로 되어 있다. 양쪽 끝에는 대개 로마의 판사들이 있는 재판소가 있었고, 대개 개인의 주거지나 황궁이 있는 곳에 지어졌다.

4세기경 성당이나 교회 말고도 다양한 건축 양식에도 이 용어가 사용되었으나 점차 교회 건축 양식을 지칭하는 단어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원형인 바실리카식 교회와 그 양식을 통틀어 가리킨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바실리카는 폼페이에 있는 폼페이우스 대성당으로, 오늘날 폼페이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물로 재판이나 집회 등이 이루어졌던 공간이다. 


고대의 바실리카

4세기 이후 로마의 지원을 받으며 그리스도교 인구들도 늘면서 로마에서는 그동안 있었던 만남의 광장 같은 것보다 더 크고 으리으리한 공공 건물을 지을 필요성을 느낀다. 밀라노 칙령으로 인해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공식 종교가 되며 새로운 교회의 시대를 열었고, 자연히 공식 종교로서의 예배 장소에 적합한 건축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로마의 바실리카를 변형, 사용하게 된 것이다. 왕의 집무실이며 그리스 시기엔 호민관이 백성들의 호소를 듣고 판결을 내렸던 법정의 역할을 했던 로마 시대 바실리카는 주로 재판소나 상업 회의소로 사용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unsplash
성 베드로 대성당 /unsplash

바실리카는 내부 정면에 높은 단이 있고, 중앙에는 빛이 들어오기 위해 지붕이 없는 중앙 통로, 양쪽으로 평행을 이루는 복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순하면서도 웅장한 공간 구조는 약간의 변형을 거쳐 사람들의 예배소로 쓰였다. 여기서 오늘날 교회의 기본 구조가 만들어진다. '신의 시야가 확보된 탁 트인 하늘'과 '창문이 없는'것에서 시작한, 높은 벽에 설치한 창문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햇빛이 인상적이다. 이것은 교회 건축의 일관된 특징으로, 20세기 후반까지는 모든 기독교 종파의 교회들에겐 일반적인 건축 양식이었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장군인 카토가 기원전 184년 건설한 것이 최초의 바실리카로 알려져 있다. 이후 이 용어는 상업용, 군사용, 또는 종교용으로 쓰는 큰 공간에 주로 쓰였다. 이후 연극용 공간이나 관객 홀로 쓰였던 바실리카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중앙에 넓은 통로를 가졌으며 입구는 대개 황제의 동상으로 장식되었다. 후기 공화정 시대에 들어 바실리카는 점점 기념비적인 공간이 된다. 

바실리카 율리아의 터 /flickr
바실리카 율리아의 터 /flickr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바실리카 대성당을 바실리카 율리아로 개명했으며, 바실리카 에밀리아 성당은 매우 화려하게 재건되어 고대 로마의 정치인이자 학자인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는 이 성당을 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라고 썼을 정도였다. 각기 기념비적인 의미를 띈 바실리카들은 시민들과 황제에 의해 로마에 정기적으로 지어졌으며 손님과 방문객들을 위한 피로연 장소로도 쓰였다.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는 황실 가족들의 거주를 위해 팔라티노 언덕에 바실리카를 건설했고 팔라티노 바실리카는 제국 시대 동안 황실 궁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바실리카는 로마에서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고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바실리카를 건설함으로써 서로의 지위를 과시했다. 도시 외곽에 세워진 바실리카는 로마의 영향력을 상징했고 로마의 행정 및 상업 중심지이기도 했다. 바실리카 옆에는 보통 다양한 사무실과 여러 공간들이 있었고 여러 조각품들을 전시하는 장소로도 쓰였다. 점점 바실리카가 교회 신도들의 예배를 위해 개조되면서, 로마의 초기 교회들은 재판소가 있는 바실리카로 지어졌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에는 바실리카가 교회 건축의 귄위 있는 양식이 되었고 4세기 말엔 교회 건축의 '표준'이 되었다. 7세기 이후에는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대부분의 유럽 등지에서도 이 양식이 사용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의 궁전 단지 안에 바실리카 성당을 짓기도 했다.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는 황제의 위엄을 반영했고 황궁을 연상시켰다. 이 시기부터 바실리카는 교황으로부터 부여받은 일종의 특별한 칭호로, 특권을 부여받는다. 특히 '원로 바실리카'로 지정된 교회들은 높다란 교황의 왕좌와 제단을 갖고 있어야 했다.

성모승천 바실리카 /unsplash
성모승천 바실리카 /unsplash

기독교 이전, 로마 건축에서 바실리카는 사업을 거래하거나 법적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세워진 커다란 공간이었다. 내부 공간이 넓으며 양 쪽에 통로가 있고, 건축물 중앙에 높은 천장을 만들어 개량시킨 바실리카 양식은 그리스도교의 성당으로 쓰이며 초기 교회 양식의 원형으로 남았고, 기독교가 들어오며 이 양식이 성당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성당으로 변형된 바실리카는 건물 안 마당을 높은 벽으로 지탱한 지붕으로 막은 후에 옛 마당을 복도, 신자들이 앉는 자리인 곳과 기도실, 예비 신자들이 앉는 자리로 구성된다. 

전세계에서 '대 바실리카'는 총 네 곳이며 '소 바실리카'는 전세계에 여러 곳이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십자가 보목을 모시고 있는 목포레지오기념성당인 산정동성당이 우리나라 최초로 로마 교황청이 지정한 '소 바실리카 성당'으로 인준받았다. 


대표적인 바실리카 

성 베드로 대성당 /pixabay
성 베드로 대성당 /pixabay

성 베드로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베드로 성인의 묘지 위에 세워졌다. 이민족의 잦은 약탈로 많은 피해를 입어 보수 작업을 시행하다 1503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재건축 계획을 본격적으로 세운다. 설계의 책임을 맡았던 브라만테는 로마에서 가장 역사성이 높았던 판테온의 돔 형태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둥을 도입하였고, 건축 책임자였던 미켈란젤로에 의해 오늘날 완성된다. 총 제작에만 1세기가 넘게 걸렸다.

미켈란젤로는 건물 내부를 그리스식 십자가 형태로 하고, 돔을 현재 모습대로 설계했다. 미켈란젤로는 이 돔을 세우기 위해 1558년부터 1561년까지 나무로 된 돔의 모형을 제작했다고 한다. 이후 성당의 마무리 작업은 조각가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맡는다.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장식을 일생에 걸쳐 작업했으며 이 작업은 지금도 그의 가장 대표적이고 뛰어난 작품이 되었다. 그는 성당의 내부가 조화롭게 어울리는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성당 바닥은 대리석으로 치장하고 양쪽 회랑에 있는 부속 성당들의 장식은 붉은색 천연 대리석으로 꾸몄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전통적인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고 전 세계 교회 건축에 영감을 주었다. 

베드로 성인과 바올로 성인의 조각상이 있는 본당으로 들어가려면 입구의 회랑을 통과해야 하는데, 바닥에는 교황 요한 23세의 문장이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대리석상이 오른쪽에 있다. 베르니니가 1670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입구 회랑에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다섯 개가 있으며 맨 오른쪽에 있는 문이 '성스러운 문'으로 16편의 성서 이야기가 부조되어 있다. 

성 베드로 성당의 내부 /pixabay
성 베드로 성당의 내부 /pixabay
성당 내부의 돔 /unsplash
성당 내부의 돔 /unsplash

 당 안으로 들어서면 엄청난 화려함과 웅장함에 말을 잃을 정도이며, 중앙의 제대에서 돔까지의 높이는 137m에 이른다. 대성당 내부에는 44개의 크고 작은 채플, 395개의 조각품이 배열되어 있으며 135개의 모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다.

성당을 들어섰을 때 보이는 커다란 돔은 세계에서 가장 큰 돔들 중 하나로, 돔의 설계는 미켈란젤로가 했지만 건축은 그의 제자인 자코도 델라 포르타에 의해 1590년에야 완성되었다. 돔은 16개의 큰 창문, 프레스코, 96개 이상의 형상을 포함한 6개의 동심원 등 여러 요소를 갖고 있다. 231개의 계단을 오르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난 후에 또 320개의 계단을 올라 돔 꼭대기에 오르면 바티칸과 로마의 광활한 풍경을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flickr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flickr
성 베드로의 청동상 /Public Domain
성 베드로의 청동상 /Public Domain

성당 내부에는 미켈란젤로의 역작인 피에타 조각상이 있다. 성모와 그리스도의 모습이 교묘한 대비를 이루며 어우러진다는 찬사를 받는다. 왼쪽 통로를 올라가면 오른쪽에 성 베드로의 청동상이 있다. 피에타와 함께 이 성당에서 꼭 봐야 하는 것으로, 발가락에 키스를 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고 복을 얻는다는 전설 때문에 오른쪽 발이 다 닳아 있을 정도라고.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건물, 로마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돔 등 여러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 성당만이 보유하고 있는 풍부한 예술과 문화 유지를 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라테나로 대성당 /flickr
라테나로 대성당 /flickr

산 조반니 인 라테나로 대성당은 보통 라테나로 대성당이라 부르며,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교 성당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당이며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서는 전세계 모든 성당의 0순위로 대접받는 곳이다. 대성당 정면 외관에는 '구세주 그리스도를 위하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의 다른 성당보다 우위에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막센티우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면서 근위대는 폐지되고 요새는 무너졌는데, 대성당 건물은 이 요새 유적지 바로 위에 세워져 있다. 

라테라노 궁전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막센티우스의 누이였던 파우스타와 재혼할 때 황제에게 들어왔으며, 라테라노 궁전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로마 주교에게 넘어간다. 궁전에 딸린 대성당은 여러 개축과 확장을 거쳐 최종적으로 로마의 주교좌 성당이 되었다. 이후 두 차례 일어난 화재로 라테라노 궁전과 대성당이 크게 손실되고, 교황이 로마로 돌아왔을 때 이곳이 교황이 거주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이들은 나중에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을 임시 관저로 삼아 떠난다.

라테라노 대성당 내부 /flickr
라테라노 대성당 내부 /flickr
12사도의 성상 /flickr
12사도의 성상 /flickr
카밀로 루스코니의 '안드레아' /flickr
카밀로 루스코니의 '안드레아' /flickr

교황 식스토 5세의 최종 계획이 있을 때까지 대성당은 여러 차례의 재건이 시도된다. 이탈리아의 바로크 건축가였던 프란체스코 보로미니의 지휘 아래 대성당의 내부를 조금 더 새롭게 만드는 작업이 계속된다. 그가 만든 건축물 벽에는 로코코 조각가들이 만든 사도들을 묘사한 조각상들로 채워졌다. 이후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대성당의 외벽 설계도를 공모해 최종적으로 건축가 알렉산드로 갈릴레이의 설계안이 선정된다. 그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축 정면부를 완성해 옛 대성당의 바실리카 양식은 지금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중앙 통로 양쪽에는 보로미니가 설계했던 12사도의 성상이 있다. 170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가 실제 사람보다 더 커다란 사도들의 조각상 디자인을 공모 후 완성까지는 비어 있던 곳이다. 경쟁 끝에 카를로 폰타나와 카를로 마라티를 주축으로 해 이 조각상들이 만들어졌고 이들의 작품은 로마에 있는 바로크 후기 조각상들 가운데 가장 특별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성 바오로 대성당 /pixabay
성 바오로 대성당 /pixabay

전해져 오는 얘기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가 죽은 무덤 위에 작은 성당이 세워지고, 324년 콘스탄티누스 1세의 의해 건물이 사라진 후 그 자리에 기념 성당이 건축된 것이 바오로 대성당이다. 성 바오로 대성당은 다른 대성당들과는 달리 4세기 후반 바실리카 양식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지만 1823년 대화재로 완전히 파괴되어 버리는 비극을 겪는다. 

성당에 보관되어 있었던 르네상스 이전 예술품들도 이때 모두 소실된다. 바실리카를 복원하기 위해 이집트 총독은 설화 석고 기둥을 기증했고 러시아 황제는 모자이크를 위해 값비싼 청금석과 공작석을 보내왔다고 한다. 재건은 레오 12세 교황에 의해 원래의 모습대로 재건축되어 1854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축성되었다. 재건 이전의 건물은 바실리카 양식의 분위기가 있었지만 재건 이후는 신고전주의 양식이 반영되었다. 정원에는 칼을 든 바오로 사도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성 바오로 대성당 내부 /flickr
성 바오로 대성당 내부 /flickr
교황들의 초상화 /flickr
교황들의 초상화 /flickr

성 바오로 대성당의 내부는 거대한 대리석 기둥과 금빛 모자이크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다만 대화재 때문에 몇몇 부분만 온전하게 남아 있을 뿐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러나 대성당에는 여전히 13세기의 모자이크, 12세기 당시 볼 수 있었던 샹들리에, 사도 바오로가 묻혀 있는 대리석관이 남아 있다. 

벽면에는 19세기부터 그려졌던 교황의 초상화를 방문객들이 구경할 수 있고 들어오는 햇빛이 이 초상화들을 비춘다. 또한 벽은 성 바오로의 일생을 담은 장면들을 모자이크로 다시 장식했다. 재건된 대성당은 원래의 건물 형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19세기 만들어졌던 80여개의 기둥을 볼 수 있다. 모자이크들은 원형 그대로 존재하며 주제는 요한 묵시록에서 묘사한 그리스도의 흉상을 둘러싼 교회 원로 24명, 그 위에는 네 명의 복음사가들을 상징하는 동물들이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이다.

2006년, 고고학자들은 제단 아래에 사도 바울의 유해가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대리석 관을 하나 발견한다. 관은 제단에서 꺼내지 않은 상태라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모르며, 단지 한쪽 면만 보이고 있다. 사도의 무덤에는 접근해서도, 만져서도 안 된다는 대성당 측의 입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에 대한 확인을 위해 석관을 열 수 있는지에 대한 요청만이 지금도 남아 있을 뿐이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flickr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flickr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은 고대 로마 양식의 4대 성전 중 하나로 꼽힌다. 1348년 발생한 지진으로 손상을 입고 여러 번 재건을 거쳤다. '마조레'는 위대함, 주요함이란 뜻을 갖고 있으며 건립 후 각 시대별로 새로운 건축 요소와 많은 장식이 첨가되었지만 아직 로마의 초기 그리스도교 성당의 기본 형태를 갖고 있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 /flickr
마리아와 아기 예수 /flickr

대성당 정면의 모자이크는 1292년 교황 니콜라오 4세 때 제작된 것으로 상부 중앙에는 그리스도와 그 주위를 네 명의 천사들이 둘러싼 모습을 볼 수 있다. 모자이크 아래쪽에는 대성당을 세우게 된 유래를 묘사한 것이다. 1743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의 지시로 건축가인 페르디난도 푸가가 주의를 기울여 13세기 모자이크들을 손상시키지 않고 새로 덧붙여진 정면과 잘 어울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대성당이 정면이 만들어지면서 당시 유명했던 조각가들이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각종 대리석상을 바로크 양식으로 조각해 그 위에 세웠다.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내부 /flickr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내부 /flickr
평화의 모후 /flickr
평화의 모후 /flickr

성당의 내부는 좌우로 이오니아식 기둥들에 의해 세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기둥들 중 36개는 대리석, 4개는 화강암이다. 모두 처음 지어졌던 대성당과 다른 고대 로마 건물들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성당 왼쪽에는 '평화의 모후'라 불리는 조각상이 있는데, 교황 베네딕토 15세가 제 1차세계대전이 끝난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세운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한 손을 들고 더이상 다른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모습이고 아기 예수는 평화의 상징인 올리브 가지를 쥐고 있다.

성서의 내용이 그려져 있는 모자이크 /flickr
성서의 내용이 그려져 있는 모자이크 /flickr
성서의 내용이 그려져 있는 모자이크 /flickr
성서의 내용이 그려져 있는 모자이크 /flickr

중앙 제단 뒤에는 1295년 자코포 토리티가 제작한 모자이크가 보인다. 성모가 예수에게 왕관을 받는 모습과 그 주위를 천사들이 둘러싼 모습들이 보이며 성모 대관 모자이크 아래에는 성서의 여러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이 있다

강화성당 내부 /문화재청
강화성당 내부 /문화재청

강화도에 가면 우리나라 최초로 지어진 한옥 성당을 볼 수 있다. 강화성당은 특이하게 교회의 내부가 바실리카 양식으로 되어 있다. 당의 전체적인 건물 배치는 서쪽에 출입문을 두어 서구 형태를 취하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배 모양을 본떠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 및 내삼문과 성당종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두었다. 후미에는 사제관을 배치하여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기도 하다. 다수의 사람들이 모였던 커다란 건물들을 가톨릭에서는 성당의 형태로 받아들였고, 이제 세계 곳곳의 바실리카는 옛 로마 사람들이 드나들었던 것처럼 현대의 사람들이 즐겨 찾는 소중한 문화 유적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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