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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조선 왕실의 모습, 궁중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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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조선 왕실의 모습, 궁중기록화
  • 윤미지 기자
  • 승인 2021.02.02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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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 윤미지 기자] 조선 왕실의 모습은 언제나 호기심의 대상이다. 과거에는 아무나 왕실 출입이 불가했고 현대 역시 그 남아있는 유적을 토대로 왕실을 간접적으로 엿볼 방법밖에는 없어 조선 왕실에 관한 관심과 궁금증은 세대를 구별하지 않고 이어진다.

역사의 기록을 찾아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글로만 표현되어있는 과거의 모습은 머릿속에 쉽게 상상되지 않아 그 풍경을 유추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

베일에 싸여있을 것만 같은 궁중문화도 의외로 관련 자료 자체는 풍부한 편이다. 이를 글로 상세하게 기록한 문헌도 찾아볼 수 있고, 궁중 행사의 경우 시각화한 자료로 궁중기록화가 존재하여 꼭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그 모습을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기도 하다.
 

무신년의 궁중 잔치 /국립중앙박물관
무신년의 궁중 잔치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에서 진행됐던 각종 의식과 행사에 관한 내용은 궁중의 일상만큼이나 많은 관심을 받아 왔다. 특별한 날 거행되었던 궁중의 행사는 왕실 의례 문화와 풍속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해 기록한 내용 역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조선 시대 궁중 행사의 기록, 궁중기록화에 대해서

글로 읽는 조선 시대의 역사도 매우 흥미롭지만 시각화된 자료는 그 시대의 모습을 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담고 있어 문화를 유추하는 것에 더욱더 도움이 된다. 화려한 왕실 행사의 모습을 그린 궁중기록화 역시 그중의 하나다.

궁중기록화는 국가와 왕실에서 이루어진 각종 의식, 행사의 모습을 그려낸 그림을 일컫는다. 궁중의 행사를 사실적으로 표현해서 시각화한 작품으로 궁중행사도라고도 말한다. 궁중기록화는 왕실 행사 전형을 마치 현장에 지켜보고 있는 듯 자세하게 그려내, 현대의 감상자로 하여 더 실감 나게 시대의 모습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궁중기록화가 많은 의미를 가진 것은 그 시대 궁중의 모습은 물론 왕의 삶까지도 유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궁중기록화의 주된 내용은 여러 종류의 궁중 연향, 과거시험과 과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주는 방방, 이조와 병조의 인사행정, 개천의 준천, 진하, 책봉, 능행, 기로소 등이 있다. 또한 조선 왕세자의 관례나 성균관 입학, 회강 등에 관련한 의식을 그림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궁중 연향이다. 궁중 연향을 그린 궁중기록화의 자료가 매우 방대하여 진작, 진찬, 진연, 양로연 등의 각종 궁궐에서 거행한 잔치 대부분을 그림으로 확인할 수 있다.
 

순조어극30년진찬도, 기축년의 궁중 잔치 /국립중앙박물관
순조어극30년진찬도, 기축년의 궁중 잔치 /국립중앙박물관

순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화려한 진찬례 역시 궁중기록화로 확인이 가능하다. 1829년 2월 순조의 사순과 즉위 3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창경궁에서 거행된 궁중 잔치인 진찬은 ‘순조기축진찬도’로 병풍 제작되어 궁중기록화로써 전해진다. 왕과 대신들이 명정전에 모여 잔치하는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냈으며 병풍의 다른 쪽에는 다른 날 자경전에 모인 왕비를 비롯한 여성들의 잔치 모습을 담았다.

고종 임인년에 열린 진연을 그린 ‘임인진연도병’도 궁중 행사 거행의 모습을 담고 있는 그림으로 열폭 병풍으로 제작됐다. 이 그림은 고종황제가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입소하게 되고 이를 경축하기 위한 진연 모습으로 알려진다. 기로소는 문관 중 70세가 넘은 이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이다. 이 진연은 덕수궁 함녕전에서 거행되었으며, 궁중기록화 ‘임인진연도병’은 조선 왕실의 문화와 공연예술을 그림에 담아 더 의미 있는 역사 기록에 해당한다.
 

'임인진연도' 병풍 /국립국악원
'임인진연도' 병풍 /국립국악원

궁중기록화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또 있다. 궁중기록화는 하나의 사진처럼 현장을 그대로 재현해 그려내는데 대부분 제작 동기를 기록하는 서발문序跋文이 따른다. 또 그와 함께 확인 가능한 좌목座目을 통해서 그림 제작에 합의한 관료들 성명과 자호, 생년 등을 볼 수 있으며, 이를 함께 보는 것으로 그림의 제작 시기와 그 당시 문화까지도 유추해보는 것이 가능하다.

궁중기록화의 특징은 여러 시대에 따라 각 궁중 모습을 담아왔으나 왕을 포함한 왕족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은 점이 눈에 띈다. 대한제국기가 끝날 때까지 그려졌던 궁중기록화지만 그 그림에서 왕과 왕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왕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진찬도, 순조의 자리가 비어있다 기축년의 궁중 잔치 /국립중앙박물관
왕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진찬도, 순조의 자리가 비어있다 기축년의 궁중 잔치 /국립중앙박물관

이는 임금의 모습이나 형태를 그림 속에 나타내지 않았던 당시 궁중 법도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왕의 얼굴은 어진 외에는 그릴 수 없었으며 기록화에는 주로 왕의 자리만 그리거나, 왕이 타고 있는 말 위의 빈 모습을 그리곤 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왕의 모습이 등장하는 궁중기록화도 존재한다. 바로 조선 후기 그려진 ‘대한제국 동가도’가 이에 해당한다.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인 채용신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필치가 분방하고 행렬 순서라거나 그 외 문자 정보가 정확하지 않아 이 작가에 대한 추측이 다양하며 네 번에 걸쳐 등장한 고종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어 신비롭다. 

궁중기록화는 시대별 궁중의 모습을 반영하는 그림이었지만 매우 보수적인 그림 작업으로 양식의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정면에서 바라보되 높은 위치에서 피사체를 내려보는 부감 형태로 그려졌고 세부 표현에는 여러 시점이 반영되어 그려진 것이 특징적인 부분이다. 그 외에도 안정적인 좌우 대칭 기법이 돋보인다. 이후 궁중기록화는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원근법과 명암법 같은 서양 화법이 수용되기도 했다.


화원, 조선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다

그렇다면 궁중기록화를 그린 이들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조선 시대에는 그림 그리는 일을 담당하던 관청이 있었고, 이를 ‘도화서’라고 불렀다. 궁중기록화는 도화서에서 그림 그리는 일을 맡았던 화원이 주로 맡아 작업했다. 화원들은 한 번에 여러 그림 작업을 맡아서 진행했고, 공동작업을 주로 했으며 궁중기록화는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전해진다.

이 화원은 비교적 이름을 알리기 어려우며 종품에 해당하는 격이 낮은 잡직이기는 했으나 녹봉을 지급받으며 또한 관직의 기회도 있었다. 특히 그림을 배우고 화원으로 인정받는 일은 매우 어려웠는데 화원을 뽑기 위해 미리 도화서에 입속 시켜서 전습하도록 화학 생도를 두기도 했다고 한다.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홍도와 조선의 풍속화가였던 신윤복의 이야기를 재구성하여 담은 드라마  /SBS 드라마 '바람의 화원' 공식 포스터

또한 화원이 진급하기 위해서는 국가에서 시행하는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여러 시험과목 중 응시자는 두 가지를 선택하여 그리고 특히 죽, 산수를 잘 그리는 화원은 우대를 받았으며 이에 대한 배점이 높은 것이 그 이유였다. ‘죽’은 사대부의 절개를 상징하는데 이를 사군자의 으뜸으로 여기는 당시의 풍조가 반영되었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도화서 화원들은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매우 다양한 그림 작업에 참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의례, 제례, 의장 등의 내용을 기록으로 담고 있는 의궤 속의 그림 의궤화였다.

의궤는 조선 시대 왕실에서 거행된 주요 행사를 소상하게 기록해둔 서책이다. 보통 실록에도 의례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으나 그 내용이 많고 소상하게 기록된다는 점, 그리고 행차 모습까지 그림으로 담아야 하여 따로 의궤로 모아 제작했다고 한다. 이 의궤에 들어가는 그림을 가리켜서 의궤화라고 한다.
 

궁중기록화를 통해 거행되었던 잔치의 악대 구성 등 다양한 궁중 문화를 자세하게 엿볼 수 있다. 정해년의 궁중잔치 /국립중앙박물관
궁중기록화를 통해 거행되었던 잔치의 악대 구성 등 다양한 궁중 문화를 자세하게 엿볼 수 있다. 정해년의 궁중잔치 /국립중앙박물관

사실 넓은 관점으로 의궤에 수록되어있는 그림 역시 궁중기록화에 포함할 수 있다. 왕실과 국가에서 거행한 각종 행사를 그림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비슷한 개념으로도 본다. 다만 의궤에 들어가는 그림은 행사의 전체적인 모습 기록의 의미를 담고 있었으며 궁중기록화는 행사 자체의 풍경을 사진처럼 담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화원은 국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그리기도 하였다. 당시 임금의 용안을 그린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으며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진 가장 어려운 작업에 해당했다. 당연히 1급 화원 출신에서 작업자를 선발했고 당대 이름난 화원이 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임금의 용안을 그리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로 기록에 따르면 어진을 잘 그리면 출세하는 기회를 얻거나 상을 하사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영조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영조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 시대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도 도화서 화원으로 정조의 신임을 얻어 당대 이름난 화가로 활동했다. 18세의 어린 나이로 도화서 화원이 됐던 김홍도는 그 실력을 인정받아 28세에 정조의 어진을 그렸다.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향연도 /국립중앙박물관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향연도 /국립중앙박물관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향연도 /국립중앙박물관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향연도 /국립중앙박물관

당시 그림을 그리는 직업은 비교적 격이 낮은 잡직에 해당했음에도 김홍도는 정조의 신뢰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역사 속 기록에 따르면 김홍도는 동참 화사로 참여를 했던 것이며 주관 화사로는 작업하진 않았다고 한다.


청계천에서도 볼 수 있는 궁중기록화,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역사 속 그림이라는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궁중기록화를 쉽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청계천을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역시 왕의 행차 모습을 담은 의궤화이자 궁중기록화이다. 이 그림 기록은 청계천 광통교 인근에서 직접 볼 수 있으며 세계 최대 규모의 도자 벽화로 알려져 있다.

이 궁중기록화는 정조의 수원 행차 8일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정조는 아버지인 장헌세자의 회갑을 맞아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수원 화성, 현릉원을 다녀온 행차 모습을 기록한 그림이다. 장헌세자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도세자이다. 현재 청계천에 설치된 행차의 모습은 역사학자의 고증이 반영되어 재현되었고 미술전문가가 이를 작업했다고 알려진다.
 

화성원행의궤도 /국립중앙박물관
화성원행의궤도 /국립중앙박물관
화성원행의궤도 /국립중앙박물관

이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역시 당대의 일류 화원들의 작업으로 전해진다. 특히 김홍도가 참여했다고 하여 더 눈길을 끄는데 국왕인 정조에서 하급 군졸까지 하여 1천 779명의 사람과 말 779필의 행렬 모습이 그려져 있어 그 규모가 굉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는 궁중기록화이면서도 의궤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원형 을묘 정리의 궤’라는 책에 해당 그림이 수록되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기록화의 경우 풍속화로서 당시의 모습을 자세하고 섬세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특히 행렬에서 보이는 격식과 그 시대 복식, 악대 구성 등 여러 문화를 함께 연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시대의 복식과 악대 구성 등의 내용을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화성원행의궤도 /국립중앙박물관

글은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와 비슷한 것 같지만 그림은 조금 더 직관적이다. 그림을 감상하는 행위는 때론 그 시대, 그 장소로 화자를 데려다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조선 시대 풍속화는 역사 속 조상의 모습을 섬세하고 실감 나는 형태로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에 그 가치를 가진다. 이는 시대상의 모습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분류되기도 한다.

궁중기록화 역시 이와 같다. 왕의 삶과 궁중에서 거행되었던 여러 의식과 행사를 그림을 매개로 실감 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어 신비한 궁중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의 시각에서 살펴보는 궁중기록화는 더욱더 특별함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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