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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예인, 기생의 삶에 대한 사실과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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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예인, 기생의 삶에 대한 사실과 오해
  • 윤미지 기자
  • 승인 2021.01.22 1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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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화가 지은, 우리나라의 기생에 대해 그 역사와 실상을 다룬 책, 조선해어화사, 국립한글박물관
이능화가 지은 우리나라 기생에 대한 역사를 담은 책, 조선해어화사 /국립한글박물관

[핸드메이커 윤미지 기자] 기생은 예로부터 말을 아는 꽃이라 하여 해어화라 하였다. 잔치나 술자리에서 가무를 통해 흥을 돋우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이를 천하게 생각하는 인식이 있었지만, 기생은 실제 조선의 예인이면서 당대의 지식인과 대화를 나눌 정도로 영리한 여성들이었다. 

물론 기생의 구분에 따라서 매춘을 병행하는 일도 있었으나, 예인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춤이나 음악에 뛰어난 기량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다만 자신의 역량이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경우엔 다른 방도가 없어 매춘을 겸하는 일이 흔히 발생했다. 기생도 능력에 따라 구분이 되다 보니 실력 있는 예인으로 인정받으려면 타고난 수재여야 하는 것은 물론 수련 또한 필요했다. 

비록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기생을 매춘부로 바라보는 시선이 생겼지만, 기생은 근대 이전의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여성이 사회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신분이었다. 한국사의 흐름에서 종합예술인으로 평가받던 기생의 삶은 어땠을까. 


매창불매음(賣唱不賣淫), 노래를 팔지언정 몸을 팔지는 말라

기생의 삶에 관해서 들여다보려면 먼저 현대 사회에 만연한 오해를 해결해야 한다. 흔히 기생이라는 직업을 떠올리면 몸을 파는 일, 매춘을 주 업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생긴 이미지로 실제 조선 시대의 기생은 엄격한 자기관리를 통해 기예를 다지는 예술인에 해당했다. 

기생에 대한 현대의 왜곡된 시선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여러 TV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기생을 조명하는 것에 있어 기방에서 술을 따르고 유흥을 제공하는 관점에서만 표현된 것에서 그 문제를 찾을 수 있다. 그 가운데에 조선 시대 중종 때의 유명한 기생이었던 황진이의 삶을 그린 드라마나 영화가 공개되면서 일반인들도 예인으로서 기생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기생은 조선 시대 신분 중에서도 가장 낮은 신분인 천민에 해당했다. 하지만 천민이라는 사회적 시선은 그들의 활동에 있어 생각보다 큰 벽이 되지 않았다. 기생은 주로 잔치나 술자리에서 춤, 음악을 통해 흥을 돋우는 직업이었다. 그들은 천민의 신분인 것보다 오히려 자신이 어떤 기생으로 분류되어 활동하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기생에도 단계가 존재했으며, 개인이 겸비한 예술성, 지성, 미모에 따라서 일패 기생, 이패 기생, 삼패 기생으로 구분이 됐다. 일패 기생은 오로지 임금 앞에서만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 기생이었다. 실제 일패 기생들은 나라에서 직접 관리하기도 했고, 사실상 그 신분을 양인으로 취급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선 시대 양인 여자는 성매매를 못하게 하는 법이 있던 때이므로 일패 기생은 거의 매춘을 하지 않았다. 물론 성매매를 금지하는 법은 기생에게는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일패 기생은 국가의 중요한 업무를 맡아 외교관을 접대하기도 했고, 기생으로서 은퇴한 후에는 일반인과 혼인하는 일도 존재했다. 특히 일패 기생은 궁궐 출입 또한 가능했다고 알려진다. 그만큼 모든 기생이 단순히 몸을 파는 일을 하였다고 여기는 관점은 잘못된 것이며, 그들의 직업적 분류는 예술인에 해당했다고 여겨진다. 
 

기생의 모습이 담긴 사진엽서, 양금 타는 기생들, 국립민속박물관
기생의 모습이 담긴 사진엽서, 양금 타는 기생들 /국립민속박물관
승무를 추는 기생의 모습이 담긴 그림엽서 /국립민속박물관
승무를 추는 기생의 모습이 담긴 그림엽서 /국립민속박물관

이패 기생은 관기와 민기로 나뉜다. 관기는 문무백관을 상대로 활동했고 민기는 일반 양반을 상대하며 가무를 선보였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이패 기생 역시 매춘을 하지 않았지만 음지에서는 이뤄졌던 것으로 알려진다. 삼패 기생은 일반 평민을 상대했으며 노래와 춤, 매춘을 병행했다고 한다. 이로써 종합예술인으로서 능력을 키우고 직업적 소명을 가졌던 것은 실제 일패 기생과 이패 기생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삼패 기생의 경우 매춘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것에 어느 정도 이유가 있다. 당시 기생의 단계에 따라서 부를 수 있는 노래와 춤이 한정되어 있었다. 삼패 기생의 경우 그 위에 단계에서 허용되는 노래와 춤을 부를 수 없으며 낮은 수준의 잡가나 민요만을 부를 수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매춘이 주 업무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기생은 자신의 능력 여하에 따라 주 업무가 정해졌고 대부분 기생은 일패로서 활동하기 위해 예술적 재능을 키우는 것에 집중했다.

사실 우리가 종합예술인으로 정의를 내리는 삶은 일패 기생과 이패 기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삼패 기생도 당연히 그 시대의 유녀, 작부 등과는 확실히 분류되어 있었다고 전해지나 비교적 기예의 수준이 낮았다고 한다.  

특히 주된 고객인 상류층 양반을 상대하려면 춤과 노래가 뛰어난 것은 물론 기생이라 하더라도 시조, 학문 등에 넓은 견문을 갖추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일패 기생과 이패 기생은 높은 수준의 지식까지 두루 겸비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기생은 천민의 신분이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덕수궁 중화전 앞의 관기와 관인, 사진엽서 /국립민속박물관
덕수궁 중화전 앞의 관기와 관인, 사진엽서 /국립민속박물관

조선 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궁중 연회라거나 예인이 동원되는 자리가 많았기 때문에 기생청을 통해 이들을 직접 관리했으며 재능부터 높은 수준의 지식, 고매한 자태와 성품까지 갖추도록 교육한 것을 미루어 볼 때 기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니었던 것으로 예측된다. 


기생의 화려한 삶, 그이면 

흔히 기생의 모습을 떠올리면 화려한 한복과 그에 걸맞은 어여쁜 외모를 생각하곤 한다. 우리가 방송 매체를 통해서 보는 기생은 외적인 모습에만 치중하는 이미지에 국한되는데, 이들은 자신을 꾸미고 돋보이는 것 외에는 꼭 하는 일이 없게 느껴진다. 이에 대해서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물론 기생이 화려한 한복을 즐겨 입고 갖가지 장신구로 자신을 치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조선 시대 사회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존재했으며 복식 역시 이에 따라 제도화되어 있던 때였다. 조선 시대의 그 엄격한 복식 금제에서 유일하게 제외되는 대상이 바로 기생이였다.

조선 시대에는 계층에 따라서 입을 수 있는 옷의 종류와 그 색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었지만 기생들은 여기서 예외의 존재였다. 실제 복식 금제에 있어 기생은 많은 특혜를 받았는데 금과 은으로 장식된 노리개는 물론이고 수를 놓은 아주 화려한 신을 신기도 했다고 하니 다소 사치스러운 복장도 허용이 됐던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기생은 한복 색상에서도 자유를 가졌다. 화려한 색상은 물론 수가 들어갔거나 무늬가 있는 옷감, 고급 비단을 사용하는 것 또한 허용됐다. 기생은 머리 장식부터 그 외 장신구들까지 모든 화려한 복장을 마음대로 입을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천민이었지만,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조선 시대 사회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기량을 뽐낼 수 있었던 유일한 직업이 아닐까 싶다. 

기생의 삶이 이면적이라는 점은 여기에 있다. 직업적으로는 천민 신분에 해당하지만 여기에 얽매이지 않고, 엄격한 신분제도 속에서 이를 대표적으로 표시하는 복식을 자유롭게 입었다는 점은 굉장히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신분제도에 자유롭지 않았던 그 시대를 생각하면 유일하게 이에 대해 예외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 엄청난 특혜로 여겨진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행위는 지양해야 하지만 자신이 어떤 옷을 입고 스스로 어떤 모습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권이 있는 사람으로서, 기생은 일정 부분 당당하고 자유로운 이미지로 비추었을 것이라 인식된다. 실제로 기생의 옷과 화장이 유행하기도 했는데 물론 일반적인 신분에서는 사치 금지법에 따라 이를 그대로 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예측된다. 

흔히 기생의 화려한 복식을 떠올리며 대부분 외면에 치중한 삶을 살았을 것이라 예상하기도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바로 잡을 것이 많다. 조선 시대의 기생은 체계적으로 양성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패 기생은 종합예술인으로 분류되었으니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기생은 이를 키우는 학교인 ‘교방’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조선 전기의 기록으로는 나흘에 한 번 관습도감에 나가 춤과 여러 악기를 배웠다고 한다. 관습도감은 조선 전기 음악에 관한 행정기관이었다. 기생 수업이 생각보다 높은 경지에서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것은 가곡과 악기를 배울 때 스승이 정해졌으며, 이를 익히는 것을 게을리하면 수업하는 스승도 함께 벌을 받았을 정도였다고. 기생들은 이곳에서 가곡과 당비파, 현금, 거문고, 가야금, 장구, 아쟁, 향비파, 해금, 대금 등 다양한 기악을 익혔고, 시험을 통해 일정 수준을 증명하기도 해야 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기생의 가장 기본적인 재능으로 춤과 노래, 급에 따라서는 판소리나 각종 재주도 함께 익혀야 했다. 
 

기생은 다양한 악기를 배웠다, 거문고, 국립민속박물관
기생은 다양한 악기를 배웠다, 거문고 /국립민속박물관

기생은 신분의 천함을 떠나서 당대의 지체 높은 남성과 어울리며 풍류를 즐기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다. 그러므로 각종 예술적 재능을 타고나거나 익히는 것과는 별개로 각종 시와 서에 능통해야 했다. 화술도 뛰어나야 했으며 높은 신분의 지식인 남성과 대화를 유려하게 이끌어 나기 위해서는 선비들이 공부하는 만큼 기생도 똑같이 공부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일패 기생들의 지적 수준은 매우 높았는데 어떤 선비들은 기생과 학문에 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즐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당대에 학식을 지닌 선비들은 풍류를 즐길 때도 시를 읊거나 학문에 대해서 논하는 일이 보편적이었다. 사극에서도 선비들이 사군자를 그리거나 시를 쓰고 읊는 장면은 자주 접했을 것이다. 기생 역시 이와 수준을 맞추기 위해서 항상 지식을 갖추기 위해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기생 문학이 따로 존재했을 정도라고 한다. 
 

세 명의 남자가 기생들과 뱃놀이를 하는 모습, 조선회화 신윤복필 풍속도첩 주유청강 /국립중앙박물관
세 명의 남자가 기생들과 뱃놀이를 하는 모습, 조선회화 신윤복필 풍속도첩 주유청강 /국립중앙박물관
18세기 조선의 간소한 기방풍경, 조선회화 신윤복필 풍속도첩 홍루대주 /국립중앙박물관
18세기 조선의 간소한 기방풍경, 조선회화 신윤복필 풍속도첩 홍루대주 /국립중앙박물관

기생의 예술적, 지적 견문이 굉장히 넓었다는 것은 그들이 국문학에 끼친 영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고려가요의 전승은 상당수 기생에 의해서 이뤄지기도 했다. 기생은 전통 예술을 가르치고 이를 전승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만큼 당시에는 가부장적 유교 사상이 만연해 있었기 때문에 일패 기생이 아무리 좋은 대접을 받았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상류층 남성을 접대하고 그들의 풍류를 돕는 이미지를 벗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상류층인 양반을 상대하더라도 천민 신분인 기생 자체가 상류 사회에 속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고 전해진다. 
 

대동강에서 평안감사가 베푼 잔치의 모습,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향연도 /국립중앙박물관
잔치에서 춤을 추고 있는 관기,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향연도 /국립중앙박물관
평안감사가 베푼 잔치의 모습, 배 위에서 관기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전 김홍도 필 평안감사향연도 /국립중앙박물관

기생을 보고 ‘말을 이해하는 꽃’이라 하지만 꽃을 감상하는 몫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다. 당대 선비 이상의 재능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기생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상대가 되어주기 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기생의 삶은 그 시대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비교했을 때 관념적으로는 얽매였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재능에 비해서 후대에 전해진 가치는 비교적 약하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사실 기생으로 알려졌지만 우리에게 시인으로도 익숙한 인물이 다수 존재한다. 다수의 드라마나 영화로 조명됐던 조선 기녀 ‘황진이’는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등의 시조로 유명하다. 황진이는 용모가 출중한 것은 물론 가창도 빼어났으며 시조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 
 

드라마 '황진이' 공식 포스터 /KBS
드라마 '황진이' 공식 포스터 /KBS

시에 능했던 기생은 황진이뿐만이 아니다. 전북 부안에 유명한 기생이었던 ‘매창’은 조선 시대 황진이와 함께 당대 이름난 인물이었다. 비록 기생의 신분이었지만 거문고에 재주가 있었고 시에 능통했다. 매창은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사후 그가 지은 시 58편이 모여 ‘매창집’이 발간됐다고 한다. 

특히 기생 매창은 시에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현대에서는 홍길동전을 지은 조선의 소설가 허균의 연인으로 더 유명한 점이 아이러니하다. 황진이 역시 유명한 시조를 가진 조선의 여류 시인으로 평가받기보다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한 지족선사를 유혹하는 일에 몰두했다거나, 그의 애정 관계에 관해 일화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기생의 신분 중 여성 시인으로 명성을 날린 인물은 또 있다. ‘금원’은 조선 시대 여성 시인으로서도 유명하지만 그 시대에 여성의 몸으로 혼자서 금강산에 오르고 단양팔경을 구경하며 여행을 다녔던 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여성이 혼자 여행할 수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금원의 기개는 실로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금원은 기생 명부에 이름을 올리기 전에 전국 일주에 나섰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때 남장을 하고 조선을 유람했다고 한다. 14세의 여행기는 20년이 지나고 금원이 34세가 되어서야 ‘호동서락기’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빛을 본다. 금원의 경우 기생이었다는 것보다 여성으로서 당시에는 금기시되었던 여행을 직접 행하고, 이에 대한 여행기를 썼다는 사실이 더 크게 알려져 있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금원이 ‘금앵’이라는 이름으로 기녀 생활을 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 이에 대해서는 추정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이 외에도 여류 시인으로 이름은 날렸으나 기생이라는 이유로 작품이 보존되지 못한 이들이 많다. 기생에 관해서는 현재까지도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일패 기생의 경우 몸을 파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겼으며 종합예술인으로서의 절개를 지킨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실제 이패 기생부터는 뒤에서 남몰래 매음하였다고 하여 ‘은근짜(慇懃짜)’라고 불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 기생을 예인으로 정의 내릴 것인지 혹은 고급 접대부로 볼 것인지는 여러 의견이 충돌한다. 하지만 직업적 소명을 가진 일패 기생들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된다. 기생의 삶을 미화할 필요도 없지만 또한 그들의 예술적 활약상을 축소 시킬 이유 또한 없다. 

화려하지만 그 이면에는 씁쓸함이 묻어나는 조선 시대 기생의 삶은 그나마라도 조선 시대 여성이 사회적으로 자유롭게 예술적 활동을 했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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