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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알렉산더가 동양의 불교를 만나다, 간다라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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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알렉산더가 동양의 불교를 만나다, 간다라 예술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0.11.2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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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라 예술의 대표적인 불상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나는 마케도니아에서 출발, 그리스를 정복했다. 트라키아와 일리리아를 꺾고, 트리발리아와 메디아를 차지하고, 헬레스폰트에서 홍해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아시아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의 끝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이르렀다. 이제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리라.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리라. 나는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선을 허문 사람이노라. 왕위에 오른 지 9년 만에, 나이 스물여덟에, 두 대륙의 주인이 되었노라.” 

동서양을 아울러 장장 약 2만 7천Km의 대륙을 점령했던 알렉산더 대왕이 한 말이다. 334~326년 경 알렉산더가 동방 원정을 떠났을 때에만 해도 서양 사람들은 동방 지역에 대한 지식이 없었다. 인도라는 나라는 아주 작은 나라로 생각했고, 중국은 아예 있는지도 몰랐다. 이후 그리스인들과 마케도니아인들이 아시아 서반부 곳곳에 정착하게 되며, 그 중 지금 우즈베키스탄 남쪽인 박트리아 지역에서 헬레니즘 문화가 뿌리내리게 된다. 박트리아엔 지중해처럼 체육관과 극장도 있었고, 궁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학파의 철학책 단편도 출토됐다. 그리고 조금 더 남쪽으로 올라간 간다라 지역에서 불교 미술이 시작되었다. 


간다라 예술의 발전 과정 

'간다라' 라는 용어는 여러 의미가 있다고 추정하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은 향기를 의미하는 간드(Qand, Gand)와, 땅을 의미하는 하르(Har)를 이어붙였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간다라' 는 정직하게 '향기의 나라' 라는 뜻이 된다. '간드' 라는 단어는 향기 말고도 '물웅덩이'란 뜻이 있었고, 페샤와르 지역이 우기에 좋은 배수로를 가진 호수가 있었던 축복받은 곳이기에 힘을 받는 이론이기도 하다.

2세기 간다라 양식의 불상 /Thinkstock

고대 간다라는 오늘날 파키스탄 북부 지역으로, 페샤와르 계곡과 포토하르 고원을 포함해 아프가니스탄의 잘라라바드 지역까지 해당된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은 이 지역을 정복하고 7세기에 걸쳐 간다라 예술을 다른 나라에 전파했다. 이 교류는 파르티아 제국, 인도와 그리스 등 도시들을 잇는 교역로를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 길은 아라비아해를 건너기 위해 계절풍을 이용한 해양 항로가 도입되며 점차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고, 간다라를 거쳐 중앙 아시아와 중국으로 이어지는 육로 무역길도 만들게 했다. 간다라는 무역로를 통해 인도, 헬레니즘, 로마, 파르티아 미술 등 여러 문화가 혼합해 더 독특해진 불교 예술과 건축 문화 등을 꽃피울 수 있었다. 

간다라에 대한 첫 언급은 기원전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전 인도 북서부에서 중앙아시아 일대를 지배했던 쿠샨 왕조에서 특히 번성했고, 1세기 쿠샨 왕조의 제 3대 왕인 카니슈카는 불상을 신격화시키며 처음으로 다른 나라에 불상을 소개하기도 했다. 불상만 수천 개가 제작되었고 손에 들 수 있는 작은 불상에서부터 신성한 장소에 세워지는 조각상까지 나라 곳곳에서 불상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2-3세기 파키스탄, 쿠샨 왕조의 미륵보살 조각품 /V/A Museum


실제 불교가 아소카 왕 시대에 이어 두번째 부흥기를 맞은 것도 카니슈카 왕의 시대였다. 부처의 이야기는 간다라 미술에서 흔한 소재가 되었고, 도시의 예배당이나 수도원에 안치된 불상은 지금도 볼 수 있다. 간다라를 포함한 쿠샨 사람들은 로마와 계속 접촉하며 고전적인 로마 예술에서 많은 기법들을 배웠다. 불교 활동의 중심지가 된 쿠샨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에서 온 순례자들을 반겼고, 간다라 미술과 건축, 문화 등이 같이 발전하며 황금기를 맞이했다.

이렇듯 간다라 예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로마 제국과 해로 및 실크로드를 통한 국제 무역의 번영도 한몫했다. 불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박트리아, 중앙아시아, 중국 등으로 확산되었다. 5세기 후 간다라가 여러 나라에 침략당하면서 불교 유적지들은 파괴되거나 사라져 갔지만, 카슈미르 등 간다라의 핵심 지역에서는 불교의 명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간다라 도시는 이후 800년대 후반까지 티벳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가, 에프탈 족의 침입과 파괴로 간다라 예술은 기원전 1200년 경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간다라의 불교 미술 

쿠샨 왕조, 서 있는 부처상 /flickr

간다라는 문화적 갈림길에 위치했기 때문에 불교 예술은 대체로 그레코로만, 이란, 인도 양식 등 여러 문화의 융합으로 나아갔다. 그레코로만의 영향으로 1세기 부처에 대한 의인화 묘사가 처음 등장하고, 이 양식은 쿠샨 왕조 때 절정을 이뤘다. 실크로드의 영향으로 간다라 불교 양식은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불교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탁실라, 페샤와르, 마단 등의 도시에서는 오늘날에도 간다라 예술의 흔적을 볼 수 있다. 

불상 재료로는 초기에 녹색 천매암과 청회색 운모편암 등을 썼고, 3세기 이후부터는 조각상에 원래 색을 칠하고 금박을 입혔다. 전기는 주로 석조 조형, 후기는 소조 조형을 만들었다. 내용적으로는 석가를 중심으로 한 불상이 가장 많았고, 보살상이나 천부상도 많이 만들어졌다. 얼굴 모양이나 의상은 모두 그리스풍이었는데, 간다라 지역이 예전 그리스인들의 거점이었기 때문에 간다라 미술은 헬레니즘 양식이 결합한 형태로 발전했다. 엄밀하게 인도의 자체적인 발전은 아니지만 헬레니즘풍의 양식이 간다라의 지역적인 특성과 결합해 특별한 '간다라 양식' 이란 예술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파키스탄의 각 지역마다 불상이 발전한 방식도 달랐다. 스와트 지역은 인물들의 전체적인 비례가 균형이 잘 맞지 않거나 짧으며, 신체의 각 부분도 파격의 비례로 구성되었다. 탁실라 지역의 불상은 전체적으로 유물이 다양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특히 불보살상 중 머리 부분은 파도형의 머리 등으로 다양하며 동시에 희로애락의 감정이 표현되어 있다. 간다라 미술의 중심지였던 페샤와르 지역은 보리수, 스투파, 법륜, 보좌 등의 조각상이 상징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얼굴의 생김새가 인간적이고 개성적이다. 
 

부처의 얼굴 /The Met

부처의 얼굴 

이 조각상은 탁실라에 있는 간다라 유적지에서 초기 스투코 방식과 비슷한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섬세한 모델링은 이 시기 석재로 제작된 다른 조각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한 표현력을 자랑한다. 
 

 부처의 죽음 The Death of the Buddha /The Met

부처의 죽음 (열반상)

부처는 80살이 되던 해 쿠시나가르 성 주변에서 영면했는데, 조각에서 보이는 부처는 윤회의 순환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른 상태다. 특별한 점이라면 부처를 둘러싼 신도들이 비탄에 잠긴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부처님이 열반에 이르렀으니 전혀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등을 돌린 채 평온하게 있는 수바드라 스님의 모습과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간다라 양식을 바탕으로 부처의 죽음을 다룬 이 이미지는 이후 수세기 동안 불교계를 통틀어 두고두고 존경받는 작품이 된다. 
 

앉아 있는 석가모니불 Seated Buddha /The Met

앉아 있는 석가모니불

이 작은 청동 불상은 초기 간다라 양식 중 석가모니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표현 중의 하나다. 조각상에서 그는 오른손에 시무외인(Abhaya Mudra)이라는 수인을 취하고 있다. 시무외인이란 손의 모습은 오른손을 꺾어 어깨 높이까지 올리고 다섯 손가락을 가지런히 펴서 손바닥이 밖으로 향하게 한 형태이다. 이것은 '나를 믿으면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요가 자세로 앉아 있는 그의 후광은 톱니바퀴 모양을 하고 있다. 이 불상은 다른 간다라 불상들에 비해 로마의 조각상과 더 가까운 느낌이다. 헤어스타일과 의상, 조각상의 형태는 당시 서양 양식과도 밀접히 교류했음을 알 수 있다. 


간다라의 건축 예술  

간다라 건축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거의 천 년 동안 지역의 정체성을 함축한 수도원이나 부도 같은 종교 시설이 지속적으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부도는 주로 불교 성인들의 유골을 경외하기 위해 세워졌고, 가장 오래된 부도는 부처의 유골을 직접 보관하고 있다 한다. 불상 외에도 높은 지위의 승려들이 탑을 세웠고, 불상과 관련된 신화적인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도 같이 표기했다. 
 

굴카다 유적지, 과거 이 유적지의 중앙엔 거대한 부도가 있었다 /flickr

스투파(사리탑)는 주로 건축적인 미학의 요소도 있었지만, 대부분 간다라 예술을 전시하거나 숭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다. 처음 부도는 원형의 기지로 세워졌고 크기도 작았지만 부처에 대한 숭배가 점점 커짐에 따라 많은 신도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정교해지면서 더 화려해졌다. 쿠날라나 다르마라지카의 부도는 처음엔 작았다가, 이후 아소카와 카니쉬카 같은 통치자들에 의해 큰 규모로 확대된다. 

불탑은 그 지역에서는 불교의 건축 업적에 대한 일종의 상징이 되었고, 종교적 권력의 구조 또한 견고하게 만들었다. 부도는 그 자체로 종교적인 이야기와 사건들을 묘사하는 이미지로 장식되었고 불탑은 예배의 주요 중심지가 되었다. 수도원이나 가람 등의 종교 시설은 불교 전통 문화의 큰 부분이 되었고, 그리스나 페르시아 유적지에서 보여지는 쌍두취탑 같은 경우는 그 지역에 존재했던 여러 문화가 혼합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쌍두취탑 Double-Headed Eagle Stupa /Muhammad Bin Naveed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 /Public Domain

쌍두취탑 Double-Headed Eagle Stupa

태양의 사원이라 불리는 힌두교 유적지로, 스투파의 기단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 조각이 있어 쌍두취탑이라 불리는 이 탑은 불교와 그리스 예술이 혼합된 양식으로 조형, 처마, 기둥 등은 헬레니즘 양식도 띠고 있다. 쌍두취탑의 양식은 서아시아의 바빌로니아나 히타이트에서 볼 수 있었고 그리스의 '기하학 양식' 시대에도 쓰이던 것이다. 서방의 영향 아래 샤카, 파르티아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한다. 두 개의 머리를 가진 독수리는 좌우, 동서양을 넘나들며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의미를 담는다. 

 

다마라지카 부도 Dharmarajika Stupa /Dr. Muhammad Kashif Ali

다마라지카 부도 Dharmarajika Stupa

다마라지카 부도는 간다라 예술과 문명의 아이콘이다. 부도(stupa)는 사리탑이란 뜻으로 붓다의 사리가 보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탑은 기원전 3세기에 아소카 대왕에 의해 세워졌다. 파키스탄에서 가장 큰 부도로 이곳은 한때 불교의 땅이었음을 보여준다. 부처가 처음 설법을 행한 자리로도 추측하는 곳이다. 

여섯 번의 보완 공사를 거쳐 인도 사회에서 불교의 위치를 과시하기라도 하듯이 30미터의 높이로 지어졌지만 1794년 바라나시의 마하라자가 궁을 지을 벽돌을 구하기 위해 헐어버려 현재는 밑부분의 기단 부분만 남아 있다. 헐어버릴 때 스투파 안에 모시고 있던 녹색 대리석의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붓다의 사리를 포함한 유물은 모두 갠지스 강에 버려졌다고 한다. 현재는 같이 들어 있었던 돌로 된 상자만 인도의 콜카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타흐티바히 불교 사원 Takht Bahi Buddhist Monastery /flickr

 타흐티바히 불교 사원 Takht Bahi Buddhist Monastery

타흐티바히의 불교 수도 단지는 페샤와르에서 약 80km, 마르단 시에서 북서쪽으로 16km 떨어진 152m 높이의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로마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불교의 성지로 번영했던 간다라 지방의 유적이다. 남쪽에 있는 중심스투파는 사각 모양의 기단만 남아 있으며, 기단 바깥쪽에는 커다란 불상의 다리를 발굴해낸 '큰 불상의 벽'이 있다.

타흐티바히사원은 20세기 초 발견해 복원한 곳으로서 2세기 무렵 쿠샨왕조의 왕 카니슈카가 건설하였다. 안뜰에는 참배객들이 바친 35개의 작은 스투파들이 있고 사원 벽면은 스투코라고 불리는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산마루 위에 위치했기 때문에 훈족과 다른 적대 민족의 침입을 피할 수 있었고, 덕분에 사원의 원래 특성이 대부분 오늘날까지 잘 간직되어 있다.


동서양 문화의 화합이 있던 자리, 간다라 

간다라 문화는 우리나라에도 어김없이 영향을 끼쳤다. 인도 간다라 지역의 마라난타 존자는 중국 남조를 거쳐 백제로 건너왔다. 영광 법성포에 도착한 마라난타를 침류왕은 교외까지 나가 그를 맞이했고, 궁궐 안에 머무르게 했다. 참고로 법성포의 법(法)은 불교를, 성(聖)은 성인인 마라난타를 가리킨다. 그는 궁중에 머물며 국왕 등 왕족에게 설법을 전했고, 백성들까지 점점 교화되어 불교를 신봉하게 된다. 이것이 백제 불교가 처음 시작된 계기라 전해져 온다. 마라난타는 침류왕을 설득해 385년 새로운 도읍지인 한산주에 백제 최초로 절을 창건하고, 10명의 백제인을 득도시켰다고 한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엔 지금도 아미타불과 마라난타 존자를 포함한 사면대 불상과 부처의 일대기를 23면 원석으로 조각한 부용루, 간다라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 등을 볼 수 있다. 
 

백제불교최초도래지 /영광군 

간다라에 최초로 부처의 얼굴을 조각한 불상이 만들어진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사람들이 부처를 인간의 모양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간다라 사람들은 부처를 직접 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 그랬기에 간다라 사람들은 여러 불교 경전에서 만연했던, 부처가 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형상 자체가 없다고 굳게 믿었던 분위기를 깰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신전과 조각이 만들어졌던 것처럼 사람들은 불상을 만들었다. 불상의 제작 자체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아 불상은 불당에 모셔진 채 부처를 대신하는 존재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덕을 쌓고 복을 얻기 위해 쓰인 존재로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다. 단지 부처를 직접 보고 싶었던 사람들의 마음이 닿아 간다라에서 최초로 인간의 형상을 한 불상이 나올 수 있었고, 동서양의 여러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만나고 교류하며 간다라 예술이라는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동양과 서양의 조우, 이제 드디어 세상은 진정으로 연결되었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폴리비오스가 한 말이다. 간다라 왕조는 문화 교류의 교차로에 위치해 동서양의 종교와 문화의 화합을 만드는 구심점이 되었다. 또한 간다라는 그리스의 문화 양식과 불교 문화가 융합된 곳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간다라의 도시 탁실라는 기원전 5세기부터 2세기까지 힌두교와 불교 학문의 중심지가 됐다. 간다라 예술을 품은 문명은 오늘날까지 종교와 문화의 조화로운 화합을 이룩한 여러 역사적인 문명들 중의 좋은 예시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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