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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긴 이야기, 바이외 태피스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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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긴 이야기, 바이외 태피스트리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0.11.16 16: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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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YEUX TAPESTRY 바이외 태피스트리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길이만 70미터에 육박하는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작과 웨섹스 백작 해롤드(후에 영국의 왕이 된다)의 왕위 침탈 전쟁, 헤이스팅스 전투까지의 이야기를 수로 놓은 작품이다.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와 노르만 정복에 관한 사건들이 주로 그려져 있고, 라틴어 비문이 새겨진 75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의 끝부분은 현재는 사라지고 없지만, 아마 이 작품의 끝은 영국 왕이 된 윌리엄의 대관식이었을 거라 추측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최고 업적 중 하나로, 9세기에 걸쳐 온전하게 살아남은 것은 거의 기적 수준이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를 관리했던 관리자 중 하나인 실베트 레마뇽은 2005년 자신이 쓴 저서에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엄청난 길이, 색의 조화가 주는 신선함, 정교한 솜씨, 천재적인 손재주들이 어우러져 한없이 매력적이다' 라고 썼다. 

 

오도 주교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다 /Centre Guillaume le Conquérant

다만 처음 누가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를 윌리엄의 이복 동생인 오도 주교가 이 작품을 의뢰했다는 설이 지금까지 제일 유력하다. 오도 주교를 따르는 추종자 세 명이 태피스트리에 등장하고, 오도 주교가 지은 바이외 성당에서 태피스트리가 발견되었다는 등의 이유다. 명칭 자체도 바이외 성당에서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바이외 태피스트리'라 불린다. 현대의 학자들은 바늘로 한땀한땀 수를 놓은 솜씨가 범상치 않았기에 5세기 이후로 잉글랜드에 거주했던, 앵글로색슨족 중에서도 수를 놓을 줄 아는 사람들이 이 태피스트리를 생산했을 거라 추측한다. 

사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엄밀히 말하면 태피스트리(tapestry)라기보다는 자수품에 가깝다. 태피스트리는 베틀에 실을 걸고 천을 만들며 색실로 무늬를 짜넣는 형식이지만, 자수는 이미 짜 놓은 천에 색실로 무늬를 수놓아 장식하는 미술이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이것이 캔터베리의 한 수도원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캔터베리 자수'로 이름을 바꾸려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한다. 

 

1070년 바이외 태피스트리, 린넨에 울을 수놓음 /BAYEUX MUSEUM

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 그려진 그들의 전투와 문화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헤이스팅스 전투가 일어나기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드워드 왕의 처남인 해롤드 백작이 프랑스로 떠나는 것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해롤드는 프랑스로 가던 중 배가 난파되어 한 지역 귀족에게 붙잡혔다가, 윌리엄 노르망디 공작의 손에 넘어간다. 해롤드는 노르망디에 있는 동안 윌리엄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을 때 에드워드 왕이 죽고 난 후 헤롤드는 영국 귀족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가 된다. 윌리엄은 영국의 왕 자리를 노리고 있었고, 헤롤드가 왕이 되자 즉시 군대를 꾸리기 시작한다. 

곧 윌리엄의 군사들이 탄 배들은 바다를 건넜고, 노르만 군대는 영국 땅에 자리를 잡는다. 윌리엄은 부하들을 시켜 요새를 만들게 하고, 주민들을 약탈하고 잔치를 벌임으로써 그들의 존재감을 굳히기 시작했다. 나중에 헤이스팅스 전투가 일어났을 때의 모습을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꽤 상세하게 묘사를 하고 있다. 결국 윌리엄의 칼에 해롤드 왕은 죽게 되고, 패배한 영국인들이 그곳을 탈출하는 모습이 태피스트리의 마지막 장면에 나온다.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롤드 왕의 죽음 /Centre Guillaume le Conquérant

그것이 끝이다. 갑작스러운 이 결말은 많은 사람들이 이 태피스트리의 내용이 정말 이대로 끝난 건지, 아니면 마지막 부분이 더 있었는데 잃어버린 건지에 대해 꽤 오랜 시간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윌리엄의 영국 정복이 주된 내용이었기 때문에 아마 마지막 부분은 그가 왕으로 즉위하는 모습으로 존재했는지도 모른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1066년 이전 윌리엄과 헤롤드의 관계에 대한 여러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또다른 중요한 이유는 이 노르만 정복에 관한 정치적 사건 뿐만이 아니라 노르만족의 군사, 사회, 문화 역사에 대해 몰랐던 사실들을 알 수 있는 정보들이 있기 때문이다. 

 

매를 부리는 사람 /Centre Guillaume le Conquérant

의복 전문 학자들은 이 태피스트리에 나타난 그림을 보고 앵글로색슨족과 노르만족의 옷 스타일, 패션에 대해 알 수 있게 됐다. 중세 초기의 선박 건설이나 항해, 목공 등에 관심이 있었던 학자들도 윌리엄이 이끌고 온 침략 함대의 모양과 항해를 다룬 부분에서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군사 관련 역사학자들도 마찬가지로 태피스트리에서 보이는 갑옷과 무기들을 연구하고, 전투 장면을 분석해 당시의 군사 기법과 훈련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건축 전문가들도 11세기 건축의 유형에 대한 정보를 태피스트리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건물 구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태피스트리는 노르만 족의 생활, 사회, 문화, 역사 등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정보를 담은 유산이기도 하다. 태피스트리에서 묘사되는 노르만인들은 매우 짧은 머리를 선호하고, 앵글로색슨족은 긴 머리와 콧수염을 선호하는 걸 보여준다. 농사에 위협이 되는 새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파종, 쟁기질 등의 농업 문화도 생생하게 알 수 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그것에 대해 연구하면 할수록 몰랐던 것들을 알 수 있게 한다.
 

1070년 바이외 태피스트리, 20인치 높이의 린넨에 양털 자수 /@Centre Guillaume le Conquérant
1070년 바이외 태피스트리, 20인치 높이의 린넨에 양모 /Centre Guillaume le Conquérant

노르만인들이 영국 해안에 도착하고 나서 첫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식사하는 자리 옆에서는 하인들이 불을 피워놓고 그 위에 빵을 굽는 모습이 보인다.
 

1070년 바이외 태피스트리, 20인치 높이의 린넨에 양털 자수 /Centre Guillaume le Conquérant

식사가 끝난 후 윌리엄과 그의 이복 형제인 오도 교주는 전쟁 관련 회의를 위해 만난다. 한쪽엔 motte and bailey (모테 앤 베일리)를 열심히 짓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토루(모테)위에 탑을 올린 요새로, 밀폐된 안마당(베일리)에 둘러싸여 있다. 전투용 뿔, 방패, 화살을 형상화한 그림들이 당시의 전투 전 상황을 보여준다. 

 

1070년 바이외 태피스트리, 20인치 높이의 린넨에 울 자수 /Centre Guillaume le Conquérant

이 장면은 11세기 전투 장비에 대한 시각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기병대원들은 원뿔형의 철모를 쓰고, 쇄자갑을 입고 방패와 창을 들고 다니는 것이 보인다. 기병대는 갑옷을 입었지만 말들은 갑옷이 없는 게 특징이다. 윌리엄의 전술적 기병 활용은 이 'Cavalry(기병)' 장면에서 나타난다. 기병대는 쉽고 빠르게 퇴각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보병대가 돌격할 수 있도록 상대의 방어를 분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유연하며 위협적인 전술로, 윌리엄은 기병대를 선두로 하고 방패를 들어 서로를 보호하는 보병들을 같이 세웠다. 
 

1070년 바이외 태피스트리, 20인치 높이의 린넨에 양모 자수 /Centre Guillaume le Conquérant

전쟁의 잔혹함을 여과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태피스트리의 중앙이나 아래쪽을 보면 치명상을 입은 채 흩어져 있는 사람들과 말의 모습이 보인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이 바이외 태피스트리를 만드는 데 참여했을까. 중세 초기 앵글로색슨족 중엔 뛰어난 자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자수는 특히 엘리트 계층 여성들에게 가치있는 작업이라 여겨졌다. 이전엔 수녀나 엘리트 여성들이 바이외 태피스트리를 만든 것으로 추측했지만, 지금은 정교한 조직 수준으로 이루어진 자수에서 이 작품을 만든 사람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라 유추한다. 

자수 전문가인 알렉스 마킨은 어떤 대규모 그룹의, 고도의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역시 훈련된 관리자 밑에서 이 70미터 길이의 작품을 작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이 작업이 얼마나 걸렸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아직 없다. 아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자수를 작업할 수 있는지, 재료를 얼마나 쉽고 빠르게 구할 수 있는지 등에 따라 달려 있었을 것이다.
 

현대에서 재현한 바이외 스티치 기법 /flickr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린넨 천에 무늬를 따라 바느질을 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 무늬를 채우는 데 쓰인 실은 대부분 두 겹의 털실로 린넨 실과 섞어 사용했다. 청록색, 금색, 올리브색, 파란색, 흑색 등 열 가지 이상의 색을 썼으며, 실들은 식물이 재료인 원료를 만들어 염색을 해 꿰맸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 사용된 이 '바이외 스티치' 기법은 다양하게 변형되어 17세기 크루엘 자수로 이어져 인기를 끌었다. 

이 태피스트리는 그 수많은 시간 동안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던 걸까.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소위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 이것은 그냥 일반 건물에 전시되었을 수도 있고, 특정한 모임을 위해 아무렇게나 장식됐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1년 중 한 번만 바이외 성당에 전시된 후 계속 나무 궤짝에 보관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또한 나치나 나폴레옹 등에게도 정치적인 선전으로 쓰는 데 유용한 도구로 쓰였기 때문에 안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담으로, 나무 궤짝에 보관하고 있을 당시 태피스트리의 끝 부분이 하필 제일 위로 향한 채 보관되어 부식이나 침식 등 피해에 취약해 그 부분만 소멸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이정도면 지금 시대까지 나머지 부분이 온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 정말 축복일 수도 있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에는 아직도 숨겨진 이야기가 많다 
 

심슨 가족이 패러디한 바이외 태피스트리 /BAYEUX MUSEUM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전체적인 구조가 현대 만화나 영화의 스토리보드와 비슷해 다양한 대중 문화에서 차용되었다. 영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탈보트는 이것을 '영국 최초로 알려진 만화' 라 칭했다. 1745년 프래스턴팬스 전투를 둘러싼 사건을 기록한 프래스턴팬스 태패스트리나 1944년 오버로드 작전, 노르망디 상륙을 기념하는 오버로드 자수 등 현대 자수에도 영향을 주었다. 영화와 텔레비전 문화에서도 인기 있는 소재 중 하나가 되어, 커크 더글라스 주연의 영화 '바이킹스' 와 심슨 가족 에피소드에서도 볼 수 있다. 

과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이 바이외 태피스트리가 존재하는 동안은 그 당시 자수 기술에 대한 더 많은 연구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태피스트리의 자수가 만들어진 방식, 실의 활용 방법 등을 직접 눈으로 보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길 바라고 있다. 이 바이외 태피스트리가 궁극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중세 초기 자수 제작 방법이나 자수 조직, 구조에 대한 자세한 정보 등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바이외 태피스트리엔 아직도 학자들이 알고 싶어하는 11세기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고, 그것은 언제든 우리들에게 그때의 시절을 말해줄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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