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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을 사랑했던 20세기 문화의 아이콘, 잭슨 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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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을 사랑했던 20세기 문화의 아이콘, 잭슨 폴록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0.11.12 1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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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기둥 Blue Poles>1952 /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잭슨 폴록은 미국의 화가이자 1950년대의 미국 추상표현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 중 하나다. 그는 미국에서 꽤 영향력 있는 화가 중 한 명으로 엄청난 명성과 혹평을 동시에 받는 삶을 살았다. 무의식적으로 온몸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그의 소위 광적인 춤사위는 '액션 페인팅'이라 불렸다. 이 기법은 수많은 평론가들의 반응을 극명하게 갈리게 했다. 누군가는 그의 창조적인 능력을 칭찬했고, 또 누군가는 그의 무작위한 움직임을 아무 의미도 없다며 조롱하기도 했다. 

1940~1950년대는 추상표현주의가 주류인 시대였다. 본래 이 추상표현주의란 용어는 러시아의 예술가 칸딘스키의 초기 작품에 쓰였던 말이다. 알프레드 바 라고 하는 미국의 한 평론가가 미국에서 전시 중이던 칸딘스키의 작품을 보고 형식적으로는 추상적이며 내용적으로는 표현주의적이라는 말을 한 이후 등장했다. 그 후에 1940년대, <뉴요커>의 기자 로버트가 이 용어를 잭슨 폴록에게 또 사용함으로써 알려지게 된다. 

미국의 예술가인 윌리엄 시츠는 추상표현주의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이 동적인 표현력과 개인의 내면을 중시한다는 말을 남겼다. 폴록 또한 그림에는 자신의 삶이 있고, 자신은 이미지를 파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말을 했다. 추상표현주의가 '무의식에 의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무의식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어냈던 잭슨 폴록은 추상표현주의의 아이콘이자 대표 주자 그 자체였다.


잭슨 폴록, 그가 그림을 시작하기까지의 여정 

잭슨 폴록 /flickr

폴록은 미국 와이오밍주 코디에서 태어나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다. 1928년 로스앤젤레스의 매뉴얼 미술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하며 아버지와 종종 여행을 다녔다. 폴록은 여행을 다니는 동안 아메리칸 원주민 문화를 알게 되고, 이때 멕시코 벽화 운동의 선구자였던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의 영향을 받게 된다. 

1929년 폴록은 지역주의 화가 토마스 하트 벤턴에게 드로잉과 회화, 구성 등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1936년 뉴욕의 한 워크숍에서 멕시코의 벽화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에게 액체 페인트를 쓰는 법을 처음 배운다. 그는 이후 페인트를 붓는 것을 작품에 쓰는 여러 기법 중 하나로 쓰기 시작했고, 나중엔 스튜디오 바닥에 캔버스를 깔고 그림을 그리면서 '드리핑(drip)' 기법을 개발한다. 이때 폴록은 그림 표면에 페인트만이 아닌 에나멜 페인트와 모래 등 다양한 재료를 뿌릴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러나 이때 폴록은 지독한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에 뒤덮여 있던 상태였다. 정신병원에 네 달이나 입원해 심리치료를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면서 그의 작품 성향은 자연스럽게 추상적으로 변해갔다. 폴록은 1939년 11월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열렸던 피카소에게서, 또 후안 미로의 작품들에서 모티브를 따고, 시케이로스에게 배운 기법들을 이용해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벽화 Mural>1943 /commoncurator.blogspot.com

폴록은 1943년, 예술 작품을 전문으로 수집하는 컬렉터인 페기 구겐하임에게 처음으로 그림을 의뢰받게 된다. 그는 자신의 집 로비에 걸 그림이 필요해 폴록에게 그림을 의뢰했고, 폴록은 이 의뢰를 받아 실제 벽 크기의 <벽화 mural>를 그리게 된다. <벽화 Mural>를 본 미술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나는 이 그림을 한번 보고, 이것이 정말 멋진 예술이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폴록 잭슨이 이 나라에서 배출한 가장 위대한 화가라는 것도 알았다' 는 회고를 남겼다. 이후 구겐하임과 갤러리 계약을 맺은 후 폴록이 연 첫 전시회를 소개하는 카탈로그에는 '그의 작품은 마치 화산 같다. 불같으며, 예측할 수도 없고, 어떤 규율도 존재하지 않는다' 라 쓰여 있었다. 

<벽화 Mural>는 초현실주의 미술 기법과 무의식적 이미지에 영향을 받은 그의 개인적 스타일을 확립하는 계기가 된다. 이때부터 폴록은 꾸준히 자신, 즉 그를 구성하는 모든 것을 그림으로 그리기 위한 투쟁을 시작한다.


잭슨 폴록의 모든 것이었던 '드리핑'기법 

추상표현주의는 미국의 비평가 로젠버그에게 '액션 페인팅'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로젠버그는 '완성된 작품'이란 창조하는 과정이나 행위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의 하나일 뿐이라는 평을 남겼다. 즉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작품 자체가 아닌 작품을 만들기까지의 기나긴 과정이라는 것이다. 플록은 이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인 주자 중 하나였다. 

폴록은 1947년 그의 화가 인생의 전환점이 된 새로운 작업 방식을 도입하게 된다. 바로 작업실 바닥에 놓인 울퉁불퉁한 캔버스에 에나멜 페인트를 던지듯 떨어뜨리는 '드리핑' 기법이다. 우선 집에 딸린 헛간을 개조해 작업실로 꾸미고 그곳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캔버스에 단계적으로 페인트를 붓거나 떨어뜨리는 것부터 시작해, 그림을 완성하기 전 몇 주간 사색을 하며 여러 그림들을 번갈아 그리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폴록은 에나멜 페인트나 알루미늄 페인트가 그리는 궤적에 자신의 육체적 움직임을 가미했다. 
 

<연금술 Alchemy> 1947/guggenheim.org

그가 그림을 그릴 때 보이는 팔과 손목의 움직임, 붓놀림, 흘러내린 물감, 페인트를 던지고 튀기고 더럽히는 등의 모든 것들은 단지 화가의 '행동' 중 하나였다. 폴록은 페인트를 캔버스에 떨어뜨린 채 그 위에서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거나, 캔버스 위에 서서 무의식에 따라 페인트를 떨어뜨렸다. 이 무의식이 자신을 표현하게 한다고 폴록은 말한다. 뭐라 단정해서 설명할 수 없는 이 행위는 순수한 창조를 위한 무의식적인 그의 표현이다.

폴록은 예술을 만든다는 게 무엇인지를 재정의하고 싶어했다. 그가 이젤을 쓰는 것에서 벗어나고, 관습화된 미술 기법을 벗어난 건 그 시대 예술가들에겐 해방의 신호나 다름이 없었다. 예술가들은 폴록이 바닥에 채 펴지지 않은 캔버스를 놓은 것, 페인트로 이루어진 거침없는 흐름, 정체를 알 수 없는 지저분한 얼룩들이 이전까지 존재했던 경계를 넘는 창작의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폴록의 '액션 페인팅'은 예술 작품의 개념을 확장시키고, 더 무한한 가능성을 만들게 했다. 

19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초반까지 폴록은 거의 매년 뉴욕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949년 한 잡지에 '그는 미국에서 제일 위대한 화가인가?' 란 주제로 4페이지 가량의 글이 실리며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다. 꾸준히 전시회를 열며 그의 명성이 절정기에 달했을 즈음 폴록은 무슨 일인지 드리핑 기법을 포기한다. 그의 그림들은 점점 상업적인 갤러리들로 이동하게 되고, 수집자들의 수요 또한 많아져 그에 따른 압박이 심해지며 그의 좌절감 또한 극대화되기 시작했다. 그를 꾸준히 괴롭혔던 알코올 중독도 점점 심해진다. 
 

<하얀 빛 White Light> 1954 /jackson-pollock.org

1953년 이후로 폴록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져 가며 그에 따라 작품 제작도 줄어든다. 그러나 그는 말기에 〈하얀 빛 White Light〉, 〈향기 Scent〉 등의 중요한 그림을 남긴다. 1956년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 대신 철사, 거즈, 석고 등으로 이루어진 조형물을 만들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 해 8월, 44세의 폴록은 음주운전을 하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그가 죽은 지 4개월 후인 12월, 뉴욕 현대미술관 MOMA에서 그를 기리는 기념 회고전이 열렸고, 1998년과 1999년에 걸쳐 뉴욕의 MOMA와 영국 런던의 THE TATE에서 열린 대규모 기획전은 그를 기억하는 자리가 되었다. 

폴록은 바닥에서 그리는 자신의 화풍을 언급하며, '바닥에 있을 때 나는 더 편안하다. 그럴 때 나는 그림에 더 가까워진다고 느낀다. 난 그림 주위를 걸어다닐 수 있고, 어디서든 작업을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림 안에 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란 말을 남겼다. 그는 그림 속 뚝뚝 떨어지는 페인트와 함께 날뛰며, 마치 춤추는 것처럼 캔버스 주위를 활기차게 뛰어다녔다. 폴록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그림으로 볼 수 있을 때까지 멈추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잭슨 폴록의 명작들 

<파시파에 Pasiphae>1943 /jackson-pollock.org

<파시파에 Pasiphae> 1943

페기 구겐하임의 뉴욕 갤러리에서 열린 첫 전시회 이후 마무리를 끝낸 <파시파에>는 1940년대 중반 신화적 주제를 다룬 그림 중 제일 큰 규모다. 폴록은 자신의 작품에 그리스 신화를 종종 차용하곤 했다. 파시파에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왕비이자 미노타우르스를 낳은 신화 속 인물이다. 여담이지만 미노타우르스는 폴록에게 모티브를 제공했던 피카소와 그 외의 초현실주의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재이기도 했다.

폴록은 처음 가벼운 터치로 윤곽을 그리면서 그림을 시작해, 나중엔 점차 두껍고 불투명한 페인트 층을 쌓아 그렸다. 그는 붓만 쓴 게 아니라 팔레트나이프와 페인트를 이용해 캔버스에 페인트를 역동적으로 발라 그림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열기 속의 눈 Eyes in the Heat> 1946 /jackson-pollock.org

<열기 속의 눈 Eyes in the Heat> 1946

<열기 속의 눈 Eyes in the Heat>은 페기 구겐하임의 뉴욕 갤러리에서 전시된, 총 7개의 캔버스 시리즈인 "잔디의 소리 Sounds in the Grass"의 일부분이다. 폴록은 이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 이 시리즈 작업에 강도 높은 노력을 퍼부었다고 한다. <열기 속의 눈>은 폴록이 드리핑 기법을 도입하기 전 그린 것으로, 물감을 뿌릴 때 나타나는 불특정성은 볼 수 없지만 소용돌이 모양의 커다란 붓질이 그의 표현주의적 요소를 극대화하고 있다. <열기 속의 눈>은 특정 대상을 묘사하거나 재현하는 게 아닌, 단지 화가의 표현력을 최대로 끌어올려 캔버스에 옮겨놓은 작품 그 자체다. 

 

<Number 1> 1948 /jackson-pollock.org

<Number 1> 1948

폴록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서 주제나 의미를 찾는 것을 기피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제목을 짓는 대신 작품에 번호를 매기기 시작했다. 폴록은 이 방식에 대해 '이것은 관객들이 작품을 보고 어떠한 주제를 생각할 수 없게 하고, 선입견을 가질 수 없게 한다' 고 말했다. 수집자들은 폴록의 이 급진적인 스타일을 보려 하지 않았고, 이 그림은 처음 전시되었을 때 전혀 팔리지 않고 남아 있었다고 한다. <Number 1>은 나중에 폴록의 두 번째 단독 전시회에서 다시 전시되었고 후에 MOMA에 팔리게 된다. 

<Number 1>은 폴록이 쓴 액션 페인팅 기법, '드리핑'의 걸작으로 꼽는 작품이다. 폴록은 바닥에 놓인 넓은 캔버스를 이리저리 움직여대며 물감으로 물든 밧줄을 던졌다. 이 작품은 폴록의 역동적인 몸짓이 녹아들어 있는 여러 작품들 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캔버스에 쌓인 페인트는 예술가가 들인 힘과 속도를 알 수 있게 하며,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밀도있지만 섬세한 디테일이 느껴진다. 
 

<가을 리듬 Autumn Rhythm (Number 30)> 1950/jackson-pollock.org

  <가을 리듬 Autumn Rhythm (Number 30)>, 1950

1950년 10월 그려진 <가을 리듬>은 그림에 실린 폴록의 힘이 절정에 달했던 때 만들어졌다. 얇은 캔버스에 페인트가 끊임없이 떨어지고, 바닥에 부딪치는 페인트는 사방으로 수없이 흩어진다. 복잡해 보이면서도 촘촘한 페인트 층을 만들기 위해 폴록은 쓸 수 있는 모든 도구를 사용했다. 이 작품에 중심점 같은 건 찾을 수 없다. 폴록은 사방팔방에 페인트를 뿌리며 캔버스를 이리저리 움직이길 반복했다. 역동적인 비주얼과 소용돌이치는 줄무늬는 드리핑 기법으로 페인트를 칠하는 폴록의 '춤사위' 를 보여주는 듯하다. 폴록은 이 모든 과정이, 단지 자신은 무의식 속에서 페인트의 흐름을 조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의식을 사랑했던 남자, 잭슨 폴록 

로스엔젤레스의 한 벽에서, 잭슨 폴록 /flickr

한스 나무트라는 한 사진작가가 그 당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폴록을 찾아가,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자고 제안한다. 촬영은 야외에서 진행되었고, 나무트는 폴록에게 평소 작업하는 것처럼 행동해 달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무의식을 중요시했던 폴록은 감독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며 그림을 그리는 척 해야 하는 자신의 행위가 버거웠다. 어느날 그는 잔뜩 취해 테이블을 엎어버리면서, 나무트에게 '나는 가짜가 아니다' 라고 말했던 일화가 있다. 폴록은 제가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말을 남길 정도로 무의식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심리학처럼 잭슨 폴록의 작품은 미국 미술의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잭슨은 전통적인 경계 안에 머무르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고, 그의 무의식 속에서 파생된 감각을 작품의 본질로 봤다. 그가 작품을 창조할 때 사용했던 급진적인 기술인 '드리핑' 기법은 예술가들에게도 널리 퍼졌다. 그의 개인적이고 비타협적인 예술에 대한 접근은 찬사를 받았고, 예술가들에게 그는 예술과 삶을 성공적으로 융합시킨 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 폴록의 작품들은 또한 윌렘 드 쿠닝, 아르실레 고르키, 로버트 마더웰, 마크 로스코 등 다른 추상적 표현주의자들에도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끔 만들었다. 작품을 향한 그의 창의적인 접근은 그저 정해진 경계를 따르는 게 아닌, 예술가들이 열정을 가지고 또다른 작품을 창조하도록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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