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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의 구수한 매력 ②] 일제의 탄압으로 사라진 전통주, 부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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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주의 구수한 매력 ②] 일제의 탄압으로 사라진 전통주, 부활하다
  • 최미리 기자
  • 승인 2019.09.27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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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전쟁· 산업화 등 모진 풍파에서도 살아남은 전통주의 험난했던 역사 속으로
주막의 사람들, 1780년 김홍도作 [출처- 위키피디아]

[핸드메이커 최미리 기자] 고된 농사일을 마치고 이웃·친척과 어울려 술을 즐기는 농부, 취기에 젖어 시를 읊으며 자연을 찬미한 선비, 술을 통해 예와 의의 유교 정신을 표현했던 신하와 왕까지 한국인들은 각자 다양한 술을 만들고 즐겼다.

우리 전통주는 오랜 세월 동안 발전해왔고 일상 깊숙이 스며들어왔지만 오늘날 전통주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생소하기만 할 뿐이다. 어째서 오랜 역사를 자랑해온 전통주가 100년 밖에 안되는 세월 동안 급격히 사라진 것일까?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시행된 일제의 전통주 탄압 정책

전통주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탄압받기 시작한다. 음주가무를 즐기는 흥의 민족인 우리나라 사람에게 전통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고유한 문화였다. 그렇기에 일본의 입장에서는 민족의식을 꺾고 식민 지배 체제를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전통주 문화를 말살해야만 했다.

더불어 복잡한 가양주를 규제하여 일률적으로 술을 관리하고 세금을 용이하게 걷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일찍부터 상업적인 양조장 문화가 발달했던 일본에서는 집집마다 자유롭게 술을 빚어 마시는 한국의 가양주 문화가 상당히 이질적으로 다가왔고 이를 자신의 기준으로 바꿔버리고자 했다.
 

가양주를 빚는 장인 [문화재청 제공]

또한 한편으로는 쌀을 많이 사용하는 전통주를 탄압해야만 조선인의 쌀 소비도 줄이고 조선을 쌀 공급기지로 만들기 위한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畵)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전통주 탄압은 아주 다양한 목적을 갖고 진행되었다.

일제는 한일합방 이전부터 통감부에서 1905년부터 1908년까지 한국의 주류실태를 조사하는 등, 치밀한 작업을 진행했으며 1909년 최초로 주세법을 제정하였다. 주세법은 술을 빚기 위해 신고를 의무화시켰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술에 세금을 메기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불만도 커졌다. 그렇게 계속 밀주가 성행하자 일제는 1916년에 더욱 강력한 주세령을 반포하였다.
 

1) 자가용 술은 타인에게 양도하거나 판매할 수 없다.

2) 자가용 술의 제조자가 사망했을 경우 그 상속인은 절대로 주류를 제조할 수 없다. '전항에 위반했을 때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당시 쌀 한 가마니 가격 약 10원) 

<주세령>, 1916

일제는 더욱 강력해진 주세령을 통해 아주 엄격한 기준으로 면허를 받은 자만이 술을 제조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 계승을 막았다. 이를 어기는 경우, 더욱 강력해진 처벌로 대응했다. 또한 이후에는 전통주 제조를 완전히 금지하는 데까지 이른다.
 

조선총독부 [출처- 위키피디아]

철저하게 진행된 탄압으로 단절된 우리 전통주

이 틈을 타 일본 청주 업체들이 대거 한국에 진출하게 된다. 특히 이 중에서도 일본 사케의 한 브랜드인 정종이 한국의 술 시장을 주도했다. 마음대로 술을 만들지 못하게 된 사람들은 제사용으로 사용할 우리 청주 대신 비슷한 정종을 찾게 되었다. 1921년 주류 통계치에 따르면 조선에서 생산된 일본 청주가 5만 7천6백 석에 달한다고 할 정도이다. (당시 1석은 약 180리터)

청주와 일본 정종은 비슷한 부분도 있었지만 분명히 다른 술이었다. 특히 우리 청주는 덩어리로 뭉쳐진 전통 누룩인 떡누룩(병국)을 사용했지만 일본 청주는 낱알이 흩어져 있는 흩임누룩(산국)을 사용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결국 우리 전통 청주는 정종에 종속되고 말았고 오늘날까지 청주라는 단어 자체를 일본 술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조선주조사 등 통계에 따르면 전통 가양주 제조장 수는 1909년 15만 개소에 이르렀지만 1933년 4,112개로 감소했다. 또한 가양주를 허가받은 사람은 1916년 30만명에 달했으나 1932년에는 오직 1명에 불과했으며 이후에는 아무도 가양주를 만들지 못했다. 또한 일제는 가양주를 탄압하여 일률적으로 술을 관리하게 됨으로써 어마어마한 주세를 걷게 된다. 1918년 총독부의 주세 징수액은 1909년에 비교하여 12배가 상승했으며 1933년의 경우에는 한국 전체 세액의 33%가 주세가 차지할 정도였다.
 

현대 이후 우리 술 문화를 소주가 대체하게 되었다. [출처-pixabay]

1945년 해방 이후에도 전통주는 여전히 환영받지 못했다. 당시 식량이 매우 부족했던 시기였기에 쌀을 많이 사용하는 전통주를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965년 정부는 '양곡관리법'을 제정하여 쌀로 술을 만드는 것을 금지했다. 이후에는 우리가 잘알고 있는 소주가 퍼져 나갔다.

소주는 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새롭게 생겨난 술이다. 소주는 증류주에 속하지만 전통 증류식이 아닌 희석식으로 만든다. 희석식이란 여러 번 증류한 주정(에틸알코올)에 물과 감미료를 첨가하여 희석시킨 것이다. 희석식 소주는 쌀 대신 값싼 재료를 사용해 만들 수 있었고 급격히 우리 술 문화를 주도하게 되었다.


사라질 뻔한 전통주, 고난의 세월을 극복하다

암흑의 시기를 보내던 전통주가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80년대 이후부터이다. 경제성장으로 국민의 삶의 질이 올라가고, 86년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등 세계에 한국의 전통문화를 알릴 필요성이 생기면서 정부가 전통주 복원에 나선 것이다. 정부는 서둘러 각 지역의 전통주 장인을 찾아 이를 육성 및 계승·보존하기로 하였다.

정부는 장인들을 무형문화재, 식품명인 등으로 지정하며 제조 자격을 부여하였다. 무형문화재 전통주 부문은 1986년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교동법주, 문배주, 면천두견주 3개의 국가무형문화재와 각 시도무형문화재를 합해 약 34개에 이른다. 주류 부분 식품명인은 1994년 제1호 조영귀 송화백일주 장인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약 28명이 지정되었다. (5명은 지정 해제)

1995년, 드디어 자가 양조가 전면 허용되었다. 일제시대부터 금지되어 온 자가 양조가 허용되면서 우리의 전통 가양주 문화가 부활히게 된다. 정부 차원의 연구·개발도 한창이다. 농촌진흥청은 2009년 '우리 술 복원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옛 문헌을 연구하여 사라진 전통주를 복원했으며 현재에도 새로운 신 기술을 이용한 우리 술을 개발하고 있으며 이를 민간 기업에도 전수하고 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소재한 전통주 갤러리 / 핸드메이커 최미리 기자

이 밖에도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서는 지난 2015년 '전통주갤러리'를 개관하여 다양한 우리 전통주를 홍보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통주갤러리는 인사동에 처음 문을 열었다가 현재는 강남구 역삼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는 다양한 전통주를 상시 및 특별 행사를 통해서 무료와 유료 시음 행사, 판매 등을 진행한다.
 

2018 우리 술 대축제 현장 / 핸드메이커 최미리 기자

아울러 두 기관은 매년 '우리 술 품평회'를 개최하여 우수한 전통주를 심사 및 선발하고 있다. 선발된 전통주는 다양한 혜택과 지원이 제공된다. 또한 후속적으로 '대한민국 우리 술 대축제'을 개최하여 선발된 전통주를 비롯한 다양한 전통주를 선보여 소비자와 바이어에게 홍보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는 일제의 강점과 6.25전쟁, 독재정권과 산업화 등 수 많은 사건을 겪어왔다. 전통주는 혼란한 역사 속에서 사라질뻔 했으나 우리 민족은 슬기롭게 고난을 극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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