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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래피티는 진지한 낙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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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그래피티는 진지한 낙서다
  • 이황 기자
  • 승인 2019.08.08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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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 이황 기자]

사소한 낙서라도 반드시 지워야 한다.

80년대의 뉴욕 지하철은 절대로 타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온갖 범죄가 일어나는 장소였다. 1994년 취임한 뉴욕 시장 루돌프 줄리아니(Rudolf Giuliani)는 뉴욕 시 범죄율을 낮추는 방법으로 “낙서 지우기”를 제시했다. 당시 뉴욕 지하철은 온통 낙서로 뒤덮여 있었는데 낙서를 하나둘 지워나가면 범죄율이 낮아질 것이라고 했다. 이는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James Q. Wilson)과 조지 켈링(George L. Kelling)의 '깨진유리창법칙'에 근거한 주장이었다. 깨진 유리창과 같은 사소한 결함을 방치하면 대중은 유리창을 깨는 사소한 범죄를 저질러도 괜찮다는 인식을 갖게 되고 이는 도덕적 해이로 이어져 절도나 살인과 같은 더 큰 범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정화작업의 결과는 놀라웠다. 범죄율이 대폭 하락했던 것이다.

국어사전은 낙서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장난으로 아무데나 글자를 쓰거나 그림을 그림. 또는 그 글자나 그림.”

사전적 정의에서도 느껴지듯이 낙서란 언젠가는 꼭 지워야만 할 대상처럼 다가온다. 지우지 않고 내버려 둔 사소한 낙서는 또 다른 낙서를 부를 것 같다. 낙서로 더럽혀진 골목이라면 왠지 범죄 소굴이 될 것만 같다. 낙서를 생각하면 부정적인 인식이 먼저 든다. 그렇다면 지우고 싶지 않은 낙서란 없을까? 더 나아가서 낙서는 예술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래피티는 비상식적이다.

그래피티는 스프레이 페인트를 사용하거나 긁어서 벽에 그린 그림을 의미한다. 그림뿐만 아니라 글자를 써넣기도 한다. 인적이 드문 지하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지하도 벽면엔 음담패설이 담긴 문구가 휘갈겨져 있거나 해골과 같은 반항정신 가득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물론 전혀 예술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저 반항기 청소년들의 일탈처럼 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래피티에 대한 그러한 이미지는 편견이다. 그래피티는 낙서를 넘어 예술이 되기도 한다.
 

뉴욕 5포인츠 건물 [출저- 위키피디아]

뉴욕 퀸즈 롱아일랜드시티에는 5포인츠(5Pointz) 건물이 있었다. 지금은 재개발로 철거되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섰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건물은 그래피티 예술가들의 성지였다.

그래피티는 분쟁을 일으킬 수 있다. 타인의 벽에 그림을 그리기 것이기 때문에 타인의 재산권을 침해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또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타인의 거주지에 침입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된다. 이렇듯 그래피티는 상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해서 만든 작품을 갤러리에 전시하는 상식 말이다. 벽에 스프레이로 그린 그림은 갤러리에 전시할 수 없다. 벽을 떼어다가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부분 그림을 그린 그 벽은 그래피티 예술가의 소유가 아니다. 건물 소유자의 허락을 받고 합법적으로 그래피티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렇듯 그래비티는 제도권 예술 바깥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캔버스에 붓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벽에다가 스프레이를 뿌려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도 인적 드문 밤 몰래 불법을 감수하면서도 그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피티는 풍자이며 저항이다.

뱅크시(Banksy)는 요르단 강 서안지구 베들레헴 분리 장벽에 그래피티 여러 개를 그렸다. 장벽에 키스를 하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을 그리거나 장벽을 드나들 수 있는 틈을 만들려고 양쪽에서 장벽을 잡아당기는 천사를 그리기도 했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타 민족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이스라엘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그래피티다. 뱅크시는 2017년 월드오프 호텔(The Walled-off Hotel)을 열기도 했다. 그 호텔은 분리장벽 바로 앞에 자리한 건물이어서 해가 들지 않는다. 호텔 안은 산소마스크를 쓴 천사나 최루탄에 괴로워하는 다비드상 등과 같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장벽 때문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학교나 직장, 병원 등을 오고 가는데 커다란 제약을 겪고 있다.
 

분리장벽 [출저- 위키피디아, Mauer-betlehem ]

2010년 한국에서 G20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당시 모 대학 강사가 버스정류장에 여러 장 붙인 G20 홍보 포스터에 등불을 든 쥐를 그린 사건이 있었다. 대법원은 모 대학 강사에게 형법 제141조 공용물건손상죄를 인정하여 벌금 200만 원 확정했다. 참고로 쥐는 뱅크시가 즐겨 그리는 그림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행하는 부당함은 글로 쓸 수도 있고 화폭에 그림을 그릴 수도 혹은 영화로 만들어 폭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베들레헴 장벽이라는 장소에 직접 그리는 것은 또 다르다. 분쟁의 장소에 그렸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G20 홍보용 포스터 풍자 그림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정류장이라는 장소와 국가의 홍보 포스터. 이렇듯 그래피티는 장소가 중요하다. 어디에 그리는지가 중요하다. 그것은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불의에 항의하기 위함이다. 투쟁은 바깥에서 하는 것이다. 바깥으로 나갈 때만이 분명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다. 이렇듯 그래피티는 권력이나 자본주의, 부당함에 대한 저항을 추구하는 사회참여 예술이다. 갤러리에 찾아가야만 감상할 수 있는 제도권 미술이 아니다.

 

G20을 풍자한 쥐 그림 [출저- 트위터]

그래피티는 갤러리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피티는 어느 낙서나 그렇듯이 언젠가는 지워질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 그렇지만 그래피티 자체를 소장하거나 관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벽에 스프레이를 부리는 그 행위다.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예술가들은 많다. G20을 풍자하고 비난한 글도 많았다. 하지만 장벽이나 G20 홍보 포스터에 직접 풍자예술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피티란 의미 있는 장소를 선택하는 행위다. 물론 모든 그래피티가 사회 참여적인 것은 아니다. 순수예술을 위한 그래피티도 있고 디자인을 위한 그래피티도 있다. 그러나 그래피티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는 까닭은 권력과 자본주의 등 불의에 항의하는 사회참여적인 모습 때문이다.

장벽에 키스하는 미 트럼프 대통령이나 G20 홍보 포스터에 그려진 등불을 든 쥐처럼 그래피티는 장난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래피티란 결국 낙서다. 아무 데나 그리는 장난스러운 그림이다. 그러나 “아무 데나”의 의미는 말 그대로가 아니다. 어느 곳이든 그릴 수 있다는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선택의 자유를 말한다. 장난스러움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진지한 장난이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깊은 메시지를 표현하는 풍자다.


예술의 기준은 다수의 생각이다.

물론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모든 그래피티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지난해 6월, 독일이 한국에 기증한 베를린 장벽에 무단으로 그래피티를 그린 예술가는 결국 국민참여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장벽은 독일에서 한국의 통일을 염원하며 기증한 것이며 그래피티를 그린 행위는 장벽의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다. 또한 홍대 등에서 거리를 무의미하게 어지럽히는 그래피티나 문화재를 훼손하는 그래피티 역시 금지되어야 한다.

무엇이 예술이고 아닌지는 법으로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어렵다. 그 경계는 모호하다. 그러나 최소한의 기준은 정할 수 있다. 그래피티가 예술이 될 수 있는가와 아닌가의 기준은 그래피티 예술가에게 있지 않다. 그래피티는 누군가의 소유물이 아닌 함께 나누고 공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거기서 무엇을 느끼는지가 중요하지 아닐까?

낙서에서 무언가를 공감할 수 있고 느낄 수가 있다면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베를린장벽의 낙서처럼 아무리 겉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표현하더라도 거기서 아무것도 공감할 수 없다면 그것은 가볍고 의미 없는 훼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래비티는 '진지한 낙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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