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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의 세계 여행 2] 조선인 도공에서 유럽까지, 일본 '이마리 자기'의 탄생임진왜란 당시 끌려간 조선 도공들이 만든 '이마리 자기' 유럽과 일본 역사에 거대한 영향 미쳐
  • 김강호 기자
  • 승인 2019.07.17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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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17~18세기의 유럽 왕실과 귀족들에게는 동양의 도자기를 모으는 것이 유행했다. 동양 도자기는 아주 값비싼 예술품이었으며 부와 교양의 상징이었다. 당시 유럽의 기술로는 고급 고령토와 유약을 고온의 가마에서 만든 영롱한 경질자기의 아름다움을 구현해낼 수 없었다. 

도자기가 가장 발달한 나라라고 하면 보통 중국을 떠올리곤 한다. 또한 당시 중국에는 도자기뿐만 아니라 차, 비단 등 다양한 고품질의 수공예품들을 생산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이 물건들을 구하기 위해 중국과의 교역에 힘썼다.
 

이마리 자기

중국 도자기를 대체하며, 유럽에서 유행했던 일본의 이마리 자기

하지만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17세기 명·청 교체기 시대에는 중국의 사회가 극도로 혼란해져 유럽인들이 중국의 도자기를 수입하는 일도 어려워졌다. 그러자 유럽 상인들은 도자기를 얻기 위해 중국 대신 일본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일본은 17세기에 이와미 은광 등의 개발로 상당한 양의 은을 확보했다. 당시 은은 중요한 화폐의 역할을 하였는데, 이를 토대로 당시 유럽과의 교류 및 무역에 나섰다. 또한 일본인들은 유럽인이 원하는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상당한 기술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일본 도자기의 중심지는 이마리(伊萬里)였다. 이마리는 일본 규슈에서 도자기를 수출하는 사가현의 항구를 말한다.

이마리 도자기는 특히 아리타 마을의 것이 유명해 '아리타 자기'라고도 부른다. 이 도자기는 부채와 쪽지, 화첩이나 비단 두루마리 등의 모양으로 창을 내어 장식을 했으며 익살스럽고 풍부한 장식, 푸른빛과 흰빛 등의 영롱한 색깔 등을 특징으로 한다.
 

규슈도자박물관이 소장한 이마리 그릇 [출처-Pekachu]
국립도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마리 화병 [출처- Daderot]

이마리 자기, 납치된 조선인들에 의해 탄생하다

그런데 이러한 이마리 도자기의 근간에는 조선인들의 기술이 바탕이 됐기에 가능했다. 일본은 1592년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른다. 일본이 낙후된 도자기 기술을 끌어올리기 위해 조선의 도자기 장인들을 납치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 도자공들 중에는 이삼평(李參平, ?~1656)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그의 정확한 출생연도와 출신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어쨌든 그는 사가번의 다이묘인 나베시마의 군대에게 잡혀 끌려가게 된다. 이삼평은 일본 이름을 얻고 생활하게 됐으며 다른 사람들과 아리타로 이주한다.

이삼평은 1616년 아리타에서 도자기를 굽게 되면서 이마리 도자기를 만든다. 이삼평은 당시 아리타 동부에 있는 이즈미야마[泉山] 채석장에서 백자를 생산하기에 적합한 백자석[白磁石]을 발견하여 이를 활용해 도자기를 굽는다. 이에 만족한 당시 사가 번주는 이삼평에게 특별히 '카나가에'라는 성(性)을 하사했다. 일본에서 당시 성씨는 무사 이상의 계급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초창기 이마리는 조선식 백자와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독자적인 일본 만의 기술력을 갖추게 됐다. 또한 명나라가 멸망하고 중국 징더전 가마의 장인들도 일본으로 들어오면서 중국의 영향도 함께 받으면서 새롭게 융합된 도자기로 재탄생한다.
 

독일의 마이센 도자기 [출처- World Imaging]

수준높은 기술력과 아름다움으로 유럽에서 대유행한 이마리 자기 

그런데 이후 일본인들이 너도 나도 이곳에서 도자기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산림이 황폐화되고 도자기의 수준도 하향평준화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 조정에서는 1637년 11개 가마를 폐쇄하고 826명의 일본 도자공을 추방한다. 그리고 오직 조선 도자공만을 남겼다. 조선 도자공을 위주로 한 소수 정예 고품질의 도자기 생산 체제를 갖춘 것이다.

이 이마리 도기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상인들이 1650년 145개의 일본 자기를 구입한 것을 시초로 유럽으로 팔려간다. 이후 이마리 자기는 동인도회사를 중심으로 1730년까지 70년 동안 약 700만 개라는 엄청난 양이 만들어져 수출되었다.

유럽인들도 이러한 이마리 자기에 감탄하여 자체적으로 도자기를 만들어보고자 했다. 독일 작센주에서는 이마리 자기의 영향을 받아, 작센 후작의 원조로 여러 기술자들이 1709년 '마이센 자기'를 만든다. 이후 마이센 자기를 시작점으로 유럽 각국에서도 로얄 코펜하겐, 웨지우드 등을 만들며 자체적인 기술력을 갖추게 된다.

한편, 사가현의 번은 도자기 수출 등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이들 서일본 번들은 이러한 부를 토대로 훗날, 일본 막부를 타도하고 근대화의 기틀을 다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조선에서는 별 볼일 없는 신분이었던 도자공들이 전 세계의 역사를 뒤바꾼 것이다.
 

사가현에 이삼평을 기리는 비 [출처- STA3816]

조선인의 피땀과 눈물이 어린 이마리 자기, 한일 우호의 디딤돌이 될 수 있기를

사가현과 아리타 마을은 오늘날도 질 좋은 수공예 도자기를 생산하고 있는 세계적인 관광지이다. 사가현 곳곳에는 다양한 도자박물관과 문화관, 공방과 체험장, 상점이 가득한 도자기 시장 등이 형성되어 눈길을 끌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삼평과 수많은 조선인들의 노력을 잊지 않았다. 1917년 주민들은 일본의 백자 탄생 300주년을 맞아, 이삼평의 업적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또한 매년 5월 4일, 이삼평을 기리는 축제인 도조제(陶祖祭)와 도자기 축제를 열고 있다. 아리타 마을은 인구 약 2만 5천명의 작은 마을이지만 도자기 축제 기간에는 매년 100만명의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또한 아리타 마을 주민들은 1990년 이삼평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대한민국 공주시에도 이삼평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 비석을 세우는 데에는 사가현 주민들이 한일 양국의 우호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은 모금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공주시는 2016년 계룡산에 '이삼평공원'을 건립하여 우리나라에서 이삼평을 널리 알리는 중이다.

조선의 도자기 기술은 일본을 거쳐 유럽에도 영향을 주었고 각자 자신만의 다른 독창적이고 훌륭한 도자기로 재창조되어 발전했다. 그렇기에 여기에 우리의 우수함 또는 전통을 주장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문화란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러한 문화의 흐름은 강제로 납치된 수많은 조선 도자공들의 피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한 아픔을 오늘날 한일 양국이 공유하며 이삼평비처럼 한일 우호의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는 화해의 디딤돌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김강호 기자  cpzm78@handm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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