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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무령왕릉 나올 수 있어', 공주 송산리고분서 백제 고분 흔적 확인공주 송산리고분군 지표조사·물리탐사 결과, 41기의 추가 고분 확인과 문자벽돌 나와
  • 김강호 기자
  • 승인 2019.07.17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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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한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현황 [문화재청 제공]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무령왕릉'이 포함된 백제 웅진시대의 왕실묘역, '공주 송산리고분군(사적 제13호)'에서 새로운 고분이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졌다.

백제 왕실의 묘역이 모여있는 공주 송산리 고분군

공주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 문주왕이 서울(한성)에서 공주(웅진)로 천도한 이후, 성왕이 부여(사비)로 다시 옮기기까지 5대 왕과 63년(475~538)을 이어온 웅진시대의 백제 왕실 묘역이 모여있는 곳이다. 1963년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었으며 2015년에는 공주의 공산성, 부여의 관북리 유적,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의 익산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와 함께 '백제역사문화지구'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현재 송산리 고분군은 1,2,3,4,5,6,7호분의 고분이 복원되어 있는데, 특히 7호분은 무령왕릉으로 잘알려져 있다. 1~4호분은 굴식 돌방무덤의 형태로 일제강점기인 1927년에 조사가 이뤄졌지만 이미 이전부터 도굴로 훼손된 상태였다. 5호분은 1932년 발견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돌을 이용해 거주지처럼 방과 통로, 출입구를 만든 굴식 돌방무덤이다.

6호분과 7호분은 일정한 크기의 벽돌로 방을 설계한 벽돌무덤으로서 돌방무덤과 크게 형태가 다르지 않지만, 활 형태의 돌방무덤과 달리 천장이 차이형의 구조를 띈다. 또한 이 2기는 백제 시대에 유일한 벽돌무덤이다. 6호분에는 사신도(四神圖)를 그린 벽화가 있으며, 벽돌에 ‘중국 양(梁)나라 관영공방의 기와를 본보기로 삼았다(梁官瓦爲師矣)’라는 글이 있어 중국 남조 시대인 양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편 7호분은 1971년 발견되었다. 다른 벽돌무덤과 굴방무덤이 도굴에 취약한 특성상 상당히 많은 유물이 훼손 및 도굴된 것에 비해 7호분은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금제관식, 은제팔찌 등 각종 금은 장신구와 도검, 도자기, 목제품, 신발 등 2906점의 수많은 유물이 쏟아져나왔다.
 

무령왕릉 내부 [문화재청 제공]
1~4호분 정비구간에서 확인된 일제강점기 조사 고분의 지하 흔적, 지하물리탐사를 이용해 무령왕릉 주변에서 지하 구조물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문화재청 제공]

정밀조사 통해 새로운 고분의 존재 밝혀져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중장기 학술조사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첫 정밀현황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번 조사는 크게 3단계(기초자료 조사‧현장(지표)조사‧과학적 탐사와 측량조사)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지난 2~3월에 문헌조사와 사진조사를 동반한 실내조사를 시행하였으며, 4월에 시행한 고고학 지표조사에서 고분 41기의 유존 가능성을 추가로 확인하였다. 신라, 가야와 달리 백제는 지하에 매장시설을 두고 봉분을 크지 않게 조성했기 때문에, 지표면에서 고분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조사를 통해 고분의 흔적(봉분, 석재 등), 입지특성, 지형분석 등을 통해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다.

6월부터는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과 함께 무령왕릉 정비구간의 지하물리탐사를 진행했으며, 그 결과 일제강점기 이후 위치를 알 수 없었던 7~9호와 29호분의 흔적도 파악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고분의 위치를 표시한 사진자료와 현재 촬영한 사진자료를 비교‧검토하여 확보한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이들 고분들의 현재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령왕릉 서벽 창문모양 장식에 사용된  ‘중방(中方)’명 벽돌(좌)과 이번 조사에서 수습한  벽돌(우) 벽돌의 크기와 글자의 위치가 무덤방 벽면에 세워 창문 모양을 장식한 것과 유사하다 [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문헌과 일제의 조사로만 존재했던 고분, 우리 손으로 조사·연구 기대

조사과정에서 지표면에서 수습된 ‘중방(中方)’명 벽돌은 특히 주목할만한 자료이다. 벽돌무덤인 무령왕릉과 6호분은 틀로 찍어낸 소성(燒成)벽돌을 쌓아 터널형태의 무덤방을 만들었는데, 아치형 구조를 시공하기 위해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벽돌을 제작하였다. 대부분 동전과 연꽃 등 장식용 문양을 넣었지만 문양이 없는 대신 대방(大方), 중방, 중(中), 급사(急使) 등 글자를 압출(壓出)한 벽돌도 일부 확인된다. 글씨들은 벽돌이 사용된 위치 등 쓰임새를 의미한다는 견해가 많다.

무령왕릉에 사용된 총 7,927점의 벽돌 중 ‘중방’을 새긴 벽돌은 30점에 불과하다. 벽돌의 크기와 글자의 위치로 볼 때, 이번 수습품은 긴 벽면에서 창문모양을 장식한 8점과 유사하다. 연구소 관계자는 "이번에 수습된 벽돌이 발견된 위치가 벽돌무덤인 무령왕릉의 남쪽 80m 지점이었고, 일제강점기에 보고된 벽돌무덤인 17호분의 추정 위치와도 70m 이상 떨어져 있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벽돌이 발견된 일대에 또 다른 벽돌무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밝혔다.
 

1933년 가루베가 일본 '고고학잡지(23-9)호'에 게재한 공주 송산리고분군의 전경과 고분의 위치 [문화재청 제공]

또한 이 지역에 백제의 왕릉이 있다는 것은 1530년 지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서 이미 알려져 있었다. 1927~1933년에는 가루베 지온과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처음 시행한 조사에서 당시 총 29기를 보고하였지만, 사신도가 그려진 6호분과 돌방무덤 1~5. 7~8, 29호 8기의 발굴기록만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전부이다. 이번에 추가로 발견한 41기의 고분이 일제강점기때 보고된 29기와 얼마나 중복되는지는 파악하지 못한 상태이다. 

하지만 연구소 관계자는 "이번 조사를 통해 기록상에만 남아있던 고분들의 위치를 추가로 대거 파악하였으며, 일본인에 의해 조사된 것을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진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본다"라고 전했다. 앞으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2020년부터 추정 고분들의 본격적인 조사를 단계적으로 진행할 계획이다.

김강호 기자  cpzm78@handm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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