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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초현실은 현실을 향한 착실함이다'“르네 마그리트”의 신비로움
  • 이황 기자
  • 승인 2019.07.11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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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 이황 기자] 

우리의 현실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지나치며 살아간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소중한 것이 떠나간 뒤다. 왜 우리는 돌아서서 후회할까? '바쁘고 힘이 드는 삶 때문에 소중한 것을 성취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변명이다. 소중한 것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주변에 있다. 일상 속에 스며있다. 보도블록 틈에서 피어난 제비꽃,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따뜻한 물줄기,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팝송, 파란 하늘, 때가 탄 하얀 스니커즈, 단지 우리는 그것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실감하지 못할 뿐이다. 너무나 당연하고 현실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소중한 것들을 외면해왔다. 오늘도 우리는 자기 생각 안에 갇힌 채 고달픈 인생이라 자책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제대로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걸까? 사람들은 무감각함을 일깨우기 위해서, 예술작품을 접하곤 한다. 삶을 다시 살아갈 활력과 감각을 되찾으려는 것이다. 예술의 역할은 보통 사람들이 무심하게 지나치는 것들을 포착하고 관찰하여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어떻게 작품을 매개로 현실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예술은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보통 예술의 역할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과학적 정확성을 갖춘 기법으로 세계를 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실제로 본 것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단 하나의 감각적 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객관적인 관찰이란 없는 것이다. 바깥의 풍경도 결국 개인의 주관에 따라 재해석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통해 사물을 바라본다. 그리고 배우고 익힌 미술 기법을 통해서 세계를 화폭 위에 그려낸다.1) 그러므로 과학적 원리에 따라 그림을 그렸다고 해도 그것은 객관적이지 않다. 하물며 사진조차도 사실 자체가 아니다. 사진은 순간을 선택하여 포착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인상주의도 주관의 전달일 뿐이다.

뭉크의 '비명' 1893년作 [출처-pixabay]

이러한 인상주의의 모순을 극복한 대표작으로는 표현주의 작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비명」이 있다. 이 그림의 원제는 'THE SCREAM'이며 “'절규'라고도 한다. 인간의 감정은 사물을 보는 관점과 그것에 대한 기억까지도 변형시킨다. 「비명」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모사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이미지를 왜곡하여 표현함으로써 절망을 잘 표현했다. 당대 사람들은 이 그림을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뭉크는 인간의 고통, 가난, 폭력, 격정과 같은 추함에 대해서 정직해야 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표현이 오히려 세계를 더 잘 표현하는 건 아닐까? 2)

초현실주의자와 '르네 마그리트'

초현실주의 역시, 보이는 대로 똑같이 그려야한다는 전통을 거부했다. 그러나 표현주의자들이 감정을 표현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그들은 꿈과 상상력에 집중했다. 이성보다는 무의식의 광기 그리고 꿈을 통해 예술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낸다. 정신분석학을 창시한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는 '사고가 마비되면 우리들 내부에 있는 유아성과 야만성이 지배하게 된다'라고 말했다.3) 
 

르네 마그리트의 '투시력' (La Clairvoyance,, 1936년作)

초현실주의 예술가 르네 마그리트(1898~1967)는 「투시력」에서 새알을 그냥 새알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새알을 보고서 한 마리 새를 그린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실적이지가 않다. 알은 그냥 알이지 새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에서 깨어난 새끼가 성장해서 날아다니는 새가 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 현실적이다. 마그리트가 그냥 알만 그렸다면, 사람들은 그림에 흥미를 갖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새를 그림으로써, 사람들은 그 알의 진정한 의미에 관심을 갖는다. 그러한 표현법이 우리에게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뭘까? 초현실주의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함으로써 현실을 더 현실적으로 보이게끔 노력한다.
 

'이미지의 배반' (La trahison des images, 1929년作) [출처- 위키피디아]

르네 마그리트(1898~1967)의 「이미지의 배반」이라는 작품이다. 그는 파이프를 그려놓았는데, 이 그림 밑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이 그림은 파이프를 그린 이미지일 뿐, 진짜 실물인 파이프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작품은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돌아보게 만든다. 사람들은 저 이미지와 실물인 파이프를 연결 짓고 동일시한다. 그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르네 마그리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다음과 같다. 대상은 화폭 속에 재현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이미지일 뿐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피레네의 성' (Le chateau des Pyrenees 1959년作)  [출처- Ωmega]

다시, 우리의 소중한 현실

위 그림 「피레네의 성」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모티브가 되었다. 우리는 저 그림을 보고 '돌이 하늘에 뜰 만큼 가벼울 수 있는가?'하고 흥미로운 생각을 하게 된다.

르네 마그리트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판타지를 그리려는 것 또한 아니었다. 그는 데페이스망 기법을 활용하여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안겨주었다. 데페이스망 기법이란 서로 관계없는 대상들을 한 공간 안에 배치함으로써 신비감을 만드는 미술기법이다. 일상적인 대상들을 이리저리 섞거나 뒤바꾸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벽난로와 증기기관차를 나란히 그린 그림을 보면 사람들은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그 두 대상이 서로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보는 현실은 각자 경험과 감정, 그리고 신념에 따라 왜곡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현실을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상과 사물,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속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도 결국 그러한 관심이 아닐까? 상상력과 무의식・꿈을 활용해 만들어낸 신비감은 단순히 신비감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가 지나치는 많은 것들이 이미 소중한 것이며, 원래부터 신비로웠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결국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은 현실을 향한 착실한 발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넘어설 때 우리는 비로소 현실에 다가갈 수 있다.

1) 곰브리치 지음, 백승길・이종숭 옮김,『서양미술사』, 예경, 2010, 561~562쪽.
2) 같은 책, 564쪽
3) 같은 책, 590~592쪽

 

이황 기자  berryl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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