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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선 문화를 대표했던 청동북, 우리나라에서는 의식과 제례의 도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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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선 문화를 대표했던 청동북, 우리나라에서는 의식과 제례의 도구로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9.2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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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옥천사 청동북 /문화재청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경남 고성국 옥천사와 옥천사성보박물관은 10월 31일까지 옥천사 영산회 괘불도 및 함 보물 승격 기념 ‘옥천사의 찬란한 보물전’을 전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보물 제495호인 옥천사 청동북, 보물 제1693호인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 10점 중 5점이 공개되어 있다.

고성 옥천사 청동북은 절에서 사용하는 청동으로 만든 소리내는 도구이다. 금고 또는 금구반자라고도 하며 절에서 대중을 불러모으거나, 의식을 행할 때 두드려서 소리내도록 한다. 중심원에는 6개의 둥근 연꽃열매가 돌출되어 있으며, 그 다음 원에는 연꽃잎이 겹쳐서 도드라지게 새겼다. 가장 바깥 원에는 덩굴무늬가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고 안쪽의 원에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처음부터 옥천사에서 전해진 것이 아닌 지리산 안양사의 것이었는데, 언제부터 옥천사에 보관했는지는 알 수는 없다. 옆면의 글을 통해 만든 시기와 유래, 발원자와 제작자까지를 알 수 있어 당시 고려 장인 사회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에서 전해 내려온 청동북

동선 청동북 /국립제주박물관

2014년 4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2014년도 첫 번째 특별전시인“베트남 고대 문명전 – 붉은 강의 새벽”을 개최되었다. 베트남 민족 자긍심의 원천이자 고대 동남아시아 최고 수준의 청동 제련기술을 간직한 베트남 청동 유물을 소개하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전시는 베트남 청동기 문화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는 전시로, 출품된 유물 또한 베트남 국립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최고 수준의 동선 청동북 14점과 각종 토기, 장신구 및 일상 용구 등의 선사시대 유물 380여점을 관람객들에게 선보였다. 우리나라의 청동북은 이 베트남과도 꽤 관련이 있는데, 베트남의 청동 문명이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베트남 문명의 시작을 기원전 2000년부터 1400년 시기 하노이 북쪽을 중심으로 신석기 후기에서 초기 청동기 시대, 풍-응웬 문화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기원전 1200년경 쌀의 수경법과 청동 기술이 마강과 홍강 유역에서 발달하기 시작했고, 정교한 청동북으로 상징되는 동선 문명이 시작되었다. 동선 문명 유적지에서 나온 청동제 무기, 기구, 북 등은 청동을 주조하는 기술이 동남아시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준다.

베트남의 청동북 /국립중앙박물관

동선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은 단연 청동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동남아 최고의 청동 제련술로 제작된 청동북 14점이 전시의 포인트였다. 청동북은 베트남 역사와 문화, 민족 자긍심의 상징이다. 베트남뿐 아니라 동남아 전역과 남중국, 우리나라까지 널리 분포하는 데에는 동선 문화가 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구리 합금인 청동 재질의 특성상 대형 청동기를 만들려면 강도를 높이는 기술이 뛰어나야 하는데, 이들의 청동북에는 정교하고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어 빼어난 예술성을 보여준다. 두드리는 면은 빛 줄기를 뿜는 태양 무늬가 한복판에 있고 그 둘레로 동심원 띠를 따라 날아가는 새, 바둑판 무늬, 빗금 무늬 등이 빼곡하다. 몸통에도 사람, 집, 배, 동물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분포 지역 또한 베트남뿐만 아니라 남중국, 동남아시아 전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을 정도로 광대하다. 청동북은 기원전 600년경에서 3세기 사이에 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홍강에 터를 잡은 동선 사람들은 당시 최고 수준의 청동기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또한 철기 문화를 받아들여 보다 발달된 금속기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 

청동북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의 청동기 유물은 농기구 같은 일상용품은 없고 의례나 신분 과시용으로 만든 거울과 칼이 대부분인 것과는 다르게 동선 문명의 청동북은 고도로 발달한 청동 제련술을 이용해 낫, 호미, 쟁기 등 농기구를 비롯해 거의 모든 일상용품을 청동으로 제작한 것도 특징이다. 그중에서도 청동북은 최초의 제작 시점이 기원전 500년 전까지 올라갈 정도로 매우 유서가 깊은 유물이다. 

베트남 동선 청동 북에 그려진 배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또한 잇따른 발굴조사를 통해 청동기 제작에 사용된 거푸집이 계속적으로 출토되면서 동선 청동북의 베트남 기원설은 힘을 받았다. 동선북에는 중앙의 태양을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며 새, 배를 타는 사람들,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등 다양한 장식 문양들이 새겨져 있어 선사 시대 베트남인들의 삶에 대해 추측할 수 있다. 특히 배가 새겨져 있다는 것은 동선북을 만들었을 당시 무역의 중요성을 상징하며, 이 북이 무역과 보물의 대상이었던 것을 나타낸다.

동선 청동북은 처음에는 악기로 만들어졌으며 연주할 때 나는 소리가 마치 천둥 소리처럼 들려 ‘천둥드럼’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청동북은 사람을 모으거나 의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구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숭배의 대상도 되었다. 또 어느 곳에서는 무덤의 부장품 혹은 화폐로서의 기능도 있었다고 한다. 즉 악기에서 점점 의례의 상징으로 청동북의 기능이 점차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북은 종과 함께 사찰 의식 때 범음(절에서 재를 올릴 때 부르는 불교 음악)을 내는 주요 의식 법구로, 불교 전래 이후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범종이 주로 아침·저녁의 예불이나 중요한 의식법회 때 사용된 것과 다르게 청동북은 공양 시간을 알린다거나 사람을 모으는 등 단순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함통6년명 청동북 /문화재청

그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북은 무엇일까, 보물 제1907호 '함통6년명 청동북'은 경상북도에서 발견된 것으로 865년(경문왕 5)에 만들었다는 명문이 적혀 있어, 우리나라에서 제작 연대가 새겨진 청동북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지름 31.5cm, 폭 10.5cm의 아담한 크기인 이 청동북은 전체적으로 푸른 녹이 고르게 슬어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옆면은 두텁고 뒷면은 둥그렇게 입을 크게 벌린 모습이며, 옆면에는 위쪽에서부터 거의 90도 간격을 두고 세 곳에 고리를 달고 그 여백 면을 돌아가며 북의 제작과 관련된 명문을 새겼다. 명문은 글씨의 좌우가 반대인 '좌서'로 쓰여 있으며, 그 내용은 제작 연대(865년)와 청동북의 명칭(금구) 등이 주류를 이룬 가운데 ‘이룬, 이루다(成內)’ 등 이두식 표기도 눈길을 끈다.

함통6년명 청동북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청동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연대를 가진 청동북이라는 점에서 공예사적 의미가 크고, 표면에 특출하거나 화려한 문양을 사용하지 않고도 담백하고 세련된 조형미를 만들어 낸 통일신라시대의 금속공예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봉업사명 청동북 /문화재청

바라, 금고, 반자라고도 부르는 청동북은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사찰에서 의식 법구로 쓰였기 때문에 주로 사찰과 관련이 있고, 절터에서 발견된 것들도 많다. 경기도 안성 봉업사 절터에서 나온 고려 시대 청동북인 '봉업사명 청동북'은 행사를 알리는 데 쓰인 타악기이다. 옆면에는 '정우오년(1217년, 고려 고종 4년), 죽주 봉업사 주지 찬겸이 발원하여 만들고 새기다. 상대장은 부금, 대장은 아각, 삼대장은 경문, 도색대사는 홍식이다'란 명문이 새겨져 있어 정확한 제작년도와 과정을 알 수 있다. 

비교적 큰 크기로서, 표면의 장식 문양도 특이하다. 3줄의 돌출선을 돌려 3개의 원으로 나누었고 중심원인 당좌(종을 칠 때에 망치가 닿는 자리)에는 9개의 둥글게 돌출된 연꽃 열매와 주변에 8장의 연판문을 장식하였다. 당좌 주위에는 24장의 연판문을 새겼고, 바깥쪽 원에는 네 곳에 구름 무늬가 있으며, 가장자리에 꽃봉오리 무늬를 새겼다. 옆면에는 중간에 돌출선을 돌리고 그 선 위에 3개의 고리를 달아 매달 수 있게 하였고, 고려 고종 4년(1217)에 죽주 봉업사에서 발원하여 만들어졌다는 명문을 새겼다.

선암사 청동북 /문화재청

선암사 대웅전 법당 내에 있는 선암사 청동북은  2006년 11월 25일 부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37호로 지정되어 범어사 성보박물관에서 위탁 보관하고 있다. 지름 69.4㎝, 두께 15.6㎝의 크기로 비교적 큰 편이다. 뒷면은 넓게 뚫려 있어 징 모양과 유사한 반자 형식을 띠고 있다. 

측면에는 세 곳에 고리를 달아 걸 수 있게 했다. 명문이 새겨져 있지 않아 명확한 조성 연대를 확인할 수 없지만 1862년(철종 13)에 제작된 '범어사 대웅전 청동북'과 형식이 동일하며, 양식적 특징도 유사하여 선암사 청동북의 시기를 유추해 볼 수 있다. 더불어 승려 주일이 지은 「선암사 중수기」를 통해 선암사 전각을 중수(重修)한 1867년(고종 4)을 전후한 시기에 선암사 청동북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황리현명 청동북 /문화재청

사찰이 아닌 곳에서 만든 청동북도 있다. '황리현명 청동북'은 고려 선종 2년인 1085년 황리현(현 경기도 여주)의 호장(고려시대 향직의 우두머리)인 민씨 등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황리현과 가까운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서 발견됐다.

청동북의 표면에 자연 산화로 인한 푸른 녹이 전체 면에 형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흙물이 많이 부착되어 있는 상태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출토된 유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함통6년명 청동북'(865년), 고려시대의 `함옹 9년 경암사명 청동북'(1073년), `대강 10년 법해사명 청동북'(1084년)에 이어 지금까지 알려진 4번째로 오래된 청동북이다.

청동북 앞면에는 크고 작은 동심원을 돋을새김하고 안쪽 동심원에 연꽃무늬 당좌(북채로 치는 부분), 바깥쪽 동심원에는 구름무늬를 배치하였다. 북의 뒷면에는 넓은 공명구를 뚫고, 측면에는 명문을 음각하여 고려시대 청동북의 전형적인 특징이 보인다. 명문을 통해 명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고 고려시대 지방자치제도 등을 연구할 수 있는 한편, ‘반자(半子)’라는 청동북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는 등 자료로서의 가치도 높은 문화재로 평가받는다. 

경선사명 청동북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2층 서화실에서 9월 26일까지 전시하는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 故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에서도 청동북을 볼 수 있다. '경선사'가 새겨진 이 청동북 옆면에는 소리를 울리게 하는 구멍이 있고, 제작 정보가 담긴 글이 새겨져 있다. 고려 무관들이 장수와 승진을 기원하면서 이를 제작해 경선사에 바쳤음을 알 수 있어 가치가 높다. 

베트남 북부 지역에서 발생해 동선 청동북으로 이름지어진 이 도구는 고대에도 악기, 제례 의식에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찰에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불교 의례에서 사용하는 금속제 타악기로 썼다. 스님들은 청동북을 나무로 만든 걸이에 걸어 놓고 가운데 당좌 부분을 북채로 쳐서 소리를 냈다고 한다. 청동북은 가장 세련된 금속 유품의 한 예시로 꼽힌다는 것에서도 가치가 있지만,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유물이 드문 고려 전기~중기 경에 제작되고 발견된 것만으로도 청동북은 충분한 희소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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