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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문자 해독의 위대한 열쇠, 로제타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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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문자 해독의 위대한 열쇠, 로제타스톤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9.13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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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봉균, 'Monument' /갤러리마레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8월 한달간 부산 해운대구 중동 갤러리마레에서는 안봉균 작가의 개인전이 열렸다. 안 작가는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를 예술로 발현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작업 ‘모뉴먼트(Monument)’ 시리즈는 나일강 하구에서 발견된 로제타스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대리석 분말이 바인더와 섞인 모델링 컴파운드로 캔버스에 배경을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바탕 화면 위에 나이프를 이용해서 음각 또는 양각으로 글자를 새기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다시 착색을 하고 여러 단계로 깎아내며 작품을 완성해 나간다.

안 작가는 “이미지의 홍수 시대에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서 보태는 것에서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글자만 빼곡한 로제타스톤이 울림을 주는 이미지로 와닿았다.”고 전했다. 그는 세월에 마모된 오래된 비석이나 목판이 인류의 기억을 품고 있는 것처럼 캔버스 위에 텍스트를 새기고 깎는 작업을 벌써 20년 가까이 하고 있다. 그에게 영감을 준 로제타스톤은 지금도 신비로운 유물들 중 단연 위대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문자 해독의 키가 된 거대한 돌, 로제타스톤

로제타스톤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CC BY-NC-SA 4.0

로제타스톤이라고 하면 동명의 외국어 학습 소프트웨어가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프트웨어 또한 로제타스톤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1799년 7월 15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 소속이던 피에르 부샤르대위가 알렉산드리아에서 56㎞ 떨어진 지중해변의 작은 마을 로제타(아랍어로는 라시드라 부른다)에서 발견했다. 비석에는 고대 이집트 프롤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5~30년)의 정치를 찬양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윗부분과 중간 부분의 텍스트는 각각 히에로글리프(신성문자)와 데모틱(민중 문자)을 사용한 고대 이집트어고, 아랫부분은 그리스어로 되어 있다. 당시 이집트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 혈통이기 때문에 그리스 문자가 사용됐다고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이집트 문자를 해독한 열쇠로 유명하다. 

헬레니즘 시대에 조각된 것으로 원래는 근처 사이스에 있는 사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로마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1세가 비기독교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모든 신전의 폐쇄를 명령했을 때 이 신전 또한 아마 문을 닫았을 것이다. 원래 있었던 비석 또한 어느 순간 파손되었고, 남은 큰 돌은 로제타스톤이 되었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전역 지도/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이후 고대 후반 맘루크 왕조 시기에 옮겨졌고 라시드 마을 근처의 건축 자재로도 쓰였다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에 발견되었다. 고대 이집트 신전들은 새 건축을 위한 채석장으로 쓰였고, 로제타스톤 또한 이런 방식으로 재사용된 것으로 추정한다. 1799년 7월 19일, 군사 엔지니어 부대 하나가 라시드, 즉 로제타 항구의 나일 강 서쪽 변에서 요새의 토대를 발굴하다가 비문이 새겨진 돌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로제타스톤은 현대에 복구된 최초의 고대 이집트 언어가 담긴 유물이었고, 이전에 번역되지 않았던 상형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키로 많은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나중에 로제타스톤과 관련 있는 누바이라 비석, 나일강 가운데에 있는 섬인 엘레판티네와 이집트의 누브 타하에서 발견된 비석, 필레 신전의 비문 등을 발견한다. 로제타스톤과는 달리 이 비문들의 상형문자는 비교적 무사하게 남아 있다. 

2년 후, 영국이 알렉산드리아 전투에서 승리한다. 메누 장군은 로제타석을 숨기려고 했지만 영국군은 기어코 이 돌을 런던으로 가져갔다. 이 외에도 영국은 프랑스가 약탈한 유품들을 가로채 본국으로 가져간다. 로제타스톤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이 비문의 가치를 인식하고 탁본 및 복사본을 미리 만들어 두었기 때문에 여러 학자들이 로제타스톤의 내용을 미리 접할 수 있었다. 

로제타스톤에 비친 관광객의 모습 /flickr

런던에 도착한 이후 일정 기간 동안 이 비문은 읽기 쉽도록 흰색 분필로 색칠해 선명함을 자랑했다. 다만 이때는 유리창 없이 전시되었으나 관람객들이 하도 만져대는 통에 접촉을 막기 위해 결국 유리창을 세웠고 더 닳지 않도록 표면에 카르나우바 왁스를 발랐다. 이 조치로 검은 현무암처럼 보이는 이 돌은 꽤 어두운 색이 되었다. 1802년 이래로 대영박물관에 지속적으로 공개 전시 중이다. 

그리스어의 텍스트어를 해독한 결과 비석의 연대는 기원전 196년으로 밝혀졌고, 로제타석에 새겨진 법령에 대한 연구는 1803년 그리스어 본문의 첫 완전한 번역이 출판되었을 때에도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1799년에는 각기 다른 문자로 새겨진 비문이 모두 동일한 내용임이 밝혀졌다. 프랑스의 이집트어 학자인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1822년 해독에 성공하는데, 한 문장이나 한 단어 안에 표의 문자와 상징 문자, 표음 문자가 동시에 섞여 있는 복잡한 체계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는 이 글자를 해독하려면 왕의 이름부터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고, 그리스어로 쓰인 내용은 성직자들이 프롤레마이오스 왕을 칭송하는 내용이니 이집트 부호에도 그의 이름이 들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어떤 부호가 '프롤레마'를 나타내는지만 알면 적어도 발음 기호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수많은 부호 가운데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부호에 관심을 가졌는데, 이정도로 강조된 것이라면 혹시 왕의 이름이 아닐까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이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필레에서 발견된 비석에도 상형 문자와 그리스 문자가 씌어 있는데, 이 비문의 그리스어에서도 프롤레마이오스 왕의 이름이 나왔고 상형 문자에도 로제타스톤처럼 똑같이 타원형의 부호가 있었던 것이다. 이 발견은 상형 문자 해독을 위한 첫 걸음이었다. 샹폴리옹은 그림 문자의 핵심은, 그려져 있는 그림들이 발음을 나타내는 알파벳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그는 상형 문자가 소리 글자와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고 발표한다. 그동안 상형 문자를 그림으로만 해석하려 했던 학자들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여담이지만 샹폴리옹은 이 발견을 하자마자 너무 기쁜 나머지 그의 형이 일하는 사무실로 달려들어가 '내가 알아냈어!' 라 소리를 지른 뒤 곧바로 기절했다. 이후 무려 일주일 넘게 드러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크게 앓았다고. 어쨌든 이 일로 샹폴리옹은 이집트학의 아버지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윗부분이 깎여 있는 로제타스톤 /flickr

그러나 학자들이 고대 이집트 비문과 문학을 막힘없이 읽을 수 있기까지는 시간이 더 걸렸다. 훼손되어 있는 상태 때문에 세 가지의 글 모두 완성된 글은 아니다. 상형 문자로 채워져 있는 가장 높은 부분은 가장 큰 피해를 입어 마지막 14줄만 볼 수 있다. 오른쪽은 모두 깨져 있고 왼쪽은 12줄 정도 보인다. 가장 잘 보존된 곳은 32줄 정도며, 위의 14줄은 오른쪽 부분의 약간 손상이 보인다. 하단부는 54개의 줄을 포함하고 있고, 첫 27줄은 완전히 남아 있으며 나머지는 돌 오른쪽의 대각선 모양에 따라 점점 짧아진다. 

로제타스톤은 프롤레마이오스 5세의 대관식 이후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통치자에 대한 신성한 숭배를 표현하는 포고문이라 할 수 있다. 이 포고문은 고대 도시 멤피스에서 모인 사제 회의에서 내려진 것으로, 이 해는 프롤레마이오스 5세의 통치 9년과도 일치한다. 그 해 4명의 성직자를 임명한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5세를 묘사한 고대 동전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포고문은 이집트 역사 중에서도 격동의 시기에 발표되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별칭이었던 에피파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정부인 아가토클레아와 관련된 음모에 의해 자신의 아버지가 살해당한 이후, 겨우 다섯 살에 통치자가 된다. 음모에 관련된 공모자들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후견인 역할을 자처하며 이집트를 통치했고, 2년 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의 아들이라 불리는 틀레폴레모스 장군 하에 아가토클레아와 그녀의 가족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폭도들에 의해 린치를 당했을 때까지도 이집트를 지배했다.

설상가상 이집트 국경 너머의 정치 세력들은 프롤레마이오스 왕국의 내부 문제들을 악화시킨다.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3세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는 이집트의 영토를 분할하는 협정을 맺는다. 필리포스는 아시아 서남부의 카리아, 반도의 에게 해 북동 해안 지방인 트라키아의 여러 섬과 도시를 점령했고 이집트 남부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통치 기간부터 시작했던 오랜 반란으로 들끓고 있었다.

어린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12세의 나이로 멤피스에서 공식적인 왕위에 올랐을 때에도 전쟁과 내부의 반란은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나서, 멤피스에 포고문이 내려지게 된다. 포고문에 따르면 프롤레마이오스 5세는 신전에 은과 곡식을 꽤 많이 제공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대가로 제사장들은 매년 왕의 생일과 대관식 날을 기념하고, 이집트의 모든 제사장들은 다른 신들과 함께 그를 섬길 것이라 맹세했다고 한다. 

일련의 일들을 보면 프롤레마이오스 왕들이 시민들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제들의 호의가 필요했다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이 즉위했던 시기 멤피스의 사제단은 특히 중요했는데, 당시 멤피스의 사제들은 왕국에서 가장 높은 종교적 권위자들이었고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로제타스톤 /flickr

이 포고령은 프톨레마이오스 통치자들이 있었던 정부의 중심인 알렉산드리아가 아닌 이집트의 고대 수도 멤피스에서 내려진 것을 봤을 때 이 젊은 왕은 사제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고 싶어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집트 정부는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 이래 그리스어를 사용했지만 멤피스의 이 포고문에는 이집트어로 된 본문도 포함되어 있어 문맹이 많았던 당시 이집트 사제들을 통해 전체적인 내용을 일반 대중에게 알리려 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로제타스톤의 발견, 그리고 해독 이전 고대 이집트 언어와 문자는 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상형 문자의 사용은 파라오 시대 후반부터 전문화가 되어 갔고 소수의 이집트인들만이 이 언어를 읽고 쓸 수 있었다. 상형 문자의 사용은 신전의 사제들이 점점 이탈하면서 중단되고, 곧 이집트에서 사라진다. 이집트의 종교는 이후 기독교로 바뀐다. 마지막으로 알려진 비문은 이집트 필라에에서 발견된 것이다. 상형 문자를 읽고 쓰는 것에 대한 모든 지식과 방법이 사라지고, 약 1400년이 지난 후 학자들은 이 돌에 새겨진 비문을 이집트 언어를 해독하는 키로 사용할 수 있었다. 

까만 칠을 해 더 선명하게 보이는 로제타스톤 /pixabay

이 포고령의 본문은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업적, 통치에 대한 긴 찬사로 시작한다. 왕은 이집트에 큰 번영을 가져다 주었고, 신전을 새로 짓고 오래된 신전을 복구하는 데 많은 투자를 하였으며, 백성들에게는 곡식을 나눠 주었다. 국가에 반기를 들었던 많은 죄수들은 그의 통치 기간 모두 석방되었고 왕은 이집트의 적들을 무찌르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 모든 일을 기리기 위해 모든 신전에는 왕관을 쓴 왕의 동상을 세우고, 하루에 세 번씩 제사장들이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왕의 생일과 대관식 날짜는 모든 것이 있는 축제로 기념했고 매달 17일과 마지막 날은 신들에게 사랑받는 위대한 통치자인 프롤레마이오스 5세를 기리기 위한 축하날이었다. 본문은 이 포고문이 세 개의 문서로 씌어 있으며, 모든 신전에 세워져 있는 돌들은 영원히 살아 있을 이 위대한 왕의 조각상 옆에 세워져야 한다고 전한다. 


로제타스톤을 둘러싼 여전한 분쟁
 

로제타스톤 모형 굿즈를 들고 좋아하는 아이 관람객 /flickr

로제타스톤을 이집트로 반환하라는 요구는 2003년 7월, 이집트의 최고유물위원회 사무총장이며 고대유물부 장관인 자히 하와스에 의해 제기된다. 이집트에서는 이 비석이 '우리 이집트 정체성의 아이콘'이라 언급하며 유물을 이집트로 송환하라는 요청을 한다. 2005년 대영박물관에서 로제타스톤이 전시되고 있을 즈음 하와스는 이 비석의 3개월 임대를 제안했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집트는 최종적으로는 영구 반환이라는 목표를 두고 있지만 대영박물관은 이집트의 반환 요구에 아직까지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있다.

영국의 박물학자 존 레이는 '이 돌이 로제타보다 대영박물관에서 지낸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란 말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미 2005년 대영박물관의 한나 볼턴 대변인은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세계의 유수한 유물들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전 인류에 계속 제공할 것"이라며, 로제타 스톤을 반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현재는 국제적으로 구속력 있는 협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해 당사국 정부 간의 협상으로 해결해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어찌됐든 이 커다란 돌을 둘러싼 분쟁이 하루라도 빨리 원활하게 끝나는 것이 이 위대한 유물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싶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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