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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게 올리는 올곧은 마음, 상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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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게 올리는 올곧은 마음, 상소문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9.07 10: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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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유인석 선생의 상소문 /KBS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일제강점기 시절 의병장이었던 의암 유인석 선생이 125년 전 고종 황제에게 쓴 상소문의 초고본이 발견되어 화제를 모았다. 강원도독립운동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추진위)는 8월 12일 강원 춘천시 효자동 사무실에서 의암 선생이 1896년 고종 황제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상소문 초고와 유품을 공개했다.

의암 선생의 상소문 초고본은 선생의 증손댁 집수리 과정에서 발견돼 후손들이 추진위)에 전달한 것이다. 고친 흔적이 있어 상소를 올리기 전 초고로 파악되며, 가로 2.8m, 세로 30cm 크기의 상소문은 의암이 구한말 의병을 이끈 항일운동 지도자로서의 결의와 애국심을 느낄 수 있다.

의암 선생은 상소문에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에 대해 ‘재앙을 당하셨다’라 적었고, 김홍집 내각에 의해 발표된 단발령에 따라 황제가 단발을 시행한 것을 두고 ‘치욕을 받으셨다’며 안타까운 심정을 밝혔다. 


왕에게 보내는 충절의 신호, 상소문
 

김수옥을 비롯한 720여명의 충청도 유생들이 연명으로 왕에게 올린 상소 /국립중앙박물관

청와대에 국민청원 게시판이 있다면, 조선 시대에는 상소문이 있었다. 상소는 직무와 관련된 보고나 국정 현안에 대한 건의를 위해서 관료나 유생이 국왕에게 올린 문서 혹은 문서를 올리는 행위를 뜻한다. 원래 상소는 문서의 형태로 국왕에게 올리는 모든 문서 양식을 통칭했다.

주요한 내용은 업무 보고, 건의, 청원, 진정 등에서부터 개인적인 감사의 표현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일성록(日省錄)』 등 관찬서에는 그 내용이 대체로 간략하게 쓰여 있거나 왜곡되게 고쳐진 것도 있으며,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래서 상소문의 원본은 관찬사서, 또는 문집류에 실려 있는 상소문의 진실 여부를 고증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상소는 행정 문서뿐만 아니라 정치 득실을 따지는 언론의 목적으로도 활용되기도 하였다. 주로 사간원이나 사헌부, 홍문관과 같이 국왕에 대한 언론의 책임이 있는 관서에서 이러한 상소를 자주 올렸다. 또한 관료들뿐만 아니라 서울과 지방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는데, 성균관 유생들의 유소나 영남에서 지역 유생들이 올린 만인소가 유명하다. 상소는 일반 사대부들의 여론이나 지방 유림들의 민심을 국왕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현대에 새롭게 발간된 고문진보 후집' 상·하권 /전통문화연구회

사실 조선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 중에서 상소문의 형식으로된 글이 차지하고 있는 양은 꽤 많다. 상소문은 임금과 소통하는 문장의 정수라는 평가를 받지만 왕조 시대 임금에게 올린 정치적인 글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볼 만한 것이 못 된다는 편견으로 주목을 받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상소문 중에서도 이사의 『축객서』, 제갈량의 『출사표』, 이밀의 『진정표』 등 문학적이고 감동적인 글들도 존재한다. 이 글들은 『고문진보』에 편집되어 있어 명문장으로서 후대 독자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사랑을 받아온 명작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상소는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바로잡기 위한 선비들의 읍소였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도끼를 매고, 멍석을 짊어지고, 죽음을 각오하는 상소를 올려 자신들의 충정을 표현했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고 궁궐 앞에 이마를 찧어가며 상소를 올려 왕도를 펼쳤고, 자신들의 언로가 막히면 선비들은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려 길을 열었다. 자신만의 욕심에 눈이 멀어 백성의 재물을 수탈·착취하고 백성의 고혈을 짜는 탐관오리들을 내쫓기 위해 임금에게 눈물을 흘리며 간곡한 어조로 상소를 올리는 선비들도 많았다. 선비 정신이라고 하면 상소문이 빠질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그렇다면 최초의 상소문은 무엇이었을까? 신라 시대 병부령을 지낸 김후직이 진평왕에게 올린 '상진평왕서'라는 이름의 상소가 최초라는 기록이 있다. 

“사냥을 중지하시고 정사를 돌보십시오. 옛날 임금은 하루 사이에도 만 가지의 일을 보살피되 깊이 생각하고 멀리 걱정하였으며, 그 좌우에는 올바른 선비를 두고서 정직한 말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부지런하여 감히 편안히 쉴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날마다 놀이에 미친 사람이나 아니면 사냥꾼과 더불어 매나 개를 풀어놓고 꿩이나 토끼를 쫓으며 산과 들을 달리면서 스스로 그칠 줄을 모르시니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김후직과 진평왕의 일화가 있는 삼국사기 원문 /한국학중앙연구원

한마디로 나랏일은 뒷전이고 유흥에만 빠져 있는 왕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김후직은 노자의 '도덕경'와 공자의 '서경'을 인용해 “노자는 ‘말을 달리고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狂) 한다’고 하였고, <서경>에는 ‘안으로 여색을 탐하거나, 밖으로 사냥에 미치거나 이 중 한 가지만 하더라도 망하지 않은 이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시옵소서”라고 적었다. 그러나 진평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후에 김후직은 죽기 전 자신을 왕이 사냥을 다니는 길가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후 어느날 진평왕이 평소처럼 사냥을 가는데 어디선가 '가지 마십시오'란 말이 들렸고, 진평왕은 근처에 김후직의 묘가 있다는 걸 알게 되고 그에 대한 이야기도 듣게 된다. 이후 진평왕은 크게 뉘우치며, 사냥을 더이상 가지 않고 나랏일을 돌봤다고 전해진다.

고대에는 신하가 왕에게 상소를 올린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신의 목을 내놓고 하는 일과 같았다. 무엇보다 말이 아닌 장문의 글을 선택하는 건 자신이 뜻하고자 하는 의미를 최대한 논리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컸다. 이황의 '무진육조소에 나오는 "직접 구두로 진술해 올리면 본래 정신이 흐리고 구변이 무딘지라 한 가지를 아뢰면서 만 가지를 빠뜨릴 우려가 있으므로" 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율곡전서 /국립중앙박물관

그렇다면 조선시대 상소를 제일 많이 올린 사람은 누구일까? 다름아닌 율곡 이이, 이율곡 선생이다. 율곡은 아직 어린 명종이 왕위에 오르고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며 나라가 쇠락해지자 상소를 올리기 시작했다. 총 70여건의 상소를 올렸고 대부분의 상소는 나라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해 올렸으며 후에는 사직 상소를 30대에 9번, 40대에 11번이나 올리기도 했다.

『율곡전서』에는 율곡이 임금에게 올린 59건의 상소가 실려 있다. 그의 상소는 당대의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임금의 수양과 백성을 위무를 위한 개혁 방안을 제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만언봉사」는 선조 7년 임금의 구언을 계기로 올린 상소로서 이이의 관직 생활 초기를 대표하는 저술이라 할 수 있으며, 이 상소를 통해 당시의 현실을 통찰하고 당면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제시하였다. 

만언봉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율곡은 붕당 대립의 조정을 위해 특히 노력했는데,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바로 사직 의사를 밝혔던 율곡은 상소문에 이렇게 쓴다. "신이 쓸 만한 사람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당면한 일들에 대해 하문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신의 말이 채택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신다면 다시는 소신을 부르지 마옵소서"라는 글이 적혀 있다. 

즉 여러 차례 자신을 요직에 앉혀도 자신의 말은 듣지 않는 선조를 향한 회초리였다. 왜곡된 상황을 바로잡기 위한 쓴소리를 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관직과 목숨도 마다 않았던 율곡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율곡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며 곧바로 그를 해임해 버린다. 율곡의 말처럼 동인과 서인 세력은 결국 말을 다스리지 못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고 결국에는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맞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최익현 선생의 묘 /문화재청

국사를 배운다면 상소문을 쓰고 도끼를 들고 한양으로 올라간 한 사람이 생각날 것이다. 흥선대원군 밑에서 관리 생활을 하던 최익현이 그 인물이다. 당시 경복궁을 짓는 데 당백전을 발행해 물가가 치솟고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이 일로 그는 좌천되었지만, 이 상소문으로 주목을 받게 된다.

관직에서 물러난 최익현은 나중에도 또 상소문을 올려 흥선대원군의 서원 폐지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또 고종이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직접 정치를 해야 한다며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흥선 대원군의 눈치를 보던 많은 신하들은 최익현을 비난했지만, 최익현의 주장을 옳게 생각한 고종은 그를 보호해 주었다고.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최익현은 상소문의 내용이 과격하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귀양을 갔지만 고종의 배려로 3년만에 풀려나게 된다. 평범한 생활만이 있을 것 같던 그였지만, 강화도 조약 체결로 인해 고종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을 즈음 최익현은 개항 반대 내용을 포함하는 상소문을 쓴다.

그리고 그는 이 상소문과 함께 도끼를 들고 경복궁으로 간다. 이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신은 이 도끼로 자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평소 서양 문화에 개방적이었고 관심이 많았던 고종이었고, 결론이 나지 않은 나라의 정책에 대해 예의 없이 도끼를 가지고 임금이 행차하는 길 옆에 엎드려 상소문을 올렸다며 최익현을 귀양 보내는 씁쓸한 결말을 맞는다. 

1728년, 사도세자의 신원이 부당함을 알리는 소를 올린 것에 격분한 영남유생들이 세자의 신원을 위해 도성에 도착하여 소를 올리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천휘록 /한국국학진흥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상소도 존재한다. 약 만 명이 참여했다 해서 붙여진 만인소는 조선 시대 유생들이 정책상 의사 발표를 위해 올린 상소다. 정부의 정책에 강력한 반대 여론을 일으키는 방법의 하나로, 유생들이 10,000명 내외의 공동 명의로 정부에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원래 이 만인소는 처음에는 수백 명 정도의 규모였지만 갈수록 1,000명대를 능가하는 규모로 커져 갔다.

한국사시험이나 국사를 공부할 때 영남만인소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정조 16년 올라온 제1차 영남만인소는 만 명이 넘는 영남의 선비들의 이름으로 올려졌다. 상소 하나에 1만명 이상이 서명한 사례는 조선 왕조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내용은 사도세자가 영조에 충성했을 뿐 아무런 죄도 없다는 것을 선포함으로써 군주의 권한을 강화하고 강력한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차 영남 만인소에 정조가 깊이 공감하자 10368명이 연명한 2차 상소를 또 올리게 된다. 이외에도 장헌세자 추존 만인소와 1884년 의제개혁 반대 만인소의 원문이 각각 안동 도산서원과 경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 /한국국학진흥원

2018년 6월, ‘만인의 청원, 만인소’(萬人疏)가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태지역 위원회는 광주에서 열린 제8차 정기총회에서 ‘만인소’ 등재를 확정했다.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1855년)와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1884년)는 여러 상소문 중에서도 원본으로 전해지며 각각 도산서원과 옥산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다가 현재는 안동 한국국학진흥원에 보관되어 있다.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는 정통 왕위 계승자임에도 불구하고 당파 싸움으로 인해 뒤주에 갇혀 불운하게 생을 마친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해 달라는 내용이다. 당파적 이해관계로 인해 왕통이 올바르게 서 있지 않은 현실을 바로잡으려 한 내용이 들어 있다.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는 1884년 내려진 복제 개혁에 반대하면서 이 정책에 대한 재고를 청원하는 내용이다. 조선은 개화를 명분으로 좁은 소매의 옷을 강제로 입도록 하는 복제 개혁을 단행했는데, 전국 각지에서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고 그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다. 

복제개혁반대 만인소 /경주시

이 만인소들은 ‘만여 명의 개인이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유교적 윤리관을 국가에 실천적으로 적용한 민주주의의 초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권력을 갖지 못한 재야 유교 지식인들이 자발적 참여를 통해 형성된 공론을 국가에 적용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청원했던 결과물이라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경주시 관계자는 “이들 만인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수 있도록 문화재청, 경상북도,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과 긴밀히 협력하는 한편, 기록유산과 문화유산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다양한 정책을 마련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세상의 빛을 본 한 의병장의 상소문 /KBS

8월 12일, 의암 선생의 증손 유연창 씨는 강원도독립운동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에 의암 유인석 선생의 상소문을 기탁했다. 남귀우 추진위 사무국장은 “상소문 초고본은 조선 말 큰 학자가 바라본 나라의 위기와 그 속에서 의병 운동을 일으켜 싸워야 하는 지식인의 고뇌가 담긴 귀한 사료”라며, “이를 기꺼이 기탁해준 유연창 옹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추진위는 앞으로 건립될 강원독립기념관에 의암 선생의 후손들이 기탁한 상소문 초고본을 상설 전시할 계획이다. 의암학회와 의병마을은 후손들의 자택에 의암 선생의 중요 유품들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연구를 이어갈 방침이라고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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