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1-10-23 04:25 (토)
따뜻한 그림, 행복해지는 민화를 사랑한 민화장 김만희
상태바
따뜻한 그림, 행복해지는 민화를 사랑한 민화장 김만희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8.26 10: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채용신, 삼국지연의도 8폭 작품 중 두 번째인 ‘삼고초려(三顧草廬)’ /영월군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국내 최초의 민화 전문 박물관인 조선민화박물관이 ‘고종의 꿈-영원한 조선을 꿈꾸며’를 주제로 미디어아트가 접목된 이색 특별전을 11월 30일까지 진행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종의 어진을 그렸던 조선 말 최고의 인물화가인 석지 채용신 선생이 명나라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 내용을 그린 ‘삼국지연의도’ 걸작 8폭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작품인 채용신의 ‘삼국지연의도’ 8폭은 고종의 어진을 그렸던 조선 말 최고의 인물화가인 채용신의 걸작이며 명나라 때 나관중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의 명장면을 담은 작품으로 보기 드문 대작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채용신의 ‘삼국지연의도’ 중 도원결의, 적벽대전과 같이 중요한 장면을 미디어아트로 제작했다. 작품을 대형 스크린으로 전시장에 함께 배치해 단순 작품 감상을 넘어선 생생한 소설 속 현장감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전통을 잇는 귀하디 귀한 화가, 김만희 화백

조선 말기에 민화 초상화로 유명했던, 최고의 인물 화가라는 평을 받았던 채용신 화가였지만 사실 조선 시대에 가장 천하게 여겨져 왔다는 것이 화가였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6·25 이후까지도 민화장들은 겨울이 되면 시골 마을이나 장터를 무대로 괴나리봇짐에 간단한 필구와 물감을 준비해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다. 이들은 민화를 그려 주는 대신 쌀이나 보리를 받아 짊어지고 동구밖을 떠나가곤 했다고. 

김만희 '아이스케기' /포스코갤러리 

이후 실학 사상이 새롭게 도입되며 각종 문화 예술에 대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판소리, 가면극, 민화 등이 이때 발생하며 서민들도 예술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민화는 비전문적인 화가나 일반 대중들의 조악한 작품들도 포함한다.

넓은 의미에서는 직업 화가인 도화서의 화원이나 화가로서의 재질을 갖춘 화공이 그린 그림 또한 들어가 있다. 처음 민화라는 말을 쓴 사람은 야나기(柳宗悅)라는 이름의 일본인으로, “민중 속에서 태어나고 민중을 위하여 그려지고 민중에 의해서 구입되는 그림”을 민화라 정의했다.

그 뒤에 우리나라에서도 민화에 대한 연구와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여러 학자들이 민화의 의미를 밝히려 노력했다. 민화 자체가 사람의 본능적인 회화 의지, 순수하면서도 유치한 대중적인 실용화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의 역사와 같이 발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석기 시대의 암벽화, 청동기 시대의 공예품, 고분 벽화 등에서 민화와 같은 그림과 무늬를 쉽게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강승렬 '십장생도' /루씨쏜 아뜰리에

민화를 그렸던 주체도 꼭 비범한 능력을 가진 천재나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만 있던 건 아니었다. 민화의 작가는 화원, 화원이 되지 못했지만 그림에 재주가 있어 사람들의 의뢰를 받고 그림을 그린 화공, 우리네 같은 일반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심지어 이들의 지위가 높은 것도 아니었고, 신분이나 사회적 지위 또한 낮았다. 귀족, 승려, 무당 중에서도 재주가 있었으면 화가라 불렀고 시골 동네와 장터를 돌아다니며 그림을 그려주던 유랑 화가들도 화가였다.

민화의 주체가 아닌 수요자들 또한 모든 사회에 속해 있는 대중들이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대부분 그림 공부도 제대로 못한 무명 화가들, 떠돌이 화가들이라 그림을 그린 화가의 낙관조차 없어 신원미상의 민화들로 남은 게 많다는 점이다. 아마 그들도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고 싶었을 텐데 말이다. 비전문적인, 자신의 느낌대로 자유롭게 그렸던 화가들의 그림이라 우리나라의 민화에는 공간 구성이 다양하고 자유로우며 어두운 색이 거의 없다. 민화에는 밝고, 유쾌하면서도 원색적이고 한없이 밝은 느낌을 띄고 있다. 

민화장 김만희 화백 /문화재청 

이렇게 오랫동안 보존되어 온 민화를 그리는 사람을 민화장이라 통칭하며, 민화장은 서민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표현한 민속공예기술로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96년 12월 31일 무형문화재 민화장 기능보유자로 김만희 화백이 인정받아 우리의 고유한 민화기법을 전승하였으며, 2017년 4월 13일에 명예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림으로 우리 민중의 삶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민화만큼 적절한 것이 없다고 믿었다”고 회고했던 민화장 김만희 화백은 지난 4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현재는 민화전수 교육조교 정귀자 선생이 그의 뒤를 이어 민화를 대중들에게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민화를 그리는 故 김만희 화백 /서울시 유튜브 

1931년 부산에서 태어난 김만희 화백은 교직 생활을 했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처음에는 교사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10여년간 교직 생활을 하던 그는 1961년, 무슨 생각인지 교사를 그만두고 화가의 일을 시작했다. 그냥, 막연하게 새로운 다른 것을 해 보고 싶었던 그는 순식간에 백수가 되었고 정말 여러 일들을 시작해 봤지만 그 또한 다 실패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이 미술이었다. 사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 관심과 열정이 많았고, 그제서야 그 열정이 발현된 것이다. 어렸을 때 미술을 잘 했고, 그림도 잘 그린다는 평을 들었지만 그림으로 먹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이란 말을 입버릇처럼 들었던 그였기에 직업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교사 일을 했던 것이라 그는 말한다. 

하고 싶었던 미술을 선택한 그가 처음 민화에 손을 댔을 때는 자료들도 거의 없어 민화자료 책자 하나만 가지고 독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풍부한 자료가 필요했다. 당시 김만희 화백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는 초가집이나 한옥 등의 전통 건물들이 사라지고 아파트나 주택 등이 들어서던 시기였다. 이 현상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그는 전통을 지키고, 계승하는 방법으로 민화를 선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정들었던 전통적인 것들이 없어진다는 생각에 이를 기록으로라도 남겨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전했다. 

소나무와 학을 그린 민화 /서울시

김만희 화백은 왜 그림에는 서양화, 중국 화풍에 영향을 받은 동양화만 있을까? 우리나라의 전통이 깃들어 있는 제 3의 미술을 시도해 보자는 생각이 들어 시작한 일이라 밝히기도 했다. 자료가 너무 부족했던 탓에 그는 카메라와 보따리만 들쳐메고 전국 방방곡곡의 사찰, 박물관, 개인 소장가 등을 찾아다니며 고서적과 민화를 사진으로 찍고 기록으로 남기면서 지금까지 약 1만 점의 그림을 그렸다. 민화가 민간신앙과도 연결되어 있어 종교적인 건물이 있는 곳도 돌아다니다 보니 간첩으로 오해를 받아 국정원에서 전화가 온 적도 있었다고.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여러 자료를 수집하고 돌아다니던 중에 그는 1970년 열린 전국관광민예품경진대회에 그림 100여장을 출품했고, 입선이 된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여러 대회에 수상하며 가능성을 봤다가, 1971년 국립공보관에서 전시 희망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전시 신청을 한다. 그는 당당히 전시 자격을 부여받고 4개의 전시장 중 가장 큰 1972년 '민속화자료전'이라는 타이틀로 첫 전시회를 연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미술을 선택한 것에 반신반의를 하고 있었고, 이 길을 계속 따라가야 하는 건지 고민도 많았다고. 

작업중인 김만희 화백 /서울시 유튜브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남들에게 무당 그림이니, 간첩이니 오해를 받았던 일이 있었으니 그는 민화를 제대로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100평 남짓한 공간에 300여편의 자료와 작품들을 한꺼번에 전시했다. 이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면 이제 이 일을 하지 않겠다는 각오까지 하고 홍보를 했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이 첫 전시회는 말 그대로 대박이 났다. 하루 약 2천여명의 사람들이 다녀갔고 얼마나 화제성이 높았는지 언론의 보도도 이어졌다고 한다.

후에 김만희 화백은 “전시로 인해 용기를 얻게 됐다”며, “그제야 민화를 할 가치가 있다 고 판단을 했고, 끝까지 이 길을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이후 그는 국내외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이어가게 된다. 이듬해인 1973년에도 같은 전시의 앵콜전이 열렸고, 이후 10년 동안 22회의 초청전이 열렸다.

개인전의 성공을 발판삼아 김만희 화백은 1996년 제18호 인간문화재 민화장으로 지정받았다. 이로 인해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갈 것만 같았던 민화도 우리나라 전통 문화의 일부로 인정받았고, 이를 연구하고 계승하는 움직임도 생겼다. 지금도 전국에서 여러 사람들이 민화를 공부하며 작업하고 있고, 지역 문화센터에서 사람들을 위한 강좌의 일부로도 등장하고 있다. 

작호도 /서울시

민화가 점점 사람들에게 알려질수록 그에게도 또 하나의 고민이 생겼다. 주목을 받게 되며 인터뷰 등의 자리가 많아질수록 민화를 포함한 전통 그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묻는 질문에 답변하려면 그에 맞는 지식이 필요하다 생각한 그는 그림이 아닌 이론 공부도 시작했다. 점점 지식의 깊이가 깊어지고 작품 생활이 길어질수록 그의 작품은 세상 밖에서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국내는 물론 대만, 일본, 미국, 오스트리아, 독일 등의 5개국에서도 10 번이 넘는 해외 전시를 가지며 우리나라의 민화를 세계에 알렸다.

민화 작업에 열정을 너무 쏟았던 탓인지, 그는 51세 되던 해 백내장으로 한쪽 시력을 잃게 된다. 전시회를 성황리에 마친 후 병원을 찾았으나 수술에 실패하면서부터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게 한쪽 시력을 잃는다는 건 꽤 치명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는 인공 안구에 의존하면서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어릴 때 경험했었던 1930년대에서 1950년대 생활상을 민화의 소재로 삼아 약 200여 점의 풍속화를 작업했다. 그에게는 전수조교 1명, 이수자 3명, 전수장 학생 1명 등 문화재로 인정된 제자가 5명 정도 있다.

김만희 '42번' /포스코갤러리

그는 민화는 서민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풍속화도 즐겨 그렸다. 1950년대 집 짓는 풍경, 농촌의 사람들이 일하는 풍경 등이 근현대 자료전을 통해 공개되기도 했다. 그 시절 그 세대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켰고,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옛 풍속과 함께 그 시대의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게 했다. 그는 오랫동안 민화를 그려왔으면서도, 같은 주제를 쓰더라도 조금씩 다른 그림을 그렸다. 늘 새로운 민화를 그리는 건 어렵지만, 옛날 조선시대 수많은 사람들이 민화를 그렸던 것처럼 그는 자유로운 사고로 민화를 그려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눈을 감기 전까지 민화를 계속 그릴 것이라 말했던 김만희 화백은 자신의 역할이 1960년대 풍속을 그리는 것까지라고만 했다. 이후의 사람들이 그리는 민화는 다음 세대가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처음 민화를 배울 때는 기술을 습득하고 방법을 배우기 위해 모사를 하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자신만의 새로운 소재를 찾아내야 한다"며, "정형화된 화법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적이며 자유롭게 표현해 내는 것이 민화의 매력이고 강점이다"라고 그는 밝혔다.

故 김만희 화백 /서울시 유튜브 

옛 민화는 어떻게 보면 그림에 대해서는 무지할지도 모르지만 순수한 사람들이 표현하는, 때묻지 않은 그림들이었다. 김만희 화백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마다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부드럽고 따뜻한 그림을 좋아한다. 일반 대중이 보는 그림은 보고 즐거워야지, 어두운 감정이 생기면 안 된다"라고 그는 말했다. 민화는 우리의 정서가 담긴 그림이기 때문에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호감이 느껴진다. 요즘 사람들이 민화를 봐도 거리감 없이 정겹게 느낄 수 있는 이유다.

지금 사람들이 민화에 관심을 갖고 그림을 그리고, 작업을 이어나가는 것도 민화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도록 노력한 사람들의 열정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왕에 태어난 거, 민화 속 호랑이나 까치처럼 즐겁게 살다 가는 게 김만희 화백의 꿈이었다. 그는 민화의 세계처럼 사람들 또한 웃으면서 세상을 살아가길 바랐다. 이제 그는 세상에 없지만, 민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진다면 사람들의 삶 또한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