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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과 패기, 권력의 힘을 상징한 우리나라의 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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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과 패기, 권력의 힘을 상징한 우리나라의 철불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8.24 1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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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심 깃든 쇳물, 강원과 전북 철불 /국립익산박물관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국립익산박물관은 5월 25일부터 '불심 깃든 쇳물, 강원과 전북 철불' 순회전 진행하고 있다. 순회전은 생활 속에서 쓰이는 철이 중생을 제도하는 부처와의 만남이 주제이다. 

이번 전시 전시품으로 원주 학성동 철조약사여래좌상(보물 제1873호), 임실 중기사 철조여래좌상(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68호)을 비롯한 33건, 총 51점을 선보이고 있다. 쇠를 녹여 만든 불상인 철불은 9세기 통일신라 말부터 고려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당시 수도였던 경주나 개성이 아닌 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많은 예가 남아 있는 곳이 바로 강원도와 전라북도이다. 이번 전시는 앞서 강원도 원주 철불에 대한 보존과학적 연구성과를 공개한 국립춘천박물관 특별전 <강원 철불>에, 전북 남원과 임실에 전하는 철불을 더하여 꾸몄다.

4부로 구성된 순회전 제1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에서는 어떤 재료로 불상을 제작했는지 살펴보고 생활 속에서 귀하게 여긴 다양한 재질의 불상을 소개하고 있다. 제2부 ‘어디서 만들었을까?’에서는 주조 구덩이, 부처 나발 모양의 거푸집 등이 출토된 강원도 동해 지가동 유적과 제련로 노벽과 철 찌꺼기가 출토된 장수 대적골 유적 등을 소개했다.

제3부 ‘어떻게 만들었을까?’에서는 과학적 조사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거대한 철불의 제작 방법을 소개했으며, 마지막으로 제4부 ‘철불 안 들여다보기’에서는 250㎏에 달하는 무게로 인해 평상시 쉽게 접할 수 없던 철불의 내부를 직접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불심 깃든 쇳물, 강원과 전북 철불' 전시는 이번 달 29일 까지 진행된다.


매력적인 재료, 철로 만들어진 철불

철조 비로자나불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 삼국 시대에는 소금동불, 석불, 마애불이 유행했으며 통일신라 시대에는 금동불과 석조불상, 철불이 유행했다. 고려시대에도 철불과 석불이 유행하다 중기에 이르면서 점차 목조불과 금동불, 건칠불 등 여러 종류의 재료가 사용된 불상이 등장한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금동불이 사라지며 소조, 목조불이 유행하게 된다. 이러한 재료의 시대적 차이는 정치적인 변화, 사찰의 경제력, 불사를 주도하는 후원자의 성격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같은 재료일 경우에도 시대에 따라 다른 제작 방법과 기법이 유행한다. 

사람들이 불상을 만드는 의미와 재료에 대해서는 경전에서 알 수 있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에서는 '어떤 이는 부처를 위해 여러 형상을 세우거나 부처님상 조각하면 그들도 이미 성불하였고 혹은 칠보로나 놋쇠나 백동들과 납, 주석, 쇳덩이나 나무, 진흙으로 이루며……'라는 구절이 나온다.

즉 오랜 세월 동안 기도하는 공덕보다 더 빨리 성불하는 게 불사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불사는 곧 시주와도 연결되어 있어 후원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내용 또한 포함한다. 그리고 동, 철, 흙, 나무, 칠포 등 불상의 재료까지도 설파하고 있으며 지속성이 강하면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모든 재질을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청양 장곡사 철조약사여래좌상 및 석조대좌 /문화재청 

처음 불상을 만들 때 보편적인 재료로 많이 쓰였던 건 금이었다. 다른 재료로 불상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마지막 작업은 그 위에 금을 씌워 마감하는 개금불사(불상에 금칠을 할 때에 행하는 의식)가 이루어졌다. 이는 가장 귀하고 고귀한 재료인 금을 통해 불상에 영원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한다. 시대적으로 가장 많이 남은 불상은 동으로 조성한 동불인데, 동을 재료로 상을 만든 다음 그 위에 금으로 씌운 금동 불상이 가장 많다.

철은 이르면 8세기 중엽, 또는 9세기 이후부터 고려시대까지 불상의 재료로 사용되었다. 사실 철은 표면이 거친 데다 녹는점이 동보다 높고 온도가 내려가면 금방 굳어버리는 성질이 있어 표정과 손 모양, 옷주름 등 세부적인 표현에 공을 들여야 하는 불상의 제작에 선호되는 재질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전기의 장인들이 철을 선택하여 불상을 만들게 된 데에는 여러 사정이 있었다.

당시 불사를 둘러싼 사회적인 분위기는 예전만큼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 하대인 806년에는 애장왕이 경제력과 승군을 보유한 사원과 귀족 세력의 결합을 우려하여 불교 사원의 창건을 금지했고, 834년에도 흥덕왕이 신분별로 사용할 수 있는 재료를 규정하는 교서를 내리는 등 당시의 사치 풍조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러니 되도록 왕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는, 즉 문제의 소지가 없는 재료를 찾아야 했다. 게다가 840년대에는 서해 해상무역을 주도하며 동의 국내 수급에 일조했던 장보고가 사망하고 당 무종의 회창폐불, 즉 불교 탄압 사건까지 벌어진다. 자연히 중국과의 교역에 차질이 생겨 신라는 전반적인 동 부족 상태에 놓이게 된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국가적 차원으로 다수의 사찰을 창건하도록 했을 때도 동의 공급은 여전히 수요를 따라잡지 못한 상황에서 철은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동을 대체할 수 있는 재료가 되어 주었다.

남원 선원사 철조여래좌상 /문화재청 

지방 호족들의 적극적인 지원도 한몫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대부분의 철불들은 통일신라 하대인 9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들이다. 중앙 정치의 기반이 흔들리고 지방 호족 세력이 대두하던 시기에 철불이 대거 등장한 이유는 구리의 부족과 철의 양산 등 당시의 시대 상황과도 연결되어 있다. 당시에도 청동의 공급난은 심했기 때문에 철은 지방 호족들이 무기 제작을 위해서 항상 준비해 두었던 재료에 속해 있었다. 즉 철은 구입이 쉽고 금동불보다 적은 비용으로 대형 불상을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조각 재료였다.

원래 금속 중에서도 철로 만들어진 철불은 금동불보다 제작 공정이 훨씬 까다롭지만 비용이 적게 들고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강도 때문에 건축이나 조선, 무기 등의 재료로 이용되곤 했지만 구리에 비해 녹는 온도가 높고 주물이 까다로워 어느 정도 이상의 표현은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주조 과정은 금동불을 제작할 때와 기본적으로 동일하지만, 주조가 끝난 뒤 표면상의 불완전한 부분을 끌로 손질할 수 있는 동에 비해 철은 녹는점이 높고 강도가 강해 한번 굳으면 다듬을 수 있는 범위가 훨씬 적었다. 그 크기 때문에 거푸집을 여러 판 결합시켜 주조해야 하는 대다수의 철불에는 판과 판의 이음새에 쇳물이 흘러들어 생긴 분할선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문화재청 

철불의 주조는 금동불 주조법이 뒷받침하지만 밀랍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주조 기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금동불은 흙으로 대체적인 형상을 만들고 여기에 밀랍을 입힌 후 정교하게 조각하여 이를 기본틀로 삼지만, 철불은 소조불처럼 흙으로 실제 모습을 그대로 조각하여 원형으로 삼는다.

이 원형 위에 다시 점토를 발라 마치 석고본을 뜨듯이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틀을 떠낸 다음, 이를 서로 결합하여 바깥틀로 삼는다. 안틀과 바깥틀 사이의 틈새로 쇳물을 부어넣고 이 경우 여러 조각으로 결합한 바깥틀의 틈새로 쇳물이 스며 나와 마치 용접 자국 같은 흔적이 남게 된다. 주물이 끝나면 표면에 두껍게 옻칠을 한 뒤 금박을 입혀 마무리하는 과정을 거친다.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문화재청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도피안사에 있는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 경문왕 5년(865)에 도선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진다. 기록에 의하면 도선대사가 철조비로자나불을 만들어 철원의 안양사에 모시려고 했으나 운반 도중에 불상이 없어져서 찾아보니 도피안사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에 절을 세우고 불상을 모셨다고.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는 철로 만든 불상이 유행했는데, 이 불상은 그의 대표적인 예시다.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까지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고 갸름한 얼굴은 인자하고 온화한 인상을 하고 있다. 평판적인 신체에는 굴곡의 표현이 없고, 양 어깨를 감싼 옷에는 평행한 옷주름이 형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몸에 비해 가냘픈 손은 가슴 앞에서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의 모양이다.

이 불상은 당대에 유행하던 철조불상으로, 섬세하고 평판적인 양식이나 형식적 특징과 함께 만든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작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능숙한 조형 수법과 알맞은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문화재청 

보림사 대적광전에 모셔진 철불인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머리와 불신의 비율이 대구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비슷한 모양으로, 당시의 불상 비례를 반영하고 있다. 육계(부처의 머리 위에 튀어나온 혹)가 비교적 큼직하며 얼굴은 달걀형으로 편편한 콧잔등, 가늘고 긴 눈, 사다리꼴의 두드러진 인중, 작은 입 등이 상당히 추상화된 경향을 나타낸다.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수종이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어서 정확한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다. 

통일신라 전성기(8세기)의 불상에 비해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고,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다.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이러한 양식이 더 발전하여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나 봉화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같은 9세기 후기 조각 양식으로 정착되었다. 이 불상은 조성 연대가 확실한 불상으로, 당시 유사한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는 기본 자료가 되는 통일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철불좌상이라 할 수 있다.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 /문화재청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은 고려 초기의 철조석가여래좌상으로,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의 절터에서 발견됐다. 옛 지명을 본뜬 "광주 춘궁리 철불"로도 불린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332호로 지정되었다. 이 철불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가 하나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서 용산으로 이전하며 높이 2.85미터, 무게 6.2톤이라는 어마어마한 무게 때문에 한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었던 철불도 결국 이사를 해야 했다는 이야기다. 

2004년 용산 이전을 위해 철불을 포장하고 운반하는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신유섭

한지와 천 등으로 포장을 하고 지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이 철불은 다른 유물들처럼 계단이나 승강기를 이용해 옮길 수가 없어 박물관 동쪽 벽면의 땅을 파내야 했다. 두께만 53센티인 벽을 헐고 150여톤의 크레인을 이용해 불상을 지상으로 빼냈다. 지상의 공기를 맡은 불상은 트레일러에 실려 용산으로 이송되었다.

이 불상이 발견된 곳은 경기도 하남시 하사창동의 한 폐사지였다. 고려시대 행정구역상 광주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1917년 조선총독부의 고적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남쪽을 향한 철불이 동‧서로 2구 있었는데 그 중에서 크기가 더 큰 불상이 이왕가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나와 있다.

나머지 한 구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후의 조사에서 이 폐사지와 인접한 곳에 천왕사라는 상당한 규모의 절이 있었던 것이 밝혀진다. 가람의 규모와 철불의 크기, 함께 발견되는 유물의 수준으로 미루어 볼 때 세력가의 후원이 뒷받침되었을거라 추정한다.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 /문화재청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은 고려 시대로서는 예외적으로 큰 불상이다. 얼굴 모습이나 손 모양, 자세, 편단우견(불교에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옷 모양새)의 천의의 모습과 주름 등 모두 석굴암의 본존상을 충실히 모방하고 있어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보았지만 지나치게 긴 눈, 예리한 눈썹, 입술의 윤곽 등 추상적인 경향이 뚜렷한 점 등으로 현재는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본다. 신라 불상을 충실하게 재현하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고려 초기의 복고적인 특색을 보이는 작품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까지 큰 불상이 필요했던 걸까, 9세기 말 경북 문경 봉암사의 창건 이유를 보면 왜 대불이 필요했는지 알 수 있다. 봉암사가 세워진 지역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기근과 국가의 수탈로 도적화된 농민의 항거가 자주 발생했다. 이에 사원이 서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을 우려한 지증대사 도헌이 “기와집을 짓고 사방으로 추녀를 드리워 지세를 누르고, 철불상 2구를 주조하여 절을 호위토록 했다"고 한다.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 /문화재청

이 봉암사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가 혼란한 시기 민심을 바로잡고 사람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사원과 불상을 만든다면 당연히 위엄있는 불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여기에 압도적인 크기는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요소였을 것이다. 하남 하사창동 철조석가여래좌상이 철로 만들어졌다는 건 충주를 비롯한 주요 철 산지가 주변에 위치하고, 당시 있었던 뱃길로 긴밀하게 연결된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철이라는 재료에 대한 접근성이 높았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임실 중기사 철조여래좌상 /문화재청 

현재 국립익산박물관에서 전시중인 '불심 깃든 쇳물, 강원과 전북의 철불’ 순회전은 생활 속 거리두기 방침에 따라 다양한 온라인 전시 콘텐츠를 운영하고 있다. 특별전을 포함한 전시 관람은 박물관 누리집에서 온라인 사전예약을 할 수 있으며 현장 신청도 가능하다.

국립익산박물관 관계자는 이번 전시를 두고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으로 지친 일상속에 이번 전시를 감상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을 기회가 되길 희망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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