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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작은 그릇 공장에서 시작된 로열 덜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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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작은 그릇 공장에서 시작된 로열 덜튼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8.17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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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도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익히 들어봤을 이름, '로열 덜튼'은 영국의 도자기와 식기 전문 제조업체다. 유명 브랜드 도자기 할인전에는 빠지지 않는 도자기로, 최근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에서도 여러 유명 브랜드와 함께 로열 덜튼이 참여해 접시류, 티팟, 커피잔세트 등 식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도자기 상품을 판매했다. 

특히 로열 덜튼은 영국의 전통과 품위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 1960년 한국도자기와 제휴해 ‘황실 장미 홈세트’를 우리나라 시장에 선보이기도 했다. 


22세의 청년, 작은 도자기 공장에서 전 재산을 투자하다

존 덜튼의 모습을 형상화한 머그잔 /이베이

로열 덜튼은 1815년 런던 남부, 템즈강이 보이는 램버스의 작은 그릇 공장에서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도자기 브랜드들이 좋은 흙이 나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반면 로열 덜튼은 좋은 흙이 나는 지역이 아닌 곳에서 시작하게 된다. 1688, 영국 도예의 대가인 존 드와이트가 플럼에 정주, 도자기 제작의 특허를 얻어 플럼 자기를 생산한다.

그의 견습생들 중 하나였던 22세의 도공인 존 덜튼이 램버스에 있는 도자기 공장의 공동경영권을 따낸다. 그는 그동안 소중히 모아 놨던 100파운드를 이 사업에 투자했고 마사 존스, 존 왓츠와 함께 공동으로  Doulton & Watts라는 이름의 회사 운영을 시작했다. 당시 런던의 템즈강변에는 도자기 공장이 여럿 있었지만 존 덜튼은 실용적이고 값싼 제품을 대량 생산하며 그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기반을 다졌다.

람베스에 있는 오래 된 로얄 덜튼 공장 외부에 있는 토기 타일 /flickr

이들은 초기, 플럼 공장과 비슷한 형태로 소금 유약 도자기를 생산했다. 자기와 도기의 중간쯤인 석기는 특정 점토를 고온에 굽는 형태로 튼튼하며 방수성이 뛰어나고 유약을 바를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토기와는 다르다. 특별하게도 존이 생산한 소금 유약 도자기는 가마에 소금을 넣는 추가 공정을 넣었다. 소금 속 나트륨은 점토 안의 실리카와 반응해 갈색, 파란색, 보라색의 빛나는 윤기를 만들었다.

이후 1835년 존의 아들인 헨리 덜튼이 이 사업에 뛰어든다. 그는 겨우 15세의 나이였지만 도자기 산업의 주요 인플루언서가 되었다. 헨리 덜튼은 도자기를 만드는 모든 분야에 소질이 있었고 회사에 입사하면서 도자기 사업에 큰 공헌을 하게 된다. 회사명은 덜튼앤컴퍼니로 바뀌고, 도자기 회사로써의 본격적인 도전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덜튼앤컴퍼니는 필터, 배수 파이프 및 위생 설비를 포함한 산업용 도자기 제조 업체로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후 영국은 갑자기 발생한 콜레라 전염병에 신음 중이었다. 런던에서 유행한 콜레라를 성공적으로 퇴치했던 인물인 존 스노우 박사는 노후화된 펌프에서 새는 물이 전염병 감염의 주요 원인이며, 이전까지 사람들이 생각했던 원인인 공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했다. 이윽고 벽돌로 된 낡은 하수관을 대체하기 위해 새 하수관이 설치되었고, 새 하수관은 존 덜튼과 존 왓츠에 의해 만들어졌다.

구식 벽돌 하수관을 대체하는 도기 파이프가 불티나게 팔렸고 이 위생 도기가 인기를 끌으며 회사 자체도 엄청난 성장을 하게 된다. 1840년대 들어 헨리 덜튼은 세계 최초로 식염 유약을 사용해 만드는 파이프 생산 공장을 설립했다. 이것은 깨끗한 물을 공급함으로써 영국이 의료 발전을 이루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파이프 사업은 계속 번창했고, 원형 세라믹 하수관 제조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의 형인 존 주니어도 나중에 파이프를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다. 

로열 덜튼, 외바퀴 손수레 /flickr

1854년 존 왓츠는 회사에서 은퇴를 하게 되고, 이 시기 덜튼앤컴퍼니에서 존 덜튼은 조금 더 장식적인 도자기 라인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때 유리, 실리콘, 상감세공 등 많은 유리 및 장식 효과를 개발하게 된다. 1871년 헨리 덜튼이 경영을 이어받으면서 그는 '예술의 산업화'를 목표로 했다. 헨리 덜튼은 도자기 산업 이외에도 산업가들이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는 상황에서 드물게 노동자들의 복지에도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도자기에는 페인트칠에 비소를 사용하고 유리에는 납을 사용했기 때문에 작업실 자체가 위험한 곳이었다. 노동자들은 종종 폐질환에 걸렸고, 수십 톤의 재료를 옮기고 들어올리면서 자연스럽게 건강이 나빠지는 게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부담을 덜기 위해 헨리 덜튼은 수작업의 일부를 개선하는 데 도움되는 기계식 유압 리프팅 장치를 구입했다. 또한 보다 현대적이고 안전한 생산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여러 과학적인 연구를 장려했다고도 한다. 

헨리 덜튼은 사업을 성장하게 만든 실용주의적 도자기보다 예술적인 작품에 관심을 가졌다. 웨지우드 같은 다른 도자기들과 경쟁하면서도 수작업으로 채색한 뒤 유약을 바르고 자기를 굽는 언더글레이즈드 기법을 사용해 생동감 있는 색상의 도자기들을 만들었다. 

로열 덜튼의 피규어 조각 /flickr
영국의 왕 조지 5세의 모습이 새겨진 항아리 /flickr

헨리 덜튼은 젊고 유망한 디자이너들과 모형 제작자들을 선발해 격조 높은 디자인 개발에 정성을 쏟았다. 덜튼의 도자기들은 주요 국제 전시회에서 수상을 했고 188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전시회에서도 극찬을 받았다. 쏟아지는 대중의 관심과 불티나는 생산품들, 1890년대 후반 약 370여명의 예술가들이 람베스에 고용되어 소금 유약 도자기를 만들며 이들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들은 다양한 조각상, 항아리, 꽃병 등을 만들었다. 영국 왕실에서도 그의 제품들을 주목했고, 빅토리아 여왕은 그의 제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1887년 도자 예술에 대한 혁신적인 공헌을 인정받아 업계 최초로 헨리 덜튼에게 기사 작위가 내려졌다.

이후 빅토리아 여왕의 죽음과 함께 대중의 취향이 점점 바뀌며 복잡하게 장식된 도자기의 대한 수요가 줄게 된다. 그러나 여전히 100명 미만의 예술가들은 고용되어 일했고, 제1차세계대전 이후 공장에서는 현대적인 취향을 반영해 석기를 생산했지만 제2차세계대전을 거치며 30여명의 예술가들만이 남는 등 소규모의 제작이 계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보다 저렴한 가격에 대량 생산이 가능한 단순한 디자인으로 방향이 바뀌게 된다. 

토비 저그 /flickr

로열 덜튼의 아트 디렉터였던 조 레저는 전통적인 디자인을 계속 제작하는 동시에 저렴한 가격에 고품질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도록 여러 기술을 개발했다. 로열 덜튼의 역사에 중심이었던 제품 라인 중에는 18세기 초 처음 생산되었던 토비 저그를 들 수 있는데, 이 머그컵은 건장하게 웃는 남성성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한다. 머그잔의 테두리 양쪽에는 두 개의 주둥이가 있으며 캐릭터가 쓰고 있는 삼각 모자에 포인트를 주는 역할을 한다. 이 토비 저그에 대한 품질과 디테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꽤 컸다고 한다. 

한쪽은 조지 워싱턴, 다른 한쪽은 조지 3세를 그린 양면 머그컵 /flickr
에드워드 8세를 기념하는 도자기 /flickr

헨리 덜튼은 버슬렘 안에 있는 작은 공장을 구매했는데, 이것은 신중한 투자였고 곧 성공하게 된다. 1880년대 후반 로열 덜튼과 도자기 제품들은 국제적으로 유명해지고 1885년 헨리 덜튼은 '예술적인 도자 제작에 대한 격려'의 표시로 왕립예술학회에서 수여하는 알버트 메달을 받으면서 그의 업적에 대한 영예를 안게 된다. 

1897년 헨리 덜튼이 죽은 이후 헨리의 아들 헨리 루이스 덜튼이 회사의 경영권을 넘겨받았고,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계속 고용되어 일했다. 1901년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만에 그는 킹 에드워드 7세로부터 '로열'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회사 이름에 '왕실'이라는 단어를 추가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은 것이다. 이때부터 회사의 이름은 로열 덜튼으로 알려져 유명해진다. 

1930년대 호주의 시골 풍경과 유칼립트 나무 /flickr

킹 에드워드 7세는 로열 덜튼의 버슬렘 공장을 왕실 납품 공장으로 지정했고, 로열 덜튼은 20개 이상의 도자기 공장과 글라스 공장을 보유하게 된다. 몇 년 동안 재능있는 아티스트들과 함께 람베스와 버슬렘이 있는 공장들 모두 성장하며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냈다. 람베스 공장이 소금 유약 생산을 규제하는 환경 규제로 인해 1956년 문을 닫았지만 버슬렘 공장에서는 계속 도자기를 만들어 냈고, 1900년대 초반까지 로열 덜튼은 세계적으로 훌륭한 도자기의 주 생산지로 알려졌다. 

로얄 더튼이 추모한 찰스 디킨스의 등장 인물들, 디킨스가 가장 사랑했던 캐릭터 중 17개의 로얄 더튼 인형들 /flickr

헨리 루이스 덜튼은 독특하고 희귀한 색상 효과를 내는 실험적인 유약 공정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유악 중 하나인 빨간색과 검은색 유약의 우혈홍(Rouge Flambé)는 1990년대 까지 회사 내에서는 서너 명만 알고 있는 비밀 기법으로, 로열 덜튼만의 독특한 유약이었다. 이 당시 나온 캐릭터 주전자는 캐릭터 머그잔과의 관련성을 이어가며 1930년대 영국 노래, 문학, 역사의 대표적 인물들을 토대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었다. 로열 덜튼의 미국 시장 진출은 회사의 성장과 성공에 중요한 요소였고, 1945년 자회사인 Royal Doulton USA Inc.가 미국 내 제품 판매와 마케팅을 돕기 위해 설립되었다.

1960년대 파인차이나로 알려진 신제품을 소개하며 소비자들에게 도자기를 저렴한 비용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1972년 테이블웨어 중심의 민튼, 크라운더비, 로열 알버트를 인수하며 거대 그룹으로 몸집을 키웠다. 그러다 2005년 ‘웨지우드’ 브랜드로 로열 덜튼과 함께 세계 정상을 다투던 경쟁 업체인 워터포드웨지우드가 로열 덜튼을 인수하게 된다. 

워터포드웨지우드는 ‘영국 도예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시아 웨지우드가 1859년 세운 회사다. 현재 로얄 덜튼 그룹은 테이블웨어 중심의 '민튼', 동물 형상의 도자기 '존 베스윅', 그리고 현대적 작품 기법으로 유명한 '패러곤'과 '로얄 알버트', '로얄 크라운 더비'를 생산하며 영국 전체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로열 덜튼, 브렘블리 헷지 /이베이

로열 덜튼의 대표적인 라인은 브램블리 헷지를 들 수 있다. 영국의 동화 작가 질 바클렘의 동화를 모티브로 했으며, 질 바클렘은 '브램블리 헷지'라는 쥐에 관한 네 가지의 이야기를 출판했다. 브램블리 헷지의 세상은 전세계적으로 젊은 층과 노년층의 상상력에 의한 생활의 일부가 되기 충분했고, 로얄 덜튼에 의해 우주의 매력을 내포한 가장 진기한 창작품인 브램블리 헷지의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 가족적인 생쥐의 따사로운 이야기를 로얄 덜튼은 도자기에 그대로 옮겨 놓았고 전세계의 자기 애호가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로열 덜튼은 장인 정신과 품질을 중요시한다. 장인들이 손으로 직접 페인트를 칠하는 데에는 160시간 이상 소요되며 막대한 비용 또한 들어간다. 수집품들 또한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많아 1980년 로열 덜튼 인터내셔널 콜렉터 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로열 덜튼 기록관은 1815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약 10,000개의 수채화를 회사와 디자이너들에게 제공했다. 여러 공장과 회사가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지만 직계 가족들의 유대 관계 또한 남아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존 덜튼의 직계 후손인 마이클 덜튼은 매년 전 세계에서 로열 덜튼의 도자기를 수집하는 수집가들, 팬들과 만나고 있다고.  


영국 본차이나의 자존심, 로열 덜튼
 

20세기 말, 나폴레옹 흉상 머그 /flickr

로열 덜튼의 신규 라인들은 집안을 편안하고 사교적인 장소로 만들기 위한 모든 구성을 갖추려 노력한다. 좋은 품질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단순한 식탁 위 식기에서 벗어나 요리기구, 선물용 제품, 인테리어 제품군으로 확장했다. 현대적이고 깔끔한 디자인, 평범함과는 다른 트렌드를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 로열 덜튼은 고급스러움을 지향하기보다는 젊은 고객층, 디자인을 중요시하는 고객들이 접근하기 쉽도록 구성하고 있다. 

1815년, 존 덜튼은 자그마치 22년간 모은 100파운드를 과감히 런던의 작은 도자기 공장에 투자했다. 새로운 소재, 유리 기술의 혁신, 예술가와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에 의한 역량 강화 등을 목표로 한 로열 덜튼은 영국 본차이나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비록 1950년대 시의 규정으로 인해 공장은 런던을 떠났지만 이들은 런던을 떠나지 않았다. 이들은 지금도 그들의 고향인 런던의 마을과 사람들, 음식에서까지 영감을 얻어 수많은 도자기를 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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