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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와 중세의 위대한 과도기, 메로빙거왕조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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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와 중세의 위대한 과도기, 메로빙거왕조 미술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8.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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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의 성 베드로 성당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프랑크는 '용감한 자'를 뜻한다. 대부분의 프랑스와 벨기에, 독일과 스위스 일부분을 로마인들의 점령 직후 5세기부터 8세기까지 통치한 프랑크족을 다스리던 왕조가 바로 메로빙거 왕조다. 메로빙거왕조미술은 게르만 민족 침입으로부터 8세기 후반 카롤링거 왕조 형성에 이르기까지의 3세기 동안에 나타난 고대 미술에서 중세 미술로 옮겨가는 최초의 과도기 미술로 불린다. 

세 가지의 주요 요소가 특징이며, 우선 고전고대 미술의 전통이 건축 및 장식 조각이나 모자이크 등에 전해져 그리스도교 미술과도 관련이 있다. 또 그리스도교 미술 속 오리엔트의 여러 지방으로부터 들어온 문화 요소와 함께 반(反)고전적인 원시 양식 진출의 길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켈트인, 게르만인들이 자신들의 문화와 함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며 무구, 복식품 등 공예를 주로 하는 장식 미술을 선호해 공예를 중심으로 하는 추상주의 미술이 발전했다. 


메로빙거왕조, 과도기 미술의 시작
 

소뵈르 성당의 파이프 오르간 /flickr

유럽 시대에서 중세는 약 1,000년 정도의 미술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역사는 중동과 북아프리카로도 퍼진다. 초기 중세는 일반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의 시대를 알리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부터 올라간다. 미술사학자들은 중세 미술을 주요 시대들의 양식으로 일일이 구분지으려고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초기 기독교  미술, 비잔틴 미술, 로마네크스 미술, 카롤링거 미술, 고딕 미술 등으로 구분하는 편이다. 인구 감소나 지방으로부터의 침략, 부족민들의 이주 등은 중세 초기에도 계속되었고 다양한 게르만 민족을 포함한 대규모의 움직임은 곧 새로운 왕국을 만들었다. 

메로빙거 왕조는 5세기 중반부터 8세기 중반까지 프랑크족을 다스리던 왕조로, 시캉브르(Sicambres)라는 곳에 살았던 골족과 고대 그리스 아르카디아 지역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왕국은 자주 내부 권력 다툼이 일어나고 분열과 통합을 반복했는데 8세기에 이르러 왕조의 군주들은 유명무실해지고 궁정 신하들의 권력이 강화됐다. 

클로비스1세 /flickr

메로빙거라는 이름은 메로빙거 1세에서 유래했다. 메로빙거는 킬데리크 1세의 아버지라 이야기되는 전설적인 인물인 메로베(메로빅, 메로베크)에서 유래한다. 현재 프랑스어 ‘메로뱅지앙’, 독일어 ‘메로빙거’는 모두 이 ‘메로베(크)’의 형용사형에서 파생된 단어들이다. 그에 대해서는 메로빙거1세, 그리고 킬데리크1세의 아버지라는 사실 외에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킬데리크의 아들 클로비스1세는 최초로 갈리아를 통일하고 단일 프랑크족 국가를 세운다. 클로비스 1세는 현재의 프랑스를 비롯한 서부 독일 지역을 장악하여 프랑크 왕국을 서유럽의 강자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군사적 정복을 통해 설립된 메로빙거 왕조는 여타의 다른 게르만 왕조들처럼 왕국에 체계적인 중앙 및 지방 통치 제도를 구비할 역량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권이 지닌 공적인 성격과 사적인 성격 사이의 구분은 자연스레 모호해진다. 메로빙거 왕조의 통치는 이후의 카롤링거 왕조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이고 체계적인 법과 제도에 따른 통치보다는 구체적이고도 가변적인 후견과 피후견 관계에 입각한 통치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다고베르트 1세 이후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 사이에 전개된 치열한 투쟁은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초래하였고 이는 왕권의 약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메로빙거 왕가가 아닌 새로운 세력이 등장한다. 아우스트라시아 궁정 재상직을 세습해 나가기 시작한 페팽(피피누스)가문이었다. 페팽 가문은 뫼즈 강변 하구를 중심으로 막대한 토지와 사병, 수도원 등을 거느리고 있었고, 곧 허수아비로 전락한 왕을 고립시키고 왕실 재정을 조금씩 장악해 나갔다.

이후 그의 아들 샤를 마르텔이 궁재직을 세습했고, 그가 사망하자 다시 그의 아들인 페팽 3세가 그 뒤를 계승한다. 나중에 킬데리크 3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이미 모든 권력은 페팽 3세에 집중되어 있었다. 급기야 페팽 3세는 킬데리크 3세를 폐위시킨 후 수도원에 유폐시키고 교황 자카리아스의 동의 하에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에서 메로빙거 왕조는 막을 내리고 페펭 가문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데, 이 왕조의 이름을 페팽 3세의 아버지 또는 아들의 이름을 따라 카롤링거라 부른다. 

쿠니군데 왕비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 /flickr

메로빙거 왕조는 고전 미술과 중세 미술을 잇는 과도기 그 자체였다. 유럽의 초기 중세 미술은 로마 제국 예술의 유산과 초기 기독교 교회의 상징적 전통 안에서 자라났다. 이 시대에는 갈리아(프랑스), 게르만(독일), 비지고트(에스파냐), 브리타니아(영국과 아일랜드) 등이 각각 다른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구로마제국의 지배가 강했던 지역에서는 고전 양식을 좇은, 사실성이 강한 기독교 미술이 생겨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알프스 이북이나 에스파냐에서는 북 또는 동으로부터 이동하여 온 게르만 민족과 선주민인 켈트족이 가지고 있던 추상적인 형체나 순수한 장식성과 결부된 조형들이 인기를 끌었다.  

벨트의 받침대 /flickr

메로빙거 시대는 고전적인 전통의 점진적인 쇠퇴와 추상적이면서도 화려하게 장식된, 북유럽의 활발한 '바바리안' 문화와 혼합되었다. 소위 '야만적인' 미술 양식들이 새로운 문화 요소들을 흡수함으로써 더 두드러졌다. 또한 메로빙거왕조의 미술은 추상화의 경향이 있었다. 즉 실제 세상과는 동떨어졌음을 의미하며 기하학적 무늬와 정교한 장식을 자랑한다. 유럽 역사에서 메로빙거인들은 장신구, 벨트 버클 등 간편하게 갖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물건들을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메로빙거왕조의 금화 /flickr
 메로빙거 시대 만들어진 디스크 팬던트 /flickr

7세기에 이르러 메로빙거의 장인들과 석공들은 교회를 짓는 데 동원되었다. 석공들은 석조 벽돌에 목재 기둥이 들어갈 수 있는 정밀한 구멍을 뚫어 기반 시설을 만드는 건축 기술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메로빙거는 금세공이 유명했는데, 특히 유럽과 동부에서 온 정착민들은 금세공과 칠보 기법을 서양 미술에 도입한 공로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금 세공인 성 엘리조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작품은 페트루스 크리스투스의 ‘금 세공인 성 엘리조’다. 금은세공업을 배웠던 성 엘리조는 왕실의 보물을 제작하면서 메로빙거왕조의 클로테르2세 눈에 띄게 된다. 성 엘리조는 금은세공업뿐만이 아닌 왕실의 조언자로서도 활약했고, 655년 클로테르가 죽었지만 성 엘리조를 눈여겨 보던 다고베르트 역시 그를 왕실 고문의 수장으로 임명한다. 성 엘리조는 주교가 되자 이교도를 개종하고, 수도원과 교회를 설립하는 데 헌신했다. 모두가 성 엘리조를 존경했고, 그는 유럽 전역에서 금은세공사의 수호 성인이 된다.

메로빙거왕조의 건축 구조물들은 몇 년에 걸쳐 반복적으로 재건되었고 지금은 그다지 많이 남아 있는 게 없다. 5세기경부터 프랑크족의 왕은 종교 건축물을 세웠는데, 안타깝게도 오늘날까지 예전 모습 그래도 남은 건 없다. 클로비스 1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프랑크 왕국을 통일하면서 교회, 특히 수도원 건설의 필요성에 공감했다고 한다. 이교도인들을 기독교화하기 위한 운동이 계속되면서 수도원들이 속속들이 세워졌다. 수도원과 교회는 일종의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수도원과 수도승은 중세 초기의 종교와 정치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막강한 가문의 토지 신탁, 새로 정복된 지역의 선전 및 왕실의 중심지, 선교와 전도의 근거지 등의 다양한 역할을 했다. 이곳은 교육과 문맹과도 관련이 있었다. 원고를 베낄 수 있는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만 인쇄물이 보급되면서 미술은 대중들에게 성서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주요한 방법 중 하나가 되었다. 

젤라시오 전례서 /Public Domain

미술은 자연주의적인 이미지보다 복잡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우선시되면서 양식화되고 추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실제로 중세 초기 라틴 고전들의 많은 필사본들이 수도원에서 만들어졌다. 현재는 극소수의 메로빙거식 채색 필사본이 남아 있는데, 가장 화려한 장식으로 남아 있는 필사본은 바티칸 도서관에 있는 젤라시오 전례서이다. 이외에도 수도승들은 역사, 신학 등 여러 주제들을 다루는 작품들을 만들었다.

아일랜드의 선교사 성 콜럼바누스가 유럽에 도착했을 때 루아르 남쪽에만 200여개 정도의 수도원이 있었는데, 불과 100년이 지난 메로빙거 왕조 시대에는 약 400개의 수도원이 생겼다고 한다. 메로빙거 왕조는 바실리카 양식을 부활시켰으며, 성당과 수도원을 지을 때 바실리카 양식의 전통을 이어갔고 이것은 시리아와 아르메니아까지 영향을 미친다. 십자형 교회의 좌우 날개 부분인 트란셉트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클뤼니 수도원에 있는 메로빙거 석관 /flickr

동양에서는 건축물이 대개 목재로 지어진 것에 반해 서양과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중요한 건물은 주로 석재로 지어졌다. 메로빙거의 지배 하에 있는 남부 지역에 석조가 흔했던 탓도 있다. 메로빙기의 석조 조각들은 고풍스러운 형태를 단순화시킨 것이 특징이며 동물적인 모티브, 특히 새와 양이 줄지어 있는 모습이나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구현되는 것은 석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생 마르탱 대성당 /flickr

수많은 메로빙거 왕조의 교회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지만, 한 가지 유명한 예로 들 수 있는 투르에 있는 생 마르탱 대성당은 120개의 대리석 기둥과 탑, 그리고 몇몇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생 마르탱 대성당은 복잡한 내부 구조와 그에 상응하는 외부의 실루엣 장식의 조합을 보여준다.

그레고리오 주교는 생 마르탱 대성당을 두고 성 뻬르뻬뚜오 주교가 프랑크 영토의 가장자리에 세운 가장 아름다운 메로빙거 교회 중 하나라고 평했다. 쾰른의 성 게레온 성당,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원이라 불리는 생제르맹데프레 수도원 등 다른 유실된 건물들도 이와 비슷한 장식으로 묘사되었다. 

생 마르탱 대성당의 내부 /flickr

프랑크 교회 건축의 상징이 된 생 마르탱 대성당은 신 비잔틴 양식의 우아한 장식과 거대한 돔이 돋보이는 건축물로 지하에는 도시의 수호 성인인 생 마르탱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이곳은 투르의 세 번째 주교이자 성인인 생 마르탱이 묻힌 유서 깊은 장소이다.

생 마르탱의 제자이자 그의 뒤를 이어 투르의 네 번째 주교가 된 생 브리의 명으로 5세기경 교회가 처음 들어섰으며 이후 11세기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바실리크가 새로 건립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오랜 세월로 인해 파괴가 심한 성당을 19세기 말부터 신 비잔틴 양식으로 대대적으로 증축한 것이다. 아치형 입구와 우아한 장식이 돋보이는 입구 양쪽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으며 뒤쪽에는 거대한 돔이 있다. 

생 테티엔 성당에서 보이는 둥근 지붕 /flickr

주요 교회들은 대개 한번 이상 재건되었지만 일부 몇몇 작은 건물들, 특히 세례 성당들은 재건축을 면할 수 있었다. 엑상프로방스, 프로방스 리에즈 등에 있는 세례당은 각각 기둥 위에 둥근 모양의 지붕을 얹은, 팔각형 모양의 세례당이 있다. 이러한 프로방스 세례 성당들과는 달리 푸아티에 생 장 세례당은 세 개의 앱스가 나란히 놓여 있는 직사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 원래의 건물은 여러 수정을 거쳤을 테지만 장식에는 당시의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중세 과도기의 위대한 유산, 메로빙거왕조 미술 
 

소뵈르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flickr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일부를 통치했던 메로빙거 왕조였다. 중세 미술의 시초였던 메로빙거왕조 미술은 로마 제국의 유산과 모자이크, 석관 등의 기독교 미술을 합친 양상으로 발전했다. 새로운 지역의 주인이 된 켈트인과 게르만인들은 그들의 전통 양식에 기독교 미술을 받아들여 공예를 주로 한 장식 미술을 흥하게 만들었다. 메로빙거왕조 미술은 오늘의 유럽을 만들었다는 평을 받는 카롤링거 르네상스 이전까지의 유럽의 중세 문화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또하나의 소중한 문화 유산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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