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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 보수적이었던 사회 속 여류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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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에게 보수적이었던 사회 속 여류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
  • 윤미지 기자
  • 승인 2021.08.16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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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 윤미지 기자] 위대한 여성 예술가를 찾는 일이란 어려운 작업이라는 것을 한 번이라도 시도해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여성 예술가들의 작업이 위대하지 않기 때문에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여러 문화권에서 여성 예술가의 활동은 쉽지 않았다. 과거 여성 작가의 작업은 물론 그들의 작품을 지지하지 않았던 것은 일반적으로 접하는 사례이며 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원인을 파악하고자 하는 연구 활동도 현대에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반도 역사 내에서도 발견된다. 선비 문화 속에서 주로 예술적 향유 주체가 탄생했기 때문에 여성 예술 작가의 등장도 활동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과거 여성에게 가졌던 기대는 어떠한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보다는 가정적이어야 한다거나,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전통적 여성관에 초점을 두었다.
 

15. 1920년 초의 나혜석,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전통적 여성관에 순응하지 않았던 여성 운동가이자 여류 화가 나혜석. 1920년 초의 모습.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전 세계적으로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는 현재 우리는 그나마 많은 여성 예술가들의 삶에 비로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이름을 꼽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 역사 속에서 여성의 주체적 활동에 보수적이었던 사회적 시선에도 불구하고 작가로서의 예술성을 펼쳤던 이들은 누가 있을까. 


여성 예술이라 할 수 있는 전통 규방 공예
높은 가치에도 불구하고 예술 활동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사회와 가정의 억압 속에서 자유롭게 예술 활동을 선보이지 못했던 여성 예술가들의 사례는 세계적으로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다. 서양 미술사 속 여성 예술의 영역만큼이나 흥미로운 분야가 있다면 바로 조선 시대 역사 속 여성 예술가 이야기다.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흥미롭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 수가 정말 많지 않다는 점이다.

조선 시대 당시 여성의 사회진출이 어려웠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이야기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 여성의 삶은 다른 시기에 비교하여 더욱 제한이 많았다.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면서 주체적인 활동을 선보이기에 어려운 환경이었으며 유교 사상의 전파와 영향에 따라 남존여비의 불합리를 겪어야 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 기인할 때 여성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 활동을 내세우고 두각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조선 시대 여성의 대중적인 예술 활동이란 규방에서 이뤄졌던 ‘규방 공예’ 정도를 예로 들 수 있다. 양반집 규수들이 바느질을 이용해서 다양한 장신구와 생활소품을 만드는 규방 공예는 지금까지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전통 예술의 한 갈래로서 이어져 오고 있다. 현대에도 다양한 기관을 통해서 규방 공예를 직접 배워보는 기회를 접할 수 있으며 장인의 손에 의해서 매듭과 자수 등의 전통 공예가 맥을 이어오고 있다. 
 

3. 조영석의 사제첩 중 바느질하는 모습을 담은 장면, 한국학중앙연구원
바느질은 규방공예의 기본이다. 사제첩, 바느질, 조영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전통 규방 공예가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활 공예의 한 갈래라는 점으로만 인식됐다는 것이다. 규방 공예는 우리 전통의 얼과 기술이 담겨 있으면서도 선조들의 생활상이 잘 반영되어있는 예술이다. 과거에는 생활소품을 직접 만들어서 써야 했으며 여성의 바느질을 통해 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조상들의 삶이 담겨 있는 예술이기 때문에 현대에는 전통 수공예의 가치가 더욱 높게 평가된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규방 공예가 매우 흔한 작업에 불과했고 규방 내 여성들의 손에 의해서 이뤄졌기 때문에 이를 가치 있게 대우하거나 하나의 예술품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또 다른 관점에서 규방 공예를 여성을 억압했던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의견도 있다. 아무래도 유교 사상이 만연했던 시대에 여성의 외부적 활동이 제한되고 규방 내에서 이뤄져 왔던 공예라는 점에서 이를 바라보는 관점 차가 생겼을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바느질을 여성의 기본 소양이라 생각하는 인식은 차분하고 정적이며 가사에 능한 여성상을 주입하는 시대의 모습이라 보이기도 한다. 
 

매듭 기능전승자 09-3호 심영미의 작품, 금바늘겨레색동술단작노리개, 한국색동박물관
금바늘겨레색동술단작노리개. 심영미(매듭기능전승자) 작품 /한국색동박물관
보자기, 국립민속박물관
바느질을 통해 보자기를 완성할 수 있다. 보자기. /국립민속박물관

하지만 규방 공예 자체는 억압된 사회 속에서 여성이 유일하게 자신의 예술성을 펼칠 수 있는 하나의 예술적 갈래였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가족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활 소품을 만들고, 때로는 알뜰하게 살림하고자 했던 조선 여성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현대에는 전통성을 인정받아 장인들의 손에 의해 그 맥이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조상의 삶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소중한 역할을 하는 객체로서, 전통 규방 공예품에 대한 가치가 높아지고 인식 또한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유일한 ‘여성 초상화’를 남긴 남성 화가 신윤복

여성 작가의 삶을 논하기 전에, 심지어는 여성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 또한 당시에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상기하면 문화적인 활동 내에서 여성이 얼마나 배제됐는지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선 후기 활동했던 풍속화가 ‘신윤복’은 작가적, 작품적 특성을 돌아볼 때 여성과 매우 밀접하게 닿아있음을 보여준다. 신윤복은 조선 시대의 3대 풍속 화가로서 김홍도, 김득신과 함께 이름을 알렸으나 그 유명세에 비교해봐도 화가 자신의 삶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여기에 그의 작품에서 여성적인 화풍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윤복을 여성 화가였을 것으로 추측하는 관점도 존재했다. 

물론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봤을 때 신윤복이 실제 여자였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다만 조선 후기 유일한 ‘여성 초상화’ 작품을 남겼으며, 그 시대 주류 문화가 아닌 여성의 생활을 화폭에 담고 조명했다는 것이 특별하다. 
 

8-1. 신윤복 여속도첩 중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여성의 생활을 화폭에 담고 조명했다. 신윤복필 여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여성의 생활을 화폭에 담고 조명했다. 신윤복필 여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신윤복의 ‘미인도’는 그 시대 여성의 복식 문화를 보여주면서도 신비한 아름다움을 표현해 그의 최고 걸작으로 통한다. 특히 여성의 모습을 단독으로 그림 속에 담아 더 의미가 있가. 미인도는 현재 보물 제197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서울 간송미술관이 이를 소장하고 있다.
 

7.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신윤복은 이외에도 그 당시 다른 작가들은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여인의 삶을 여러 화폭에 표현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 여성의 삶을 여섯 폭의 그림으로 표현한 ‘여속도첩’은 그 시대 다양한 여성상을 조명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를 통해 당시 여성의 생활과 복식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이를 소장하고 있다. 


도화서 유일한 여성 화원이었던 ‘홍천기’

신윤복이 화원으로 있던 도화서는 조선 시대 그림 그리는 일을 맡았던 관청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윤복은 당시 외부에서 그림의 소재를 찾고 풍속화를 화폭에 담았으나 본래 도화서 화원은 왕실, 사대부의 회화 작업을 담당했다고 알려진다. 

이러한 도화서에도 여성의 활동이 있었다고 추정하는데 바로 화가 ‘홍천기’가 조선 시대 유일한 여성 화원이었다고 알려진다. 홍천기에 대한 내용은 성현이 저술한 ‘용재총화’에 언급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홍천기의 화가로서 재능보다는 그의 수려한 미모에 초점을 맞춘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아쉽다. 용재총화 제6권에서는 서달성이라는 인물이 홍천기의 아름다움에 반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20. 용재총화 2, 국립중앙박물관
용재총화 /국립중앙박물관

놀라운 것은 조선 후기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서도 홍천기에 관해 서술한 부분을 짧게 발견할 수 있다. 다만 그녀가 도화서 화원으로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시기는 세종 때인데 당시 능력만 있다면 출신을 따지지 않고 등용하는 사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관직에 여성을 등용했다는 사실은 구체적으로 확인되는 사항은 아니다. 또한 역사에서도 이에 관해 자세하게 기록한 부분이 없다는 점은 의아한 부분이다. 
 

연려실기술, 국립중앙박물관
연려실기술 /국립중앙박물관

더욱이 현존하는 작품이 남아있지 않아 여러 가지 이유로 홍천기가 실존하는 인물인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그가 종7품 화사를 역임했다고 알려진 부분이 있으며 산수화에 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림의 실력이 인상적인 만큼은 아니었다고 알려지는데 사실 이 부분은 현존하는 작품이 없으니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고 보인다. 

하지만 그 시대 많은 화원 중 뛰어난 이는 얼마나 많고, 또 그저 그런 수준의 그림을 그렸던 이들은 얼마나 많았을까. 그림 그리는 재능이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으나 조선 시대 도화서에서 관직을 받아 활동했던 한 명의 화원으로서 홍천기라는 여성의 기록이 남아있다는 점은 기억할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수적 사회 속에서 자신을 드러냈던 여성 예술가들

‘신사임당’은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인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현대에는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하나 그의 기억할만한 업적은 단순히 가정생활에 충실했다는 점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위대한 조선 여류화가였으며 시와 서, 화 모두에 능한 예술가였다. 

신사임당은 화폭 위에 주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재능이 있었고 당시 유학자들은 그의 그림과 글씨를 칭찬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작품은 여류 작가로서 섬세한 표현을 잘 사용했다는 평가도 많은데 그럼에도 부드러운 여성 작품의 한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구도는 대담한 면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 ‘초충도’가 존재하며 이외에도 ‘산수도’, ‘묵포도도’ 등 다양한 작품을 그렸다. 
 

전 신사임당필 초충도 /국립중앙박물관

현대에는 그를 유교적 여성상에 맞춰서 평가하는 사례가 많으나 신사임당은 한 명의 조선 예술가로서 조명해도 부족함이 없다. 자연을 소재로 한 다양한 그림을 그렸으며 아름다운 꽃과 풀의 모습, 그 주변을 자유롭게 노니는 곤충을 부드러우면서도 절묘하게 표현했다. 색채는 따뜻하고 정감이 가며 신사임당만의 특색있는 작품을 완성했다는 점에서 더 특별하다. 
 

가지와 방아깨비 등 자연의 모습을 섬세하고 따뜻하게 표현했다. 전 신사임당필 초충도 /국립중앙박물관

물론 이런 신사임당의 자유로운 작품 활동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존재했다. 당시 시기상으로 비교적 여성의 인권이 억압되지 않은 조선 전기에 해당했으며 신사임당은 혼인 이후에도 친정에서 생활했다는 내용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어린 나이서부터 그는 그림에 높은 재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 화가 안견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는 등 천재적인 화가적 자질을 가진 것도 분명하다. 여기에 아내의 자질을 인정해주는 남편을 만났다는 점도 그의 예술 세계가 확립되는 것에 큰 요인 중 하나였다고 알려진다.

현대에는 비교적 여성 작가의 활동에 선입견을 보이는 일이 드물지만,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물론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에서 여성 작가가 혼자 위대한 작품을 남겼을 리 없으며, 기혼자의 경우 남편의 도움이 있었을 것이라 지레짐작하는 사례도 적지 않게 존재했다. 그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그 시대 신사임당이 예술가로서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더욱 특별한 사례라는 생각이 든다. 

신사임당만큼이나 잘 알려진 여성 예술가로는 조선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이 있다. 우열을 비교할 수는 없으나, 신사임당은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업적 외에도 여성의 덕목인 자식을 잘 길러내는 것과 남편을 잘 내조하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지기도 하는데 허난설헌은 오로지 천재적인 시인적 기질에 의해 이름이 알려졌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난설헌은 호였으며 본명은 허초희였다. 
 

13. 허난설언 작약도, 국립중앙박물관
전 허난설헌필 작약도, 국립중앙박물관

허난설헌의 이름을 언급할 때 꼭 따라붙는 내용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그의 동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허난설헌은 시에 있어 천재적인 재능을 갖추고 있었으며 여성에게 관대하지 않았던 조선 중기에 시인으로서 활동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의 작가적 활동은 더욱 주목받을 만하다.

허난설헌은 8세 때 이미 시를 썼으며 아버지인 허엽과 오빠 허봉은 이에 매우 감탄했다고 한다. 27세의 짧은 생을 살았으나 많은 시 작품을 남겼으며 대표작으로는 ‘감우’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지은 ‘몽유광상산’이 있다.

안타깝게도 허난설헌은 결혼 후에 매우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여성의 주체적인 활동을 원하지 않았던 당시의 분위기는 물론, 시가에서도 허난설헌의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남편을 향한 마음을 시로 표현하기도 했으며 자신이 겪었던 여러 가지 상황 속 감정들을 시로 남기기도 하는 진정한 시인의 삶을 살았다. 
 

14. 난설헌시집. 목판초간본, 국가문화유산포털
난설헌시집. 목판초간본. /국가문화유산포털

허난설헌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겼는데 자신의 모든 시집을 불태워달라는 것이었다. 시를 짓다가 불행해지는 여인이 더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허난설헌의 시는 추후 동생 허균에 의해 ‘난설헌집’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서 발행되었으며 중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활동한 여성 예술가 중에는 기생의 신분이었던 이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이름을 알린 인물은 바로 조선 전기 활동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개성 출신의 기생 ‘황진이’가 있다. 황진이는 아름다운 외모는 물론 재주가 많고 특히 시조에 능했다. 

당시 시대상에 비추어볼 때 여성은 남성에게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으나 황진이의 성품은 이와는 달랐다. 자존심도 굉장히 강했으며 여러 일화를 보면 목표한 바를 이루고자 하는 담대한 성품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많은 시조 작품을 남겼으며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등의 대표작이 있다.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시고 시를 배웠으며 다수의 대표작을 남겼음에도 벽계수, 지족 선사 등 남성들과의 일화로 더 많이 언급되는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당시 여성에 제한적이었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조금은 자유로웠던 것은 기생이었다. 비록 신분에 있어서는 한계가 있었으나 여성이 주체적으로 예술적인 활동을 할 기회가 마련되기도 했으며 일패 기생에 한해서는 예술가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황진이와 함께 잘 알려진 또 다른 기생이 있었는데 바로 부안 기생 ‘매창’이다.
 

기생 사진엽서 국립민속박물관
기생은 비교적 주체적으로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기생 사진엽서. /국립민속박물관

매창은 기생임에도 황진이와 함께 조선 시대 여류 시인으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그는 거문고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당대 문인들과 시를 논할 정도로 글에 대한 재능도 갖추고 있었다. 매창은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잘 알려진 시조 ‘이화우 흩 뿌릴제’가 대표작이다. 이외에도 ‘추사’, ‘춘원’ 등의 작품이 있고 58수의 시를 묶어 ‘매창집’을 발행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매창에 대해 많은 이들이 주목하는 요소는 조선 시대 문인이었던 유희경과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 등 매창과 인연을 맺은 남성 문인들과의 이야기다. 특히 허균은 정을 나눈 사이로 알려져 있는데 두 사람의 인연에서 중요한 것은 여성과 남성의 관계보다 시를 매개로 한 문인의 교류가 핵심이었다고 전해진다. 실제 매창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허균은 매우 슬퍼했다고 하며 이에 대한 감정을 시로 남기기도 했다. 


화가이자 여성 운동가였던 신여성 나혜석

시대의 편견에 갇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던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또 있다. 화가 ‘나혜석’은 조선 여성 최초의 서양화를 그렸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특유의 당찬 성품으로 자신의 예술가로서의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억압된 여성 인권에 관한 관심을 가졌던 신여성이다. 

나혜석은 조선의 천재 화가로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근현대사의 주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화가로서 개인전을 열기도 하며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입선하는 등 예술가로서 뚜렷한 활동을 선보였다. 또한 소설 ‘경희’를 쓰는 등 글에서도 특별한 재능을 발휘했고 한 명의 예술가로 또는 한 명의 여성 운동가로 활동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17. 나혜석의 그림 전시회,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그림 전시회 중 나혜석의 모습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나혜석은 화가로 활동하며 수많은 작품을 그렸다고 알려지나 대표작으로는 1928년에 그렸다고 추측되는 작품 ‘자화상’, 1935년에 그린 것으로 알려지는 ‘화녕전 작약’ 등이 있다. 이외에도 몇 가지 작품이 더 이름을 알렸으나 다른 작가들에 비교할 때 작품 자체가 많이 남아있지 않으며 이 또한 대중들에게 제대로 공개되지 않아 그의 회화적 예술 세계를 섬세하게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느껴진다. 
 

16. 나혜석作 자화상,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자화상, 나혜석作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다만 그간 조선의 여성들의 그림에서 섬세하고 여린 표현이 돋보였다면 나혜석의 작품은 확연하게 다른 점을 보인다. 여성을 그릴 때 전통적인 조선 여성상에 맞춘 외형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물론 강한 선이나 역동적인 표현이 눈에 띈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으며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하기도 했다. 실제 그 과정에서 여성 운동에 관한 관심을 가지기도 했고 또한 어렸을 적부터 가부장적인 남성 중심의 사회에 문제점을 느꼈다고 전한다. 그의 여성 운동은 여성도 하나의 인간이며 인간 평등에 기인한 내용을 담고 있다. 

현대 대중에게 있어 나혜석이라는 화가에 가장 관심을 가지게 하는 글은 ‘이혼고백서’가 있다. 그가 쓴 이혼고백서는 1934년 공개된 글로 남편과 이혼하는 과정에서 남긴 글이라고 한다. 이혼고백서는 정조 관념에 대해 남성과 여성에게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사회를 비판하고 여성은 인형이 아니라 하나의 사람이기에 조금 더 인간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나혜석의 능동적인 예술 활동과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목소리는 남성 중심의 사회에 도전장을 내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여성에게 모성애를 강요하고 불합리한 여성의 역할을 부여하는 사회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한국 근대사에 접어들며 여성 예술가들이 이전보다 활발히 등장한 것은 사실이나 그 수를 많다고 보기엔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다. 과거 남성 예술가의 경우 이름을 알리는 것만이 중요한 과제였다면 여성 예술가는 사회적인 편견과 함께 가족 내에서 여성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며 자신의 예술혼을 펼쳐야 했다. 

확실한 것은 여성 예술가라고 해서 더 특별한 의미 부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사상을 주입하거나 펼칠 이유가 없다. 다만 예술에 있어 작품 외의 외부적 요인에 고군분투해야만 했던 예술가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기억할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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