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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 합격자를 위한 교지, 홍패와 백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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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거 합격자를 위한 교지, 홍패와 백패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8.12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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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端宗)시대에 발급된 ‘백패’ 중 생원 백패 /한국국학진흥원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최근 한국국학진흥원은 조선 전기 단종 시대 발급된 합격증서인 백패 2장을 발굴, 공개했다. 재위 기간이 3년에 불과했던 단종 시기의 문서는 보물 제501호인 장말손 백패(1453년)가 유일할 정도로 매우 희귀한 편이다. 

이번에 발굴된 과거합격증서는 기탁 자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성종 연간에 동일 인물에게 발급된 교지와 분재기도 함께 발견돼 조선 전기 과거제도와 재산 분배 등의 사회적 분위기를 파악하는 귀중한 단서가 될 전망이다.

여산 송씨가 홍패(礖山 宋氏家 紅牌) /국립해양박물관

홍패와 백패는 과거 시험을 합격한 자에게 주는 일종의 징표였다. 조선 시대의 과거는 크게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었다. 문과와 무과는 정기적인 식년시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과거를 시행하여 많은 인재를 등용하였으나, 잡과는 수요 인원이 많지 않은 까닭에 과거로는 식년시 이외에 증광시가 있었다. 

문과는 소과와 대과로 나뉘어진다. 소과는 다시 초시·복시의 2단계, 대과는 다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로 나뉘어 있어서 모두 5단계를 차례로 거쳐야만 문과 급제가 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5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대과의 전시와 동등한 자격을 받던 과거에는 알성문과 및 성균관 유생이 보던 절일제·황감제·관학유생응제 등이 있었다. 시험의 실시는 예조에서 담당했다.

선비들은 소과 시험에 합격해야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 하급 문관에 등용될 수 있는 자격, 대과 시험에 합격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무과는 소과와 대과 구분없이 한 번만 치러지고 잡과는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로 구분되었다. 

대과의 초시는 과거 제1차 시험으로 각 지방에서 실시하였으며 복시는 초시 합격자 중 33명을 선발한다. 대과의 초시와 복시를 통과하고 남은 33인은 관리로 제수하게 되는데 이때 전시를 통해 33명의 순위를 매기며 관직의 품계가 달라지게 된다. 전시는 임금이 동행해 직접 보는 시험으로 과거의 최종 시험이다. 

홍패, 박기우(朴起羽)의 합격을 알리는 교지이다 /밀양시립박물관

무과는 무인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오늘날의 육, 해, 공군 사관생도나 학사장교 등 일종의 군인을 선발하는 시험이다. 문과와 달리 무과는 신분상의 제약을 낮추어 무관의 자손을 비롯하여 향리나 일반 서민으로서 무예에 재능이 있는 자에게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무과는 소과와 대과의 구별이 없는 단일과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가 있었으며 장원을 선출하진 않았다.

이렇게 여러 단계를 거쳐 시험에 합격한 선비들은 관직을 받게 되는데, 이때 왕의 임명을 받게 된다. 왕이 관직에 사람을 임명할 때 교지를 내리며 이 교지를 보통 '홍패'라 불렀다. 문무과 시험의 합격자들에게 발급하는 것을 홍패라 지칭했기 때문에 그에 대응해 색을 칠하지 않은 교지를 반대로 백패라 지칭했다. 

홍패는 대과 급제자에게 내리는 합격증서이다. 바탕 색깔이 붉다고 해 홍패라고 불렀으며 갑과, 을과, 병과로 구분해 등급을 매겼다. 반면에 백패는 생원, 진사와 같은 소과 합격자에게 내리는 합격증서이다. 바탕 색깔이 희다고 해 백패라고 부른다. 소과에 합격한 경우 급제라 하지 않고 '입격'이라 했다. 소과의 정원은 세종 이후 생원, 진사 각 100명으로 관례화되었다. 

남원 양씨 홍패 /전주역사박물관

조선이 세워진 뒤 생원시와 진사시는 여러 차례 시행과 폐지를 거듭한 뒤 1438년(세종20)에 이르러 합격자에게 합격증서를 발급하기 시작했다. 문무과나 잡과 합격자들에겐홍패를 발급하고 있었지만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는 패를 발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원진사시 합격자들에게도 패를 지급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에 교지 양식으로 된 합격증서를 발급하기 시작했고, 형태는 홍패와 다른 모습으로 가로 폭보다 세로 폭이 길게 했다. 홍패는 전폭, 백패는 반폭 용지를 사용했으며 홍패와 백패의 실물을 비교해 봐도 홍패는 대체로 가로와 세로의 비율이 많이 차이가 나지 않지만 백패는 가로 길이에 비하여 세로 길이가 평균 두 배 가량 긴 모습을 보인다.

백패 /국립중앙박물관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사람들에게 백패를 발급하는 건 세종 대에 와서 확립되었다. '세종실록'의 오례 가례의식 '생원방방의'에는 왕이 친림한 자리에서 예조 정랑이 합격자들에게 백패를 나누어 주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고려 시대에는 국자감시 합격자들에게 합격 증서가 발급되었는지에 대한 여부를 아직 모르기 때문에, '세종실록'을 통해 백패 발급 제도는 조선에 들어와 생원진사시의 제도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으로 본다. 

잡과 합격자에게도 발급한 패가 있지만 조선 초기부터 이미 합격 증서가 발급되고 있었고 문무과 합격자들에게 발급하는 문서와 동일하게 홍패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잡과 합격자를 문무과나 생원진사시 합격자들과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은 안 된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며 잡과 합격자들에게 발급되는 교지는 홍패가 아닌 백패로 부르게 되었다. 양식도 교지 양식이 아닌 예조에서 발급하는 관문서 양식으로 확정되었다.

고려 희종 원년(1205)에 진사시 병과에 급제한 장양수에게 내려진 홍패 /문화재청

이후 잡과 홍패는 한번 더 변화를 겪고 '경국대전'의 잡과백패식으로 정착했다. 현재까지 조선 시대에 발급된 잡과 백패는 여러 개가 확인되었지만 문무과 홍패와 생원진사시 백패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었다. 잡과 합격자들은 역과, 의과, 율과 등 전문 영역에서 종사한 전문 관료였지만 양반 관료층과의 신분 차별로 인해 이들에 대한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이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홍패가 점점 남발됨에 따라 홍패 매매나 위조 홍패의 폐단 또한 나타나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보통 생원이나 진사의 경우 백패를 수여하는데, 영조 40년 서울의 박만춘과 김현중이란 사람들이 가짜 어보(국새)를 찍은 홍패를 팔다가 포도청에 잡힌다. 제조는 김현중이 하고, 박만춘은 판매에만 관여했지만 김현중은 박만춘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우게 된다. 결국 박만춘의 14살 된 딸이 영조에게 억울함을 호소하자, 아비를 고문해 아들이 자복케 한 것은 비윤리적 처사라며 포도청 포교를 처벌하고 박만춘은 석방되는 일도 있었다.

단종(端宗)시대에 발급된 ‘백패’ 중 진사 백패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이 이번에 발굴한 백패는 1453년(단종1) 9월 7일에 발급된 것이다. 이 백패는 조선 개국 이후 폐지됐다가 60년 만에 부활한 진사시에 합격하고 받은 것이기에 더욱 주목된다. 백패의 주인공 '김정'은 진사시뿐만 아니라, 생원시에 합격해 두 개의 백패를 받았다.

1392년 조선 개국 이후 태조는 고려 말 사장을 중요시한 데서 오는 폐단을 없애고 경학을 장려하기 위해 진사시를 폐지하고 생원시만 실시하겠다고 선포했다. 그 뒤 2, 3차례 복구와 폐지를 거듭하다가 단종 1년인 1453년 2월 완전히 복구됐다.

올해로 탄신 580주년이 된 단종(1441~1457)은 매우 비극적인 가족사를 지닌 임금이다. 1452년 5월 12살의 어린 나위로 즉위해 1455년 윤 6월 세조에게 왕위를 양위하기까지 3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재위했다. 즉위 1년만인 1453년 10월 계유정난으로 세조에게 선양하고 1457년 노산군으로 강등됐다가 죽음을 당했다. 발굴된 이 백패는 바로 그 비운의 단종 재위 기간에 발급된 몇 안 되는 희귀자료인 셈이다.

보물 제2062호로 지정된 '최광지 홍패' /문화재청 

문화재청이 보물로 지정한 '최광지 홍패'는 보물 제2062호로 고려 말∼조선 초에 활동한 문신 최광지가 1389년(창왕 1년) 문과 '병과 제3인'(전체 6등)으로 급제해 받은 문서다. 약 630년 전 고려 말에 제작된 매우 희귀한 사료다. 최광지의 이름·성적을 기록한 문장과 발급 시기를 알려주는 '홍무 이십이년 구월 일'(洪武 貳拾貳年 玖月 日) 문구를 두 줄로 적고,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란 국새를 찍었다. 

고려국왕지인은 1370년(고려 공민왕 19년)명나라 황제 홍무제가 고려에 내려준 국새로 조선 건국 후인 1393년(조선 태조 2)년에 명에 다시 반납했지만, 고려시대 공문서에 이 직인이 찍힌 사례는 최광지 홍패가 지금까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개국 직후인 1392년(태조 1년) 10월에 태조 이성계가 개국공신 '이제'에게 내린 '이제 개국공신교서'(국보 제324호)에도 고려국왕지인이 찍혀 있다. 

최광지 홍패의 국새 부분 /문화재청 

현존하는 고려 시대 홍패는 국보 '장양수 홍패'와 보물 '장계 홍패' 등 6점인데, 시기는 모두 최광지 홍패보다 빠르지만 최광지 홍패는 관청에서 왕명을 대신해 발급했기 때문에 국왕의 직인이 없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서의 형식과 성격 측면에서도 '왕지(王旨·왕명)'라는 문서명과 국왕의 인장이 찍힌 정황으로 보아 임금의 명령을 직접 실천한 공식 문서로서 완결된 형식을 갖추고 있어 왕명의 직인이 찍혀 있고 형식상 완결성을 갖춘 사례는 최광지 홍패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형식이 후대로 계승되면서 조선시대 공문서 제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보물 제1564-7호 이순신 무과 홍패 /문화재청

이순신은 28세 되던 1572년에 이르러 처음으로 무과에 응시했지만 낙방하고 만다. 기록에 의하면 “임신년 훈련원 별과 시험에서 말을 달리다 떨어져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 보던 사람들은 공이 이미 죽었는가 했는데, 공이 한쪽 다리로 일어나서 버드나무 가지를 잘라 껍질을 벗겨서 다리를 동여매니 과장의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란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1576년 식년시에 합격했는데, 병과 4등으로 전체 합격자 29명 중 12등을 한 셈이다. 

이것은 이순신이 식년무과에 병과 제4인으로 급제하고 난 후 받은 홍패로, 문무과의 최종 급제자에게 내린 합격증서이다. 우측 첫줄에 보인이라 쓴 것은 군역을 지는 양반이라는 뜻으로, 양반임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며 역을 지는 평민의 살림을 돌보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보인이라 불렀다. 우측 끝의 '출신자'는 과거 급제자를 부르는 말이다. 

당암 강익문 교지(戇庵 姜翼文 敎旨) /합천시

강익문은 내암 정인홍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는 동문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고, 광해군 시대에는 아들 강대수와 함께 출사하여 대북 세력에 맞서 동계 정온 및 역양 문경호 등과 중북의 일원으로서 활동하였다. 대북과의 정치적 싸움에서 자신은 옥에 갇히고 아들 강대수는 회양으로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인조반정 이후에 고향으로 돌아와 강학(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으로만 일생을 보냈다.

당암 강익문의 교지는 백패·홍패 및 예조참판·예조판서 증직 교지의 4장이다. 백패는 강익문이 만력 17년(1589) 4월에 3등 제13인으로 진사에 입격한 것을 증명하는 문서이며 홍패는 강익문이 만력 34년(1606) 10월 13일에 병과 제9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였음을 증명하는 문서이다.

당암 강익문과 그의 아들 한사 강대수는 남명학파 구성원으로서는 물론 내암 정인홍의 문인으로서 정계와 지방에서 역할이 컸으며, 이와 관련되어 있는 강익문의 백패·홍패 및 증직 교지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남아 있다.

안시명 무과 홍패 (武科敎旨) /문화재청 

옛 과거 시험에는 수만 명의 선비들이 응시를 했다. 그러나 합격자는 단 33명에 불과했다. 시험을 한번 쳐서 합격하는 것도 아니고 소과는 2차, 대과는 3차까지 있었다. 게다가 시험마다 과목이 여러 가지라 선비들에겐 말 그대로 시험의 연속을 견뎌내야 했을 것이다. 과거 급제 증명서인 홍패는 그만큼 귀한 것이었고, 옛 조상들은 대대로 잘 보관해서 후손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단종 시대의 백패 두 장을 두고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단종은 재위 기간이 짧았던 만큼 그 시기에 발급된 문서도 극히 소량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번에 발굴된 2점의 자료는 단종 시대 단절된 역사의 조각을 맞추는 귀중자료가 될 것”이라며, “이번 발굴을 계기로 58만점의 소장 자료에 숨겨진 희귀 문서 발굴에 더욱 힘을 쏟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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