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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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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개최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8.0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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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 전시 포스터 /국립현대미술관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윤범모)은《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을 7월 21일(수)부터 2022년 3월 13일(일)까지 서울관에서 개최한다.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한국 근‧현대미술 대표작들을 처음 공개하는 전시로, 수준 높은 예술작품을 국민과 함께 향유하고자 한 기증자의 뜻을 기리고자 마련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개관이래 한국미술사 정립을 위해 국내‧외 우수작품을 꾸준히 수집해 왔으며, 한정된 예산의 벽을 기증으로 보완해 왔다. 세기의 기증이라 할 만한 이건희컬렉션은 1,488점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은 소장품 ‘일만 점 시대’를 열게 되었다. 7월 현재 소장품은 10,621점이며 이중 약 55%가 기증으로 수집됐다.

고(故) 이건희 회장 유족들이 기증한 이건희컬렉션은 미술사적 가치는 물론 규모에서도 미술관 역사상 최대 기록이다. 근‧현대미술사를 아우르며 20세기 초 희귀하고 주요한 국내 작품에서부터 해외 작품까지 포함,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의 질과 양을 비약적으로 보강시켰다.

전체 1,488점 중 한국 작가 작품 1,369점, 해외 작가 작품 119점으로 구성돼 있다. 부문별로는 회화 412점, 판화 371점, 한국화 296점, 드로잉 161점, 공예 136점, 조각 104점, 사진 및 영상 8점 등으로 고루 분포되어 있다. 김환기, 박수근, 이중섭, 장욱진, 유영국, 변관식, 이응노, 권진규 등 한국미술사 거장들의 작품이 대거 포함됐다. 

이번 전시에서는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34명의 주요작품 58점을 먼저 선보인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제작된 작품들을 주축으로 크게 세 개의 주제로 나누었다. 

첫 번째는 수용과 변화다. 일제 강점기에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면서 미술계도 변화를 맞이한다. 서구 매체인 유화가 등장하였고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 등 생경한 용어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즈음하여 조선의 전통 서화도 변화를 모색한다. 백남순의 <낙원>(1936년경), 이상범의 <무릉도원>(1922)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통해 이 시기 동서양 회화의 특징이 융합과 수용을 통해 변모하는 과정을 비교감상할 수 있다. 

백남순(1904-1994), 낙원, 1936년경, 캔버스에 유채; 8폭 병풍, 173x372cm. /국립현대미술관

<낙원>은 백남순이 오산 시절, 전라남도 완도에 살고 있던 친구 민영순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로 보냈던 작품이다. 마치 서양의 아르카디아 전통과 동양의 무릉도원 혹은 무이구곡도의 전통을 결합한 것처럼, 동서양의 도상이 혼합된 독특한 느낌의 풍경화이다. 캔버스 천을 바탕으로 하되, 전통의 병풍 형식으로 장황을 한 것도 이색적이다.
현실 세계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높은 산들이 화면 저 멀리까지 끝없이 펼쳐진 가운데, 바다와 강, 계곡이 화면 곳곳에 넘실댄다.

풍요로운 자연을 배경으로 여러 형태의 집들이 조화롭게 배치되었으며, 인간은 각자의 소임에 충실한 듯 평화로이 노동에 열중하고 있다. ‘낙원’ 즉 ‘이상향’에 대한 동경은 동서양을 막론한 인간의 오랜 주제이다. 서양화를 공부한 1세대 한국 화가가 어떻게 소재나 기법면에서 동서양의 전통을 융합하고 변형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은 1981년 백남순의 친구 민영순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미술평론가 이구열과 당시 뉴욕에 살고 있던 백남순의 협의를 거쳐 ‘낙원’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해방 이전 제작된 백남순의 작품으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림이다. 

이상범(1897-1972), 무릉도원, 1922, 비단에 채색; 10폭 병풍, 이미지: 159x39x(2), 159x41x(8)cm, 병풍: 202x413cm /국립현대미술관

‹무릉도원›은 화면 상단에 직접 쓴 이상범의 관지(款識)에 의하면 1922년 벽정(碧庭)이라는 인물을 위해 제작된 것이다. 1923년 11월 4일자 『매일신보』는 노수현과 이상범 2인전의 성공을 전하며 또 다른 이상범의 ‹무릉도원›을 사진으로 수록하였다. 기사에 의하면 사진 속 작품은 1년 전 모씨의 요청을 받고 반년 이상의 제작기간이 걸린 연작이며, 전시된 작품들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아 소개한다는 내용이다. 두 작품을 비교하면 구도는 물론 경물 배치까지 거의 유사하다. 

또한 병풍의 제1폭 뒷면에 적혀 있는 “청전무릉도원(靑田武陵桃源)”이라는 표제(標題)는 동양의 이상향을 대표하는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를 그린 시의도(詩意圖)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화면 상단에는 당나라 문인 왕유(王維)가 도연명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도원행(桃源行)」이 적혀 있다. 안중식은 조선시대의 전통을 계승하여 1910년대에 「낙지론(樂志論)」, 「도화원기」, 「귀거래사(歸去來辭)」, 「추성부(秋聲賦)」 등의 문학작품을 산수형식으로 그린 시의도를 다수 제작하였다.

특히 배를 탄 어부가 화면의 오른쪽 하단에서 동굴을 향하고 대각선 방향의 왼쪽으로 진인동(秦人洞)이 펼쳐지는 도상은, 안중식의 ‹도원문진(桃源問津)›(1913)이나 ‹도원행주(桃源行舟)›(1915)에서 직접 차용한 것이다. 표현기법은 근대적 감각을 반영하지 않은 안중식의 초기 청록산수화(靑綠山水畵)풍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창덕궁 경훈각의 동쪽 벽에 걸린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1920)와 동일하다. 

비록 주제나 표현기법 등에서 전통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화면 왼쪽에 대각선으로 펼쳐진 진인동 장면에만 일점투시도법을 적용하여 사실적인 공간감을 나타낸 것은 근대적 시점의 수용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처럼 전통 산수화에 근대적 시점을 일부 적용해 변화를 시도하는 창작 태도는 안중식의 ‹영광풍경›(1915)과 비견할 만하다.

이밖에 화면 상단 끝부분에 보이는 “서향화수(書香畵壽)”는 석산(石山)이 1945년 이 작품을 실견한 다음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예가 겸 전각가인 성재 김태석(惺齋 金台錫, 1874-1953)이 1950년 이상범의 ‹무릉도원›을 보고 적은 배관기(拜觀記)이다. 이에 따르면 안중식의 제자 관재 이도영(貫齋 李道榮, 1884-1933)이 표제를 적었으며, 이도영과 이상범의 합작(合作)은 드문 경우라고 하였다. 어쨌든 이 작품은 이상범이 관전(官展) 스타로 부상하기 이전인 1920년대 초반 안중식의 산수화풍을 그대로 이은 수제자였음을 입증해준다는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변관식(1899-1976), 금강산 구룡폭(金剛山 九龍瀑), 1960년대, 종이에 수묵채색, 120.5x91cm /국립현대미술관

<금강산 구룡폭(金剛山 九龍瀑)>은 금강산을 주제로 한 ‘소정 양식’이 정점에 도달한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구룡폭포와 주변의 바위 모습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내금강보덕굴›(1960)이나 ‹내금강진주담›(1960)에서 금강산 명승지를 그린 작품들은 대개 과장된 표현법으로 인해 자연의 웅장함이나 주관적 감흥이 극대화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직선의 폭포와 이를 마주한 채 서 있는 뒷모습의 남성은 화면에 수직의 대담한 구도를 만들어내고, 좌우의 각진 바위들의 표면에 가한 적묵법과 파선법은 응축된 대자연의 기운을 사실적으로 전달해준다. 근경의 너럭바위에 앉거나 서서 빼어난 장관에 심취한 듯 폭포를 바라보는 두 명의 남성은 실제 현장의 공간적 크기를 실감케 한다. 전반적으로 과장된 표현을 절제하여 현장 사생의 창작태도가 그대로 화면에 드러나며 소정 양식의 또 다른 변주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김종태(1906-1935), 사내아이, 1929, 캔버스에 유채, 43.7x36cm /국립현대미술관

신문기사나 도록 등에서 사진으로 전하는 수많은 김종태의 작품은 대부분 소실되었고,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대표작 <노란 저고리>를 포함 총 4점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사내아이›는 4점의 현존 작품 중 하나로 ‹노란 저고리›와 같은 1929년에 제작되었다. 마치 소녀와 소년이 쌍을 이룬 것처럼 ‘노란 저고리’를 입은 소녀는 볼그스레한 볼을 가진 앳된 표정으로 정면을 직시하는 반면, 초록과 남색 한복을 입은 소년은 졸음에 겨워 의자에 기댄 모습으로 그려졌다.

김종태의 작품은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며, 대상의 자연스러운 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특징이다. 서양화이지만 마치 동양화의 ‘일필휘지(一筆揮之)’를 보는 듯, 간단한 한 번의 붓질로 대상을 묘사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 주변 화가들의 회고에 따르면, 김종태는 이와 같은 작품을 매우 짧은 시간에 제작했다고 한다. 서명은 항상 ‘한자 세로쓰기’를 지향해서, 화면의 왼쪽 위에 제작연도와 함께 표기되어 있다. 

이대원(1921-2005), 북한산, 1938, 캔버스에 유채, 80x100cm /국립현대미술관

‹북한산›은 이대원이 경성고보 재학시절 제작한 초기 작품으로 특유의 대담한 붓터치와 강렬한 색감이 인상적이다. 특히 저 멀리 보이는 붉은색의 북한산과 푸른색의 간략한 붓터치로 표현된 나무와 꽃은 향토적이면서도 이국적인 느낌을 주며, 산맥이 겹겹이 어우러지는 듯한 과감한 구도가 웅장함을 자아낸다. 작가는 “아무리 사실적인 그림이라도 현실과 캔버스가 동일할 수 없다. 하물며 색을 통해 대상을 확인하는 작업에 있어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울퉁불퉁한 산세들이 복잡하게 변색된 색묘에 의해 괴이하게 나타나 있지만 너무 구체적인 것에 색채가 의존해 있기 때문에 어딘가 복잡한 느낌을 갖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복잡한 산세의 색채가 오히려 사실적이기 보다 추상적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의 기 소장된 ‹뜰›(1939)과 유사한 작품 경향을 보여주어 이대원의 초기 화풍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장욱진(1918-1990), 공기놀이, 1938, 캔버스에 유채, 65x80.5cm /국립현대미술관

‹공기놀이›는 장욱진이 양정고보에 재학 중 조선일보 주최 제2회 «전국학생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사장장(최고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를 계기로 집안에서 화가의 꿈을 인정받게 된다. 이 작품은 장욱진의 대표적인 초기작으로, 그의 서울 내수동 집을 배경으로 가족의 시중을 들던 여인들이 노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비록 얼굴 등 세밀한 묘사는 생략하고 있지만 아이를 업은 소녀를 포함하여 인물의 자세와 동세가 매우 정확히 표현되었고, 구도 또한 잘 짜여져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치밀하게 전체 화면을 가득 채우는 구성방법은 장욱진의 전형적인 특성으로 이어진다. 이 작품은 화가 박상옥(1915~1968)이 좋아해서 갖고 있게 되었는데 박상옥 사후 유족이 발견하고 장욱진의 확인을 받아 서명을 한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이건희컬렉션으로 소장된 듯하다. 

권진규(1922-1973), 자소상, 1967, 테라코타, 35×23×20cm /국립현대미술관

삭발한 채로 군더더기 없이 표현된 이 테라코타 ‹자소상›은 권진규가 1950년대부터 반복적으로 제작하던 자소상의 유형 중 하나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응시하는 모습은 같은 해에 제작한 ‹지원의 얼굴›을 비롯해서 1970년 ‹가사를 입은 자소상›에 이르기까지 흉상 조각에 흔히 나타나는 조형적 특징이다. 

이러한 표현은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던 작가의 내면의식을 반영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한국 현대조각가들 중에서 자신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조각한 작가로는 김종영(1915-1982)과 권진규를 들 수 있는데, 한국에서 ‘사실주의’를 정립하고자 했던 권진규는 자신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했으면서도 외모의 닮음을 넘어 내면 세계를 담아냈다는 점에 그의 독자성이 있다. 

두 번째는 개성의 발현이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격동의 시기에도 작가들은 작업을 멈추지 않고 전시를 열고 새로운 미술을 추구하며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김환기, 유영국, 박수근, 이중섭 등 작가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그들의 독창적인 작품은 한국미술의 근간이 된다.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1950년대), 이중섭의 <황소>(1950년대),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1954) 등 이건희컬렉션에는 특히 이 시기의 작품이 집약되어 있다. 

김환기(1913-1974), 여인들과 항아리, 1950년대, 캔버스에 유채, 281.5x567cm.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여인들과 항아리›는 1950년대에 조선방직을 인수하여 국내 최대의 방직재벌 기업가가 된 삼호그룹의 정재호 회장이 퇴계로에 자택을 신축하면서 대형 벽화용으로 주문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파스텔톤의 색면 배경 위에 양식화된 인물과 사물, 동물 등이 정면 또는 정측면으로 배열되어 고답적인 장식성을 띈다. 단순화된 나무, 항아리를 이거나 안은 반나의 여인들, 백자 항아리와 학, 사슴, 쪼그리고 앉은 노점상과 꽃장수의 수레, 새장 등은 모두 1948년 제1회 «신사실파» 시기부터 50년대까지 김환기가 즐겨 사용했던 모티브들이다.

그러나 전쟁과 피난의 현실을 은유했던 노점상이나 인물들이 판자집, 천막촌 대신 조선 궁궐 건축물과 함께 배열되고, 물을 긷고 고기를 잡아 오는 노동현장의 여성들은 고운 천의 옷을 걸친 여성들로 변모하여 전체적으로 장식적인 풍요의 이미지를 자아낸다. 비대칭의 자연스러운 선과 투박한 색면 처리는 조선 백자의 형식미를 흠모했던 이 시기 김환기 작품의 조형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60년대 말 삼호그룹이 쇠락하면서 이 작품은 미술시장에 나와 이후 이건희컬렉션으로 소장된 듯하다. 

김환기(1913-1974), 산울림 19-II-73#307, 1973, 캔버스에 유채, 264x213cm.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Whanki Foundation·Whanki Museum

1964년 뉴욕에 정착 후 점, 선, 면 만으로 이루어진 추상 화면에 대한 실험을 계속하던 중 김환기는 1968년 “선인가? 점인가? 선보다는 점이 개성적인 것 같다”, “날으는 점, 점들이 모여 형태를 상징하는 그런 것을 시도하다, 이런 걸 계속해 보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무렵부터 점만으로 이루어진 올오버(All-over) 구도의 점화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70년부터는 보다 본격적으로 다양한 형태의 점화들이 시도되었다.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1970)에서 볼 수 있듯이 1970년의 점화는 단색조의 점들을 화면 전면에 걸쳐 수평, 수직으로 채워나간 형태이다. 무명 캔버스에 아교질을 한 후 미리 풀어둔 물감으로 점을 찍고 그 점을 사각형의 선으로 둘러싸기를 반복한다.

색점들은 화면 전체에 걸쳐 반복되면서 리듬을 만들어내며 청색의 부드러운 농담과 번지는 효과는 무한히 확산되어가는 공간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1971년부터 수평 수직 구도는 동심원 구도로 발전되며 직선 구도가 교차되기도 하고 하얀 직선이 결합되어 공간이 보다 복잡하게 중첩되면서 미묘한 진동을 만들어내는 화면으로 발전한다. 

1973년 작품인 ‹산울림 19-II-73#307›은 뉴욕시기 점화 양식의 완성 단계를 보여준다. 흰 사각형 안에는 동심원들이 세 방향으로 퍼져나가면서 울림을 만들어내며 흰색의 사각형 밖에서 대각선의 방향으로 별처럼 쏟아지는 점들과 대조를 이룬다. 채색 없이 캔버스 바탕을 그대로 남겨둔 흰색의 사각형은 내부와 외부의 공간이 중첩되면서 무한의 공간으로 깊이 확장되는 효과를 자아낸다.

흰 선에는 점이 찍히면서 번진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그 자체로도 미묘한 진동을 만들어낸다. 작은 점들의 파동이 광대한 우주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효과를 자아내는 듯한 점화를 통해 김환기는 미국의 색면 추상과 차별화되는 동양적, 시적 추상화의 세계를 구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김환기의 일기에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1973년 2월 19일 올해 처음 큰 캔바스 시작하다. 3월 11일, 근 20일 만에 307번을 끝내다. 이번 작품처럼 고된 적이 없다. 종일 안개비 내리다.” 

(위) 유영국(1916-2002), 작품, 1972, 캔버스에 유채, 133x133cm /국립현대미술관

유영국의 작품은 1960년대 초부터 일관되게 ‘산’을 모티브로 하였다. 이때 산은 단순히 풍경화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자연의 신비와 숭고함을 담은 아름다움의 원형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여러 가지 형태와 색채, 질감 등 회화적 요소들을 실험하기 위한 일종의 매개체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스스로에게 과업을 부과하듯, 완전히 절대적인 추상의 과정을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갔는데, 이 모든 과정은 약 2년에 한 번씩 열었던 개인전을 통해 발표되었다. 

각각 1972년과 1974년에 제작된 ‹작품›은 유영국의 회화적 경로에 있어 일종의 전환점이 되는 시기의 작품들이다. 그는 스스로 “60세가 될 때까지는 공부를 하고, 이후부터는 자유롭게 그리겠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실제로 이 무렵 그의 작품은 완전한 절대 추상에서 점차 자유로운 색감과 형태감으로 변모되는 경향을 보인다. 정방형의 화면 위에 한 작품은 차가운 계열의 색채를, 다른 한 작품은 따뜻한 계열의 색채를 과감하게 대별한 가운데, 각각의 작품은 같은 계열의 색채 내에서 미묘한 변주를 더하고 있다. ‘색채의 마술사’로 불렸던 화가 유영국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장욱진(1918-1990), 나룻배, 1951, 패널에 유채, 13.7x29cm /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1918-1990), 소녀, 1939, 캔버스에 유채, 29x13.7cm /국립현대미술관

장욱진은 한국전쟁 동안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전쟁기를 보냈다. ‹나룻배›는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소, 가방을 맨 소년, 닭을 안고 있는 여인, 항아리를 이고 있는 여인, 자전거와 함께 있는 소년, 뱃사공 등을 가득 실은 나룻배는 작가의 고향에서 장이 서는 조치원까지 반드시 건너야 하는 미호천의 교통수단이다. 장이 설 때 마다 동네사람들은 나룻배에 많은 것을 실어 갔고 장욱진은 어릴 적 많이 본 강나루 장면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1939년에 그린 ‹소녀›라는 작품의 뒷면에 그려진 것으로, 캔버스를 구할 수 없었던 당시 작가들이 기 작품의 뒷면에 그리는 일은 흔했다. 나무판 위에 그린 ‹소녀›는 유족에 따르면 장욱진 집안의 선산을 관리하던 산지기의 딸이라고 한다. 당시 유학 중이던 작가는 고향을 생각할 때 가까이서 보면서 정들었던 대상을 모티브로 그리면서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것들을 소재로 삼게 된 듯하다. 작가는 이 작품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해서 부산 피난 때는 품에 안고 갈 정도였다고 한다. 

이중섭(1916-1956), 황소, 1950년대, 종이에 유채, 26.5x36.7cm /국립현대미술관

‹황소›는 이중섭이 가장 애호했던 작품 소재 중 하나이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소를 즐겨 그렸는데, 통상적으로 ‘소’는 인내와 끈기를 상징하는 한국의 상징물이었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이중섭은 더욱 적극적으로 소를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전쟁이 끝나고 모든 것을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시점에 강렬한 붉은 황소가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대부분 1953~54년 통영과 진주에서 다수의 ‹황소› 및 ‹흰 소› 연작이 그려졌는데, 이 시기는 당시 일본에 있던 부인에게 보낸 편지를 미루어 볼 때, 대단한 의욕과 자신감에 차서 맹렬하게 작품 제작에 몰두할 때이다. 그의 소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과 같은 것이기도 해서, 화가의 심리 상태와 처지가 매우 진솔하게 표현되곤 한다.

이 ‹황소›의 경우, 강렬한 붉은 색을 배경으로 세파를 견딘 주름 가득한 황소의 진중하고 묵직한 모습을 담았다. 힘차면서도 어딘지 애잔한 느낌을 자아내는 것은 이중섭 황소의 공통된 특징이다. 붉은 황소 머리를 그린 작품으로 현존하는 것은 총 4점인데, 그중 이 황소는 1976년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0년 발간된 금성출판사 이중섭 화집에 수록된 바 있으나, 거의 전시된 적이 없었다가 이번에 이건희컬렉션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었다.

이중섭(1916-1956), 흰 소, 1950년대, 종이에 유채, 30.5x41.5cm /국립현대미술관

‹흰 소› 또한 이중섭이 즐겨 그린 소재이다. 붉은 배경의 황소 머리를 클로즈업한 작품과는 달리, 흰 소는 주로 전신을 드러내고 화면의 한쪽 방향을 향해 걷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흰 색’은 백의민족인 조선인을 암시하는 색이고, ‘소’라는 동물 또한 억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성실하고 끈기 있게 노동하는 이미지를 담고 있어 조선인의 상징으로 읽힌다. 일제강점기에는 암암리에 금기시되었던 소재였던 만큼, 해방과 전쟁을 거친 후 이중섭은 이 소재를 더욱 당차게 적극적으로 재소환하였다.

여러 점의 ‹흰 소› 중에서 이 작품은 다소 지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등을 심하게 구부려 고개를 푹 숙이고, 성기를 드러낸 채 매우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다. 이중섭은 ‘소’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의 솔직한 심리 상태를 마치 일기 쓰듯 그때그때 다른 모습으로 그려놓았다. 이중섭은 스스로 “나는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畫工)”이라고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쓴 적이 있다. 조선의 색채와 특색을 담아, 하루하루 정직하게 살며, 그것을 솔직하게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 그것이 이중섭이 그리고자 했던 작품의 세계였다. 

박수근(1914-1965), 절구질하는 여인, 1954, 캔버스에 유채, 130x97cm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은 일하는 농가의 여인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평생 반복해서 그렸는데, ‹절구질하는 여인› 역시 1936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로 출품하여 입선한 ‹일하는 여인›의 소재를 반복하여 그린 것이다. 아기를 업은 채 절구질을 하는 여인의 모습은 고단한 여인의 생활을 잘 보여주는데 이는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고 싶었던’ 박수근의 작품 세계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절구질하는 여인›은 박수근 특유의 색감과 마티에르가 완성도 있게 구사되어 있다. 1960년대가 되면 박수근 특유의 양식화가 진행되는데, 이 작품은 그 전의 무르익은 기량과 정제된 기법의 구사가 잘 드러나 있다. 타계하기 직전인 1964년에도 동일한 도상의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후기에 제작된 작품들에 비하면, 이 작품에는 인물의 이목구비와 손동작 등에서 개성적이고 구체적인 묘사가 감지된다. 

박수근(1914-1965), 유동, 1963, 캔버스에 유채, 96.6x130.5cm /국립현대미술관

박수근은 자신이 거주했던 동네의 풍경, 길가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 시장을 오가는 여인들의 모습, 휴식을 취하는 노인의 모습, 시장과 노점 풍경 등 한국전쟁 후 서울에 자리잡은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아이를 업고 있는 소녀, 쪼그리고 앉아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다른 작품에서 자주 발견되는 소재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배경은 농가로 바뀌었고, 대개의 작품에서 인물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집들은 소략하게 표현되는 데 반하여 아이들을 둘러싼 집의 모습이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림 전체에 풍기는 온화한 색조,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감, 그리고 아이들 간에 오가는 시선 등에서 대상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애정이 감지되는 작품이다. 

마지막은 정착과 모색이다. 전후 복구 시기에 작가들은 국내‧외에서 차츰 정착하며 꾸준히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모색한다. 이성자, 남관, 이응노, 권옥연, 김흥수, 문신, 박생광, 천경자 등이 고유한 조형세계를 구축하며 한국미술을 보다 다채롭게 만들었다. 이성자의 <천 년의 고가>(1961), 김흥수의 <한국의 여인들>(1959) 등 이 시기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이응노(1904-1989), 구성, 1971, 천에 채색, 230x145cm /Ungno Lee / ADAGP, Paris – SACK, Seoul, 2021

1960년대 초, 이응노의 문자추상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거친 마티에르 위에 유연한 획이 어우러지는 서정적 경향을 나타내었으나 점차 문자를 입체적으로 혹은 기하학적으로 정리하여 조각, 세라믹, 회화, 타피스트리 작품으로 영역이 확장되어 나타난다. ‹구성›과 ‹작품›은 이응노의 1970년대 문자추상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두 작품 모두 천 위에 제작한 작품이나, 기법적으로 다른 양상을 보인다.

1971년의 ‹구성›은 융 같은 표면 위에 물감으로 그려 붓터치가 보인다. 1974년도의 ‹작품›은 거친 천 위에 문자 형상을 다른 색 천으로 붙인 후 그 형상 주변에는 붉은 색의 실로 꿰맨 듯한 기법으로 제작하였다. 작가는 문자추상을 하면서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세라믹, 타피스트리 등의 영역 확장뿐만 아니라 평면 작품에서도 종이에 채색이 아닌 꼴라주, 천 등 재료에 변화와 실험을 시도하였다. 한자로 추측되지만 읽으려고 하면 무슨 글자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작가는 조형적인 실험을 위해 문자를 사용하였다. 

박생광(1904-1985), 무녀, 1980, 종이에 채색, 136x140cm /국립현대미술관

‹무녀›가 제작된 1980년은 박생광이 한국적 채색화 양식을 정립해 간 시기다. 색동옷과 단청에서 영감 받은 특유의 민속적이고, 원색적인 색감이 다채롭게 어우러지면서 평면성이 강조되었던 기존의 작품과는 달리 대상을 묘사하는 정도와 크기를 다르게 하면서 화면의 깊이를 더하고 있다.

80년대 민족미술에 대한 관심이 팽배해 있던 시대 분위기와 해외에 한국 현대미술전이 열리면서 박생광의 격정적이고 화려한 진채의 채색화는 가장 한국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해외에서도 주목받았다. 1982년부터 역사화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대작인 ‹명성왕후›와 ‹전봉준›를 제작하였으나 1984년 후두암이 발병하여 단군, 안중근, 윤봉길을 소재로 한 역사화 시리즈 계획을 완성하지 못하고 안타깝게 타계하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역사를 떠난 민족은 없다. 전통을 떠난 민족예술은 없다.”는 메모는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다. 

천경자(1924-2015), 노오란 산책길, 1983, 종이에 채색, 96.7x76cm /서울특별시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는 전통 안료인 분채와 석채, 흡수력이 좋은 전통지의 성질을 이용하여 템페라 유화처럼 반복적으로 색을 쌓고, 지우는 과정을 통해 밑에서부터 은은하게 우러나오게 색채를 표현하여 그림의 무게감과 특유의 몽환적인 느낌을 더했다.  1970년대에는 천경자 스타일의 매혹적인 여인상을 확립하며 대표작인 <길례언니>, <고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테레사 수녀> 등을 남겼다.

1970-80년대는 유럽, 중남미, 인도,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풍경을 묘사한 '여행풍물화'를 선보이는데, 이국적인 색감과 민속적이고 사실적인 풍경묘사가 인상적이다. ‹노오란 산책길›은 80년대 초부터 서정적 풍경이 담긴 여인상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모델은 그의 큰며느리였다. <황금의 비>(1982)에서 시작된 천경자의 후기 여성 인물상은 이처럼 아름답고 고혹적인 천경자만의 작품세계를 완성시켰다.

이번 기증 작품들은 작품검수, 상태조사, 사진촬영, 저작권협의 및 조사연구 등의 과정을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등록 중이며, 순차적으로 미술관 누리집에 공개될 예정이다. 

한편, 미술애호가이자 국립현대미술관과 각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배우 유해진이 이번 전시 오디오가이드 재능기부에 참여했다. 친근한 목소리로 관람객에게 깊은 감동과 여운을 전할 유해진의 전시해설 오디오가이드는 국립현대미술관 모바일 앱(App)을 통해 누구나 들을 수 있으며, 전시실 입구에서 오디오가이드 기기 대여도 가능하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가 개최될 수 있도록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국내‧외 미술작품을 대량 기증해주신 고(故) 이건희 회장의 유족들께 깊이 감사드린다”며, “국립현대미술관은 이번 전시를 시작으로 양질의 기증 작품을 국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증대하고, 지속적으로 조사‧연구하여 미술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기회로 삼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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