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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감싸는 천은 패브릭 랩이 아니지요, '보자기'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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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을 감싸는 천은 패브릭 랩이 아니지요, '보자기'라 부릅니다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7.29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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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기를 패브릭 랩이라 표현한 알라딘 /알라딘 홈페이지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최근 인터넷 상에서 작은 논란이 있었다. 인터넷 서점 및 오프라인 중고서점을 운영하는 알라딘이 22주년을 기념 윤예지 작가와 함께 협업한 굿즈를 선보였는데, 이 상품 설명이 논란이 된 것이다. '아름답게 포장해 주는 패브릭 랩'이라 썼는데, 누가 봐도 사람들 눈에는 그저 보자기였기 때문이다.

이미 서양에서도 보자기를 아는 사람은 많다. 'bojagi'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 봐도 포장을 할 때 쓰는 한국의 물건이라 나온다. 이런 마당에 '패브릭 랩'이라는, 흔하게 들어 보지도 못한 영어의 향연에 누리꾼들은 즉시 지적했고, 알라딘 측은 상품명을 '매듭 보자기'라 수정하고 해당 상품을 일시 판매 중단 상태로 전환했다. 


궁중과 민간 모두에서 쓰였던 보자기 
 

보자기 /국립고궁박물관

물건을 싸거나 덮어두기 위해 천으로 네모나게 만든 피륙, 보자기에 대한 설명이다. 간단한게 말하면 물건을 포장할 때 쓰는 천이다. 물건의 크기가 크든 작든 감쌀 수 있는 보자기는 다채로운 변형으로 보관과 소지가 편리하며, 안에 싸이는 물건에 따라 그 형태가 결정되는 가변적 운반용품이자 포장재였다. 보자기가 언제부터 어떤 용도로 처음 쓰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이 물건을 가지고 다니거나 보관할 때, 물건을 보다 안전하고 간편하게 간수하고자 하는 필요에 의해 생긴 것으로 추측된다.

보자기의 용도는 매우 넓다. 어떤 특정한 물건만을 싸 두기 위한 단일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보다는 다목적으로 융통성 있게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상용보, 혼례 시에 쓴 혼례용 보, 불교 의식 같은 종교적 목적에 쓴 불교 의식용 보, 마지막으로 장례나 기우제 등 특별한 경우에 쓴 특수용 보로 나뉜다.

또 사용 계층에 따라 민보와 궁보, 구조에 따라 안감을 대지 않은 홑겹의 홑보, 안감과 겉감 두 겹으로 된 겹보, 솜을 두어 만든 솜보, 조각천들을 이어서 만든 조각보, 일부 혹은 전체를 기름종이로 만든 식지보, 누벼서 만든 누비보 등이 있다. 색상에 따라 청보·홍보·청홍보·오색보·연두보·아청보 등이 있고 재료에 따라 명주보·항라보·모시보 등, 문양에 따라 화문보·용문보·운문보 등이 있다. 

수보 /서울역사박물관

이렇듯 매우 다양한 종류의 보자기가 생활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보편화된 것은 민간신앙적인 면도 있었다. 즉 보자기를 뜻하는 한자어 ‘복(袱)’은 ‘복(福)’과 뜻이 통하는 것으로 믿어졌으며, 보자기에 싸두는 내용물을 복에 비유하여 복을 싸두면 복이 달아나지 않는다는 믿음이 보자기의 발달이 된 것이다.

혼례 시 예물을 싸던 보자기는 이러한 의미를 내포한 대표적인 예가 되며, 혼례용보로 주로 쓰였던 관동 지방의 수보는 보자기에 투사된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 수보의 가장 대표적인 문양은 나무인데, 나무는 우리 나라에서 특별히 신성시된 자연물 중의 하나로 상서롭고 영험이 있다고 여겨졌다. 또 꽃·열매·원앙 등의 길조 문양도 비슷한 의미를 내포하였으며 특히 석류 문양은 다산·다남의 전형적인 상징이었다고 한다. 

합천 해인사 복장유물 속 보자기 /문화재청 

세계 어느 곳보다 우리나라의 보자기 문화가 발달되었던 이유를 몇 가지로 요약해 보면 첫째는 협소한 생활 공간에서의 편의성을 들 수 있다.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조선조 선비 정신에서 협소한 생활 공간은 검약과 미덕의 상징이었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 많은 양의 물건을 보관하기 위해 보자기는 함이나 궤에 비해 제작이 쉽고 사용 용도가 다양했다. 무엇보다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접어두고 보관하기 편리해 사람들은 자재 도구로서 편한 보자기를 선호했던 것이다. 

둘째는 물건들을 소중히 다루려는 동양적 사고의 '예禮' 표시로 볼 수 있다. 보자기는 물건을 주고받을 때 정중히 감싸면서 아름다운 문양의 장식성까지 있어 상대방에게 최대한 예의를 갖출 수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으니 많은 양의 이불이나 베개 등을 필요로 하는 안방 살림살이와 가재도구를 잘 덮어 남에게 보이지 않게 보관하기에 보자기는 아주 요긴했을 것이다. 

셋째는 기복신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옛 조상들은 옷을 지으면서 버려진, 조각난 천 조각을 모아 한 땀 한 땀 복을 잇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새로운 보자기를 만들었다. 이것은 물건을 복에 비유하여 보자기에 물건을 싸두는 것이 복을 싸 두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영조비 정순왕후 봉왕비 금보 봉과물품 /국립고궁박물관

조상들은 물건을 다양한 재료로 포장해 내용물을 보호하거나 장식했고, 특히 귀중한 물건과 중요한 행사가 많았던 왕실에서는 일상 생활이나 의례에서 사용하는 여러가지 물건들을 용도에 맞게 포장해 사용하는 데 각별히 공을 들였다. 유교의 영향을 받아 격식을 중요하게 따졌던 문화를 가진 왕실답게, 조선 왕실의 포장은 그 물건을 받는 사람에 대한 예의를 나타내며 공을 들였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조선 시대 보자기에 얽힌 특이한 사화를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08년(태종 8) 전사재감 이진이 입경할 때 그의 종이 황색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본 사헌부 하리 김을지가 그것을 빼앗으려고 달려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사윤 김조까지 이진에게 가담했지만 둘 다 김을지에게 봉변만 당하고 말았다.

당시 황색은 중국 황제의 전용 색이라 하여 사용이 금지되었기에 이진과 김조는 영을 어겼다 하여 각각 평주(황해도 평산지역의 옛 지명)와 수원으로 부처(죄인을 먼 곳으로 보내 그곳에 거주하게 하는 형벌)되었고, 김을지는 조관을 모욕하였다 하여 형장을 맞고 쫓겨났다고 한다. 

현종비 효현왕후 왕비책봉 교명과 봉과물품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왕실에서의 포장 문화에 보자기가 필수였다. 그 내용물만큼이나 포장에 사용되는 각종 용품 또한 최상품을 엄선해 격식과 용도에 맞게 세심하게 제작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물품이 훼손되지 않게 안전하게 보호하면서도 내용물의 겉모습을 아름답게 꾸며 왕실의 위엄과 품격을 알리려는 정성과 품격, 왕실의 위엄이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왕실에는 포장 담당 관청인 상의원이 있었는데, 상의원은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각종 용품 미 의복을 제작해 올리는 곳으로, 왕실의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관청이다.

태조대에 설치해 1907년에 폐지될 때까지 왕실의 생활용품부터 의례에 필요한 의복 등을 관리하면서 조선 왕실의 역사를 함께한 상의원은 규례를 마련해 왕실의 각종 물품을 격식과 예를 갖추어 포장하고 훼손되지 않도록 관리했다.각 의복과 용품은 종류, 위계에 따라 다양한 보자기와 상자로 포장했고 특히 최고의 예복인 왕과 왕세자의 법복은 각각 주칠, 흑칠 상자에 넣어 상의원의 부속 건물인 면복각에 따로 보관했다. 포장용품 등 상의원에서 관리하는 물품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상방정례와 같은 기록에 상세하고 규범을 정하고 이를 지켜 나갔다.

조선 왕실에서는 각종 생활용품을 사용자의 신분에 맞게 최상급의 재료로 만들고 이를 소중하게 보관하기 위해 포장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 포장에는 주로 보자기와 상자를 많이 사용했고 장신구나 은수저부터 의복, 서책까지 다양한 물품을 많이 담았다. 포장에 사용된 보자기는 직물 한 겹으로만 이루어진 홑보자기, 두 겹으로 이루어진 겹보자기, 가운데 솜을 넣은 솜보자기, 기름종이를 직물에 부착한 맛보자기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조선 왕실에서 사용했던 봉황 무늬 보자기 /국립고궁박물관

이러한 보자기의 색으로는 홍색, 청색, 자색, 황색 등 화려하고 선명한 색상이 선호되었고 최상급의 각종 비단에서부터 마, 면, 종이 등 필요에 따라 다양한 재료로 제작되었다. 물건을 담아 포장하는 용도로 만들어진 상자는 내용물의 형태에 따라 맞춤 제작해 손상을 최소화했고 내부에는 내용물이 흔들려 파손되지 않게 고정대를 설치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용물을 상자에 담은 후 다시 보자기로 포장해 오염을 방지하고 이동이 용이하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왕실 보자기에는 권위를 상징하거나 길상의 의미를 담은 여러가지 문양이 담겨 있다. 보인이나 어책을 싸는 보자기로는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의 운문을 직조해 넣은 비단인 운문단을 주로 사용했다. 여기에 칠보나 팔보문을 더한 운보문으로 장식한 경우도 많았다. 이에 비해 여성들이 사용한 왕실 장신구를 싸는 보자기에는 길상의 의미를 지닌 꽃이나 과실, 동물, 식물의 문양이 다양하게 사용되어 보자기의 장식 효과를 높였다.

봉황문인문보 /국립고궁박물관

직조 과정에서 문양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자기감 위에 화려한 문양을 그려넣은 보자기도 있는데 이를 인문보자기라 한다. 인문보자기는 왕실 가례와 같이 특별한 경우 사용했던 것으로 보자기의 중앙에 성왕, 군주 등을 상징하는 봉황 한 쌍을 그려넣었으며 그 주변은 격자형으로 분할하거나 작은 원을 배치하고 그 안에 다양한 길상적인 문양을 그려넣은 것이 특징이다. 

친왕비 쌍가락지, 장도노리개와 포장용구. 각각 두꺼운 색지로 감싸 모양을 잡고, 이를 끈 달린 비단 겹보자기로 싸고 끈으로 돌려 묶어 상자에 넣은 모습 /문화재청

왕실의 보자기는 여러 종류로 다양한 용도에 쓰였다. 끈이 없는 보자기는 사각형의 홑보자기나 겹보자기다. 함이나 궤 속에 물품을 보관할 때 마주보는 양측 귀를 먼저 여미고 나머지 두 귀를 묶어 썼다. 중앙에 대각으로 끈이 달린 보자기는 그릇에 담긴 음식이 쏟아지는 것을 방지하고 음식물의 보온을 유지하는 데 쓰였다. 끈 두 개가 한쪽 귀에 달린 보자기는 끈 길이를 하나는 짧게 하고 하나는 길게 했다. 소형보는 노리개 등 패물을 싸는 데 쓰였고 대형보는 함 등의 큰 물품을 싸는 데 쓰였고 두 귀에 폭이 넓은 끈이 달린 보자기는 끈이 없는 두 귀를 먼저 여미고 끈을 돌려 묶어 사용했다.

조선왕실의 포장의 정수는 보인, 어책, 교명, '국조보감' 왕의 초상화인 어진 등 왕권의 상징물에서 완성되었다. 왕실 주요 인물의 지위와 존엄을 상징하는 이 상징물들의 포장은 '봉과'라고 하였으며, 해당 상징물의 제작에는 고위 관리들이 반드시 참여해 의례 절차의 하나로 엄격하게 진행했다. 내용물에 따라 포장 방법이 조금씩 달라지긴 했지만 대부분 내용물을 솜보자기로 싸서 내함에 넣은 후 홑보자기로 싸고, 외함에 넣은 후에 다시한번 홑보자기로 싸는 등 수차례 보자기로 포장하는 방식은 동일했다.

함과 내용물의 사이에는 풀솜을 넣어 완충 작용을 꾀하고 의향을 넣어 충해를 방지하였으며 보자기는 끈으로 묶어 봉한 뒤 내함과 외함마다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주머니에 담아 보관했다. 왕권 상징물의 포장은 단순한 내용물의 보호나 장식뿐만이 아니라 왕권의 위엄을 나타내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그 재료 또한 최상급을 사용했다. 포장 절차와 재료 등은 의궤에서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조각보 /서울역사박물관

왕실의 화려한 포장 문화의 보자기가 있다면 민간에서 쓰는 보자기의 일종인 조각보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조각보는 쓰다 남은 자투리 천조각들을 이어서 만든 보자기를 뜻한다. 옷을 마르고 남은 조각들을 모아 두었다가 하나 하나 이어서 만든 것으로, 궁에서 사용하는 궁보보다는 고급스러움이 부족했어도 민간의 사람들은 생활 속에서 남은 폐품을 활용해서 조각보를 만들었으며 직선과 사선을 사용한 다양한 면분할을 통해 미의식을 살렸다.

옛 사람들은 보자기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감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대신 당시 귀중했던 옷감으로 옷을 짓고 남은 천의 자투리를 버리지 않고 보관해 두면 이것이 곧 아름다운 보자기의 재료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기워맞춤 자체가 독창적이며 매우 예술적인 공예가 되었고, 다양한 그림과 특징의 자수도 보자기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높이는 요소가 되었다. 

조각보 /서울역사박물관

조각보는 궁중보다는 주로 민간에서 쓰였으며 천이 귀하던 시절에 옷이나 이불을 만들고 남은 자투리 천을 모아 붙여 물건을 싸거나 밥상을 덮는데 쓰였다. 대부분 비단이나 모시 등 쉽게 상하는 천연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현존하는 조각보는 주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조각보는 대개 크게 만들어 이불보나 문에 치는 발로 이용하였고, 멋을 내어 예단이나 혼수품을 싸는데 이용하기도 했다. 

외부와 사회 활동이 거의 없는 조선 시대 여인들의 표현이 외부로 드러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은 보자기였다. 제한된 공간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여인들이 즐길 수 있었던 제작에 대한 즐거움과 성취감 또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성취감의 결과물은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을 것이고, 이는 조각보 가운데 사용한 흔적이 거의 없는 것들이 상당수 발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유산, 보자기
 

보자기로 포장을 하는 모습 /KCCLA 유투브

유투브에 보자기 백 'bojagi bag'을 검색해 보면 여러 보자기로 만든 가방을 볼 수 있다. 보자기로 직접 물건을 포장하는 방법도 볼 수 있고 완성된 제품들은 여러 보자기로 더 멋스럽게 보인다. 계급의 상하 없이 널리 쓰였고, 민간 사람들에겐 생활 속 친숙하게 썼던 보자기는 누군가에겐 패물과 버선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했다.

또 누군가에는 함을 덮고 밥상을 덮고, 혼인을 앞둔 자식을 위해 한땀한땀 자수를 놓아 혼수품으로 장만한 소중한 물건이었다. 정말 오래 전부터 사람들에게 널리 쓰였던 보자기라는 말을 패브릭 랩 같은 단순한 영어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 멋이 없지 않은가. 보자기라는 이름이 수많은 시간을 거쳐 내려와 온전히 보존된 말인 만큼 후대에도 이 말이 온전히 전해질 수 있도록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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