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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발굴 50주년만에 국가 사적으로 공식명칭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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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발굴 50주년만에 국가 사적으로 공식명칭이 되다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7.20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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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송산리 고분군 전경 /문화재청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문화재청은 사적 ‘공주 송산리 고분군’을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사적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부여 왕릉원‘으로 명칭 변경을 예고했다.

무령왕릉은 고대 왕릉 중 무덤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고 송산리 고분군이 백제왕릉임을 명확히 하는 중요한 유적인 것을 고려해 국민에게 널리 알려진 ‘무령왕릉’이 포함된 이름으로 사적 명칭을 변경하기로 하였다. 올해는 또한,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이기도 해 국민이 쉽게 인식하고 송산리 고분군의 역사·문화재적 위상을 높이고자 변경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1963년 1월 사적으로 지정된 ‘부여 능산리 고분군’은 무덤들 서쪽에서 발굴된 절터에서 ‘백제 금동대향로(국보, 1996.5.지정)’와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국보, 1996.5. 지정)’이 출토되어 능산리 무덤들이 왕실 무덤이라는 것이 확인된 곳으로, 이번 ’부여 왕릉원‘으로의 명칭 변경은 피장자들이 왕과 왕족으로서 왕릉급 고분군임을 분명히 알려 인근의 ’능안골 고분군‘, ’염창리 고분군‘들과 차별성을 두고 능산리 고분군만의 특성과 역사성을 반영하고자 한 취지다.

송산리고분군에서 열린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기념식 /공주시

최근 공주시는 송산리고분군에서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무령왕의 혼을 추모하는 불교식 제례, 세계유산 무령왕릉의 발굴과 보존 대담, 무령왕 찬가 순으로 진행된 이 기념식에서 김정섭 시장은 “50년 전 무령왕릉 발굴을 다시금 되새기고 그 의미와 가치를 시민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며, “최신 기법을 동원한 송산리고분군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진정한 송산리고분군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노력에 매진하겠다”고 전했다. 이미 공주시는 올해를 '무령왕의 해'로 선포하고 무령왕 추모제, 국제학술대회, 무령왕 동상 건립, 세계유산축전 등 다채로운 기념사업을 진행 중이다. 


무령왕릉의 수난, 그리고 유물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고분 입구 /문화재청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의 돌방무덤이 주를 이루며, 이 고분군에는 당시 중국양의 지배 계층 무덤의 형식을 그대로 모방해 축조한 벽돌무덤으로서 무령왕릉과 함께 제6호 벽돌무덤이 있다. 송산리 고분군은 발굴 당시 일본군들의 약탈로 사신도만 남고 도굴 과정에서도 천장이 훼손되어 물이 스며들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백제의 고분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에 의해 도굴되었는데, 일제의 유명한 도굴꾼이자 역사학자였던 '가루베 지온'은 무령왕릉을 그 근처에 있던 6호분을 주위에서 감싸기 위해 만든 언덕으로 착각하게 된다. 때문에 다행히도 무령왕릉은 일본인들의 도굴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무령왕릉이 백제왕의 무덤이라는 것을 가루베 지온이 알았다면, 무령왕릉 내부의 유물들 또한 지금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발굴 초기, 무덤 입구의 흙더미를 제거하는 모습 /국립문화재연구소

1971년 7월, 배수로를 만들기 위해 뒤쪽 무덤을 파던 인부는 우연히 벽돌을 쌓아 만든 아치형 구조물을 발견했고, 이것이 6호분이 아닌 다른 무덤의 입구라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부분이었다. 공사가 잠시 중단되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주관하는 발굴단이 파견되었고, 이들은 벽돌로 쌓은 이 구조물이 또 다른 전실묘의 입구란 것을 확인한다.

비가 그치고 무덤 입구가 나타나자 발굴단은 위령제를 지내고 막혀 있던 부분의 맨 위 벽돌 2개를 들어냈다. 이 발굴은 20세기 우리나라 최대의 발굴 규모를 자랑했지만 막상 발굴 수준은 한참 뒤떨어졌던 것으로 유명하다. 대개 유물이 발견되면 경찰이 오고 주변에는 외부인의 출입을 막으며 충분한 준비 후 연구가 되었어야 했지만 당시 사람들의 경험 부족, 제대로 된 통제도 없었던 등 모든 상황이 아마추어 그 자체였다.  

이 대발견은 전국으로 빠르게 소문이 퍼졌고, 무령왕릉 주변으로는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쳤다. 발굴 도중 무덤 입구에 놓인 진묘수와 함께 발견된 지석에서 ‘백제사마왕(百濟斯麻王)’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는 이야기가 삽시간에 퍼졌고, 이 소식을 들은 구경꾼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어 유적 주변을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진다. 

무령왕릉 발굴 조사 당시 현장 모습 /국립공주박물관

특히 기자들의 무리한 취재 경쟁으로 무질서하게 사진을 찍고 들어오는 등 이 과정에서 귀한 유물인 청동숟가락이 부러지기도 했다. 이에 유물이 훼손되는 것을 우려해 제대로 된 조사는 해 보지도 못하고 고분을 연 지 하루만에 유물을 수습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결국 발굴단은 사람들이 더 모여들기 전에 발굴을 빠르게 끝내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무령왕릉 발굴은 17시간 만에 끝나버렸다.

현재 남아 있는 자료는 부실한 자료와 약간의 사진, 기자들이 찍은 몇몇 사진 뿐이다. 무령왕릉 발굴 책임자이자 한국 고고학계의 거물이었던 서울대학교 김원룡 박사는 후일 수기에서 무령왕릉 발굴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수치이자 과오라고 밝힌 적이 있을 정도다. 무령왕릉의 발굴은 말 그대로 흑역사로 남았지만, 이를 교훈으로 삼아 이후 경주의 황남대총과 천마총 등을 발굴할 때는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무령왕릉 지석 /문화재청 

무령왕릉은 발굴 조사 결과, 무덤 안에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석이 발견됨으로써 백제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석에는 '영동대장군인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해 돌아가셨다.’라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이 ‘사마왕’은 무령왕이 살아 있을 때 불리던 이름이다. ‘사마’는 일본어로 ‘섬(시마)’이라는 뜻이며, 무령왕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왕의 명을 받고 일본으로 가던 중 일본 규슈 북쪽의 한 섬에서 무령왕을 낳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지석은 죽은 사람의 행적이나 무덤의 소재지를 기록해 묻은 판석이나 도판을 말한다. 대개 본관과 이름, 조상의 계보, 태어난 날, 사망일, 행적, 가족 관계, 무덤의 소재와 방향 등이 기록되며, 무덤의 앞이나 옆에 묻는다. 무령왕릉의 지석은 모두 2매인데, 하나는 왕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왕비의 것이다.

지석 /문화재청 

지석 두 개는 무덤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연도 입구에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그 중 왕의 것은 앞면에 이름과 사망일, 안장한 날짜 등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천간(天干) 8자와 지지(地支) 9자가 새겨져 있다. 왕비의 것은 앞면에 사망일과 개장일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토왕·토백·토부모에게 땅을 사서 무령왕릉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원래 지석이 발견되기 전까지 무령왕의 부계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무령왕의 부계에 대해 각 사서마다 다르게 기록이 되어 있어 파악이 어려웠는데, 이 지석이 발견된 것이다. 지석에는 무령왕이 계묘년에 62세 나이로 사망했다고 전하는데, 이때 계묘년은 523년이다. 환산하면 무령왕은 461년에 태어난 것이 되며 최근에는 무령왕을 곤지의 아들이자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보는 견해가 지지를 받고 있다.

무덤에서 지석이 출토된 것은 무령왕릉이 삼국시대 고분 중에서는 유일하다. 삼국시대 고분 중에서는 유일하게 피장자와 축조 시기가 밝혀짐으로써 백제 문화 연구에 터다란 토대를 마련하였고, 더 나아가 제작 연대를 알 수 없는 다른 삼국시대 문물 연구시 비교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아주 크다. 이 외에도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완할 수 있고, 백제에서 송나라의 원가력(중국 송나라의 하승천이 만든 달력)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 백제인의 내세관, 도교 사상, 백제의 상장 제도 등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석수 /문화재청 

지석과 같이 발견되었던 무령왕릉 석수는 발굴 당시 널길의 중앙에 밖을 향해 놓여 있어서 무덤 문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사람들의 눈에 띄었던 유물이다. 무덤을 수호하는 의미를 갖는 진묘수의 일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 이 석수는 기괴한 형태의 상상 속의 동물로, 무덤 안이나 앞에 놓아 악귀를 쫓고 죽은 자를 지킨다는 중국의 묘장 풍습에서 나온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석수 역시 악귀를 물리쳐 달라는 의미에서 안치된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릉의 석수는 몸의 양 옆면이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입과 코는 뭉툭하고 눈은 불거졌으며 귀가 작다. 몸통은 통통하고 다리가 짧은 편이며, 등에는 도드라진 네 개의 갈기를 등 간격으로 새겼다. 네 개의 다리 위에도 도드라진 날개가 붙어 있는데, 발톱의 표현은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 않다. 오른쪽 뒷다리는 발견할 당시 이미 깨져 있었다. 뒷면 엉덩이 한가운데에는 꼬리가 붙어 있으며, 정수리에는 사슴뿔 모양의 쇠뿔이 박혀 있고, 입술에는 붉은색이 아직 남아 있다.

석수는 정수리에 사슴뿔 모양의 쇠뿔이 하나 박혀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처럼 뿔이 하나 달린 경우를 ‘독각 진묘수(무덤을 수호하는 목적으로 뿔이 하나인 짐승의 석조 동물상)’ 라고 한다. 독각 진묘수는 죽은 이를 서왕모(선녀들을 지배하는 여제)에게 인도하여 영혼의 승선을 이끄는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이 석수는 서왕모라는 도교적 저승 세계에 대한 인식의 상징일 가능성이 많다. 

관꾸미개 /문화재청 

출토유물은 모두 4,600여 점에 이르며, 관대 위에는 동쪽에 있는 왕의 목관과 서쪽에 있는 왕비의 목관이 썩으면서 쓰러져 서로 유물이 겹쳐져 있었다. 목관의 판재들 밑에서는 왕과 왕비가 착장하였던 장신구와 부장 유물이 출토되었다. 무령왕릉의 대표적인 유물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무령왕의 관 꾸미개(국보 154호)는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를 기본 문양으로 하여 맞새김했다.

인동당초무늬는 전체적으로 중앙으로 모아지며 올라가고 타오르는 불꽃의 모습을 이룬다. 기록에 의하면, 왕은 검은 비단관에 금꽃을 장식하고, 6품 나솔(奈率) 이상의 관리들은 은꽃을 장식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관 꾸미개는 문헌 기록이나 출토 위치 등으로 미루어 검은 비단으로 만든 관모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파악되고 있다.

관 꾸미개의 전면에는 둥근 모양의 작은 달개가 금실에 매달려 있어 장식성이 강하고 화려하다. 왕비의 관 꾸미개(국보 155호) 역시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 장식을 맞새김했다. 그러나 왕의 것에 비해 도식화되었으며 좌우 대칭구도로 되어 있다는 점, 둥근 달개가 매달려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관 꾸미개 중앙에는 7장의 연꽃잎으로 장식된 대좌 위에 활짝 핀 꽃을 꽂은 화병이 있으며, 그 주위로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 장식이 배치되어 있다.

무령왕의 금제 뒤꽂이 /문화재청 

왕의 시신 머리 쪽에 있었던 동경 위에서는 금제 뒤꽂이가 발견되었다.  고대 국가에서는 신분을 상징하기 위해 머리에 관을 썼는데, 가장 높은 신분을 상징하는 관에는 새 장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새를 하늘과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제의 경우 관에 새가 장식된 예시가 별로 없지만, 무령왕의 머리 장식용 금제 뒤꽂이에는 새가 장식되어 있어 그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뒤꽂이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머리에 꽂는 세 가닥의 꽂이 부분과 그 위의 나팔형 장식판으로 나눠진다. 세 가닥으로 갈린 꽂이 부분은 아래가 뾰족한 형태로 두께가 1.9㎜로 두꺼운 반면 장식판으로 올라오면서 0.3㎜로 얇아 금판을 위로 얇게 펴면서 문양을 새겨 장식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세 개의 꼬리를 가진 제비로 보이는 새가 날개를 펴서 날고 있는 형상이다. 

양 날개쪽 좌우에는 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찍었고, 그 아래는 서로 대칭으로 덩굴 무늬를 빈틈없이 메꿔 놓았다. 새의 머리와 날개 부분의 테두리는 끌 끝으로 찍은 작은 점들이 열지어 있다. 여기서 사용된 문양은 모두 뒤에서 두들겨 솟아 나오게 한 타출법을 사용하였고 ,세부 표현에는 선으로 새기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아무래도 왕의 머리 부분에서 발견되었고, 끝이 3개로 갈라진 점으로 보아 의례 때 쓰인 머리 장식품으로 보인다.

무령왕릉의 내부 /문화재청 
무령왕릉의 외관 /문화재청 

무령왕릉은 아치형의 벽돌로 쌓은 벽돌무덤으로써 중국 남조에 속하는 남경을 수도로 한 양나라의 무덤의 양식과 유사하다. 중국 양서 백제전에는 백제가 기술자와 화공들을 백제로 들여갔다는 기록도 있어 무덤의 축조에 양나라의 기술자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발견된 벽돌에는 양나라 관청에서 만든 벽돌을 모방하여 만들었다라는 의미의 '양관와위사(梁官瓦爲師矣)'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남경에 있는 제가산 남조묘들과 무령왕릉의 양식이 또 매우 흡사한데, 무덤의 양식은 보수성이 강해서 쉽게 바뀌지 않는지라 무령왕릉은 새로운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또 이를 통해서 무령왕 시대에는 백제가 양나라와 긴밀한 교류를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에 드러난 무령왕릉, 벌써 50년
 

공주박물관 디지털실감영상관의 ‘무령왕릉 1448년간의 이야기’ 한 장면 /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은 6일부터 ‘디지털 실감 영상관’을 개관하고 디지털 실감콘텐츠 ‘무령왕릉 1448년간의 이야기’를 선보이고 있다. 첫 선을 보이는 ‘무령왕릉 1448년간의 이야기’는 국립공주박물관 대표 브랜드인 무령왕릉을 주제로 한 실감콘텐츠다. 영상은 무령왕이 돌아가신 523년부터 무덤이 발굴된 1971년까지 1448년 동안 무덤 안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전문가의 고증과 상상을 더해 만들었다. 국내 최초 6면 프로젝션 매핑(projection mapping) 기술을 적용하여 만든 디지털 실감 콘텐츠는 터치형 인터렉션 기능을 더해 영상 관람과 체험을 동시에 즐길 수 있게 한다. 

공주박물관 디지털실감영상관의 전시 모습 /공주박물관 

영상의 구성은 ‘백제 최고의 벽돌무덤을 만들다’, ‘무령왕과 왕비의 영원한 안식처’, ‘1442년 시간의 흐름’, ‘1971년, 무덤의 발굴’의 순서로 전개된다. 연꽃을 터치하면서 시작하는 영상은 관람객들을 무령왕이 돌아가신 523년으로 안내한 뒤 1971년 7월 무덤이 발굴되기까지 무령왕과 왕비의 영원한 안식처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상상 속의 이야기를 실감있게 그려냈다. 영상에는 관꾸미개를 비롯해 무령왕릉 출토 국보 12건 23점을 3D로 실감나게 구현하였으며, 연꽃무늬 벽돌로 채워진 무령왕릉 내부는 실제 무덤방 안에 서 있는 것처럼 생생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벌써 무령왕릉이 발굴된 지 50년이다. 무령왕릉을 발견했던 그 해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발굴 현장에서부터 시작해 엄청나게 쏟아져나왔던 유물까지 다사다난한 한 해였을 것이다. 이 귀한 발견으로 무령왕릉과 출토 유물을 통해 백제 문화는 중국 남조 문화의 직접적인 영향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사적 명칭 개선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적극 행정의 하나로 추진하였으며 문화재청은 충청남도, 공주시, 부여군과 함께 이번 지정명칭 변경에 따른 문화재의 가치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고자 안내판 정비와 문화재 정보 수정 등 후속 조치도 신속히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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