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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삶과 예술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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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삶과 예술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의 열정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7.0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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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아카이브 포스터 /콜론비아츠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이보다도 유니크한 예술가가 세상에 또 있을까. '쿠사마 아카이브' 전시가 국내 최초 '콜론비 아츠 갤러리'에서 열린다. '무엇이 쿠사마를 세계적인 예술가로 만들었을까,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기까지 그녀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콜론비아츠 갤러리는 이런 질문을 바탕으로 국내 최초로 ‘쿠사마 아카이브(KUSAMA ARCHIVE)’ 전을 기획, 온라인 전시를 진행 중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회에서는 대표작인 '호박' 등의 조각 작품, 물방울 무늬와 그물 패턴 등의 회화 작업들이 주로 전시되어 왔고 최근 쿠사마의 그림이 23억에 낙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시는 이러한 작품들이 나타나게 된 배경과 인생의 발자취에 중점을 두고, 어떤 인생의 여정이 지금의 쿠사마를 만들었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플루어 쇼' 오리지널 포스터 /콜론비아츠

'쿠사마 아카이브(KUSAMA ARCHIVE)'는 1957년 미국으로 건너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예술 활동을 펼치고 1973년 일본으로 돌아와 이후 도쿄 세이와 정신병원에 종신 환자로 입원 후 현재까지 병원 근처 신주쿠의 작업실에서 펼쳐 온 삶의 여정을 조망할 수 있는 전시 포스터, 책, 잡지, 사진 등의 오리지널 인쇄물과 컬래버레이션 아트상품, 조각 등의 오브제들로 구성되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콜론비 아츠 갤러리 안선영 대표는 “쿠사마는 세계적인 기업과의 콜라보, 비엔날레, 갤러리 전시 등 매우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했지만 모든 작품들에서 일관성을 유지했다”며, “여러 물줄기가 모여 강을 이루듯, 모든 수집품도 일관된 색깔과 흐름을 보여 아카이브 자체가 하나의 큰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미술품을 왜 수집하는가’, ‘누가 미술품을 사는가’라는 질문부터 ‘동시대 미술 수집가의 역할’에 대한 다소 심오한 질문에 대한 답을 조금이나마 엿보는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살기 위해 예술에 매달렸던 사람, 쿠사마 야요이 

쿠사마 야요이 /오드 

조각과 설치미술이 주인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는 일본의 현대 화가로 회화, 공연, 영화, 패션, 시 소설 등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작품은 미니멀 아트 이후에 대두한 현대미술의 경향 중 하나인 개념미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동시에 페미니즘, 미니멀리즘, 초현실주의, 팝아트, 추상표현주의의 일부 특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작품은 자전적이며, 때로는 성적이다. 일본에서 온 예술가들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중요한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유년기의 쿠사마는 식물 묘목장, 종자 농장을 소유한 상인 부모님의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호박 그림을 즐겨 그렸고 가끔 환상을 보며 그림을 그렸다. 이 당시 그리고 만든 작품은 이후 그의 앞길을 결정짓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자식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쿠사마는 그림이나 작품을 만들 때마다 어머니가 그것들을 가져가버렸기 때문에 서둘러 그린 후 치워버리곤 했다. 그의 어머니는 쿠사마가 순종적인 주부의 역할을 하길 바랬으며 쿠사마는 어머니가 자신을 학대한다고 생각했다. 또 아버지에 대해서는 '밖에서 여자들과 많이 노는 타입'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종종, 어머니가 자신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바람을 염탐하도록 시켰다고 말한다. 이 경험은 그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었고, 그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일종의 '성'이 평생의 경멸하는 대상이 되도록 만든다. 그는 특히 남근에 대한 혐오감이 있었다. "나는 섹스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항상 애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년이 지나도 나는 그 누구와도 섹스하고 싶지 않았다. 섹스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이 내 안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의 암울한 어린 시절은 자연히 그의 예술 스타일을 만들었다. 

그에게 있어 점은 영감이자 예술이다, 덴마크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 /flickr

쿠사마는 10살 때 '섬광, 오오라, 혹은 점으로 울창한 들판'이라 묘사했던 환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이 환상 속에는 쿠사마에게 말을 건네던 꽃, 그가 예술가로써 살아가는 과정, 영원의 세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자기망각'등이 포함되어 있다. 꽃밭에 서 있던 쿠사마는 끝없는 점들로 이루어진 들판에서 자신이 사라지는 것 같은 환상을 겪었으며 그의 예술은 그가 환상을 보기 시작했을 때, 그의 가족과 자신의 마음 속으로부터 탈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집 근처 강가를 덮고 있던 매끄럽고 하얀 돌에 매료되었으며 그가 봤던 돌들이 점(dot)에 대한 지속적인 집착을 낳았으며, 또는 자신의 예술 세계에 끼친 영향이라 말한다. 

그는 13살이 되던 해 공장으로 가 일본 군인들을 위한 낙하산을 바느질하고 조립하는 일을 하다 제2차세계대전을 맞게 된다. 그는 공장에서 보냈던 시간을 가끔 이야기하며, 공급 경보가 매일 울리고 대낮에 미국 전투기들이 머리 위로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에게 있어 사춘기는 '닫힌 어둠 속' 이었다 회고한다. 어린 시절 겪은 전쟁은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 시기 즈음, 그는 개인적이고 창조적인 자유에 대한 개념을 중요시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1948년 교토 시립 예술 공예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이 시기 서양 문화를 배격하려는 움직임 때문에 쿠사마는 천 년 전의 전통 일본 기술과 재료만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야 했다. 일본의 전통만을 고집하는 스타일에 실망했던 쿠사마는 1950년대 마츠모토, 도쿄에서 연달아 자신만의 그림 전시회를 열며 유럽과 미국의 아방가르드 경향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쿠사마는 주로 종이에 수채화 또는 기름으로 추상적인 형태를 묘사하는 그림을 그렸다. 벽, 바닥, 캔버스에도 그리다가 나중에는 집안의 물건, 나신의 어시스턴트까지 대상을 확대해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폴카 도트, 즉 물방울 무늬를 동원해 작품을 만들었다. 

수많은 점의 향연, 인피니티 네트 /flickr

그의 거대한 물방울 점, '인피니티 네트 Infinity Nets'는 그의 환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의 첫 번째 대규모 작품인 '인피니트 네트'는 환상을 암시하는 일련의 네트와 점으로 뒤덮인 모습이다. 그는 그림에 온통 점을 더함으로써 자신과 작품 자체를 더 큰 우주로 끌어당기고, 우주의 일부가 되게 만드는 것처럼 느낀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의 지구는 우주에 있는 백만개의 별 중 하나인 물방울일 뿐이다. 폴카 도트(물방울 무늬)는 무한대를 향한 하나의 과정이다. 폴카 도트로 자연과 우리의 몸을 지우면 우리는 자연의 일부가 된다" 라고 전했다. 

쿠사마의 '플라워' 설치 전시물 /flickr

1954년, 'Flower'란 작품을 소개하며 쿠사마가 언급한 코멘트는 인상적이다. "하루는 식탁에 있는 식탁보의 붉은 꽃 패턴을 보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니 똑같은 무늬가 천장, 창문, 벽을 덮었고 급기야 방 안, 내 몸과 우주를 덮었다. 나는 마치 끝없는 시간과 공간의 무한함 속에서 회전하며 곧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겁이 났다. 나는 빨간 꽃의 마법에 목숨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내 밑에 있는 계단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곧 나는 발목을 잡혀 계단에서 떨어졌다"

도쿄와 프랑스를 거쳐, 쿠사마는 27세가 되던 해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간다. 숨막히는 가정 환경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그는 미국의 대표 여성 작가인 조지아 오키프에게 '화가의 길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란 편지를 보냈고 조지아는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이 나라에서 예술가는 먹고 살기 어렵다' 라며 쿠사마에게 일종의 경고를 했지만, 그와 더불어 조지아는 쿠사마에게 미국으로 와 누구에게든지 당신의 작품을 보여주라는 충고를 한다. 

당시 쿠사마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고, 일본에서 미국으로 돈을 송금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쿠사마는 일본 사회가 너무 작고, 비굴하며, 봉건적이고, 여성을 경멸하는 사회라 생각했기 때문에 떠날 결심을 한다. 그가 떠나기 전 그의 어머니는 쿠사마에게 약간의 돈을 건네며 '다시는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에 화가 난 쿠사마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 그의 많은 작품들을 파기했고, 기모노에 지폐 달러를 덜렁덜렁 꿰맨 채 태평양을 건넜다. 쿠사마는 곧 시애틀로 이사해 그림 전시회를 열었다.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쿠사마의 전시 /flickr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뉴욕 미술계는 많은 여성 딜러들조차 여성 작가들의 작품 전시를 꺼릴 정도로 남성적인 분위기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머무르는 동안 그는 아방가르드 운동의 리더로 활약했으며 무정부주의자이자 미술 비평가인 허버트 리드에게 많은 찬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쿠사마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신과는 다르게 사람들에게서 인정받는 남성 작가들을 지켜봐야 했던 그는 현실이 고통스러웠다. 기성 미술계에서는 외면을 받았지만 그는 전략적으로 그의 후원자들을 만나 그나마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961년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미술가 도널드 저드, 조각가 에바 헤세가 있는 건물로 옮겼고 에바 헤세와는 친한 친구가 된다. 그는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사진을 찍고, 독특한 단발 가발과 화려한 패션을 한 채 대중 앞에 정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Infinity Mirrored Room /flickr
I'm Here, but Nothing /flickr

그는 그의 '인피니티 룸 Infinity room' 작업을 계속했다. 많은 거울이 정렬된 특별 제작된 방 안에는 다양한 높이에 매달린 수십개의 네온컬러 볼이 있다. 관람객들은 거울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을 반복적으로 보며 끝이 없는, 무한의 공간에 있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쿠사마의 '나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I'm Here, but Nothing' 전시는 간단한 가구가 있는 방 벽에 수백 개의 네온 물방울 점이 빛나고 있다. 이것은 자신과 방 안의 모든 것이 지워지며, 무한한 공간이 생기는 착각이 드는 결과를 낳는다. 

Accumulations /flickr

반복되는 형태에 대한 쿠사마의 관심은 어수선한 캔버스와 사물을 특징으로 하며, 그의 작품 '집적 Accumulations'으로 표현된다. 이 시리즈에서 그는 우편 스티커, 계란 상자 등을 이용해 마치 혹과 같은 형태로 행과 열을 만들어 배열했다. 나중에는 남근으로 장식된 기성품 조각을 만들며 이 시리즈는 절정에 달한다. 많은 큐레이터와 비평가들은 이 남근 모양으로 만들어진 작품에 그의 페미니즘적 경향이 보인다고 전한다.

오랫동안 쿠사마의 작품을 연구해 온 구겐하임 미술관 큐레이터 알렉산드라 먼로는 '만약 대다수의 여성이 자신의 주관성을 부인하며 지배에 복종하는 구조가 있었다면 쿠사마는 그것을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쿠사마의 남근을 이용한 작품들은 남성 지배적인 세계에 대한 억압의 진술처럼 보인다. '집적'은 그의 과거, 초기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혼란, 남근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과 공황을 반영한다. 이 작품은 팔리진 않았지만,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며 그의 특별한 성격과 성향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1966년까지 쿠사마는 거울, 조명, 여러 설비들을 대상으로 작품을 만드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재정적인 이익을 얻지는 못했다. 설상가상 이 당시 쿠사마는 과로로 정기적으로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많은 남성 예술가들은 그의 이 창의적인 시도를 모방했다. 루카스 사마라스, 앤디 워홀 등의 백인 남성 예술가들은 쿠사마의 아이디어를 도용해 작품을 만들었고, 이 남성 예술가들은 유명해졌다. 

Peep Show /flickr

1966년 쿠사마는 획기적인 전시인 핍쇼(Peep Show)를 개최했는데, 핍쇼는 관람객이 머리를 내밀 수 있는 내향 거울로 만들어진 8각형의 방으로 관객들이 예술에 몰입할 수 있는 설치물로써는 처음 하는 시도였다. 이것은 쿠사마가 계속 탐구해 온 방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도 지나지 않아 예술 방향을 바꾼 루카스 사마사르는 훨씬 더 권위 있는 갤러리에서 자신의 거울에 비친 설치물을 전시했다. 물론 쿠사마의 핍쇼와 비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쿠사마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마땅히 벌 수 있다고 생각했던 돈도 이 작가들만큼 벌 수 없었다. 한때 배신과 좌절감이 너무 심해진 나머지 쿠사마는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1960년대 들어 쿠사마는 센트럴 파크, 브루클린 브릿지 같은 눈에 띄는 곳에서 종종 나신으로 나타나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기 위한 퍼포먼스를 하곤 했다. 그 일례로, 그는 리처드 닉슨에게 베트남 전쟁을 중단하지 않으면 자신과 섹스를 하게 될 것이라며 공개 편지를 쓰기도 했다.

현재 뉴욕 보태니컬 가든에 전시 중인 Narcissus Garden /flickr

1966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공식으로 참가하지 못하게 되자 쿠사마는 1,500여개의 미러볼을 행사장 정원에 허락없이 설치하기도 했다. '나르시스 정원 Narcissus Garden'이라 불리는 이 퍼포먼스 아트에서 그는 허영심의 상징인 미러볼을 저렴한 아이스크림 값마냥 단돈 2달러에 팔았다. 고가의 미술품만 상대했던 당시 비대중적인 예술계를 대놓고 비판한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쿠사마의 작품은 점점 더 정치적으로 변해갔다. 그는 많은 동성애자들의 결혼식을 시행하기도 했고, 미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반대하는 의미로 나체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뉴욕 신문에 실린 그의 모습을 보고 시민들은 그가 자신의 홍보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며 관심을 끈다고 비판했다. 점점 더 낙담하던 그는 1973년, 다시 일본에 돌아와 강제로 작품을 만들어야 했지만 그의 우울증은 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방해했다.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한 그는 본능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인 소설, 시 등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가끔 병원에 가 치료를 받았으며, 그의 작업실은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는 종종 '예술이 아니었다면 난 오래 전에 자살했을 것'이라 밝혔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여러 편의 소설, 시집, 자서전 등을 출간하며 문학계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그가 뉴욕을 떠난 동안 1990년대 후반까지 그는 예술가로써 잊혀진 존재였지만 그에 관한 많은 회고전이 그를 다시 세상에 떠오르게끔 해 주었다. 

쿠사마 야요이의 분신과도 다름 없는 호박 /flickr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일본관이 성공을 거둔 데 이어 검은색 점 무늬로 장식한 그의 대표 작품인 '노란 호박 Great Gigantic Pumpkin'을 만든다. 이 호박은 그에게 일종의 분신이며 자화상 그 자체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호박이 좋다. 그 유머러스한 모양과 따뜻한 느낌, 그리고 인간과 같은 특성 때문이다. 나는 호박의 그런 인상을 표현하고 싶어 호박을 그리고 또 그렸다.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호박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Infinity Mirror room /flickr

그는 예술가로써 끊임없이 일했다. 2012년 전시회에서는 여러 개의 아크릴 캔버스 작품들을 전시했고, '인피니티 미러 룸 Infinity Mirror room'의 무한한 공간을 탐험하는 것을 특집으로 다루기도 했다. 거울로 정렬된 정육면체 모양의 방과 바닥에는 물이 흐르고 있으며 조명이 깜박인다. 이 형태는 삶과 죽음을 의미했다. 쿠사마는 관객들이 몰입할 수 있는 이 환경, 이 방을 자신의 오랜 꿈의 표현으로 보았다. '유리를 통과한 앨리스처럼 나 쿠사마는 환상과 자유의 세계를 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이후 하이네 온스타드 박물관, 노르웨이 현대미술관, 스웨덴의 현대미술관, 핀란드의 헬싱키 미술관을 돌며 100개 이상의 작품과 대규모 미러 룸 설치 관객들을 맞이했다. 1960년대 쿠사마의 실험적인 패션 디자인을 발표한 것을 포함해 만든 이후 대중에게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초기 작품 몇 개도 같이 선보였다. 2017년에는 도쿄에 야요이 박물관을 개관해 그의 작품들을 전시했다. 

Walking Piece /OTA FINE ARTS, TOKYOYAYOI KUSAMA STUDIO INC.

18개의 컬러 슬라이드로 연속된 이미지인 '워킹 피스 Walking Piece'에서 쿠사마는 기모노를 입고 우산을 든 채 뉴욕 거리를 걷는 모습이다. 기모노는 전통적인 일본 문화에서 여성들을 위한 일종의 한 관념이자 성역할 같은 것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우산은 검은색이고, 겉만 흰색으로 칠했을 뿐 가짜 꽃으로 장식한 것이다. 쿠사마는 미지의 탐험을 하며 사람들이 없는 거리를 걸어간다. 그러다 그는 갑자기 돌아서서는 이유 없이 울다가, 걸으면서 곧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 퍼포먼스는 아시아계 미국 여성들이 끊임없이 직면하는 고정 관념들을 포함한다. 쿠사마는 세계 최대의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을 문화적으로 분류해 보는 부조리를 보여줌으로써 백인 미국 관객들이 그를 분류하며 보는 고정관념을 드러냈다. 그는 뉴욕 회색의 텅 빈 거리를 걸으며 이민자이자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주장했다. 


예술로 증명하는 자신의 존재, 쿠사마 야요이가 존경받는 이유 
 

Infinity Net White No28 /Christie’s.

최근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의 매출 규모가 증가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가 발표한 '2021년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의 상반기 결산'과 '낙찰총액 상위 5순위 작가별 KYS미술품가격지수 분석결과'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낙찰 총액은 약 121억원으로 당당히 3위를 차지했다. 이미 세계 여성 아티스트 중 역대 경매 낙찰가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쿠사마의 '무한 그물(White No28)'은 2014년 710만 달러의 낙찰가를 기록한 바 있다. 

최근 그의 작품 세계를 그린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가 개봉 중이다. 쿠사마의 삶, 작품 세계를 담은 최초의 영화로 영화계와 미술계 모두 관심을 가진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호박'을 비롯해 인피니티 네트, 인피니티 미러 룸과 더불어 초기 회화 조각품, 설치미술까지 그의 여러 작품을 볼 수 있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오드 

특히 그의 목소리로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 여러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전세계에서 사랑받는 아티스트가 되기까지의 여러 일화를 직접 듣는 것도 별미일 것이다. 힘겨운 삶을 예술로 마음껏 표현하며 치유하려 노력했던 그는 30년간 공황장애를 겪으면서도 단지 예술이 좋아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고 한다. 그저 죽을 때까지 예술을 계속하고 싶다는 그의 열정으로 하여금 한없는 존경을 받는 것,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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