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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땅밑에서 쏟아져 나온 금속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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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땅밑에서 쏟아져 나온 금속활자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7.0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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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 /문화재청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최근 우리나라에 귀하디 귀한 보물들이 땅속에서 발견되어 온갖 매스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재)수도문물연구원이 발굴조사 중인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내 유적(나 지역)’에서 항아리에 담긴 조선 전기에 제작된 금속활자 1,600여 점과 세종~중종 때 제작된 물시계의 주전(籌箭)을 비롯해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점, 중종~선조 때 만들어진 총통(銃筒)류 8점, 동종(銅鐘) 1점 등의 금속 유물이 한꺼번에 같이 묻혀 있는 형태로 발굴된 것이다. 

이번에 공개된 유물들은 금속활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잘게 잘라 파편으로 만들어 도기항아리 안과 옆에 묻어 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활자들은 대체로 온전했지만 불에 녹아 서로 엉겨 붙은 것들도 일부 확인되었다. 이들의 사용, 폐기 시점은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 중 만력(萬曆) 무자(戊子)년에 제작된 소승자총이 있어 1588년 이후에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발견된 금속활자 /문화재청 

이번 발견된 금속활자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가장 이른 시기의 한글 금속활자’다. 일괄로 출토된 금속활자들은 조선 전기 다종다양한 활자가 한 곳에서 출토된 첫 발굴사례로 그 의미가 크다. 특히, 한글 금속활자를 구성하던 다양한 크기의 활자가 모두 출토된 점이나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5세기에 한정되어 사용되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금속활자가 실물로 확인된 점이 최초라 할 수 있다.

동국정운식 표기법은 당시 혼란 상태 그 자체였던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바로잡고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간행된 것이다. '운회'의 번역본을 탈바꿈한 것이 '동국정운'일 가능성이 크며, '운회'의 반절음을 우리나라 음으로 번역해 훈민정음으로 표음하고, 훈민정음의 초성 차례에 따라 글자들의 배열을 바꾸어놓은 것이 '동국정운'식 표기법이다. 

원래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책을 베끼는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했지만 그 과정에서 틀린 글자나 빠진 글자 등이 많아 원래의 내용을 다르게 하는 단점이 있어 인쇄술의 필요성이 커졌다. 처음은 목판 인쇄술에서 시작했지만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고 보관이 어려워 잘못하면 아예 못쓰게 되는 경우가 많아 등장한 것이 활자인쇄술이다. 목판 인쇄술에 비해 기술 면에서 활자를 만드는 것과 배열해 검사하는 것이 비교적 복잡했으나 활자나 활자판의 제작에 드는 재료, 수공, 시간과 비용 등이 비교적 절약되고 생산이 빨라 인쇄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출토된 금속활자의 모습 /문화재청 

이렇게 등장하게 된 이번 금속활자 중 전해지는 예가 극히 드문,  한문 사이에 쓰는 한글 토씨인 '이며'나 '이고'를 편의상 한 번에 주조한 연주활자(連鑄活字)가 10여 점 출토되었다. 현재까지 전해진 가장 이른 조선 금속활자인 세조‘을해자(1455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다 20년 이른 세종 ‘갑인자(1434년)’로 추정되는 활자가 다량 확인된 점은 유례없는 성과다.

을해자병용 /국립중앙박물관

이 금속활자가 알려지기 전까지 가장 오래되었던 한글 금속활자인 '을해자병용'은 조선 전기 문신이자 서화가였던 강희안이 쓴 글씨를 글자본으로 1455년 을해년에 만든 금속활자다. 1434년에 만든 갑인자와 더불어 조선 전기 사용된 대표적인 활자로 꼽힌다. 갑인자 다음으로 가장 오래 사용되었으며 임진왜란 전까지 썼다고 한다. 

이는 한글 창제의 실제 여파와 더불어 활발하게 이루어진 당시의 인쇄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다양한 크기의 한글 금속활자가 출토됐다"며, "아직 금속활자 분석이 끝나지 않았지만, 종류가 다양해 인쇄본을 찍을 때 사용한 조선 전기 활자의 실물이 추가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또한 "크기와 뒷면을 깎은 모양새를 보면 활자가 각양각색이며 활자 상태는 대부분 온전하지만, 일부는 불에 녹아 엉겨 붙어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연주활자의 시기가 확실해지면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크보다 앞서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정받을 수 있다. 

자동 물시계의 주전으로 추정되는 동제품 /문화재청
주전으로 추정되는 동제품 /문화재청 

도기항아리에서는 금속활자와 함께 세종~중종 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주전으로 보이는 동제품들이 잘게 잘려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동제품은 동판(銅板)과 구슬방출기구로 구분된다. 동판에는 여러 개의 원형 구멍과 ‘일전(一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구슬방출기구는 원통형 동제품의 양쪽에 각각 걸쇠와 은행잎 형태의 갈고리가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형태는 『세종실록』에서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 방출해 자동물시계의 시보(時報)장치를 작동시키는 장치인 주전의 기록과 일치해 어떤 물건인지 알 수 있었다. 출토된 주전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의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의 자동 물시계는 장영실이 만든 보루각 자격루와 흠경각 옥루가 있다. 보루각 자격루는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로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 시계로 사용하였다. 

보루각 자격루 /국립중앙박물관

1434년(조선 세종 16) 장영실에 의해 정해진 시간에 종과 징·북이 저절로 울리도록 한 물시계가 처음 제작되었으나, 오래 사용되지는 못하였고, 1536년(중종 31)에 다시 제작한 자격루의 일부가 현재 남아 있다. 흠경각 옥루는 세종 시절인 1438년 장영실이 개발해 침전인 경복궁 강녕전 옆에 설치됐다.

이번에 발견된 자동 물시계의 동제품들은 기록으로만 전해져 오던 조선 시대 자동 물시계의 주전 실체가 처음 확인된 것으로 의미가 크다. 이번에 발굴된 유물이 금속 활자들을 포함해 세종 시기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해, 이번에 발견된 자동 물시계 부품 또한 세종 시기 설치된 자격루의 부품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활자가 담긴 항아리 옆에는 주․야간의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가 출토되었다. 세종 때 시작한 천문 기구 제작 프로젝트는 1437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으며 혼의·혼상을 비롯해 규표·해시계·물시계 등의 각종 기구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것만이 성에 차지 않았던 세종은 낮과 밤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시계의 제작을 명령하고,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인 일성정시의가 1437년 개발된다.

일성정시의 /국립민속박물관 

일성정시의는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는 천문관측기구인 '간의'를 응용한 것으로, 간의에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장치만 분리해 해와 별의 관측을 통해 시간을 알 수 있도록 개량했다. 전체적인 형태는 용이 시반에 해당하는 '환'들을 지탱하는 형상으로, 세 개의 환인 주천도분환, 일구백간환, 성구백간환이 적도면에 평행으로 겹쳐 하나의 바퀴 덩어리를 이룬다. 이 세 개의 환 위에 붙어 있는 계형으로 해와 별을 관측해 세 개의 환 위에 적혀 있는 눈금을 읽는 방식이다. 

이번에 출토된 일성정시의 주요 부품 /문화재청 

'세종실록'에 따르면 1437년(세종 19년) 세종은 4개의 일성정시의를 만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번에 출토된 유물은 일성정시의 중 주천도분환, 일구백각환, 성구백각환 등 일성정시의의 주요 부품들로, 시계 바퀴 윗면의 세 고리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 유물을 일성정시의라 알 수 있었던 건 기록에 이 물건이 세 개의 고리로 되어 있으며 제일 외각의 고리는 두 개의 귀가 있고, 가운데의 고리는 귀가 없고, 왼쪽의 고리에도 두 개의 귀가 있어 움직이게 하는 도구라 나와 있었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이 기록만으로도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현존하는 자료 없이 기록으로만 전해져 오던 세종 대의 과학기술의 그 실체를 확인한 것으로 의미가 크다. 

이번에 출토된 동종 /문화재청 

동종은 일성정시의의 아랫부분에서 여러 점의 작은 파편으로 나누어 출토되었다. 포탄을 엎어놓은 종형의 형태로, 두 마리 용 형상을 한 용뉴(龍鈕)도 있다, 귀꽃 무늬와 연꽃봉우리, 잔물결 장식 등 조선 15세기에 제작된 왕실발원 동종의 양식을 계승하였다. 종신의 상단에‘嘉靖十四年乙未四月日(가정십사년을미사월일)’이라는 예서체 명문이 새겨져 있어 1535년(중종 30년) 4월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왕실발원의 동종에는 주로 해서체가 사용되므로, 왕실발원의 동종과는 차이점을 보이기도 한다. 1469년 추정 <전 유점사 동종(국립춘천박물관 소장)>, 1491년 <해인사 동종(보물)>등의 유물과도 비슷한 양식이다. 

출토된 총통 /문화재청 
차승자총통 /문화재청 

소형 화기인 총통은 승자총통 1점, 소승자총통 7점으로 총 8점이다. 조사 결과 최상부에서 확인되었고, 완형의 총통을 고의적으로 절단한 후 묻은 것으로 보인다. 복원된 크기는 대략 50~60cm 크기이다. 총통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계미(癸未)년 승자총통(1583년)과 만력(萬曆) 무자(戊子)년 소승자총통(1588년)으로 추정되었다. 장인 희손(希孫), 말동(末叱同) 제작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장인 희손은 현재 보물로 지정된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차승자총통>의 명문에서도 확인되는 이름이다. 만력 무자년이 새겨진 승자총통들은 명량 해역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유물의 조사 지역은 현재의 종로2가 사거리의 북서쪽으로, 조선 한양 도성의 중심부이다. 조선 전기까지는 한성부 중부 견평방에 속하며, 주변에 관청인 의금부와 전의감을 비롯하여 왕실의 궁가인 순화궁, 죽동궁 등이 위치, 남쪽으로는 상업시설인 시전 행랑이 있었던 운종가가 위치했던 곳이다. 조사 결과, 조선 전기부터 근대까지의 총 6개의 문화층(2~7층)이 확인되었다. 금속활자 등이 출토된 층위는 현재 지표면으로부터 3m 아래인 6층(16세기 중심)에 해당되며, 각종 건물지 유구를 비롯하여 조선 전기로 추정되는 자기 조각과 기와 조각 등도 같이 확인되었다.

유물이 출토된 피맛골의 모습 /문화재청 

출토 유물들은 현재 1차 정리만 마친 상태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하여 안전하게 보관 중이다. 앞으로 보존처리와 분석과정을 거쳐 각 분야별 연구가 진행된다면 이를 통해 조선 시대 전기, 더 나아가 세종 연간의 과학 기술에 대해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모든 유물은 1588년 이후에 같이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않은 것 같다"며 "보존처리와 추가 연구를 거치면 조선 전기 인쇄술과 과학기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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