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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듯 비슷한 서양의 베일, 우리나라의 면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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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듯 비슷한 서양의 베일, 우리나라의 면사보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7.05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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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흥 이씨의 가리마(여성용 쓰개의 일종) 실제 착장 모습 /문화재청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서양에 '베일'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쓰개, 면사가 있다. 베일은 머리나 얼굴의 일부, 또는 중요한 것을 덮기 위해 옷에 달린 천을 뜻한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에서 기나긴 역사를 갖고 있으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발전했다. 베일은 특히 여성과 관련이 깊지만 특정 문화권에서는 베일을 여성보다 남성들이 더 많이 쓰는 곳도 존재한다. 종교적 의미 외에도 베일은 결혼 풍습같은 현대의 문화적 의미로써도 존재한다. 

우리나라 '쓰개'를 통칭하는 면사는 머리에 덮어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보자기를 뜻한다. 6월, 조선시대 중기 여성의 복식 문화를 알 수 있었던 '오산 구성이씨·여흥이씨 묘 출토복식'이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는데, 특히 시신의 머리에 쓴 상태로 출토된 '가리마'는 기록으로만 정하던 여성용 쓰개의 착용 방법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었다. 


베일의 기원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그리스, 페르시아 제국의 엘리트 여성들은 높은 지위와 존경을 받는 의미로 베일을 썼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증거는 중세 아시리아 법전에서 나온 내용으로, 아시리아는 여성의 계급과 직급, 직업에 따라 어떤 여성이 베일을 쓰고, 쓰면 안 되는지를 상세히 기술한 법규를 갖추고 있었다. 여성 노예와 매춘부는 베일을 쓸 수 없었고 썼을 경우 처벌을 받았다. 베일은 귀족 계급을 가리키는 일종의 한 지표였고 자신들의 기준에 맞춘 '훌륭한 여성'과 아닌 여성을 구분하는 척도였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존경받는 여성들은 베일로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낯선 남자들의 눈에 띄지 않아야 했다. 

그리스의 베일 쓴 조각상 /flickr

그리스, 헬레니즘의 조각상들은 베일로 덮인 얼굴을 한 그리스 여성들을 묘사했다. 그리스 여성들이 그들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가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로마 여성들은 남편의 권위를 상징하는 의미로 베일을 썼고, 베일을 쓰지 않은 여성들은 이혼하는 것으로 보았다. 미혼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머리를 가리지 않았지만 결혼한 여성들은 그들의 순결과 겸손을 보여주기 위해 베일을 썼다고 하며, 베일은 여성을 사악한 세력으로부터 보호한다고 생각했다고. 

곧 다가온 인류의 혼합은 그리스,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제국과 중동의 문화들이 서로 융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수세기 동안 어린 여성들을 제외하고 앵글로색슨, 앵글로노르만 여성들은 그들의 머리를 가리고 턱까지 덮는 베일을 썼다. 이탈리아 남부의 여성들은 겸손하고 품행이 단정하며 신앙심 또한 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종종 머릴 가리는 베일을 썼다고 한다.

가면과 베일로 얼굴을 가린 모습 /unsplash

많은 시간 동안 유럽의 여성들은 베일을 써 왔지만 특정한 상황에서만 썼다. 지금은 영화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베일이 상복을 입은 여성의 보닛이나 모자에 씌워졌고 장례식을 치르는 애도 기간 동안 이 방식이 고정되었다. 베일은 가면의 대안으로도 쓰였으며 사람의 정체를 감추거나 다른 사람이 알아채기를 원하지 않는 용도로 간단하게 쓰였다. 

베일을 쓴 마리아의 모습 /pixabay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서 머리를 가리는 개념은 예절, 겸손과도 관련이 있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전통적인 묘사는 대부분 베일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중세 시기 동안 유럽의 기혼 여성들은 얼굴보다는 머리 쪽을 가렸고 다양한 스타일의 베일을 사용했다. 얼굴보다 머리를 가리는 베일은 1960년까지 교회에 다녔던 여성들이라면 흔한 모습이었다. 가톨릭을 믿는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레이스가 달린 베일을 썼고, 지금도 전통적인 교회들은 이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일부 가톨릭 국가에서는 아직도 여성들이 장례식에서 레이스로 된 베일을 쓰고 있다. 

베일은 곧 아랍의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도 퍼졌고, 중동 전역 도시에 있는 이슬람 여성들 사이를 떠돌게 된다. 특히 아랍계 무슬림 여성들의 베일은 계급적, 배타적인 생활 방식의 표시 그 자체였다. 17세기 이스탄불, 농촌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베일을 쓰는 게 훨씬 느렸다고 한다. 이유는 논과 밭에서 일하는 데 베일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란다. 일을 하는 여성들에게도 베일을 쓰고 다니는 것은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베일을 쓴 여성은 자동적으로 자신은 일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남편이 돈을 많이 버는 부자라는 표시였다고. 

히잡을 쓴 여성 /unsplash
니캅을 두른 여성 /unsplash

잠시 지금과는 확연하게 동떨어지는 이야기를 해 보자면, 이슬람 사회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머리카락이 남성을 유혹하는 부분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지금도 이슬람 여성들이 쓰는 베일의 한 종류인 '히잡'은 가리다, 숨긴다는 뜻으로 단어의 시초는 이슬람 경전의 '코란'에서 찾을 수 있다. 더 완고한 무슬림은 아예 여성이 얼굴마저 가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슬람교가 부흥하기 전, 아랍에서는 유목민 부족들 간의 크고작은 전쟁이 많아 특히 여성의 피해가 컸다. 자연히 여성 보호의 필요성이 생기며 그 최소한의 대비를 옷차림으로 잡은 것이다. 지금이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성적 매력이 드러나지 않도록 옷을 입어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했다. 16세기까지 이집트의 이슬람 교도들과 기독교 여성들은 베일과 부르카를 포함한 옷을 입었다. 

1979년 이슬람 혁명 후 여성들에게 '차도르' 착용을 의무화하면서 많은 이란 여성들이 항의 시위를 하기도 했다. 여전히 평생 베일에 싸여 살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단체들로 인해 여성들에게 강제로 베일을 씌우는 선택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논란을 낳고 있다. 여성들은 베일을 쓰지 않는다면 큰 형벌을 받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히잡, 부르카, 차도르 등 여성들에게 씌워지는 이 베일은 개인의 상황에 따라, 이유나 동기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종교적인 신념이 베일을 쓰는 일반적인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모로코, 터키와 같이 무슬림 여성이어도 반드시 히잡을 쓸 필요가 없는 나라도 있다. 

머리에 세라를 쓴 남성 /flickr

여성들이 아닌 남자들이 베일을 쓰는 곳도 있다.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의 일부 지역은 남자들이 결혼식을 올리는 날 '세라 Sehra'를 입는다. 세라는 얼굴 전체와 목을 덮는 베일로 주로 꽃이나 구슬로 만들어진다. 가장 흔한 세라는 신선한 마리골드(국화의 한 종류)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신랑은 식을 올리는 내내 얼굴을 가리고 세라를 하루종일 쓰고 있어야 한다. 오늘날 북부 인도에서는 신랑이 세라를 머리에 두르고, 말을 탄 채 오는 모습 또한 볼 수 있다. 

신부가 쓴 베일 /unsplash

베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결혼할 때 신부들이 쓰는 '면사포'일 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로마에서, 행복을 방해하는 악령들로부터 자신을 숨기기 위해 베일을 쓴 신부가 통로를 걸어갔던 것이 초기 웨딩 베일의 역사라고 본다.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영혼과 악령을 두려워했고 약혼한 신부들을 훔치기 위해 제단까지 악령이 쫓아올 것이라 믿었다. 베일은 이런 사악한 세력으로부터 신부를 감추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며 웨딩 베일은 겸손과 미덕이라는 전통적인 상징보다 사람의 신분과 부를 표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의 신부 베일이 등장한 것은 19세기가 되어서였고, 빅토리아 여왕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베일을 뒤집어쓴 채 결혼해 베일을 쓴 최초의 현대 군주가 되었다. 결혼한 빅토리아 여왕의 모습은 수세기 동안 결혼식을 올리는 여성의 이미지로 정의되었다. 물론 현대의 웨딩 베일은 고대처럼 악령을 막는 수단이 아닌, 단순한 장식으로 사용된다. 오늘날 웨딩 베일의 스타일은 대중적인 유행보다 신부의 옷차림, 취향에 더 의존한다. 


우리나라의 면사 

조선왕실면사 제5대 금박장 김기호 작 /성북선잠박물관

서구에 웨딩 베일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면사가 있다. 실제 웨딩 베일을 우리나라에서는 면사포, 또는 면사보라 부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이 얼굴을 가릴 때 쓴 쓰개를 언제 썼는지를 알려준 최초의 문헌은 '고려도경'으로, 이 자료에 따르면 고려 여성들이 귀천을 막론하고 '몽수' 쓰기를 즐겼다고 한다. 몽수는 검은색으로 몸을 다 덮을 정도로 길이가 길었으며 얼굴은 드러내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당시 여성의 얼굴을 가리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유행이나 멋을 위해 착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쓰개는 원래 머리를 보호하는 두의(頭衣)로 발생했으며 점차 장식적, 신분의 표식 등으로 발전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유교 사상으로 내외법을 강조하면서 내외용 쓰개가 일반화되었다. 양반 여성들의 외출에 면사를 착용하도록 한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도 전해진다. 이 기록에는 면사를 쓰지 않아 기녀로 오해받았던 여성에 대한 일화가 등장한다. 양반 부인은 외출할 때 면사를 착용했어야 했지만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는 일도 있었다. 기록에 양반 부녀자가 길거리에서 면사 걷는 것을 금지하자는 내용이 있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쓰개 /한국민속대백과사전

다만 면사로 지칭된 쓰개가 보자기 형태의 면사인지, 챙이 넓은 모자 위에 천을 드리운 너울의 형태인지는 잘 모른다. 실제 조선 초기에는 '면사'라는 용어가 너울과 혼동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자루형 쓰개가 너울, 보자기형 쓰개는 면사로 구별되어 쓰였다. 너울은 기마 행차에 사용되는 데 비해 면사는 법복에 속해 예장용(행사에서 입는 복장)으로 쓰였다. 면사에는 궁중용과 민가용이 있었고 궁중용 면사에는 겹면사와 홑면사가 있다. 보자기형 면사에 대한 기록은 '가례도감의궤'나 '국혼정례' 등 조선시대 후기 문헌에서 나타난다. 

문헌에 따르면 면사는 왕의 첩인 비빈, 조선시대 내명부 종2품의 위호인 숙의에게만 사용되고 신분에 따라 색상이 달랐다고 한다. 상궁이나 내인에게는 너울만 있을 뿐 면사에 대한 기록은 없어 이들은 면사를 사용할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상방정례'에는 면사 제작에 필요한 재료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법복용이나 평상용이든 상관없이 화려하게 꾸몄다고 한다.

궁중기록화 복식 면사 /배화여자대학교 전통의상과 소장

숙의·공주·옹주의 길례에는 남색의 전면사(前面紗)를 사용했는데 이 면사를 면사보라고도 불렀으며 비빈의 면사와는 명칭과 색만 다를 뿐 형태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옷감의 재료와 색으로 차이를 둔 것으로 보인다. 면사는 민간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서울 지역의 혼례식에서도 면사를 착용했다고 하니 구한말 궁중 풍속이 민간에게까지 퍼진 것으로 추정한다. 


하나의 천 조각이 여러 의미를 가진다, 베일 
 

우리에게 제일 익숙한 베일, 우리는 면사보라고 불렀다 /unsplash

고대부터 베일은 복장의 한 부분이었다. 이슬람 사회 안에서 베일은 정체성, 저항의 한 상징으로 여겨졌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순결, 순수, 계급의 우위, 부의 표시 등 다양한 표식으로 불렸다. 베일의 기능과 의미는 개인, 사회, 문화적 관점에 따라 좌우되었다. 민족 중심적, 또는 여성혐오적인 해석도 담겨 있다. 20세기 초 터키와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지도자들은 여성의 외모를 베일로 통제하는 것을 통해 국가 정체성을 정의하려 애쓰기도 했다. 또 어디에선가 베일은 인생에 있어 가장 빛나는 순간 중 하나일지도 모르는 결혼식에서 신부를 그 날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장식의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시대 유교 사상으로 인해 여성들이 쓰고 다녔던 면사가 있었다. 지금은 모든 여성들이 얼굴을 마주 보며 다니지만 한때는 서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했던 적이 있었다. 인천공항에 있는 '인천공항박물관'에서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조선왕실의 면사보를 전시 중이다. 이슬람의 히잡이나 웨딩 베일은 많이 봤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나라의 면사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으니 실제 우리 조상들이 쓰고 다녔던 면사를 이번 기회에 직접 눈으로 구경해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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