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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 꽃을 피운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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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시대 꽃을 피운 이탈리아의 천재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6.08 18: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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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의 경배 The Adoration of the Shepherds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이탈리아 최초의 르네상스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작품은 지금도 파도바의 오베타리 예배당을 가면 볼 수 있다. 만테냐는 원근법으로 그림을 즐겨 그렸으며 그의 양식과 기법은 조반니 벨리니, 레오나르도 다빈치, 알브레히트 뒤러 등 내로라 하는 화가들이 차용할 정도였다. 그의 천재성은 일찍부터 돋보여, 어린 시절부터 유명 화가의 제자로 들어가 일을 배울 정도로 그림에 대한 열의가 컸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만테냐는 전통에 따라 그림을 작업했다. 회화 말고도 그는 다수의 동판화들을 만들었는데, 특히 동판화의 일종으로 부식 과정 없이 판면에 철침으로 직접 그림을 새기는 '드라이포인트' 기법을 개발해 여러 색조 표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또한 만테냐는 이탈리아 최초의 인그레이빙(금속판에 끌로 직접 선을 새겨 인쇄하는 기법)작가이기도 하다. 원근법을 포함한 다양한 그의 기법은 몇 세기를 걸쳐 화가들의 발전을 일구어냈다. 


천재의 파란만장한 일생 

안드레아 만테냐의 자화상 /flickr

만테냐는 목수 비아지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1세가 되던 해 그는 이탈리아의 화가인 프란체스코 스카르초네의 제자가 된다. 고대 예술에 대한 열정과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스카르초네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리스에서 고풍스러운 조각상이나 꽃병 등을 수집해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440년 설립된, 스카르초네가 운영하는 학교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유명해져 137여명이나 되는 예비 화가와 학생들이 거쳐갔다. 당시 만테냐는 스카르초네가 라틴어를 가르치고 로마 조각상의 연구를 지시했던 제자들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제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17살이 되던 해 만테냐는 스카르초네의 작업장을 떠난다.

나중에 만테냐는 스카르초네가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돈을 버는 등의 일을 했다고 주장하며 그를 떠나 자체적으로 작업장을 차리게 된다. 후일담이지만 만테냐를 비롯해 스카르초네의 후원을 받은 몇몇 예술가들은 나중에 그의 화실에 들어갔던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고. 파도바에서 스카르초네와 같이 고대 미술품을 수집하며 이 작업과 관련이 있었던 많은 학자들, 골동품 수집가들을 알게 되면서 만테냐는 자연스럽게 고대 로마 문화에 대해 알게 된다.

만테냐의 첫 작품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1448년 산타 소피아 교회의 제단화였다. 당시 이 정도 어린 사람이 그 정도의 주문을 받는 건 이례적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만테냐의 실력이 뛰어났다는 이야기다. 만테냐는 그림에 '파도바 출신의 안드레아 만테냐가 17세인 1448년 이 그림을 손수 그렸다'라는 글을 적어 넣었다. 글을 적으면서도 얼마나 스스로 뿌듯해했을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오베타리 성당의 프레스코화 /flickr

같은 해, 그는 파도바의 오베타리 성당의 작품을 위임받은 많은 화가들과 함께 일하게 된다. 만테냐는 대부분의 작업을 혼자서 끝냈으며, 파도바에 있을 당시 그가 그린 작품에서는 종교적인 향기가 풍겼다. 그는 성 크리스토퍼와 성 제임스의 생애를 담은 프레스코화 연작을 완성했지만 불행하게도 '성모승천'과 '성 크리스토포루스의 순교' 장면을 제외하고는 제2차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사라졌다. 

만테냐는 비록 스카르초네와 좋지 않은 결별을 했지만, 스카르초네의 작업장에서 조각품들의 복제 석상들을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베타리 성당 작업을 마친 그의 작품들에 영향을 준 것도 고대 로마 예술을 사랑했던 스카르초네였다. 또한 만테냐는 도나텔로의 작품과 해부학에도 영향을 받았으며, 약 2년 정도 로마의 여러 조각들을 보고 공부했다. 어쨌든 만테냐에게는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의 옛 스승이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일 테다.

성모자 The Virgin and Child /flickr

1453년, 만테냐는 베네치아의 야코포 벨리니의 딸 니콜로시아와 결혼하며 베네치아란 도시와 관계를 맺게 된다. 그 이전, 1447년 만테냐는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산차카리아 교회에서 피렌체의 화가인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가 그린 프레스코를 보았다. 아마 이때부터 베네치아와 자신이 연관될 것이라고는 생각이나 했을까, 궁금한 부분이다. 

야코포 벨레니의 아들인 조반지와 젠틸레 벨리니, 두 형제들 또한 만테냐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야코포 벨리니는 고대 건축물에 바탕을 두고 건물을 배경으로 한 원근법과 소묘를 연구했다고 하니 이것은 그의 사위인 만테냐에게 엄청난 흥밋거리였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연히 만테냐가 벨리니의 작업장에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지만 만테냐는 계속 파도바에서 혼자 일을 한다. 그러다 1456년 만토바의 영주였던 루도비코 곤차가가 만테냐에게 화가로 일하라며 압력을 가했고 그를 궁정화가로 임명한다. 1466년 가족과 함께 만토바로 이사한 그는 궁정화가로써 예전처럼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자유나, 사람들에게 의뢰를 받는 일들이 제한되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결혼의 방 Camera degli Sposi /flickr
방 내부 /Wikipedia Public Domain

그에게 처음 내려진 일은 산 조르지오 성에 있는 두칼레 궁전의 '결혼의 방'을 장식하는 일이었다. 이 방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다. 이 당시 원근법을 사용한 화가들은 벽을 바깥 세계를 향해 열린 창문처럼 보이도록 벽면에 상상의 공간을 진짜처럼 묘사하곤 했다. 그러나 만테냐는 벽과 천장에 건축적 요소를 사실적으로 그려 무의식적으로 봤을 때 방이 실제보다 훨씬 넓어 보이게 했으며, 천장도 마치 패여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소토 인 수' 기법은 '아래에서 위'란 뜻으로 만테냐가 처음 만든 기법이다. 만테냐는 이 기법으로 마치 천장이 열려 있어 건물이 넓어 보이는 효과를 주었고 이 기법은 르네상스를 그쳐 바로크 시대에도 유행할 정도였다. 1473년 완성된 이 작품은 결혼 연회가 자주 열리는 공간이라 '결혼의 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작품으로 후원자였던 루도비코와 만테냐는 꽤 친밀한 관계를 맺었지만 루도비코가 1478년에 죽고, 만테냐의 아들까지 그 직후에 세상을 떠나자 만테냐의 상황도 점점 어려워진다. 어린 프란체스코 2세가 선출되면서 만토바 왕조의 예술적 활동이 시작된다.

프란체스코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자연히 후원을 받던 만테냐는 다시 고대 로마의 흉상들을 수집해 건축적이고 장식적인 조각들과 그림들을 제작한다. 1488년엔 로마 교황인 이노켄티우스 8세가 만테냐에게 로마 벨베데레 궁에 있는 개인 예배당을 장식할 수 있는 프레스코화를 그려 달라고 주문을 하기도 했다. 

승리의 성모 La Vierge et l'Enfant dite Vierge de la Victoire /flickr

1495년, 프란체스코는 포르노보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가정을 하고, 그 승리를 기념하는 '승리의 성모'를 그리라고 만테냐에게 명령한다. 1496년 제작되어 경당에 봉헌한 작품으로, 중앙에는 옥좌에 앉은 성모가 있고 그 아래 검은 갑옷을 입은 프란체스코가 봉헌자의 자세로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있다.

프란체스코가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진 건 그가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서였고, 그림의 제목 역시 승리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그림의 주요 인물들은 한결같이 프란체스코를 바라보고 있으며, 성모자도 그를 축성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특히 성모자의 모습에서는 다빈치의 <동굴 속의 성모>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세로가 더 높은 사각 형태로서 이전의 가로가 길쭉한 모습의 ‘성모자와 성인들’ 유형에서 벗어나고 있으며, 티치아노와 같은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파르나소스 Parnassos /flickr

나이가 들고 건강이 계속 악화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말년에 만테냐는 프란체스코 곤차가의 배우자인 이사벨라 데스테를 위해 두 점의 작품, 일명 '마르스와 비너스'로 불리는 '파르나소스'와 '덕의 정원에서 악덕을 쫓아내는 팔라스'를 완성한다. 주제에 대한 화가의 지적인 접근을 보여주는 이 작품들은 관람자층인 지식인들에게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1506년 만테냐가 사망하자, 만토바의 산 안드레아 교회에 그를 추모하는 기념물이 지어졌다.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는 영안실은 1516년에 완성되었고, 천장에는 만테냐가 그렸던 '승리의 성모'와 관련된 낙원의 상징들이 그려져 있다. 참고로 15세기 화가 중 자신이 일한 도시의 중요 교회에 자신의 영안실을 가진 건 만테냐가 유일하다. 파도바를 떠난 그가 제 2의 고향으로 살았던 만토바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동산에서의 고뇌 The Agony in the Garden /영국 내셔널 갤러리

'동산에서의 고뇌'는 만테냐가 1460여년에 그린 그림으로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가 소장 중이다. 르네상스 미술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베네치아의 화가 야코보 벨리니의 독창적인 그림에서 영감을 받아 만테냐는 이 작품을 만들게 된다. 그리스도는 무릎을 꿇고 있으며 그의 모습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의 제자들은 그의 발치에 널부러져 자고 있으며, 천사가 손을 뻗어 그리스도를 위로하고 있다. 그 뒤로 배신자인 유다를 앞세워 병사들이 예루살렘 성곽을 배경으로 점점 이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림 속 죽은 나무와 독수리는 죽음을 상징한다. 짙은 하늘과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그리소드의 청색 가운은 피비린내가 날 것 같은 붉은 튜닉 위에 걸쳐져 있다.

이 그림은 같은 주제로 1457년 그렸던 작품보다 구성이 더 풍부하며 드라마적인 요소가 짙다. 만테냐의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풍경과 인물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조반니 벨리니가 1465년 그린 '고뇌하는 그리스도'에 영향을 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동방 박사의 경배 Adoration of the three kings /flickr

루도비코 곤차가가 의뢰했던, 산 조르조 성의 두칼레 성당 장식을 위한 세 폭의 제단화 중 중앙 패널이다. 1460여년경 만테냐가 그린 '동방 박사들의 경배'는 세 명의 동방 박사가 차례로 아기에게 축복의 표시를 하며 경의를 표한다.

성모자가 있는 곳은 마구간이 아닌 동굴이며, 동굴은 탄생의 공간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하늘의 별에서는 빛줄기가 동굴을 향해 내려져 있고, 뾰족한 칼은 성모 마리아가 아들의 죽음으로 겪어야 하는 고통을 상징한다. 기괴한 바위에 뚫린 어두운 동굴을 배경으로 부각되는 성모자와 경배하는 세 박사들에게 주의를 집중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은 후광을 비춘 채 단순한 옷을 입고 있으며 동방 박사들은 이국적인 옷과 보석으로 치장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박사는 황금, 유황을 예물로 주고 있다. 만테냐는 이 공간 안에서 인물과 사물을 압축시켰고, 날카로운 디테일을 통해 그리스도를 숭배하는 모습에 관객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아기 예수의 숭배는 15세기 모든 예술에서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였다. 

죽은 그리스도 The Lamentation over the Dead Christ /브레라 미술관

만테냐의 파격적인 걸작인 '죽은 그리스도'는 그의 몇 안 되는 캔버스에 그린 작품이다. 작품의 연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지만 1457년에서 1501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 그림에서는 원근법의 구축이 제일 큰 특징으로, 루도비코 공작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테냐는 '원근법으로 그린 예수'라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이 낯선 비례는 그림을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충격에 빠지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유례 없는 이러한 방식의 그림을 통하여 관람자들은 처참한 고통을 당한 예수의 몸을 찬찬히 보게 된다. 상흔이 남은 맨 아래의 발바닥에서부터 중앙의 축 늘어진 채 못자국이 선명한 양팔, 그 위로 고통 속에 죽어간 얼굴에 이르는 동안 관람자 역시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만테냐의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인물과 사물에까지 원근을 적용하는 단축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차가운 대리석 위 예수의 몸이 짧아 보이는 건 누워 있는 시신을 약간 높은 위치에서 바라보는 단축법 기법을 썼기 때문이다. 화면 전체에 적용하는 원근법과는 달리 단축법은 한 대상에 적용하는 기법이다. 이 작품이 이색적인 이유는 단축법을 구사한 그의 뛰어난 솜씨를 볼 수 있어서도 있다. 

바다신들의 전투 Battle of the Sea Gods /Wikipedia Public Domain

고대 고전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만테냐는 그의 독창적인 디자인을 위한 매개체로 판화를 사용했던 이탈리아 화가들 중 하나였다. 그는 그림에서 빛과 그림자의 미묘한 그라데이션을 재현하기 위해 판화를 이용했고, 지금까지 7여개의 작품이 남아 있지만 그의 판화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15세기의 다른 이탈리아 판화 제작자들의 작품들보다 더 많이 복제되었다.

바다신들의 전투는 1488년 만테냐가 로마에 머무는 동안 보았던 골동품들 중 하나에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만테냐는 골동품에 관심이 많았고, 그의 작품에 이미지를 접목시키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다. 두 개의 분리된 구리판에 그림을 새겼으며, 두 판을 합친 판화로 만드는 관습과 전투와 행렬을 묘사한 이 모습은 이때부터 일종의 표준이 되었다.

이 기다란 인쇄물은 또한 벽에 전시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암시하며 판화에서는 만테냐가 다양한 음영으로 된 선을 사용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만테냐는 선 두께에 변화를 주기 위해 두 가지 크기의 철침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림만 그리며 살다 간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 

그리스도의 부활 The Resurrection /flickr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동안 만테냐의 영향을 받아 그의 조각 작품들을 재현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만테냐의 그림 장식 기법에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에 대한 디테일한 기술과 기법의 시도는 여러 화가들과 수집가들 사이에서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다. 두칼레 성당에 있는 그의 역사적인 천장화는 라파엘과 코레지오 같은 르네상스 예술가들과 바로크 양식 화가들에 의해 모방되었다. 

만테냐는 작업 방식이 꼼꼼해 일의 진행이 매우 느려 작품을 의뢰했던 후원자들의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그 정도로 디테일을 중요시했던 만테냐는 드로잉에도 매우 능했어서, 디자인을 계획했다면 그 틀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 정밀한 밑그림을 그려 놓고 조각과 그림을 제작했다고 한다. 때로는 스승과 결별하고, 재정적인 어려움에도 빠졌으며 고난도 많았지만 그는 평생 그림만 그리다 살며 세상을 떠났다. 그림에 미친 천재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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