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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벽화로 예술간의 계급을 깨부수다. 키스 해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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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벽화로 예술간의 계급을 깨부수다. 키스 해링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5.17 1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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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버스 X 키스 해링 /컨버스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최근 컨버스(CONVERSE)는 뉴욕 출신의 팝아티스트 키스 해링과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했다. 컨버스가 전개하는 ‘벽을 허물자 – Breaking Barriers’ 캠페인에서는 시간을 초월하는 진보적인 사고방식의 중요성을 일깨우며 과거의 창의성, 투지, 낙관주의가 없었다면 현재의 올스타즈(All Stars)가 미래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영감과 이야기를 찾기 힘들 것이라고들 한다. 

이러한 컨버스의 메시지를 누구보다 가장 잘 대변하는 아이코닉한 인물로 키스 해링이 선택되었다. 키스 해링은 뉴욕 출신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뉴욕 지하철에 그린 그림으로 알려졌으며, 아무나 볼 수 있었던 공공벽화를 통해 고급 미술과 저급 미술 사이에 그어져 있는 경계를 허물려 노력했다.

그의 작품은 예술간의 경계를 없애고 소수자들, 또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고 컨버스 측은 설명했다. 이번 콜라보는 키스 해링이 뉴욕 지하철 빈 광고판에 그려 넣었던 아이코닉한 팝 드로잉과 그의 창의적인 정신에 오마주를 표하며 다양한 풋웨어 등을 선보였다. 


키스 해링의 인생 
 

키스 해링 /flickr

키스 해링은 미국 펜실베니아주 레딩에서 태어나 쿠츠타운에서 자랐다. 그의 예술적 성향은 어렸을 때부터 드러났다.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난 캐릭터와 이야기를 하며 만화를 그렸다. 그러나 가끔 만화를 그리는 것과 예술가가 되는 것 사이에는 괴리감이 있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의 실험적이며, 다소 반항적인 기질은 청소년기 내내 예술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그는 닥터수스, 디즈니 같은 대중 문화를 접하며 기본적인 그리기 기법을 배웠다. 자연스럽게 해링은 그림 그리기에 대한 애정이 커졌고, 책과 박물관 방문 등을 통해 현대 미술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1976년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피츠버그의 상업예술학교인 아이비전문예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해링 자신은 상업적인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다는 걸 깨닫고 두 학기를 보낸 후에 학교를 중퇴한다.  

"부모님과 선생님은 미술 학교를 가라고 하셨죠. 예술가가 되려면 상업적인 배경이 있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전 삽화가나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 일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제 눈엔 불행해 보였죠. 자신의 예술을 잃어버린 거에요. 그래서 전 학교를 그만뒀어요"

피츠버그에 있는 동안 해링은 계속 혼자 공부하고 있었고, 1978년 그는 피츠버그 아트앤크래프트 센터에서 전시회를 열 기회가 생긴다. 누군가가 전시회를 취소해 한 자리가 남았을 때 전시회 감독이 그에게 한 화랑에 전시회를 열어 주겠다고 한 것이다. 박물관이 아닌, 피츠버그에서 해링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장소였다. 

키스 해링의 시그니처인 피규어 일러스트 /flickr

이후 뉴욕으로 이사간 해링은 시각예술학교(SVA)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는 다문화로 이루어진 이 도시 공동체를 본격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뉴욕은 19살 때부터 남자들과 잠자리를 가지기 시작한 그의 정체성을 탐구할 수 있는 환경이었고, 어떤 실험적 시도도 가능한 시각예술학교와 자신처럼 활기찬 집단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다 뉴욕에서 미술관과 박물관이 아닌 시내 거리, 클럽과 댄스 홀 등의 공간을 활용하고 있던 대안 미술 커뮤니티를 찾게 된다.

캐링은 특히 지하철 벽면에 그려진 낙서의 아름다움, 그리고 자연스러움에 큰 감명을 받는다. 그래피티는 그가 동경했던 모든 것들과 닮아 있었다. 낙서지만 전혀 낙서같지 않은, 오히려 고급 예술에 가까웠다. SVA에서 들은 수업은 캐링에게 떠오르는 영감을 지탱해줄 중요한 틀을 만들어 주었다. 그는 학교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학교 복도에 그림을 그려 걸어놓고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비디오 테이프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고 글도 썼다. 이 다양한 시도는 그가 독창적인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의 일부였다. 

그는 미국의 비주얼 아티스트인 케니 샤프, 화가 장 미셸 바스키아뿐만 아니라 음악가, 공연 예술가, 그래피티 작가들과 만나 친구가 된다. 해링은 친구들의 에너지에 말 그대로 휩쓸려, 클럽과 지하철 벽면 등 다양한 장소에서 전시와 공연을 직접 제작하고 참여하기 시작한다.

해링은 동시대 사람뿐만이 아닌 프랑스의 화가 장 뒤뷔페, 브리온 기신 등의 예술 정신에도 영향을 받았다. 이 덕분에 해링은 자신의 감정을 다양한 종류의 그래픽 표현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특히 크리스토와 잔 크로드의 설치미술 작품인 '달리는 울타리(Running Fence)'와 앤디 워홀의 특별한 예술, 삶의 융합 방식은 해링이 진정한 공공 예술을 창조하는 데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계기가 된다. 

2015년, 드 영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flickr

1980년, 해링은 지하철역에서 무광택의 검정 종이로 덮혀 있는 광고판을 발견하고 이것이 그가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는 매개체라고 생각했다. 그는 빈 광고판에 하얀 분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검은 종이에 분필은 너무나도 쉽게 그려졌다. 이 검은 종이를 볼 때마다 해링은 그림을 그렸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굳이 이 그림을 망치지 않고 구경했다.  

해링은 공공장소에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다고 말한다. 구경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철학적, 사회학적 실험과도 같았다. 낮에 그림을 그린다는 건 사람들이 자신을 항상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구경하는 사람도 있었고, 낙서를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해링은 이런 사람들의 반응과 그림, 자신과의 상호작용이 단지 하나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기회가 주어졌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즐길 수 있었는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해링에게 지하철 역에서 그의 그림을 구경하는 사람들은 박물관이나 갤러리에서 오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해링에게 이 행위는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 묘하게 그어져 있는 경계를 허무는 것을 의미했다.

해링은 수백 점의 그림을 빠른 리듬의 선으로 휙휙 그어나갔다. 이 이미지는 뉴욕 지하철로 통근하는 사람들에게 친숙해졌다. 지하철 벽은 해링에게 아이디어를 짜내고 그림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실험실'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불법으로 한 낙서라 경찰에 체포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러나 경찰서에 갔다가 다른 경찰들이 해링을 알아보고는 팬이라며 악수를 청하는 일도 있었다고. 

토니 샤프라치의 갤러리에서 설치샷 /haring.com 키스 해링 재단

미술학도로써 지하에만 있었던 해링은 전통적인 딜러가 있는 갤러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모든 사람들이 미술을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고, 지하철 벽에 그려진 그림들은 그가 여러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다 해링의 재능을 알아본, 뉴욕 화단의 미다스의 손이라 불렸던 토니 샤프라치란 딜러가 자신의 개인 갤러리에 해링의 개인전을 기획하게 된다. 개막식에는 수백명이 참석해 언론도 큰 관심을 보였다. 

본격적으로 해링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고 수많은 전시와 단독 전시회에 참여했다. 1982년 그는 소호 갤러리에 엄청난 인기와 호평을 받은 1인 전시회로 데뷔했다. 해링은 80년대 전반 타임스퀘어의 컬러 광고판 애니메이션, 극장 및 클럽용 세트와 배경 디자인, 스와치 시계 디자인 개발, 보드카 광고 캠페인 등 수많은 공공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그러나 그의 성공은 종종 그를 방해하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이를테면, 지하철에서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면 두 시간 후에 그 그림이 없어지는 등의 일이었다.  

그리고 1986년 4월, 해링은 소호에서 자신의 작품을 본딴 티셔츠, 장난감, 포스터 등의 굿즈를 파는 팝샵을 연다. "내 작품이 점점 비싸지고 미술 시장에서 인기가 많아지고 있어요. 작품의 가격들은 너무 높아 이 금액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작품에 접근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죠. 이제 팝샵을 통해 일반 사람들도 쉽게 살 수 있습니다"라고 해링은 설명했다. 1989년 팝숍에 대해 해링은 "지난 5-6년간 내가 원래 받아야 할 보상보다 넘치게 받았습니다. 난 내가 벌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었죠. 일종의 죄책감과도 같아요. 그래서 그걸 돌려주고 싶은 겁니다" 라고 전했다. 

도쿄에 있는 팝샵 /flickr

해링은 이 상점을 자신의 작품들과 연장선상에 두었다. 내부 전체를 흰색 벽화에 추상적인 검은색 그림으로 가득 채웠다. 이 팝샵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좀더 많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지금은 저렴한 비용으로 그의 굿즈를 구입할 수 있다. 미술계의 많은 사람들은 디자인이 저게 뭐냐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해링은 상관없었다. 그는 그의 작품이 가능한 한 많은 관객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했고 앤디 워홀을 포함한 친구들과 팬들, 멘토들은 그를 꾸준히 지지했다. 

1988년, 해링은 에이즈 진단을 받는다. 당시 에이즈는 이미 뉴욕시와 예술 세계, 그리고 해링의 주변 친구들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에이즈라는 진단은 해링에게 별로 놀라울 것은 없었다. 그는 롤링스톤지에서 인터뷰를 하며 자신의 병을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에이즈에 대한 그의 반응은 꽤 철학적이었다. 

"아무리 오래 일해도 언젠가는 삶이 끝납니다. 모든 일은 다 풀리지 않고 남아 있겠죠. 만일 75세까지만 산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동안 여전히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거니까요. 내가 죽음이란 것을 실감하는 게 별로 어렵지 않은 이유는 그것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무지 = 공포, 1989 /haring.com 키스 해링 재단
바르셀로나에 있는 '우리 모두는 힘을 합쳐 에이즈를 멈출 수 있다' 벽화 /flickr
'마약은 인생을 망친다' /haring.com 키스 해링 재단

해링은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넓히는 것 외에도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다. 죽기 전 그는 1989년 '키스 해링 재단'을 설립해 인종차별 반대, 어린이 자선사업, 동성애자 인권운동, 에이즈 관련 단체에 대한 지원 등을 이어나갔다. 그는 살아 생전 젊은이들을 위한 자선 단체에 협력했고 파리의 네커 아동병원을 포함한 많은 어린이 병원에 벽화를 그려넣었다. 그는 에이즈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이용했다. 그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에이즈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어했다.

'키스 해링 재단'은 그의 유산과 예술, 그의 신념을 지속하고 보호하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아이들과 함께 미술 워크숍을 진행하고 공익기관의 로고와 포스터를 제작했다. 소외된 지역 사회에 벽화, 조각, 그림 등을 제작해 제공했다. 또한 그가 살았던 시대와 장소에 대한 연구를 위해 자료실과 미술품 컬렉션 등을 보유하고 있으며 해링의 작품과 철학을 조명하는 전시회, 출판물 등을 후원하고 있다. 

1990년 2월 16일 해링은 에이즈 합병증으로 3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2019년 해링은 뉴욕 스톤월 국립 기념물 내에 있는 국립 LGBTQ 명예의 벽에 헌정된 50명의 영웅들 중 하나다.

마돈나의 'Into The Groove' /estephano80 유투브 캡쳐 

그의 스타일은 대중 문화에도 수많은 콜라보레이션으로 적용되었다. 아디다스, 슈프림, 리복, 코치 등의 여러 브랜드와 협력을 진행했다. 해링과 절친이었다고 알려진 마돈나는 2009년 열린 'Sticky and Sweet Tour'에 해링의 작품을 애니메이션 배경화면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 애니메이션은 해링의 트레이드 마크인 피규어들이 "Into the Groube"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다. 

닥터마틴 X 키스 해링 /닥터마틴
스와치 X 키스 해링 /스와치

그의 작품들은 사람들의 선호도가 높아 여러 곳에서 소비되었다. 그가 팝샵을 연 것도 대중과의 소통과 교감을 위해서였다. 그의 작업으로 이루어진 상품들은 현재에도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 닥터마틴은 키스 해링과 콜라보레이션을 진행, 닥터마틴의 오리지널 실루엣에 해링의 일러스트레이션을 프린팅했다. 스와치는 2021년 첫 콜라보레이션으로 키스 해링을 선택했다. 해링이 사랑했던 디즈니의 미키마우스를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경쾌한 컬러와 재치 있는 패턴으로 재해석한 디자인이 특징이다.

미국 그레이스 대성당에 있는 키스 해링의 '그리스도의 삶' /flickr

해링은 젊었을 시절 일어난 예수 운동에도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다양한 기독교인들이 모인 이 집단은 반물질주의, 반체제, 최후의 심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비 등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해링이 10대였을 때 접했던 이 종교 상징들은 그의 그림에도 영향을 주었다.

후기 작품들 중 보이는 종교적인 이미지나 상징을 두고 해링은 죽기 전 인터뷰에서 '내 작품에는 종교적인 이미지가 많다. 어떤 사람들은 내 작품이 종교적 광신도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레이스 대성당 입구 오른쪽에는 에이즈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예배당이 있는데, 그 안에 전시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삶'이란 이름의 이 작품은 1990년 해링이 에이즈로 사망하기 2주 전 완성된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예술에 계급은 중요하지 않아, 키스 해링 
 

샌안토니오 교호의 '토투몬도' /flickr
파리의 네커 병원 /flickr
영국 서머셋 하우스에 설치된 키스 해링의 조형 설치물 /flickr

해링은 생전 50개가 넘는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죽음 이후 전세계로 150여개 이상회 전시회가 열렸다. 1986년 해링의 조각품 중 3점이 유엔 본부의 함마슐드 광장 정원에 놓여졌고 1996년 호주현대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렸다. 2020년 2월, 해링 사망 20주년을 맞아 토니 샤프라치 갤러리에서는 해링의 시대별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2012년에는 그의 회고전이 뉴욕 브루클린 박물관에서 열렸고, 우리나라에서도 2018년 11월부터 2019년 3월까지 키스 해링의 전시회가 열렸다. 지금도 그를 기억하는 전시는 계속되고 있다. 

해링은 에이즈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뉴욕에서 일했다. 그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그를 초청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샌안토니오 교회에서, 네커 병원에서, 서머셋 하우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필라델피아, 샌프란시스코, 베를린, 파리 등에서도 해링이 수행한 공공미술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자유로운 예술가들과 만나 지하철 벽에서 자신의 감성을 마음껏 표현했던 해링은 어쩌면 소위 '고급 예술'을 즐겼던 사람들보다 출퇴근을 위해 낡은 지하철 역을 들락거렸던 시민들이 자신의 작품을 봐 주는 것을 더 기뻐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 대부분엔 제목이 없는데, '미술은 그것을 보는 관객의 상상력을 통해 생명을 얻는다'라며 관객과의 소통을 중시했던 그다운 선택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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