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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우물로 숨어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데린쿠유 지하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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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우물로 숨어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데린쿠유 지하도시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4.16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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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린쿠유 지하도시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터키 아나톨리아의 카파도키아에 있는 평원 아래에는 숨겨진 지하 도시가 있다. 깊이 85m까지 내려가는 지하 8층 규모의 데린쿠유 지하도시는 터키에 있는 많은 지하도시 중에서도 눈에 띄는 곳이다. 로마 제국의 종교 박해를 피해 온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숨어든 곳이었고 7세기부터는 이슬람 교인들로부터의 박해를 피하는 데 사용하는 등 주로 은신하려는 목적으로 사람들이 살았다. 이 도시는 최대 2만 명까지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깊은 우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데린쿠유는 현재 8층까지 공개되었으며, 어지러이 얽힌 통로들의 어떤 장소는 독방을 연상케 하고 어떤 장소는 동굴처럼 깊은 수천 개의 '방'을 연결한다. 수많은 방들은 주민들에게 기초적인 생활 설비만을 제공했던 것뿐만 아니라 교회, 학교, 공동 부엌, 회의 장소, 심지어 마구간과 양조장까지 갖추고 있어 또하나의 작은 도시를 이루게 했다. 


지하도시의 우연찮은 발견 
 

어두컴컴한 데린쿠유 지하도시 /flickr

1963년, 7살의 한 꼬마가 잃어버린 닭을 찾으러 갔을 때 일이었다. 최근 닭이 자꾸 사라졌고, 오늘도 닭이 사라진 것을 안 꼬마가 황급히 닭이 없어진 곳으로 갔을 때 본 것은 땅에 난 자그마한 구멍이었다. 꼬마는 닭을 찾으려던 나머지 그 구멍에 몸을 들이밀었는데, 뜻밖에도 통로가 이리저리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꼬마가 발견한 곳은 카피도키아 지역의 일부인 데린쿠유 지하도시였다.

발굴 결과 이곳은 깊이 85미터, 지하 8층으로 이루어진 지하 도시로 지름 1m 정도의 구멍을 수직으로 도시 바닥까지 뚫어 지상에 있는 공기와 물을 공급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깊은 우물'이라는 뜻으로 데린쿠유라 불렀다. 지하 120m까지 내려갈 수 있고 지하 20층까지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지만 관광객이 들어갈 수 있는 건 지하 8층까지이다.

카피도키아 지역은 예로부터 화산으로 유명했고, 높이가 약 1,000미터에 달하는 고원에 자리잡고 있었다. 수백만년 전 화산재 속에 묻힌 이 곳은 오늘날의 여러 화산들을 만들었다. 퇴적암의 침식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보이는 바위나 산을 형성했고, 잿더미가 쌓인 부드러운 화산암들은 히타이트인들이 수천년 전 바위로 이 동굴을 조각했을 때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부드러운 흙들은 히타이트인들이 동굴과 터널을 쉽게 만들 수 있게 했다. 

사람들이 직접 판 동굴 /flickr

그들은 창고와 지하의 식량 저장소를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고, 음식물와 귀중품은 창고에 보관함으로써 그들의 음식과 상품에 영향을 받지 않게 했다. 카파도키아는 여름에는 매우 덥고 겨울에는 매우 추웠으며 일교차도 변덕스러웠지만 지하는 1년 내내 섭씨 15도의 안정적인 온도로 동물들과 사람들의 체온 유지가 가능했다. 또한 먹거리의 신선도 유지, 식품 저장소 작업 등을 가능케 했다.

사실 이 지하 도시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앞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히타이트인들이 프리지아의 습격으로부터 숨기 위해 이 동굴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것과, 프리지아인들이 이 터널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당시 프리지아인들은 고고학자들에게 철기 시대 가장 훌륭한 건축가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도 있고,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인 크세노폰이 이 지역을 여행하고 쓴 '아나바시스'에 데린쿠유에 대해 '프리지아 왕국의 마지막 도시'라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터키는 고대 히타이트인들부터 시작해 프리지아, 로마,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이 혼재한 곳이다. 그래서 정확히 어떤 시기에 누가 이 동굴을 만들었는지 콕 찝을 수는 없지만 동굴은 로마, 이슬람교가 당시 기독교였던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던 시대를 거치며 살았던 사람들에 의해 계속 확장되고 넓어진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하도시가 있는 카파도키아 /flickr

중앙 소아시아 중부에 있는 카파도키아는 로마와 이슬람 제국 사이의 경계에 있었다. 이런 지역적 조건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 등으로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휩쓸릴 수밖에 없었다. 군대는 주민들을 몰아냈고, 주민들은 십자가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이단으로 취급하는 우상 파괴자들의 대량 학살을 겪어야 했다.

카파도키아는 기독교 유산이 풍부했지만 이 혼란스러움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랍 비잔틴 전쟁 동안 데린쿠유는 주민들의 피난처로 유용하게 쓰였다. 사람들은 커다랗고 둥근 돌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데린쿠유 지하 도시로 피난을 떠났다.

로마 시대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종교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어들어갔고, 300년간 달하는 기독교 탄압 시기 사람들은 숨어 살면서 예배를 보고 신앙을 지켰다. 데린쿠유에 살던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든 기독교도는 신앙의 자유가 있다'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됐을 때에도 지하 도시에 계속 살았다고 한다. 왜냐면 말 그대로 지하에 계속 있었기 때문에 정작 이 사실을 몰라서였다. 

데린쿠유 지하도시 /flickr

로마 시대 이후에도 지하 도시는 건재했다. 터키인들이 수십만의 그리스인들을 학살하고 퇴거시키기 전까지 주민들은 지하 도시에서 살았고, 1920년대까지 거주하다가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인구 교환으로 인해 마지막으로 살던 그리스인들이 떠나면서 지하도시는 버려졌지만 다행히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전문가들의 추정에 의하면 동굴 생활을 하기 위해 생명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만 섭취하고 배출해 별다른 화장실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다고 하니 이들의 처절한 생활력에 그저 경의를 표할 따름이다. 


데린쿠유 지하도시의 이곳저곳 


처음에는 작은 동굴로 시작했지만 데린쿠유는 쫓겨왔던 기독교인들에 의해 크게 넓어졌다. 피난민이 늘어날수록 공간은 더 많이 필요했고, 자연히 사람들이 옆이나 지하로 계속 파 내려가 동굴 전체가 복잡한 미로처럼 되었다. 학자들은 카파도키아의 지하 도시가 적어도 수백개는 될 것이라 추정하며, 현재까지 발굴된 곳은 6곳 정도 된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추정한 것 /cappadociaguidedtour

데린쿠유 지하도시는 가장 크지도, 가장 오래된 도시도 아니지만 지하도시 중 가장 깊은 곳으로 학자들은 현재 데린쿠유가 8층 정도만 알려져 있지만 지하 약 20층까지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데린쿠유에서 지상으로 8km 떨어진 곳엔 카이막르 지하도시가 존재해, 아마 사람들은 여러 군데로 피해 다녔으며 생존과 도피에 유용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데린쿠유는 사람들이 수저를 이용해 굴을 팠고, 파내고 나면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져 버려 이틀 정도를 파내야 하나의 거주지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지하도시 각각의 층은 각기 다른 기능을 갖고 있으며 환기를 위한 환기구가 도시 중심에 있었다. 1층은 동물들을 위한 마구간, 2층은 부엌이었고 3층은 음식 저장고로 사용했다. 4층은 양조장, 5층부터 7층까지는 주민들의 집으로 사용했고 마지막인 8층은 예배당으로 썼다. 특별히 1층을 동물들을 뒀던 마구간으로 쓴 이유는 침입자가 들어올 경우 놀란 동물들이 움직이고 소리를 냈기 때문에 이것으로 적의 침입을 감지하려 했기 때문이란다.

집회와 교육의 장소로 쓰였던 곳 /CC BY 2.0
당시 사람들은 이 작은 햇빛 하나만을 보며 살았다 /flickr

수세기 동안 굴에 설치되었던 횃불로 인해 터널 곳곳은 검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동굴을 좁게 만들어 침략자들이 대규모로 쳐들어오지 못하고 한 줄로밖에 이동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햇빛과 공기 또한 바닥까지 뚫은 환기 굴뚝 및 우물을 만들어 극복하고, 주요 출입구는 외부의 침략을 거대한 바위 하나만 움직이면 막을 수 있는 장치로 만들었다. 

데린쿠유 지하도시는 방과 부엌, 외양간과 마구간 등 일상 생활에 필요한 장소와 학교, 집회 시설, 저장소 등 실제 도시처럼 만들어져 있다. 동굴 자체를 작은 도시로 만들긴 했지만 적의 위협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지상으로 나와 생활하기도 했다. 주민들은 평소처럼 농사를 짓고 양을 키우며 지하 도시에 식량을 공급했다. 저장소에서 발견된 밀이나 포도주, 그릇 등은 이들이 지상과 지하 생활을 병행했음을 알려 준다. 심지어 인근 주민들조차 추수하면 곡식을 거두지 않고 지하도시의 주민들이 먹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고 한다. 

지하도시의 환기 시설 /flickr

미로처럼 얽혀 있는 통로는 이곳저곳 무너져 내린 곳이 많지만 환기 시설은 아직도 잘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 관광객들의 말에 의하면 들어가도 전혀 습하지 않고 오히려 서늘한 느낌을 준다고. 당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빵을 구워도 그 냄새나 연기가 다 빠져나갔다고 하니 당시 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환기가 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커다란 돌문 /flickr

층마다 있는 돌문은 외부 적들이 쳐들어오면 통로를 막아 침입을 차단하고, 가운데에 뚫린 구멍으로 적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화살을 쏘거나 창으로 막았다고 한다. 최대한의 보안을 위해 내부마다 각 층에 이 돌문으로 입구를 차단했다. 

마구간 /flickr
양조장 /José Luiz Bernardes Ribeiro CC-BY-SA-3.0

지상층은 보통 마구간으로 썼으며,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벽의 일부가 파여 있다. 동물들을 묶는 구멍도 바위에 새겨졌고, 현지에서 직접 수확한 포도로 만든 양조장은 상층에 만들어 포도를 쉽게 나를 수 있게 했다. 

깊은 우물, 데린쿠유 /flickr

환기 및 소통용으로 쓴 구멍은 우물로도 썼는데, 일부 우물은 지상에서 접근하지 못한 적들로부터 급수 시설에 독을 타는 일을 막았다. 환풍구로 쓴 구멍은 52개가 넘으며, 가장 밑부분에 우물이 있고 지하 우물의 물은 1962년까지 도르래를 이용해 끌어올려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지하에 사는 건 이들에겐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햇빛이 부족해 비타민D 부족으로 각기병이나 구루병을 앓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박해를 피해 살아남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치러야 했던 혹독한 대가였다.


숨어들어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의 증표, 데린쿠유 지하도시 
 

교회로 추정되는 곳 /flickr

데린쿠유 지하도시는 일종의 박물관과 같다. 매일 개방되어 있고 관광객들이 여름에 방문할 땐 시원하며 겨울에 방문할 땐 언제나 따뜻하다. 좁은 터널을 지날 땐 머리를 천장에 부딪칠 수도 있고, 지나가다 몸이 낄 수도 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밀실 공포증이 있다면 조금 긴장하며 걸을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 곳에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 당시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아주 조금이라도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죽지 않기 위해, 적의 침입을 피해 이 동굴로 쫓겨온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반강제적으로 집을 만들고 창고를 만들고, 그럼에도 자신들이 믿는 종교를 포기할 수 없어 예배당을 만들어 기도를 하며 믿음을 지켰다. 한 줄기 들어오는 빛을 볼 때마다 그들은 어쩌면 오늘도 무사히 살아남기를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집념이 이 거대한 지하 도시를 만든 셈이다. 그저 안전한 삶을 위해 끊임없이 굴을 파고 터널을 만들며 살았을 그들은 지금 없지만 데린쿠유에 가 본다면 잠시나마 그들의 고단한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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