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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것'에 대하여...수레와 가마, 순종 황제의 어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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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 것'에 대하여...수레와 가마, 순종 황제의 어차까지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4.0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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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황제 어차 캐딜락 리무진 /문화재청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요즘에야 길거리에 자동차와 오토바이, 자전거나 킥보드 등 탈것이 많지만 고대 사람들이 무엇을 타고 다녔냐고 한다면 대개 수레나 말, 가마 정도를 떠올릴 것이다. 실제 평민들은 달구지나 말, 소에게 수레를 끌게 했고 주로 조선시대 상류층들은 가마를 타고 다녔다. 

이후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정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사회 전반에 근대화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미국과 유럽을 통해 우리나라에 신기술과 문화가 유입되고, 대한제국 황실 가족의 생활도 근대적으로 변화하였으며 전통적인 이동 수단 대신 자동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에 이르러 순종과 순정황후는 미국 GM사가 제작한 캐딜락과 영국 다임러사가 제작한 리무진을 주로 타고 다녔다고 한다.   


삼국시대의 탈것, 수레 

삼국시대 이전까지는 탈것인 수레에 대해 사람들은 별 생각이 없었다. 고려 후기부터 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수레를 사용했지만 수레에 대한 정보의 습득, 도로의 발달 등이 지체되다가 평양의 낙랑 고분과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수레 관련 유물이 나오면서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수레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땅이 넓어 주로 육로를 이용해 일찍부터 교통 운송 수단으로 수레를 썼다.

안악3호분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의 수레 /국립민속박물관

특히 여러 무덤에서 발굴된 수레의 부품들과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의 무덤들에 그려진 수레의 그림들과 수레바퀴 제조 기술자의 그림은 그 시기 고구려의 수레 제작기술이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황해도 안악군에 위치하는 고구려 고분인 안악3호분의 벽화에는 차고에 여러 대의 수레가 묘사되어 있는데, 주차장에 고급 승용차 여러 대가 세워져 있는 풍경이라 생각하면 된다. 신라 사람들은 아예 수레를 담당하는 관청인 승부(乘府)를 만들어 전문적으로 관리했고, 한꺼번에 2,000대가 넘는 수레를 동원한 기록도 남아 있다.

수레바퀴모양의 토기 /국립중앙박물관

수레의 흔적은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에서도 볼 수 있다. 높이 15㎝짜리 이 수레바퀴 모양 토기는 삼국시대, 특히 낙동강 하류 지방에서 유행하였다. 주로 가야 토기 중에 이런 형태가 많이 있으며, 신라의 무덤에서도 발견된다. 이 토기는 실생활에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었던 토기가 아니라 '껴묻거리'로 만들었다고 추정한다. 껴묻거리는 죽은 사람을 무덤에 묻을 때 시신과 함께 묻는 물건으로, 죽은 이가 사후 세계에서도 사용할 만한 물건을 함께 묻는 것을 뜻한다. 

가야 무덤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모양의 이 토기는 짐수레가 아니라 사람을 태우기 위한 수레 모양이다. 비슷한 시기 가야 무덤에서는 껴묻거리로 배 모양 토기, 신발 모양 토기 등도 묻혀 있었다. 배와 신발 모두 사람이 이동할 때 쓰는 것이라, 무덤에 묻힌 죽은 사람의 영혼이 수레를 타고 편안하게 좋은 곳으로 가라는 뜻으로 수레바퀴 모양 토기를 함께 묻었다는 설이 있다. 

초헌 /국립고궁박물관

이윽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수레와 가마가 등장한다. 19세기 초에 등장한 '초헌'은 사람이 끄는 외바퀴의 높은 탈것으로,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조선 고유의 것이다. 2품 이상의 관원이 탔으나 무관은 탈 수 없었고, 앉는 자리가 높게 올라가 있어 권위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왕자와 부마도 타고 다녔다. 좁은 길에도 다닐 수 있도록 외바퀴를 달아 전후에 각각 2명씩, 4명이 밀고 끌도록 되어 있다. 이를 이용하는 관리들의 집은 문턱을 없애 초헌의 출입이 쉽도록 했다.

가마는 조선 시대에 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타고 다니던 주요한 이동 수단이었다. 대개 조그마한 집 모양으로 보통 네모난 상자 모양의 커다란 몸채가 있고 이 위를 지붕으로 덮었다. 몸채 앞에는 문을 내고 사람이 이 문으로 들어가 그 안에 앉는다. 몸채의 밑 부분에는 가마채라고 하는 두 개의 긴 막대를 나란히 덧대어 두 사람 또는 네 사람이 이 막대를 손으로 들거나 끈으로 매어 가마를 운반하는 방식이다. 

가교 /국립고궁박물관
양반의 가마 /서울역사박물관

가마는 주로 권위 있는 상류 계층, 2품 이상 당상관들이 사용하였던 만큼 가마를 타고 지나갈 때는 위세를 더하기 위해 하인들이 목청을 가늘고 길게 빼어 소리를 내기도 했다. 일반 민간에서는 가마를 메고 가다가 맞은편에서 낯선 가마가 오게 되면 길을 비키지 않고 서로 실랑이를 벌였다. 어떤 때는 가마끼리 맞대고 밀어붙이며 싸움을 벌였는데, 기세에 밀리거나 싸움에 지면 가마에 타고 있는 사람의 운수가 사납고 불길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조선 왕실의 이동수 단은 세종대에 여연(轝輦)제도로 공식화되었다. 조선시대 국가 운영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던 다섯 가지 의례인 오례에 대한 의식과 그 진행 절차를 정리하여 『세종실록』의 부록으로 수록한 「오례」에는 여연에 대한 조항이 수록되어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왕실의 공식 가마는 왕의 대연(大輦)·소연(小輦)·소여(小輿) 3종과 왕비의 대연·소연 2종, 왕세자의 연 1종이 규정되어 있다. 이것은 왕실 가족이더라도 신분에 따라 탑승할 수 있는 가마가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 /국립고궁박물관

우선 '연(輦)'은 왕과 왕비가 의례를 위한 행차 때 사용했다. 지붕·몸체·가마채(가마 밑의 긴 손잡이)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가옥의 모습과 비슷한 것이 특징이다. 연은 왕 외에도 왕비, 대비, 세자, 세자빈도 탈 수 있었지만 대군, 왕자, 공주, 옹주는 탈 수 없었다고 한다. 왕위 계승과 관련된 인물만 연에 탈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왕실의 가마가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왕실의 권위, 통치권의 정당성과도 연관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여 /국립고궁박물관

‘여(輿)’는 지붕과 벽체가 없는 가마로, 궁궐 안에서 간단히 이동할 때 주로 사용되었다. 궁궐 안에서 여를 타고 가는 것과 걸어가는 것은 왕의 선택에 따라 달랐고, 예식을 거행할 때는 반드시 여를 탔다고 한다. 궁궐 밖이라 해도 사방이 막힌 갑갑한 연보다 탁 트인 여를 타고 가는 것이 자유롭고 간편해 가까운 거리는 여를 타고 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그 외에도 왕실 여인들이 타는 가마인 ‘덩(德應)’, 왕의 상여인 대여(大轝), 신주를 운반하는 신련(神輦)·신여(神輿)등  왕실의 가마는 의례와 용도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었으며, 조선시대 전기부터 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왕실의 대표적인 이동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왕실의 가마가 중심을 이룬 어가 행렬은 백성들에게 단순한 구경거리 이상이었으며, 교외 행차 때 조선의 왕들은 백성들이 왕 앞에 직접 나서서 어려운 사정을 토로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수용해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소해 주고자 노력했다. 가마는 왕이 백성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통로가 되었으며, 정치가 바르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신부가마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전통 혼례식을 올릴 때 신부도 가마를 탔다고 한다. 신부가마는 무명 샅바로 앞문을 제외한 나머지 세 면을 X자형으로 엮어 두르거나 호피를 뚜껑에 덮어 표시한다. 채색이나 술을 다는 등 가마를 화려하게 꾸몄는데, 짝지어 노는 새나 짐승・물고기 그림은 부부의 금실과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신부의 가마 채(다리)가 부러지면 백년해로를 못 한다.”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전통혼례 시 신부가마의 행렬은 지체 높은 귀인의 행차와 비슷했고, 양반이 아닌 평민이어도 이날만큼은 귀인의 대접을 받으며 가마를 타도록 했다. 신랑이 앞서고 혼여꾼이 메고 가는 신부가마 뒤엔 상객・짐꾼・등롱군 등 많은 사람이 뒤따랐다. 

사진작가 강봉규가 1959년 전남 화순 남면에서 촬영한 달구지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높은 사람들이 가마를 탔을 때 일반 평민들은 소나 말이 끄는 달구지를 끌었다. 전통적인 수레는 바퀴가 두 개였으나 일제강점기 초 일본이 우리의 재물을 빼앗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각 항구로 더 많이, 보다 빨리 운반하기 위해 방향을 틀 수 있는 두 개의 앞바퀴를 더한 네바퀴 달구지를 만들었다.

달구지의 바퀴는 대개 박달나무를 깎아서 만든 다음 마모를 방지하기 위해 쇠 테두리를 입히는데, 달구지 한 틀을 만들기 위해서는 목수 한 사람이 10일간 작업을 해야 할 정도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보통 두바퀴 달구지에는 60재, 네바퀴 달구지에는 80재의 목재가 쓰였다.


대한제국의 왕이 타고 다닌 자동차, 어차 

19세기 후반 문호를 개방하면서 사람들의 탈것도 서양의 신식 탈것으로 바뀌어 갔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자동차는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고종이 타려 했던 어차다. 1902년 조선의 대신들이 고종에게 신식 문물의 상징인 자동차를 타고 기념식에 참석할 것을 요청했지만 고종은 격이 떨어진다는 이유와 나라 정세가 어지러운 상황에 백성들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아 거절했다가 나중에 어쩔 수 없이 승낙했다고 한다. 그러나 1902년에 개최 예정이었던 기념식은 추운 날씨와 여러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그 다음해인 1903년에 열렸다. 

그러나 고종은 이 차를 타지 못했는데, 수입한 자동차가 기념식이 열리고 나서도 4개월 후에야 뒤늦게 우리나라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수입한 자동차는 고종이 경운궁에서 광무대까지 이동할 때 사용하려 한 것이다. 1903년 들어온 고종의 어차를 두고 포드 리무진, GM캐딜락 등 여러 의견이 분분했지만 대체로 포드 리무진으로 추측한다.

순종황제 어차 /문화재청

1904년, 최초의 자동차는 기념식에 참석도 못 하고 대중 앞에 선보이지도 못한 채 러일전쟁의 혼란 속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후 고종 어차용으로 영국 다임러 리무진, 순종 황태자용 캐딜락 리무진을 더 수입했다. 고종 어차용으로 수입했던 다임러 리무진은 처음엔 순종황제가 탔다가, 나중에 순정효황후가 탔다고 한다. 

1995년 문화재관리국이 80여년간 방치되어 있던 고종 어차용인 다임러 리무진을 꺼내 복원할 계획을 세웠고, 영국 재규어 다임러에서 고종 어차를 복원하기 위해 전문가가 파견되었다. 이 전문가는 “같은 종류의 차가 영국의 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며, “전 세계에 딱 한 대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여기 또 있다니 놀랐다”고 값은 얼마든지 줄 테니 우리가 보수할 수 있게끔 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나중에 현대자동차에서 보수해 창덕궁을 거쳐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 중이다. 

순종황제 어차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전시 모습 /국립고궁박물관

순종 어차는 순종황제가 주로 탔던 것으로 미국 GM사가 1918년에 제작한 캐딜락 리무진이다. 문이 4개인 7인승으로 목제로 된 차체에 옻칠을 하여 진한 밤색을 띠며 황실 문장인 이화(李花) 문양의 금도금으로 곳곳을 장식하고, 내부는 금색 비단과 고급 카펫으로 치장했다. 의자는 자유롭게 접거나 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전체적인 형태가 마차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 초기 자동차 모델의 특징을 보여준다. 1997~2001년 복원 작업을 거쳐 2001년부터 창덕궁 어차고에 보관·전시해 오다가 2007년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옮겼다. 순종과 순정황후 어차는 국내에 남아 있는 승용차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역사적인 가치가 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20대 정도 소수만 남아 있는 차종으로 그 희소가치로 인해 자동차 역사상으로도 중요한 유물이다.

순정효황후 어차 /문화재청
순정효황후의 어차 내부 /국립고궁박물관

순정효황후 어차는 영국 다임러사가 1914년에 제작한 리무진으로 7인승, 20마력, 4기통 엔진, 배기량 3,309cc로 연식은 1914년으로 추정된다. 순정황후어차는 순종어차보다 크기는 작으나 자동차의 형태나 장식이 순종어차에 비해 유려한 편이다. 

내부는 황실문장인 오얏꽃을 수놓은 황금색 비단으로 꾸며져 있으며 차체는 목재, 외부도장은 칠(漆)로 되어 있다. 운전석 뒷편 의자를 접어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순종어차와 같다. 전 세계적으로 3대만 남아 있고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동차로 순종어차와 함께 세계 자동차의 발달사는 물론 우리나라 자동차의 역사 및 황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왕들이 탔던 자동차, 이제는 소중한 문화 유산 

화성어차 /수원관광

왕들이 탔던 어차를 직접 탈 수는 없지만, 마치 왕이 된 것처럼 어차를 타고 궁궐 주변을 돌아다닐 수는 있다. 화성행궁에서는 수원화성의 주된 관광 포인트를 순환하는 관광열차로 순종이 타던 자동차와 조선시대 국왕의 가마를 모티브로 하여 화성어차를 제작했다.

이 어차는 화성행궁에서 출발해 팔달산과 연무대(동장대)를 오가는 관광형 코스와 연무대에서 출발하여 수원화성 관광거점을 지속적으로 순환 운행하는 코스로 짜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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