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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서 전해진 타임캡슐, 미라가 전하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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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서 전해진 타임캡슐, 미라가 전하는 의미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3.30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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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상태로 발견된 여흥 이씨의 가리마 착장 모습 /문화재청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최근 문화재청은 조선 시대 중기 여성의 복식 문화와 상‧장례 풍습을 파악할 수 있는 ‘오산 구성이씨‧여흥이씨 묘 출토복식(총 96건 124점)’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예고하였다.

나머지 1기가 두 여성의 남편 묘로 짐작되었지만, 훼손 정도가 심해서 주인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다. 두 개의 묘에서 출토된 명정(銘旌)에 따르면 묘의 주인공들은 조선 시대 한 사대부 남성의 첫째 부인(구성이씨)과 둘째 부인(여흥이씨)으로 추정되며, 작고 당시의 남편의 관직 품계가 각각 9품, 6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성이씨‧여흥이씨 묘는 2010년 5월 경기도 오산 가장산업단지 공사 현장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조선 시대 회격묘(灰隔墓) 3기가 나란히 확인되었는데, 그중 2기의 묘에서 여성 미라 두 구와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미라 상태로 발견된 여흥 이씨의 가리마(여성용 쓰개의 일종) 실제 착장 모습을 보면 경이로움마저 느껴질 정도이다. 이 여인은 자신이 죽었을 때 훗날 미래의 사람들과 자신이 다시 만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고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증명, 미라 
 

투트모세 4세의 미라 /flickr

미라는 중세 라틴어인 미야(mumia)를 차용한 단어로, 방부처리가 된 시체를 뜻하는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했다. 미라의 대부분의 과학적 연구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었는데, 첫 미라를 연구한 X-Ray는 1903년에 등장했다. 영국의 해부학자인 그래프톤 엘리엇 스미스와 고고학자인 하워드 카터는 카이로에 있는 유일한 X-Ray 기계를 사용해 투트모세 4세의 미라를 검사했고, 영국의 화학자 알프레드 루카스는 이 기간 동안 이집트 미라 제작 방부처리에 사용되는 물질들을 분석했다. 그는 1922년 이뤄진 투탄카멘 분석에도 참여했다.

미라에 대한 연구는 20세기 동안 과학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주제 중 하나였다. 1992년 제 1차 세계 미라 연구 회의가 열렸을 때 300명 이상의 과학자들이 미라에 대한 100여년간의 수집 데이터를 공유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했다고 한다. 회의에서 나온 여러 정보는 미라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미라를 훼손하지 않고 정보를 알 수 있는 CT 촬영은 투탄카멘처럼 왕의 사망 원인이나 그 당시의 생활 방식을 알기 위한 디지털 부검을 하는 데 널리 활용되었다.

미라는 사람이나 동물의 시체가 썩지 않은 채로 현재까지 보존된 것으로, 우연히 만들어진 천연 미라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만든 인공 미라로 나뉜다. 사람이 죽은 뒤 다음 세상이 있다고 믿었던 문화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최초로 미라를 만든 곳은 고대 이집트나 잉카 등의 미라가 가장 유명하다. 이집트에는 전문적인 방부 처리사가 있어 파라오는 물론 농민, 새, 개, 고양이, 악어, 물고기 등 다양한 미라를 만들었다고 한다. 

무덤에서 발견된 단령형원삼·대대 /flickr

특히 이번 문화재청이 공개한 ‘오산 구성이씨‧여흥이씨 묘 출토복식(총 96건 124점)’에서 빗, 귀이개, 솔, 여러 의복이 발견된 것처럼 이집트에서도 미라가 무덤에 묻힐 때는 죽은 이가 저승을 여행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는 주문이 적힌 사자의 서(書), 다음 세상에서 하인으로 쓰기 위한 인형인 샤브티, 음식, 옷, 가구, 무기 등을 넣어 죽은 이가 다음 생에서도 무탈히 지낼 수 있도록 했다.

죽은 사람들을 보존하는 것은 고대 이집트 종교 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라는 죽은 사람들을 위한 의식의 필수적인 부분 중 하나였다. 이집트인들은 사후 보존이 사후 세계에서 더 잘 살기 위한 중요한 단계라고 보았다. 나라가 번영할수록 매장 관습 또한 부유층들에게 중요하게 자리잡았으며, 이 위계 질서는 정교한 무덤 제작과 더 정교한 방부처리로 이어졌다. 

남아메리카 칠레의 북부지역에서 발견된 친초로 미라 /flickr

수십년에 걸친 다양한 연구를 통해 이집트의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미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게 되었다. 우선 내부 장기를 제거한 몸을 향신료와 야자주를 섞은 천연탄산나트륨(나트론)에 70일간 담궈 부패를 멈추게 만든다. 이후 몸을 건조시켜 붕대를 감은 후 관에 넣는다. 추출한 뇌와 내장 등의 장기는 버터를 바르고 건조시켜 개별 항아리에 밀봉해 놓는 등의 방법을 썼다.

단, 심장은 예외다. 이집트인들은 생각을 뇌로 하는 것이 아닌 심장으로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심장은 옛 사람들에게 사고를 하고 감정을 느끼게 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만큼 이집트인들에게 심장은 중요했기 때문에 꺼낸 다음 따로 붕대로 싸서 다시 넣거나 실로 꿰맸다고 한다.

미라 제작의 목적은 대개 이집트처럼 내세 신앙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많다. 사후 3천 년이 지나면 사자의 영혼이 육체를 얻어 부활한다는 이 신앙은 미라를 만드는 마지막 단계까지 사람이 그 당시 살아 있을 때의 모습과 최대한 가까운 형태로 만든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 경우는 미라 자체에 육체의 영원함을 지향하는 의미가 강한데, 하나의 예로 인도 왕족이 사체를 일단 미라로 만든 후에 화장을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사체의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미라와, 사체 자체를 세상에서 없애는 화장과의 기묘한 결합이라 볼 수 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미라, 수난도 많이 당했다 /flickr

다음 세상에서의 영생을 빌며 만들어진 미라는 당시의 생활과 문화를 알게 해 주는 소중한 자료이지만, 19세기 유럽 사람들에게 많은 수난을 겪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집트에 여행을 가서 기념품으로 미라를 사 오는 등 미라를 하나의 유행처럼 여기기도 했다.

특히 중세에는 미라가 사람의 병을 치유한다는 근거 없는 낭설이 퍼져, 이집트 미라를 가루로 갈아 약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실제로 미라를 구할 수 없을 때엔 상인들이 범죄자, 노예, 자살한 사람들의 시체를 미라라고 속여 팔아먹는 끔찍한 짓을 하기도 했다. 수천 마리의 고양이 미라들도 밭을 기름지게 한다며 비료로 쓰이기 위해 이집트에서 영국으로 수출되었다고 한다. 이렇듯 미라는 유럽에서 수요가 높았고, 돈이 많다면 미라를 사는 것도 가능했다. 

그밖에도 스카라베나 우자트의 눈, 앙크와 같은 부적을 찾기 위해 미라의 붕대를 풀기도 하고 미라를 곱게 갈아 피부병 연고로 쓰거나, 그림 물감을 만들어 써서 튜브 안에서 나온 뼈마디에 놀라기도 했다. 무덤을 탐험하는 사람들은 미라를 횃불로 쓰기도 했다. 수많은 미라들이 근거 없는 '미라 약'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분해되고 불에 타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람들은 미라라고 하면 보통 이와 같은 이미지를 상상한다 /pexels

오늘날에 이르러 미라는 20세기 초, 초자연적인 악당이 등장하는 브램 스토커의 소설인 '일곱 별의 보석들'과 함께 고대 세계를 상징하는 종교적 상징 그 이상이 되었다. 특히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미라라고 하면 미라를 주제로 한 영화들이 묘사한, 붕대를 감은 채 벙어리인 채 무덤에서 튀어나와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 생각날 것이다. 물론 실제 미라는 그렇지 않고, 대신 꽤 현실적이면서 무궁무진한 호기심을 연상케 하는 역사를 가진 신비한 존재들이다. 


신비하면서도 의미 깊은 여러 미라들 

 

누란미녀의 전시 모습 /flickr

1980년 4월 1일, 신장웨이우얼 자치구의 러우란 고성 북쪽의 철판하 강변 판허묘지 터 사막에서 위구르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팀에 의해 발견된 여성 미라인 '누란미녀'는 전신 신체가 완벽하게 보존된 미라로 유명하다. 사망 당시 40~45세의 여성으로 시신은 모직물과 양피로 된 옷과 가죽 신발을 신고 있었으며, 머리를 감싼 스카프형 가죽에는 해오라기 깃털이 꽂혀 있다. 

판허묘지(일명 태양묘(太阳墓))의 모래더미를 위구르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무순잉이 이끄는 위구르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팀이 발굴하던 중, 중국인 인부들에 의해 발굴되었다. 사막화된 묘지 근처에서는 아기 미라와 열에 그을린 남성 유골, 기원전 800년 경의 아기 미라와 장년 남자 미라 등도 같이 발견되었다.

누란미녀 /flickr

미라의 이목구비가 백인종의 형상과 비슷 한때 누란 고성을 세운 고대의 누란 왕국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탄소연대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이 미라는 기원전 19세기에 매장된 것으로 죽을 당시의 나이는 약 40세 전후, 신장은 155cm로 알려졌다.

누란미녀는 전신과 피부, 체모가 완벽히 보존되어 있는 상태로 관 없이 모직물로 된 천에 감싸 있었다. 여성의 몸은 모직물포에 싸인 채로 모직물과 양피로 엮인 옷과 모자, 해오라기 깃털, 곡물의 씨앗이 담긴 토기와 함께 매장되어 있었다.

1980년 11월 1일에 발표된 시인 김춘수의 시집 《비에 젖은 달》에 실린 시 '누란의 사랑'과, 2005년 3월 25일에 발표된 작가 윤후명의 소설 《돈황의 사랑》 등은 누란미녀를 소재로 한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2005년 일본의 법의학자들이 그의 신체를 복원한 밀랍 인형을 제작, 신장 위구르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현재 '누란미녀'는 신장 우루무치 박물관의 2층 고시관에 전시되어 있다.

투탄카멘 /flickr

투탄카멘은 미라로 알려진 유물 중 가장 유명한 것들 중 하나다. 이집트 제18왕조의 12대 왕으로 정확하게는 투트 앙크 아멘이라 부르며, 10대 왕 아크나톤의 동생 또는 조카라고도 하지만 그의 출생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18세의 젊은 나이에 죽은 투탕카멘의 죽음에 대한 의혹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으며, 업적에 관한 기록도 남겨진 것이 없다. 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하워드 카터가 그의 묘(제62호)를 발굴해 미라와 부장품을 발견했을 당시 귀금속 세공 기술과 호화로운 유물들로 떠들썩해져 고대 이집트 국왕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의 무덤에서 발견된 물품은 금관, 얼굴 모양의 마스크, 왕좌, 나팔, 가구, 와인, 샌들 등 총 5,398점이 발견되었다. 무덤을 발굴한 하워드 카터는 이 물품의 목록을 만드는 데만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분석에 따르면 무덤에서 발견된 단검은 떨어진 운석 조각으로 만들어진 칼이며, 투탄카멘의 무덤에서 나온 당시의 유물들에 대한 연구는 그 당시 지중해 주변 지역의 금속 세공 기술 연구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무덤에서 발굴된 장신구 /flickr
투탄카멘의 황금 마스크 /pixabay

무덤 유물의 80%는 여성 파라오인 네페르티티의 장례용품으로 추정한다. 2015년 영국 이집트 학자인 니콜라스 리브스는 투탕카멘의 유명한 금으로 된 황금 마스크가 이집트 제18왕조의 왕 아크나톤의 왕비인 네페르티티를 위해 만들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남편의 죽음 이후 왕좌에 오른 네페르티티는 권력 싸움으로 인해 추방당하고, 투탄카멘이 왕이 된 이후 투탄카멘의 관리들에 의해 아크나톤의 다른 유물들과 같이 묻혔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해진다. 

외치 /flickr

외치는 약 5300년 전(청동기 초기) 살았던 사람의 자연 미라로, 1991년 9월 알프스 산맥의 외츠 계곡에서 발견되었다. 그의 왼쪽 어깨에 박힌 화살촉과 다양한 상처로 인해 아마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가 살았던 삶과 죽음을 맞이했을 때의 상황은 아직도 연구 중이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자연 인간 미라로 외치와 그의 소지품은 이탈리아 남부 볼자노에 있는 사우스 티롤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91년 9월 19일, 외치는 알프스 산맥의 동쪽 능선을 걷고 있던 독일인 관광객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등산 중이었던 헬무트 지몬과 아내 에리카 지몬이 이 시체를 처음 보았을 때, 그들은 둘 다 최근에 얼어죽은 산악인인 줄 알았다고 한다. 이튿날, 그들은 드릴을 이용해 얼음에 얼어붙은 시신을 제거하려 했지만 기상 악화로 포기하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사람들이 다시 이 현장을 찾았는데, 이중에는 산악인 한스 카머랜더와 라인홀트 메스너도 있었다. 시신은 9월 22일 추출되어 다음날 인양되었고, 9월 24일 인스브루크 대학의 콘라드 스핀들러 교수에 의해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는 같이 발견된 물건들 중 도끼를 연구한 결과 약 4000년은 더 된 것이라 추측했다. 

외치 /flickr

외치를 처음 발견했을 때는 동사 혹은 아사라 추정했지만 이후의 연구 결과 어깨 아래에 박힌 돌화살에 치명상을 입었으며, 뒤통수에도 타격을 입었고 오른손에도 공격을 막다가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상처를 발견해 타살이나 전투 중 전사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외치는 문신이 새겨진 채 발견된 최초의 미라로도 알려져 있다.

외치는 청동기 시대 살았던 전사로 추측하며, 발견되었을 때 그는 빙하에 갇혀 있는 동안 수분이 빠져나가며 자연스럽게 미라가 된 상태였다. 다행히 얼음 속에 갇혀 있었기에 그 수많은 시간 동안 보존이 잘 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식물학자들은 외치 근처에서 발견된 자작나무껍질과 꽃가루, 단풍잎 등을 분석해 그가 사망한 시기가 약 5300여년 전 초여름으로 추정한다. 두개골의 3D프린팅, 미라의 CT 촬영 등을 통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생겼는지를 예상할 수 있었으며 그의 위 성분을 분석한 결과 죽기 전 사슴 고기와 곡물, 그 외의 여러 식물들을 먹은 것으로 알려졌다. 외치는 청동기 시대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너무나도 중요한 유물 중 하나다.


고대에서 전해져 온 타임캡슐, 미라 
 

구성 이씨 묘에서 출토된 전단후장형 쌍스란 치마 /문화재청
여흥이씨 묘에서 출토된 자수바늘집 노리개 /문화재청

이번 문화재청의 조사를 통해 확인된 ‘오산 구성이씨‧여흥이씨 묘 출토복식’에는 총 96건 124점(구성이씨 41건 51점, 여흥이씨 55건 73점)에 달하는 다량의 유물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임진왜란(1592년) 이전 16세기 중후반 양반 가문 여성의 다양한 복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희소성이 높고, 조선 시대 여성의 염습 과정 등 전통 장례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특히 시신의 머리에 쓴 상태로 출토된 ‘가리마’는 기록으로만 전하던 여성용 쓰개(모자)의 착용 방법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남성의 관복처럼 목선이 둥근 형태인 ‘단령형(團領形)원삼’은 원삼의 초기 모습을 연구할 수 있다는 점, 치마의 앞부분을 접어서 앞은 짧고 뒤는 길게 만든 ‘전단후장형(前短後長形) 쌍스란치마’는 임진왜란 이전 시기에만 확인되는 복식으로 희소성이 높다는 점, 실용적인 생활 소품이자 장신구로서의 역할을 겸비한 ‘자수바늘집노리개’는 보존상태가 좋아 세부 장식이 그대로 남아 있어 당대 자수 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학술적으로 가치가 탁월하다고 인정되었다. 

그밖에도 출토 사례가 많지 않은 얼레빗과 참빗, 귀이개, 솔 등이 출토되었고, 수례지의(襚禮之衣)로 사용된 액주름, 철릭이 포함되어 있어 동시대 남성 복식의 특징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지정 예고한 ‘오산 구성이씨‧여흥이씨 묘 출토복식’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고대에서 만들어진 세계 곳곳의 타임캡슐, 미라는 존재 자체만으로 후대까지 소중하게 보존해야 할 의미가 큰 유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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