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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왕이 쌓아올린 중세 유럽 문화의 토대, 카롤링거 르네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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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왕이 쌓아올린 중세 유럽 문화의 토대, 카롤링거 르네상스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3.2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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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헨 대성당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카롤링거 제국의 문화 활동 시기에 일어났던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중세 유럽 문화 발전의 기반이 된 문화 부흥 운동으로, 기독교 로마 제국의 영감을 받아 태어났다. 이 시기는 문학, 예술, 글쓰기, 건축, 법학, 성서 연구가 말 그대로 꽃을 피우던 시기였다. 카롤링거의 통치자였던 샤를마뉴와 루도비쿠스 경건왕의 통치 기간 동안 번성했으며 카롤링거 궁정의 학자들이나 소수의 궁중 문인들이 즐겼던 문화이기도 하다.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프랑스의 교육과 문화에 눈부신 영향을 미쳤고, 예술적 작품에 수많은 논쟁들을 불러일으켰으며, 카롤링거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고 전해져 온다.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 동안 종교적 지도자들은 라틴어를 쓰고 고전적인 글자를 보존해 더 읽기 쉬운 문자를 개발하려 노력했다. 이들은 유럽 대부분의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는 공통적인 언어와 글쓰기 스타일 또한 창조했다.


샤를마뉴의 문화 부흥 운동 
 

카를로스 마그누스 카를 대제 /wikiquote

카롤링거(카롤루스) 왕조는 751년 메로빙거(메로베우스) 왕조의 페팽 3세가 마지막 왕 킬데리크 3세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카를로스 마그누스 카를(샤를마뉴) 치하에 이르러 적수가 없을 정도로 광대한 영토와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800년에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새로운 서로마제국 지역의 황제로 인정받게 된다.

카롤링거 왕조의 경제는 강력한 노동력을 동원해 대규모의 토지를 일구어 나가며 발전했고, 주로 곡물이나 소금, 포도주를 생산했다. 이 생산물들을 이용한 지역간의 무역은 도시의 확장을 촉진시켰다. 여러 내전과 바이킹들의 습격으로 인해 잠시 혼란기를 겪은 후 경제 발전이 다시 시작되었고 요새화된 상업 도시로 변해갔다. 

이 경제 성장의 주요 요인은 노예 무역이었다. 아랍 제국이 등장하면서 엘리트들은 특히 노예들에 대한 수요가 컸다. 샤를마뉴의 동유럽 정복 전쟁의 결과 점령당한 슬라브족, 아바스족, 작센족들의 지속적인 공급은 서유럽의 유대인 상인들에게도 전해졌고 그들은 노예들을 스페인과 아랍권의 다른 지역으로도 수출했다. 이른바 이 '노예 시장'은 수익성이 좋아 유럽 경제와 장거리 무역을 발전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예 무역은 무슬림과 동로마 제국이 다시 교류하며 다른 산업들도 유럽에서 성장할 수 있게 만들었다. 

카롤링거 소문자로 씌인 고문서 /wikipedia

카롤링거 왕국의 경제가 발전하며 자연스럽게 문화 산업도 성장했다. 이 시기는 로마 제국 이전의 문화를 재현하기 위한 시도가 일어난 때였다. 그러나 라틴어가 중시된 사회 속, 카롤링거 왕국 통치자들에게 서유럽의 일명 '라틴어 문맹' 문제는 심각했다. 궁정 서기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 또한 엄청나게 줄었다.

모든 성직자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던 상황, 설상가상 후기 서로마제국의 라틴어가 지역 방언으로 갈라져 나간다. 이것은 나중에 서로가 서로의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유럽의 한 지역에서 온 학자가 유럽의 다른 지역 사람들과 소통을 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만들었다.

대문자밖에 없었던 알파벳은 중세 유럽 시기 모양과 표기법도 천차만별이라 지역만 달라도 서로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서나 성서를 필사하던 사람들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쉽게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하나의 표준화된 문자 체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현재 문자의 대소문자를 구별하고, 마침표와 쉼표를 찍고, 띄어쓰기를 하는 영문 표기의 기본 원칙은 대부분 샤를마뉴의 카롤링거 소문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샤를마뉴는 새로운 서체 개발을 시작했고 카롤링거 소문자를 서유럽 전역에 도입한다. 문단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나머지 글자는 소문자로 작성해 단락을 구분짓고 지역마다 달랐던 대문자 서체도 통일했다. 띄어쓰기 없는 표기법도 폐지해 본격적으로 라틴어의 표준화된 버전을 만들게 된다. 중세 라틴어는 학문의 공용어가 되었고 행정가들이나 여행객들도 유럽의 어는 곳을 가든 서로 의사소통이 될 수 있었다. 카롤링거 왕조 시기, 10만장 이상의 원고가 제작되었으며 그 중 지금은 6000-7000장 정도만이 살아남았다. 

성 에메람의 코덱스 아우레우스 /flickr

카롤링거 르네상스 시기 가장 많이 현존하는 유산은 필사본이다. 대부분 복음서적과 구약성서들로, 영국과 아일랜드의 인슐라 미술 전래에 따라 본문은 큰 글자, 금과 조각된 상아로 만든 보석이 박힌 표지의 제본들이 교회 금고나 서재에 보관되어 있었다. 주로 필사를 했던 성직자들에 의해 대부분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필사본에는 누가 의뢰했는지, 어느 교회나 수도원에 이 원고들이 들어갔는지 알 수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나 날짜, 장소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샤를마뉴는 수도원에 학교도 같이 세워 교육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그의 개혁 프로그램의 주요 부분은 당대 기독교의 주요 학자들을 궁정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후에 루도비쿠스 경건왕과 카롤루스 대머리왕 궁정은 학자들로 그룹을 꾸려, 학교에서 쓸 수 있는 교육에 표준화된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최고의 학자로 명성이 높던 알쿠인은 교과서의 집필, 단어 작성, 중세 학교의 7개 교양 과목 중 하위의 삼학과인 트리비엄, 중세 대학의 산술·음악·기하·천문학의 사학과인 쿼트리비엄을 확립하는 것을 맡았다. 총 일곱 가지의 자유학은 교육의 근간이 되었고 사람들의 교양 또한 높일 수 있었다. 

에센의 황금 마돈나 /flickr

샤를마뉴는 로마 양식의 디자인을 모방에 아헨에 대성당을 짓기 위한 주조 공장을 만들며 대규모의 청동 주조 기법을 부활시켰다. 대성당에는 현재는 사라지고 없는 거대한 크기의 십자가도 있었는데, 금으로 만든 그리스도의 모습은 중세 교회 예술의 주요 특징이 되었다. 마치 에센의 황금 마돈나처럼 그 십자가를 만든 사람도 금박을 입혔던 것으로 추정한다. 

성 암브로지오 대성당의 황금 제단 /flickr

카롤링거 르네상스에는 탁월한 능력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많다. 밀라노의 성 암브로지오 대성당에 있는 황금 제단은 경이로움마저 자아낸다. 제단의 네 면은 금과 은으로 된 흐뿌세(금속판 등의 안쪽을 쳐 겉으로 무늬를 도드라지게 한 세공)기법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필리그리, 에나멜 등으로 꾸며져 있다. 

로테르 크리스탈 /flickr

로테르 크리스탈, 수잔나 크리스탈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다니엘서와 관련된 수잔나와 장로들의 이야기를 묘사한 8개의 장면이 삽화로 새겨져 있다. 수잔나가 사람들에게 간통죄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벌을 받는 모습, 다니엘이 사람들을 심문한 후에 거짓 증인을 밝혀내어 마지막 장면에서는 수잔나가 무죄 선고를 받는 모습이 나온다.

수정에 새겨진 글씨는 '프랑크 왕, 로테르가 이것을 만들게 했다'라고 씌어 있다. 이것으로 로테르 2세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정하며, 카롤링거 미술의 후기 사례로 꼽힌다. 카롤링거 왕조의 보석들 중 하나이지만 이 형태는 다른 크리스탈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또다른 로테르의 초상화가 그려진 이 크리스탈은 그가 죽은 지 100년 후 아헨 대성당에 있는 로테르 십자가에 부착되었다. 

로테르의 십자가 /flickr

아마 로테르 크리스탈의 주제는 궁정에서의 왕의 상징을 의도하려는 것으로 추측한다. 구약성서의 정의로운 왕들이 정의롭고 현명한 통치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시도라는 추측도 있다. 교회를 대표하는 수잔나는 통치자의 정당한 결정에 의해 적들로부터 보호받는 모습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교회와 국가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를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다.

아헨 대성당 팔라틴 예배당 /flickr
아헨 대성당 팔라틴 예배당의 돔 /flickr

샤를마뉴는 792년경 아헨 대성당 팔라틴 예배당의 건축을 시작했으며 805년 이곳은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봉인되었다. 예배당은 돔형 구조로 비잔틴, 로마네스크 이전 요소들과 샤를마뉴가 지향하는 새 왕조를 기념하는 의미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돔은 묵시록에 나오는 24명의 장로들이 왕관을 든 채 돔 아래 부분에 서 있고, 그리스도가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되어 있다. 

예배당은 이탈리아의 라벤나 주에 있는 산 비탈레 성당에 영감을 받았다. 실제 샤를마뉴는 787년 라벤나를 세 번 방문했다고 한다. 그 해에 그는 교황 하드리아누스 1세에게 편지를 보내 로마와 라벤나에 있는 모자이크, 대리석, 바닥과 벽을 만들 재료들을 요청했다.

예배당은 라벤나 건물의 복잡함을 단순화시켰고, 화려한 인테리어를 연출하기 위해 여러 색깔의 대리석 베니어판이 사용되었다. 우수한 품질의 청동 장식들, 코린트식 기둥, 아칸서스 무늬가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돔은 원래 프레스코로 장식했다가 모자이크로, 바로크 시대에는 스투코로 장식되었다. 

린다우 복음서 /flickr

카롤링거 미술의 금속 세공 분야에서는 린다우 복음서와 성 에메람의 코덱스 아우레우스가 있다. 그중에서도 린다우 복음서는 진주, 다이아몬드, 에메랄드 등 온갖 보석이 박혀 있는 표지의 필사본으로 극강의 화려함을 자랑한다. 이 보석들은 단순히 장식만이 아닌 표지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꾸며졌다.

한때 소장처였던 독일 린다우 수도원의 이름을 따 온 것으로 추정한다. 중세 시대 수도사들은 보석을 세팅하기 위해 세공인들을 고용했다. 이 필사본을 누가 의뢰했는지는 모르지만 주로 부유층이나 종교인들이 책 제작을 의뢰했던 것으로 보아 그들 중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커버에는 십자가에 못이 박힌 그리스도의 모습과, 그를 둘러싼 채 애도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복음서에는 성 제롬의 서문, 여러 복음서의 서문들이 적혀 있으며 필사 작업은 총 7명의 수도사들이 맡았다. 현재는 미국 뉴욕 모건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한 왕의 예술에 대한 사랑 
 

마르꾸스 아우렐리우스 승마상, 샤를마뉴가 라벤나에 방문했을 때 이 승마상을 아헨으로 가져갔다고 전해진다 /flickr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황제로 즉위한 샤를마뉴는 카롤링거의 가장 위대한 군주였다. 원래 이름은 카를로스였지만 그 이름에 '위대한(magnus)'이란 호칭이 붙어 샤를마뉴라고 불렸을 만큼 그의 업적은 대단했다. 커다란 군사력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도 체계적인 행정 제도를 만들어 나라를 안정시키고 국가의 문화 예술이 번영하도록 여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서유럽 지역은 끊임없는 내전 때문에 문화적으로 너무나 피폐한 상태였다. 샤를마뉴는 이 점을 인식해 수도를 아헨으로 정착하고 대대적인 문화부흥정책을 펴 서유럽에서 중세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그의 왕조 이름을 따 '카를링거 르네상스'라 불리는 건 마땅한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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