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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사랑했던 화가, 기타가와 우타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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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사랑했던 화가, 기타가와 우타마로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3.11 1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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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를 읽는 젊은 여성 /THE MET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일본의 여성들을 그린 우키요에 초상화로 유명한 기타가와 우타마로(우타마로)는 에도 시대 중기 활약한 우키요에 화가로 알려져 있다. 특이하게도 그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걸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1770년대에야 등장했고, 어딘가 과장되어 기다란 얼굴의 미인을 그린 초상화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2000여점이 넘는 판화를 제작했으며, 일본 전역에서 명성을 얻은 우키요에 화가들 중 하나였다. 에도 시대 우키요에 예술은 번성했고, 이 예술은 특히 일반 서민들에게 유행했다. 이후 풀컬러의 우키요에 판화의 최종 형태인 '니시키에'가 보편화되고 수많은 목판화로 인쇄되며, 우타마로는 니시키에로 표현한 수많은 미인도를 그렸다.  

그의 인생은 마지막까지 파란만장했는데, 1804년 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묘사한 불법 인쇄물을 만든 혐의로 체포되어 감금되었다가 2년 후 사망한다. 


우타마로의 일생 

잎을 줍는 여자들 /THE MET

우타마로는 우키요에 화가로써 널리 인정받았지만 그가 누구였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심지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 있는 문서도 없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으며, 모든 것은 다 추측으로 남아 있다. 그는 아마 지금의 도쿄인 에도에서 태어났을 것이고, 결혼을 해서 아이가 있었을 수도 있다. 그의 원래 이름은 기타가와 이치타로였고, 그의 부모의 이름 또한 알려진 바 없다. 

우타마로는 요괴를 그리는 화가로 유명했던 도리야마 세키엔에게 그림을 배우고, 1775년에 키타가와 토요아키라는 이름으로 우키요에 화단에 데뷔한다. 그는 토요아키란 이름으로 10년 정도 대중 문학의 삽화를 그리는 화가로 활동하며 가부키 배우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러다 출판업자인 츠타야 주자부로가 그를 영입하게 되고, 1782년 여러 작가들이 참석한 연회에서 그는 자신의 새 이름인 '우타마로'를 처음 발표한다. 그는 키타오 시게마사, 가츠카와 슌쇼 등의 미인화 양식을 배워 자신만의 독자적인 표현 방식을 연구했다. 1791년 그는 다른 우키요에 예술가들이 선호하는, 많은 여성들이 등장하는 판화보다 혼자 있는 여성의 초상화를 그리는 데 집중했다. 

파라솔을 들고 있는 여성 /THE MET

이것은 오쿠비에라는 독창적인 화풍으로 발전하는데, 오쿠비에란 주로 상반신을 그린 우키요에 인물화를 가리킨다. 그는 주로 가부키 배우나 사창가에 있는 여성들을 대상으로 그렸다. 우타마로의 작품은 화려하고 농염한 미인도의 최고봉으로 평가되며 그는 당대 일류 미인도 화가로 명성을 높였다.

그는 여성의 미묘한 표정과 손짓을 세세하게 그려냄으로써 여성의 다양한 심리를 표현하였는데, 이 점은 기존의 미인도와 확연히 구별되는 특징이다. 또 ‘청루(靑樓)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에도 유곽의 기녀와 유녀, 카페의 여인들을 대상으로 그린 작품이 많은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우타마로는 다른 우키요에 예술가들가들보다 더 깊으면서도, 예민한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다. 유명한 예술가로 이름을 날렸음에도 그는 츠타야와 계속 계약을 맺었고, 요시와라 지역의 여성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시리즈물을 제작했다. 그의 초상화 속 여성들은 전형적인 일본 여성들의 얼굴과는 닮은 것은 아니다. 그의 초상화에서 여성들은 매우 키가 크고 날씬했으며, 코와 얼굴은 일반 사람보다 훨씬 더 길었고 눈과 입은 아주 작다는 특성이 있다. 

1797년, 츠타야의 사망 후 우타마로는 오랜 친구이자 후원자를 잃은 슬픔을 견뎌야 했다. 일부 비평가들은 츠타야가 죽은 이후 우타마로의 작품들이 예전처럼 전성기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1804년, 우타마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의 아내와 다섯 명의 후궁을 데리고 나오는 장면을 그려 정부와 마찰을 빚었고 이것은 지배층이었던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범죄로 치부되어 그는 급기야 체포된다. 

히가시야마에서 벚꽃을 보는 히데요시와 다섯 후궁 /Public Domain

그는 이 일로 3일간의 수감 생활과 50일간의 가택연금에 처해진다. 이것은 우타마로에게 엄청난 굴욕이었고, 그는 우울증에 빠졌다. 사실 그는 우키요에를 포함한 대중 문화를 검열하려 했던 정치 개혁에 반대하는 의미로 이 그림들을 그린 것이다.

당시엔 예술가들에게 유명한 정치인들을 묘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우타마로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도요토미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과 성적인 면을 조롱하는 선정적인 포즈의 그림을 그렸고, 심지어 그림에 서명까지 했다. 감옥에 갔다 온 이후 2년간 그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1806년 그는 에도에서 53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러나 죽기 전까지도 그는 계속 판화를 제작했다. 

우타마로는 살아생전 제자들이 많았다. 제자들은 우타마로처럼 작품성을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스타일을 따라 작품을 만들었다. 그들은 스승님의 이름을 따 1820년까지 여성들이 등장하는 판화를 제작했으며, 그들은 우타마로와 같은 서명을 사용해 현대 전문가들과 수집가들에게 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곤충 삽화집에 실린 그림 /THE MET

우타마로에 대한 삶의 자세한 정보가 많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예술가로서의 그의 대한 분석은 주로 작품들에 주목한다. 그는 성인 여성들의 초상화로 유명하지만 꽃과 새에서부터 풍경화, 삽화 등 여러 종류의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1790년대에만 해도 그가 초상화에서 그린 사람의 모습은 꽤 과장된 모습이었고, 그림에서 여성들은 마른 몸매와 작은 이목구비, 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피사체의 특징, 표현 및 배경의 차이를 두기 위해 선과 색상, 판화의 인쇄 기술을 계속 바꿔 실험했고 그의 초상화에서 보인 여성들의 개성 있는 아름다움은 당시 일반적이었던 이상화된 이미지와 대조적이었다. 

다만 그가 여자들을 묘사하는 걸 즐겼다는 건 누구나 알지만, 그가 왜 그렇게 여자들을 그렸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또한 그는 기모노를 입고 악기를 연주하는 여자들 뿐만 아니라, 꽤 수위가 높은 선정적인 그림을 많이 그린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특히 사창가에서 흔히 일어나는 남녀의 정사 장면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그가 사창가에 자주 드나든 단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그러나 역시, 이 또한 아무도 모른다. 


시나가와의 달, 요시와라의 벚꽃, 후카가와의 눈 

시나가와의 달, 요시와라의 벚꽃, 후카가와의 눈 등 3점의 그림은 그의 걸작 중 하나다. 그림의 주제는 달, 꽃, 눈이며 1788년 작업을 시작해 1804년에 완성되었다. 이 그림들이 왜 그렇게 오래 걸렸는지, 우타마로가 혼자 그린 건지, 작업장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린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그림은 서명이 없어, 우타마로가 서명하지 않은 유일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이 그림들은 도치기 시의 한 상인이 의뢰한 것으로, 옛 도치기 시는 에도와 수로로 연결되어 있는 무역 중심지였다. 우타마로는 그곳에 있는 시인들과도 인연을 맺었는데, 도치기 시에서 우타마로의 그림 7점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그가 그곳을 여행했을 것이란 추측을 낳았다. 또한 그는 도치기 시를 세 번 이상 방문했다고 전해지지만 이 역시 확실치는 않다.  

시나가와의 눈 /Public Domain

달, 벚꽃, 눈은 일본에서 인기 있는 전통 예술의 소재 중 하나였다. 우타마로는 각각의 그림에서 유곽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세 그림에는 남자가 거의 없는데, 그도 그럴 것이 유곽은 남자들의 유흥을 위해 존재한 곳이고 여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남자들의 배제는 의도적이라는 해석이 크다. 

이 그림은 에도의 수도인 시나가와에 있는, 사가미야라는 이름의 유곽에서 일어난 파티를 그렸다. 우타마로는 그림 전체에 16명의 인물을 배치했으며, 왼쪽에서 놀고 있는 어린 소년과, 문 뒤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의 그림자를 제외하고 모두 여성이다. 그림의 시점은 바다를 향해 있으며 달은 그 너머 오른쪽으로 멀리 보인다. 우타마로는 일본 미술의 전통적인 관점과 유럽의 기하학적 관점을 사용해, 그림에 보이는 건축물에 깊이감을 부여했다. 이 기술은 18세기 일본 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요시와라의 벚꽃 /Public Domain

'요시와라의 벚꽃'은 유흥가에서 열린 벚꽃놀이 파티를 보여준다. 봄을 알리는 벚꽃이 사방에 떨어지고, 오른쪽 하단에는 진달래도 피어 있다. 여성들은 각기 다른 계급과 신분을 가졌고, 이것은 그들의 옷차림으로 알 수 있다. 옷이 화려할수록 계급은 높으며, 왼쪽 하단에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옷을 입은 오이란들이 보인다. 오이란은 일본 에도 시대의 대표적인 유곽 지대였던 요시와라의 유녀(遊女)중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 

2층에는 여성용 가발인 카타하즈시를 쓰고, 사무라이나 다이묘 집안의 여성들처럼 옷을 입은 여자들이 앉아 있다. 그들은 가부키 공연을 보는 관객으로, 왼쪽의 여성들은 춤추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본의 전통 악기인 샤미센과 츠즈미로 음악을 연주하는 모습이다. 

후카가와의 눈 /Public Domain

'후카가와의 눈'은 눈을 테마로 한 후쿠가와 시의 임시 유곽을 묘사하고 있다. 우타마로는 그림의 복잡함과 정교함에도 불구하고 그림 구성의 균형성으로 유명하다. 본관은 2층으로 된 식당과 카페로 보이며, 난간으로 둘러싸인 가운데의 정원을 중심으로 눈이 내리고 있는 야외를 보여준다. 왼쪽 아래에 있는 고양이에게 손을 뻗는 어린 소년을 제외하고, 모든 인물은 여자이다. 

왼쪽 아래에 있는 한 여성은 멈춰선 채 기모노를 끌어당기고 있는 고양이를 내려다보고 있고, 가운데에 있는 여성은 음식 쟁반을 들고 복도를 걷고 있다. 한 무리의 손님들은 오른쪽 방에 있는 화로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다. 오른쪽 상단에는 한 여성이 전통 보자기로 만든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있다. 뒷방에 있는 몇몇 여자들은 앉아서 손장난을 하고 있다. 여자들의 기모노는 다른 두 그림에 있는 화려하고 밝은 색과 달리 차분한 색의 옷들이 눈에 띈다. 

'시나가와의 달'은 1903년 프리어 미술관의 설립자인 찰스 랭 프리어가 구입했고, '요시와라의 벚꽃'은 프랑스를 돌고 돌아 1957년 워즈워스 미술관이 이 그림을 구입했다. 마지막인 '후카가와의 눈'은 프랑스 파리에 남아 있다가 1948년 3월 수집가 나가세 타케오가 인수했고 현재는 오카다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독특한 화풍으로 여성들을 그려낸 우타마로 

간세이 시대 세 명의 미인 /THE MET

그는 살면서 2,000여점의 판화와 그림, 삽화가 그려진 책을 만들었다. 19세기 후반, 일본의 많은 목판화가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당시 유럽은 네덜란드인들이 상업 무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네덜란드인들은 우타마로의 것으로 추정되는 우키요에 판화를 대량으로 수입했다. 일본 판화들은 서양으로 수출되었고 우타마로를 비롯한 많은 일본 판화가들의 작품이 유럽 근대 미술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일본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프랑스에서는 모네, 드가, 고갱 등이 우타마로의 그림을 수집했다고 한다. 

그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츠타야가 죽은 이후 우타마로의 상심은 컸고 그동안 미친듯이 생산해내던 작품의 양도, 질도 현저히 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1800년대, 그의 그림은 조금 더 기묘해진다. 얼굴은 보통 사람의 3배고, 몸 길이도 더 길어졌다. 비평가들은 그의 초상화의 인물들을 두고 품위를 잃었다며 비평했고, 이 이후의 작품들은 수집가들 사이에도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인기가 떨어졌다.

그러나 딱히 그것이 문제되는 건 아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큰 명성을 얻었고, 모든 계층에 있는 여성들을 포착해 그들의 주변과 분위기를 묘사했다. 위대한 우키요에 예술가 중 한 명이면서도 정작 그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그를 정의할 수 있는 기록과 문서는 없지만 신기루처럼 살다 간 그가 그린 수많은 여성들의 초상화를 비롯한 다양한 그림들이 그가 얼마나 뛰어난 예술가였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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