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1-03-01 18:45 (월)
먼 길 돌아 고향으로 귀환한 호렵도 팔폭병풍
상태바
먼 길 돌아 고향으로 귀환한 호렵도 팔폭병풍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2.18 17: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호렵도 팔폭병풍 /문화재청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문화재청은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함께 지난 해 9월 미국 경매에서 매입하여 국내로 들여 온 '호렵도 팔폭병풍(胡獵圖 八幅屛風)'(이하 호렵도)을 18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이 병풍은 1952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며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캐슬린 제이 크레인 박사가 소장했던 작품으로, 개인 소장자가 크레인 박사 유족으로부터 구매해 경매에 출품한 것이다. 이 작품이 언제, 어떻게 미국으로 반출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호렵도 팔폭병풍 /문화재청

‘오랑캐가 사냥하는 그림’이라는 뜻인 호렵도는 청나라의 황제가 사냥을 즐기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연이어 겪은 후 조선에는 청을 배척하는 의식이 지배적이었으나, 18세기 후반 청의 문물이 대거 유입되면서 청의 문화에 관심이 높아지게 된다. 이러한 조선의 복합적인 시대 배경 아래 군사 장비와 시설을 강조했던 정조의 군사 정책과 맞물려 호렵도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호렵도를 처음 그린 화가는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 중 하나인 김홍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김홍도의 작품은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기록으로만 남아있으며,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대부분의 호렵도 병풍은 민화풍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돌아온 호렵도는 웅장한 산수 표현과 정교한 인물의 표현 등에서 수준 높은 궁중 화풍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조선 시대 호렵도의 시작을 엿볼 수 있는 작품으로서 이번 환수가 더욱 의미있는 이유다. 


호렵도의 변천사 

 

호렵도 /조선민화박물관

호렵도는 주로 민화 병풍 형태로 전해져 오며 가끔 낱폭으로 된 그림도 있다. 민화 도록에는 ‘수렵도’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호렵도 병풍은 대개 8폭 정도를 하나의 커다란 화폭으로 사용한다. 우측에는 산이 있고, 산골에서 나온 행렬이 좌측 넓은 평야로 나가 말 탄 무사들이 활, 창, 칼 등을 사용해 사슴, 멧돼지, 꿩, 오리 등을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호렵도의 전형적 작품들은 대개 왕이나 지위가 높은 인물이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말을 타고 서 있거나, 장막 안에 앉아 있거나, 혹은 가리개 앞에 앉은 모습으로 표현된다. 주변에는 많은 병사들이 창검이나 깃발을 들고 호위하고 있다. 또 기마 인물들 속에 여성들이 다수 포함된 것도 있는데, 여성들은 화려하게 장식된 말이 끄는 마차 속에 타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호렵도의 '호'는 업신여기는 뉘앙스를 지닌 떼놈, 혹은 오랑캐란 뜻의 호(胡)자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에서는 청을 배척하자는 배청(排淸)의 여론이 커졌고, 심지어 청에 볼모로 잡혀 갔다 풀려 나온 효종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청을 정벌하려는 북벌론까지 세웠다. 이 계획은 숙종 때까지 이어졌지만 청이 중국 대륙을 완전히 통일하면서 사라지게 된다. 
 

호렵도 /서울역사박물관

130여 년 뒤, 정조 때 국제 관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며 홍대용·박제가·박지원 등의 북학파들이 청의 존재를 인정하고 청을 배우자는 의견을 냈다. 이 의견을 정조는 적극 수용해 문물 개방 정책을 펼쳤다. 청이나 유럽의 문물이 이때부터 유입되었고 청을 미워하면서도 그 나라의 문화를 배울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호렵도란 그림을 만든 것이다.

호렵도는 주로 청나라 황제가 무란웨이창이라는 사냥터에서 사냥하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황제들은 가을에 이곳에서 약 1만명의 군사들을 동원해 사냥을 즐겼다. 이를 목란의 가을 사냥이라고 불렀는데, 무란웨이창은 세계에서 가장 큰 사냥터였으며 황제들은 이 곳을 72개 구역의 사냥터로 나눴다.

가을 사냥은 청나라 황제들의 가장 큰 군사 훈련이자 축제였다. 이런 대대적인 행사를 벌인 까닭은 청나라 군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였는데, 수렵을 통해 군사를 훈련하는 것은 몽골족의 풍속이었다. 아마도 청나라 황제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몽골족을 회유하기 위한 방편이었다는 이유도 있다.
 

호렵도 /울산박물관 소장 

그렇게 조선에 전해진 청나라 황제의 사냥 그림은 호렵도라는 한국적인 사냥 그림으로 바뀌었다. 청나라에서는 황제의 위업을 널리 알리기 위해 호렵도를 제작하였지만, 그것을 본따 만든 한국식 호렵도는 아무래도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미 청나라로부터 두 차례에 걸쳐 침입을 받은 적이 있었던 조선으로써는 청나라에 대해 경각심을 늦추지 않고 그들의 전술 및 군사 훈련을 파악하기 위한 방편으로 호렵도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호렵도는 고려 말 공민왕이 그린 '천산대렵도'에서 시작되어 조선시대에 종종 제작되었다. 정조는 왕세자 때 '음산대렵도'에 관한 글을 썼으며 궁중 화원인 김홍도가 음산대렵도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는 김홍도의 '음산대렵도'에 관한 이런 글이 있다. 

'우리 집에는 오래 전부터 김홍도가 그린 <음산대렵도>가 있다. 견본으로 여덟 폭 연결병풍으로 되어 있다. 거칠고 누런 광야에서 활시위를 울리며 짐승을 쫓는 모습이 혁혁하여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김홍도는 스스로 말하기를, “내 평생의 득의작이니 다른 사람이 이것을 본떠서 그린 것이 있다면 밤의 어두움 속의 물고기 눈이라도 한 눈에 구별할 수 있다.”라고 했다.'
 

호인행려도 /국립중앙박물관

아쉽게도 음산대렵도는 현재 전해지지 않지만, 김홍도풍의 영향을 받은 작품은 더러 보인다. 호렵도와 유사한 주제는 김홍도 외에도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심사정은 '호인행려도'를 그렸고 김윤겸, 강희언, 신윤복 등의 많은 화가들이, 현대에는 김기창이 이런 주제를 그렸다.

이렇게 궁중에서 제작되던 호렵도는 점차 민간에도 퍼졌고, 민가에 속속들이 보이는 호렵도는 궁중에서의 군사적 목적과는 전혀 상관없는 용도로 쓰였다. 몽골족이나 만주족과 같은 북방 민족의 호방함을 담은 호렵도는 사람들에게 잡귀를 쫓는 액막이로 쓰였고,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길상(吉祥)의 용도로도 쓰였다.

호렵도의 사냥 장면에는 기린, 사자, 백호, 코끼리 같은 사냥터와 어울리지 않는 동물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들 또한 길상을 상징하는 동물들이었다. 군사적 목적이 분명했던 호렵도가 민간에 퍼졌을 땐 여느 민화와 다름없는 액막이와 길상의 그림으로 보편화된 것을 알 수 있다. 


호렵도 팔폭병풍 

 

호렵도 3폭 병풍 /문화재청 

이번에 돌아온 호렵도는 미국 경매에 출품된 것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해외 경매 시장을 모니터링하다 찾아낸 것이다. 전문가들이 검증해 유물의 역사적 의의와 문화적 가치를 판단했고, 작품 수준이 높다는 판단 하에 매입하게 됐다고 전했다. 

호렵도는 비단 바탕의 8폭으로 이루어진 연결 병풍으로, 산수의 표현과 화면 구성이 탁월하며 인물과 동물의 묘사가 생동감 있고 매우 정교하여 호렵도 중에서도 수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주요 구성은 폭포를 시작으로 스산한 가을 분위기의 산수 풍경이 숙달된 화가의 필치로 묘사되어 있는 제1-2폭, 화려한 가마를 타고 길을 나서는 황실 여인들이 묘사된 제3폭, 푸른 바탕에 흰 용이 새겨진 복식 차림의 청 황제와 다양한 자세의 기마 인물들이 등장하는 제5폭, 호랑이와 사슴을 향해 활을 겨누거나 창과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사냥꾼들이 역동적으로 묘사된 제7-8폭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호렵도 팔폭병풍 중 5폭 /문화재청 
호렵도 팔폭병풍 중 7폭 /문화재청 

이번에 공개된 호렵도는 그동안 민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호렵도 연구를 더 확장하고, 전시·교육 등 폭넓은 활용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재 전문가 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지금까지 알려진 호렵도 중 예술적 완성도가 가장 높은 작품"이라며 "김홍도 화풍의 조선시대 산수 표현과 더불어 이국적인 그림 주제와 인물을 묘사했다"고 평가했다.

김현모 문화재청장은 "현재 전해지는 호렵도 대부분은 민화풍인데 반해 이 호렵도 팔폭병풍은 궁중화풍을 간직해 희소성이 있는 귀한 유물"이라며 "궁중에서 전해지던 호렵도는 민간으로 전해지며 점차 길상의 뜻을 담아 그려졌다고 한다"고 밝혔다.

문화재청과 재단은 현재 코로나19로 인해 국외 문화재 환수 여건이 어려운 상황이긴 하지만, 국외소재문화재 발굴과 환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정부혁신 사업의 하나로 적극적인 공개와 활용을 통해 우리 국민의 문화유산 향유 기회를 확대하고 자긍심을 고취해 나갈 계획이라 밝혔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